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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예배: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되리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 “첫 열매”라는 표현이 예전에 구약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곡식의 열매를 요제로 들으면서, 흔들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내게 되죠.

그 제사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냐면,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특별히 택한 것들만 하나님께 드린다는 그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게 요제가 담고 있는 의미인데, 이처럼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우리 모두를 대표한 첫 열매로 나타난다는 것을 그들이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조금 어렵습니다. 어렵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함이 없는 하나님께서 티끌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것처럼 우리의 연약함으로, 또 우리의 아무것도 없음으로 새로운 생명 가운데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우리가 다시 한번 더 이 말씀을 통하여서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이 고린도전서에 있는 말씀인데, 고린도전서 15장은 대표적으로 부활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고린도전서 13장을 우리가 사랑장이라고 얘기하듯이 사랑에 대해서 쭉 설명을 하고 있고,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께서 부활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한 그런 장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히브리서 11장을 가리켜서 믿음장이라는 이러한 표현을 씁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것을 바라고 있으면 언젠가 우리의 실상 가운데, 삶 가운데 그게 나타난다는 그러한 말씀을 하고 있는 거죠.

아멘.

오늘도 저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25년 후에 쓰여진 성경책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빨리 쓰여진 성경책이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25년 후에 쓰여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살아 있을 때 이 책이 쓰여졌다는 것이죠.

그런데 뭐냐면, 그것은 히브리, 다시 말씀드리면 예루살렘 한쪽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이 부활의 소식이 이제 점점 유럽 땅을 막 점령하고 있는 그런 때입니다. 고린도 지역이라는 그 얘기는 뭐냐면, 그리스의 제일 남부 지역, 그리스의 제일 밑에 있는 지역, 여기까지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그때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사도 바울이 부활을 믿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그 작업을 진행하죠. 여러분들이 이때의 사상을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그리스의 사상, 그리고 또 로마의 철학 사상, 이런 것들이 그 중근동 지방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을 때입니다.

우리나라가 이제 아주 오랜 시절 동안 유교라는 정신적인 문화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죠. 그래서 지금도 많은 분들이 그런 얘기를 써요. 아침에 밥 비벼 먹는 거 아니다. 문지방 그렇게 넘는 거 아니다. 그렇게 눕는 게 아니다. 이런 것들이 유교 문화, 아니면 우리의 신을 섬기는 그런 문화, 이런 쪽에서 왔죠.

택시 운전사들은 아침에 안경 쓴 여자를 절대 안 태워 놓는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한국에서 택시를 잡으려거든 안경을 벗고 잡고 탄 다음에 쓰세요. 거기다가 여자가 지팡이, 뭐라 그러죠? 이거 지팡이를 짚고 있으면 부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문화들이 지금까지도 살아 있어요. 이럴 때 이 그리스의 철학이, 이 문화가 이 지방을 주름잡고 있을 때에 예수님의 부활을 얘기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철학에 있어서, 그리스의 사상에 있어서는 죽은 자가 일어난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헛된 그런 이야기입니다. 거기다 더해서 예수님을 신이라고 얘기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얘기하는데 신이 죽는다. 이것은 더더욱 이들에게 믿지 못할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상이 만연해 있는 이 지역에 사도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15장부터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데, 이따가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겠고, 결국 사도 바울께서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하여서 우리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그 메시지가 무엇이냐?

우리 성도들은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아갈 것이라는 이 소망을 우리들에게 주는 것이죠. 결국은 이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활을 영광 중에 맞이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죠.

그래서 부활 신앙은 우리 기독교 믿음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우리 교회에 있어서, 우리 성도들의 신앙 고백에 있어서 부활은 가장 핵심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예배 전에 사도신경을 하지 않습니까?

그는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이다. 심판하실 것이다. 우리가 매주 이렇게 부활 신앙을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이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 내용이고, 우리 신앙에 있어서 핵심 내용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지금도 살아 있다고 이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당시의 분위기를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분위기는 굉장히 살벌한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 사도가 순교를 당하게 되고, 그리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예수를 믿는 사람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본격적으로 핍박하기 시작한 그런 때라는 겁니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라는 것이죠.

유대인들은 이 부활의 소식을 전하다가는 유대의 어떤 사회로부터 추방을 당합니다. 어떤 그 공동체로부터 추방을 당한다는 것은 더 이상 그 공동체 속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죠. 도움을 받지도 못하고, 공동체의 유익을 나누지도 못하는 아주 힘든 일들이죠.

여기서 쫓겨난다는 것은 지금도 무슬림 사회에서 이슬람을 믿지 않고 다른 종교로 그 종교를 바꾸면, 지금도 그 무슬림 사회에서는 그 사회로부터 쫓겨나는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사람의 목숨을 굉장히 가벼이 여기는 그런 때였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유대인들이 살해를 하고, 국회에서 이것을 금지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계속 전한다는 얘기는 결국 내가 죽으려면 죽겠다는 그 각오가 아니고서는 이 소식을 전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나 제자들은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왜 그러냐면, 그들은 직접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아까 히브리서 11장을 말씀드렸는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얘기할 때, 이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하심을 직접적으로 목격했지만 우리는 주님의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상으로 그것이 나타나는 것이죠.

이 부활한 주님의 모습을 제자들이 직접적으로 봤기 때문에 이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는 것이죠. 이들의 시각이 완전히 바뀐 겁니다. 베드로 사도를 비롯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는 모든 사람들이 “생명아 날 살려라,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서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 도망갔던 그런 때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기 전에는 자신들의 죽음이 두려워서 한 집안에 들어가서,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꽁꽁 잠그고 숨어 있었던 그런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후로는 이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이 부활의 소식을 증거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들에게 부활은 새로운 어떤 시각을 열어 가는 그런 큰 사건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자 이들의 시간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이죠.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바뀌었고, 죽음을 바라보는 것도 바뀌었고, 고난을 바라보는 것도 바뀌었고, 모든 시각이 뒤바뀌게 된 그 사건이 부활의 사건이었다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라는 이런 여러 말들 가운데서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므로,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의 시각은 세상으로 향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그 시각으로 바뀐 것과 동일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아니면 우리 모두는 예수 안에서 이런 것들을 누리고 있고 또 예수로 인해서 이런 것들을 누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부활이라는 것은 잠시 기절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부활이라고 얘기하지 않고,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나의 비유를 통하여서,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완전히 죽음 그 가운데서 다시 나는 것처럼 인자가 보일 표적은 그것밖에 없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 부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거죠.

51절 말씀을 여러분들 한번 보십시오. 51절을 보시면,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라.” 이게 비밀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다 잠잘 것이 아니다. 다 죽을 것이 아니다. 마지막 나팔들이 울리는 그 순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니고데모가 밤중에 주님을 찾아가서 거듭남에 대해서 묻죠. 그러다가 주님과의 대화 속에서 니고데모가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은 무엇이냐면, “그렇다면 주님, 다 큰 어른이 다시 엄마의 뱃속에 들어가서 태어나는 것이 맞습니까?”라고 묻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니고데모는 이 거듭남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이 거듭남이라는 단어는 무엇이냐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는 것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가 얘기하는 것처럼 “엄마 뱃속에 들어가서 다시 태어나는 겁니까? 이 거듭남이라는 것이 그러니까 완전히 뒤바뀐 생명체, 그러니까 완전히 다른, 지금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 모습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생명체로의 다시 태어남입니까?”라고 묻는 거죠. 거듭남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부활하는 몸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에서 다시 변화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옛 모습, 우리의 현재의 모습은 완전히 죽어 버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체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존재로 거듭나 태어나는 것, 살아나는 것, 이것을 부활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집을 지을 때 만일 리모델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 허물어 버리고 새로 짓는 것, 그것을 부활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죠. 왜 그러냐면, 하나님이 몸을 변화시키게 될 텐데 왜 그러냐? 우리가 변화되어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부활은 성경에서 이야기할 때 죽은 자들의 부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 우리가 주님의 오심, 그러니까 주님의 재림하심을 맞이하는 그런 사람들은 또 다른 형태로 변화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의 현재의 몸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그러니까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는 듯한 이런 새로운 존재로서의 부활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없애 버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시각으로의 변화를 부활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죠.

그래서 성경에는 부활 전의 몸과 부활 이후의 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합니다. 네 가지로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는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한 몸으로 변화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들이지 않습니까? 이 썩을 몸이라는 얘기죠. 그런데 부활은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변화가 됩니다. 썩는다는 것은 어떤 죄의 결과로 말미암은 그러한 것이거든요. 죄로 인한 결과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부터 해방시키셨기 때문에 이제는 썩지 아니할 것으로 우리가 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죠.

죄악된 몸에서부터 아름다운 몸으로의 변화를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는 아담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악된 몸을 가지고 있다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모습으로 우리는 변화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죠.

그다음에 약한 몸에서부터 강한 몸으로 변화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나라에는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고 슬픔도 없는 그 몸으로 변화가 된다는 것이죠.

우리 황경수 권사님, 그 수술을 뭐 끝났다 그러면 또 수술한다, 뭐 또 수술이 끝났어요. 기도하고 있으면 또 다시 한다. 그런 몸으로의 변화가 아닙니다. 완전히 완벽한 그런 몸으로의 변화를 이야기를 하고 있죠. 약한 몸에서 강한 몸으로 변화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문명이 발달된 그러한 시대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사람들이 얼마나 연약합니까? 감기에 들면 앓아야 되고, 또 감기에 들면 고생해야 되고, 또 어떤 사람은 감기로 인해서 죽기까지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라는 것을 알 수가 있죠. 그러나 우리가 변화되는 그 몸은 이런 연약함이 아니라 강함 되는 그런 모습으로의 변화를 이야기를 합니다.

네 번째로는 육신의 몸에서부터 신령한 몸으로의 변화를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육신은 죄 안에 거할 수밖에 없지만, 신령한 몸으로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 모습으로의 변화를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활했다는 그 얘기는 변화된 몸으로, 새로운 몸으로 살아가는 것을 부활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죠.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죽은 자의 부활을 지금 이야기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살아서 예수를 맞이하는 그런 사람들의 변화, 이런 것들도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육신으로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영적인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 몸이 변화되어야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여기 52절 말씀을 보시면, 52절에 뭐라고 말씀하냐면, “나팔 소리가 남에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여기에서 나팔 소리가 나면, 이 나팔 소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하시는 그때가 되며, 그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은 부활이라는 것을, 어쩌면 부활이라는 말보다 변화된다는 말을 더 자주 쓰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부활이라고 얘기하는데, 이것을 변화라는 그런 단어로 참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제자들에게 지금의 이 부활하심, 이것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겁니다. 그는 죽으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다시 살리셨다. 이것이 초대교회 제자들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였죠.

그다음에 중요한 메시지가 십자가였다는 겁니다. 이 말씀은 뭐냐면, 우리는 십자가로 그걸로 다 끝난 줄 알았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그걸로 다 끝난 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다 도망갔다. 이게 제자들의 신앙 고백이지 않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다 끝난 줄 알았던 십자가, 그렇게 다 끝난 줄만 알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것을 완전히 뒤바꿨다는 겁니다. 십자가는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의 문을 여는 새로운 생명, 새로운 시간으로 우리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리스도 예수가 죽으심은 그가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살림으로 말미암아 그는 다시 살아나셨다. 이게 부활을 증거했던 초대교회 제자들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였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메시지 앞에 다른 사람들이 듣든지 듣지 아니하든지, 그 사람들이 머리로 이해하든지 이해하지 않든지, 그들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는 겁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보고 우리가 들은 것을 전할 뿐이다. 우리가 본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하심, 확실히 우리가 목격했다라는 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제자들이 우리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잠깐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죽음 이후로 이어질 것이다. 영원한 나라가 있을 것이다라는 그 얘기를 제자들이 우리들에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은 성경책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봄철에 피어나는 나뭇가지에도, 나뭇잎에도 부활을 새겨 놓았다라는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우리는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성경책에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봄철에 새롭게 피어나는 나뭇잎사귀를 통해서도 주님의 부활하심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는 것을 마틴 루터가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아무것도 없었던, 다 죽은 것만 같았던 동토에, 얼음으로 뒤덮여 있던 그 땅에서도 생명의 위대함은, 생명은 살아 있으며 다시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있는 거죠.

57절 말씀을 한번 보세요. 57절 말씀을 보시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의 권세에서, 우리가 어떻게 죽음의 권세에서 이길 수 있는가?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라고 이렇게 성경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그런가 보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또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주님께서 혹시라도 오시면 우리 살아 있는 몸이 변화된다는 것은 얼마든지 믿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여러분들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시면, 어떻게 몇천 년이 되고 또 몇백 년이 되어서 죽은 자들의 뼈가 전부 다 흙으로 다 변하였는데, 거기다가 요즘에는 살아나지 못하게 아예 화장을 해 가지고 가루로 만들어서 이걸 다 뿌리는데, 그 뿌리는 것이 어떨 때는 강에도 뿌리고 어떨 때는 바다에도 뿌리고, 이렇게 흩어졌던 것들이 어떻게 다 모여 가지고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체가 될까?

참 여러분들이 설명하기 힘든 그런 부분인데, 왜 이렇게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설명을 못 드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튼 이 죽은 썩은 육신이, 흙으로 된 육신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참 재미있는 그런 일입니다.

몸뚱아리가 전부 다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나팔 소리를 듣고, 또 어떻게 힘으로 이게 살아나는가, 이런 것들은 우리들에게 참으로 신비인데, 여기서 지금 57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말씀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 말씀은 뭐냐면,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에스겔서 37장을 보면 에스겔 골짜기에 마른 뼈들 환상이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부르셔서 에스겔에게 그 마른 뼈가 있는 골짜기를 쳐다보라, 이렇게 이야기하신 게 아니라, “와 가라. 그리고 그 마른 뼈들이 있는 골짜기를 한번 지나가 봐라. 이 뼈들이 완전히 죽었는지, 이 뼈들이 지금 더위에 말라 비틀어졌는지 네 눈으로 확실하게 쳐다봐라”라는 이 얘기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묻는 말씀이, “인자야, 이들이 다시 살아나겠느냐?”라고 묻죠. 에스겔은 자신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 저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게 살아납니까? 저는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하십니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한 거죠.

마찬가지로 우리의 썩은 이 몸이 어떻게 살아날지 우리는 에스겔보다도 지식이 없고, 에스겔보다도 더 많이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십니다”라는 이 신앙 고백은 우리들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우리들이 기억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떤 몸으로 변화될지 그것은 모르겠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모습으로의 변화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모태라는 말이 있고 세태라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모태는 세태다라는 그러한 말을 하고 있는데, 모태라는 얘기는 엄마 뱃속을 이야기하고 있죠. 세태라는 얘기는 세상의 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태라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모태 속에 있는 생명체를 여러분들이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근심, 걱정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엄마의 탯줄만 연결이 되어 있으면, 그냥 엄마가 먹는 대로 이 태아도 자라나는 겁니다. 거기에 무슨 근심이 있고, 거기에 무슨 염려가 있겠습니까?

엄마가 주는 대로 먹고, 엄마가 주는 대로 이제 살아가는 것밖에 없는 거죠. 엄마가 혹시라도 짠 걸 먹고 매운 걸 먹고 이런 식으로 한다고 해서 태아가 컴플레인 할 수 있습니까? 전혀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그냥 주면 주는 대로 먹습니다. 그래서 염려, 근심이 없고 걱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태 속에서 태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서 출산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모태의 기준으로서는 지금까지 영양분을 공급받던 그 태로부터 잘림을 당하고, 모태의 기준으로서는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다시 말씀드리면 출생으로 다시 새로운 생명체로 살아가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근심이 없고 걱정이 없는, 추위가 없고 더위가 없는 그곳에서 살아가다가, 이게 출생함으로 말미암아 그는 이제 추위를 만나야 되고 더위를 만나야 되고, 또 이 각박하고 힘든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러한 일들이 그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이제 이 세태 속으로 다시 들어온다. 이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온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모태 속에 있을 때, 한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 엄마의 탯줄을 잘라야만 생명체로 탄생하고 태어나듯이,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우리의 입장으로서는, 우리의 관점으로서는 죽음이다, 이게 끝난 것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으나, 이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영원한 세상으로서의 새로운 출발, 새로운 세상으로서의 시작이라는 것을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우리 성도들은 새 생명으로의 출발, 그것이 세상에서의 죽음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 55절과 56절을 보시면,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죄의 권능은 율법이다라는 그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이다라는 그 얘기는 뭐냐면, 우리가 잘하고 잘못함에 따라서 행위에 대한 상과 벌이 있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율법이다. 율법이 우리를 판단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갈 때 어떻게 살아가야 되느냐?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벽하고 완전하게, 아주 의인으로서 우리가 살아갈 때 이렇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보상, 아니면 악한 쪽으로 살아간 것에 대한 보상, 이것을 가리켜서 율법이 우리를 주관한다고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죽음은 뭐예요? 여기에 보시면 더 이상 죄의 권능은 율법이다라고 얘기했는데, 더 이상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우리를 더 이상 주관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사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불러들이겠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메시아 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행하셨던 가장 중요한 그러한 사역이죠. 메시아의 사역임을 우리들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그동안 율법의 기준에 의해서 우리가 잘하자는 상을 받고 못하면 벌을 받았지만, 이제 그러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기준이 우리를 덮고 그렇게 살기 때문에 우리가 죽을 때 전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여기서 사라지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58절을 보시면, 58절에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려울 것이 이제는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때로는 우리가 한숨을 쉬고, 때로는 염려하고, 때로는 근심하고 이런 염려와 걱정 속에서 살아가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떨 때 그 한숨이 의미가 있고, 그 근심이 의미가 있고, 그 걱정이 의미가 있는 그러한 존재로서 우리들이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안에 있을 때 이 모든 헛된 것들, 수고로움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죠. 너희들의 수고함, 너희들의 한숨, 너희들의 고생, 이런 것들은 주 안에서 헛된 것들이 아니라고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결국은 우리 성도들이 예수 안에서 눈물을 흘리고, 예수 안에서 한숨을 올리고, 모든 것들이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을 가리켜서 복되다라는 이런 표현을 쓴 겁니다.

결국 우리의 눈물이, 우리의 상황이, 우리의 생애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문제들이 우리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결정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성경은 이야기하죠. 그래서 율법이 우리를 더 이상 주관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주관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부활 신앙을 가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오늘도 우리가 성찬 예식을 행하지만 성찬 예식은 예수님께서 그때 부활하시고 살아나신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성찬 예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찬 예식이 마지막 만찬으로, 제자들과 함께했던 그 마지막 만찬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 지금도 계속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먹이시고 우리를 입히신다는 것을 성찬 예식을 통해서 우리들이 깨달아 알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들이 시편 23편에 보시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라고 이야기를 하시면서, “주께서 내게 상을 베푸셨다.” 상을 베푸신다라는 그런 표현을 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죽으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 가운데 살아 계셔서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에게 상을 베푸시고, 우리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데, 그 필요한 것을 그리스도 예수의 몸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우리들에게 나타내는 것,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성찬 예식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이 예식은 주님께서 친히 제정하셨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행하라”라고 얘기를 하시면서, 언제까지? 주님이 오시는 그때까지 행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가 그날 가는 그날까지, 그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하겠다는 이 표현인 거죠.

성찬 예식을 하면서 이 공급, 이것을 공급하는 이가 누구냐? 하나님께서 공급하신다는 것을 알라는 겁니다. 이것을 세상 끝나는 날까지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때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는 거죠.

성찬식은 우리가 이 다음에 천국에 가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서 주님과 교회와 혼인 잔치를 베푸는 그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주님의 피를 마시고 몸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천국 잔치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서 어린양 혼인 잔치에서 이것이 베풀어진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지난번에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것처럼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면, 성전에 들어가면 떡상이 차려져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떡상이 차려져 있다는 그런 의미는 우리의 먹을 것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신다는 것이죠.

만나를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처럼, 우리가 이것을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게 하시는 예식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성찬식을 통해서 선한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그의 목을 대시고, 지금도 그의 피로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고, 성찬 예식을 통해서 주님과의 교제가 더욱더 깊어지기를 바라고, 성찬식을 통해서 내가 주님 안에, 주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신다는 것을 확인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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