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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23:27~36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에 대한 책망


마태복음 23장을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 다시 말씀드리면 율법주의를 공격하시고 꾸짖는 장면이 23장에 이렇게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에서 율법주의다, 율법주의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요구하시는 것이 있죠. 왜 율법을 주셨느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요구하시는 것. 다시 말씀드리면 그 율법 안에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또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 됨을 확인하는 것과, 또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이 목적, 이 정신을 잊어버리고 어떤 규칙을 세워서 규칙을 준수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것.

이것을 가리켜서 잘못된 율법관, 다시 말씀드리면 율법주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쉽게 이야기를 하면 성경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놓쳐 버리고 자신들만의 어떤 규칙, 제도 이런 것들을 만들어서 그거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자신들은 잘 지킨다 해서 우리는 너희들과 다르다. 자신들의 의를 세워 나가는 것. 이게 잘못된 율법관이고 율법주의다라고 성경에서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르죠.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의 은혜 됨을 알기 때문에 우리의 의로움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성도의 삶. 이것을 은혜로운 성도의 삶이라고도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율법주의가 반대되는 은혜주의, 뭐 이렇게도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라고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의 외식함이라고도 이야기를 하고, 그들의 눈을 뜨지 못하는 눈먼 자들이라는 것과 속이 다른, 영적으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그 상태를 가리켜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이렇게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우리들이 살펴봤듯이 이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지 않습니까? 잘 가르쳐서 한 영혼이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하나님 나라에 가게 하는 것, 이게 이제 가르치는 자들의 의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들은 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어떤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책망하신다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자신들도 예수를 못 만나고, 자신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까지도 그 발걸음을 막은, 그 문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이렇게 책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이 율법주의가 예수님 당시에만 있었느냐? 그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 시대 때, 예수님이 오시기 몇백 년, 몇천 년 전에도 이 율법주의가 있었다는 겁니다. 현대에서는 이것이 없느냐? 현대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어떠한 규칙을 세워 놓고 그 정신을 잊어버리고 그 규칙을 지키느라 정신이 없을 때 우리는 율법주의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교회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뭐냐면 잘하려고 하다 보니까 그렇습니다. 서로 잘하려고 하다 보니까. 여러분들 가만히 한번 보세요. 교회 안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서로 의견들을 주고받지 않습니까?

이제 어떤 일을 하는데, 예를 들어 다음 주에 야외 예배를 간다. 그러면 우리가 뭐를 할 건가? 나는 상추를 가져온다. 나는 김치를 만들어 온다. 이런 회의 같은 것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 생각하고 다른, 저 사람은 이거를 했으면 좋겠는데 그거보다 조그마한 것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 저 사람 뭐 돈도 많으면서 저런 것을 해. 이런 마음이 우리들에게 쑥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잘하려고 하는데 이런 마음이 우리들에게 생긴다는 거예요. 저 사람은 더 할 수 있는데 왜 저거밖에 안 해? 저 사람이 왜 내 의견을 안 듣지? 나를 무시하는 거야? 이런 마음으로 가는 거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다툼들은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잘하려고 하다 보니까, 주님의 일을 잘하려고 하다 보니까 그 안에서 의견 충돌이 일어나고, 의견 충돌로 인해서 마음이 상하고 하다 보니까 싸움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게 원래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작은 것에 집중했을 때 나타나는 그런 현상들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실 때 율법을 주신 그 정신을 놓쳐 버리면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공의로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 이런 것들을 놓쳐 버릴 때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 해당이 되는 거죠. 다른 사람은 그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나는 나라는 존재로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름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똑같을 수가 없어요.

예수 안에서 하나다라고 얘기를 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끄는 그 믿음은 하나다. 이 믿음을 가지고 우리들이 모였는데 다른 사람이 나와 똑같을 거죠.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와 똑같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우리들에게 생길 때 교회 안에서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율법주의자들의 가장 큰 단점은 무엇이냐? 이 정신을 놓쳐 버리고 작은 규칙을 지키느라고 정신이 없었다는 것이죠. 자신들은 자신들이 세운 그 규칙을 잘 지키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23절에서 말씀드린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에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라고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는데, 여기서 박하와 근채, 이런 것들에 대한 것은 뭐냐면 아주 지극히 조그마한 어떤 향신료를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큰 것을 놓쳐 버리고 조그마한 것에 집중을 하다 보면 이 큰 것을 놓쳐 버리는 잘못을, 실수를 범할 수가 있다는 것이죠.

구약 이스라엘의 율법에서는 모든 소산물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것들은 모든 백성들이 잘 진행을 해요. 그런데 여기에서 나오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 이런 것들은 너무나도 조그마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소홀히 하기 쉽다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소홀히 하는 이 지극히 작은 것들이 한 가지도 십일조를 드리면서 봐라. 우리는 이것까지도 다 십일조를 드린다. 그러니까 얼마나 우리의 신앙이 좋으냐. 이런 자랑으로 갔다는 것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율법에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 이것은 놓쳐 버렸다. 율법이 원래 원하는 정신은 너희들이 놓쳐 버렸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작은 것에 집착을 하게 되면요. 큰 것을 놓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규칙을 세워 놓고 너무 그 규칙에 집착을 하다 보면 은혜를 놓쳐 버릴 때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특히 저는 회의를 뭐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 회의를 좋아하는 성도님들 한번 보세요. 규칙을 세워 놓고 그 규칙을 우리가 지켜야 돼라는 것은 좋은 현상이죠.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그 규칙대로 하는 것은 좋은 거죠.

근데 그 규칙대로 하는 것은 좋지만 은혜를 놓쳐 버리지 말라는 것이죠. 어떤 사람이 그 규칙 밖에서 행동할 때도 있습니다. 벗어난 그런 일들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엄격하게 따져 가지고 그 규칙대로 안 하는 것을 징계하고 치대하고 이런 것들을 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 안에 있는 은혜라는 것을 놓쳐 버리면 우리가 사람까지도 놓친다라는 것을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작은 것에 너무 집착을 하다 보면 큰 것을 놓쳐 버리는, 생명을 잃어버리는 그런 경우가 발생하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서 어떤 책망을 하시냐면 너희들은 겉과 속이 다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참 많이 찔리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겉과 속이 다르다라는 것이 대표적인 예로, 여러분들 차 겉은 깨끗하죠. 그런데 속까지 깨끗한 분들은 많지 않을 거예요. 아마 청소를 하면, 카워시를 하게 되면 겉은 깨끗하게 닦죠. 뭐 광택제까지도, 왁스까지도 다 바르죠.

근데 속에는 힘드니까 그냥 지저분한 그 상태에 그대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것은 비단 차에 대한 비유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은 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잘 드리는데, 그러나 그 속에 있는 그 마음은 그게 아니다라고 지금 주님께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너희들이 무엇이든지, 주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많은 백성들을 향하여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그 행위에 대해서 지적을 하면서, 너희들은 무엇이든지 그들의 행하는 것, 이런 것들은 본받지 말고, 그 사람들의 말에 대해서는 본받을 것을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이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죠.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23장 5절에 보시면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행했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보이느냐, 사람에게 보이느냐 이 차이가 있다는 것이죠. 그들의 행위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서 그렇게 열심히 신앙의 행위를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겉과 속이 다르다.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겉모양만 그렇게 한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느냐? 그래서 그들의 행위는 본받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고 그들이 말하는 것은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행할 것을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다시 말씀드리면 여기서 이제 “화 있을진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이야기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뭐냐면, 너희들은 겉과 속이 다르지만 천국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교육을 해야 되고, 잘 가르쳐야 되고, 많은 사람들을 그리로 인도해야 되고, 상처받은 영혼들을 치유해야 되고, 또 절망하고 좌절한 영혼들을 이렇게 세우는 그 의무가, 그 책임이 너희들에게 있는데 너희들도 그것을 행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행하지 못하게 한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종교 지도자들로서 가르쳐야 할 사람, 다시 말씀드리면 종교라는 것이 안에는 생명이라는 게 담겨져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떤 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이 생명이 천국으로 가느냐, 이 생명이 지옥으로 가느냐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주에도 우리 성경 공부하다가 말씀을 나눈 적이 있지만, 어떻게 눈에 뻔히 보이는 그런 이단들인데도 불구하고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까?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말씀을 중요시한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의 어떤 행위를 더 중요시했다는 것이죠.

여러분들 이웃에 혹시 몰몬교도들이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나이스한지 몰라요. 아예 내 집 앞까지 다 청소를 해 줘요. 그리고 뭐 쓰레기고 뭐 처리되고 하면 돌봐주고 사진까지도 보여 주고, 얼마나 친절한지 모릅니다. 그런 행위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혹했기 때문에 이단들로 빠져드는 것이죠.

그 말씀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냐라는 것을 먼저 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당시에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속이 다른 것은,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지만 그들의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거리,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위를 나타내기 위한 그러한 삶을, 그러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화 있을진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들에게 화가 미칠지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이 사람들이 행위를 그렇게 중요시한 이유가 무엇이냐? 자기 자신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온데간데없이 자신들의 행위로 말미암은 많은 사람들의 칭찬, 영광, 이런 것들만 그들이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27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면, 27절에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피와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회칠한 무덤이여라고 이야기를 하죠. 겉과 속이 다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무리 회를 칠해서, 아무리 페인트를 해 가지고 무덤을 아름답게 꾸몄다 하더라도 거기에 생명이 없으면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한 죽음의 집밖에 될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신앙. 예수님이 없는 신앙. 생명이 없기 때문에 겉은 화려해 보일 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지금 주께서 이야기를 하시고 비유를 하시는 거죠.

그래서 어떤 화려함, 이런 것들보다도 정말 그 안에 생명이 있는가? 큰 교회들도 좋습니다. 작은 교회들도 좋습니다. 교회가 크고 작고 문제가 아니죠. 어떤 것이 가장 큰 문제냐? 그 안에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겁니다.

아무리 큰 교회라 할지라도 생명이 없다라면 소용이 없고, 아무리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생명이 없다라면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굉장히 큰 교회라 할지라도 생명이 있다라면 정말 지역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고 의로운 역할을 하고 나눠 줄 줄 아는 교회이기 때문에 좋은 교회인 거죠.

작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있다라면 그 교회는 좋은 겁니다. 사람의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죠.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한 거죠.

그래서 회칠한 무덤이다. 그 안에 생명도 없는데 겉만 그렇게 아름답게 한다고 해서 그 무덤이 뭐 벌떡 일어나겠느냐? 그 무덤을 많은 사람들이 경배하겠느냐라는 이 책망을 주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29절과 30절에 보시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자, 이 말씀이 지금 어떤 말씀이냐면 너희들이 선지자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민다라고 얘기를 하는데, 만일 우리가 우리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이고 하나님께 악을 행한 그 길로 우리들은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을 지금 주님께서 꾸짖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 너희들도 아마 똑같을 것이다. 이야기를 합니다. 왜? 왜 그러냐면 이 사람들이 전했던, 선지자들이 전했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라면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의 열매가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었다면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삶의 내면의 어떤 변화, 바뀜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그런 모습으로 변화했을 텐데, 너희들은 전혀 그런 것들이 없구나라고 주님께서 지금 책망하시는 것이죠.

그러고 나서 이들은 이제 막 비석을 세우고 무덤을 단장하고 하는 겁니다. 이 선지자들의 무덤 앞에 가서, 우리가 만약에 그때 살아 있었다면 당신을 죽이지 않았을 텐데, 우리 조상들이 잘못해서 이렇게 된 거 우리가 용서, 우리가 회개합니다라고 비석만 번지르르하게 세우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 또 한 가지는 뭐냐면, 너희들의 신앙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해서 너희들의 신앙을 정립하는 것에 대해서 지금 책망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조상들의 행위와 자기 자신들의 현재의 모습과 비교를 하면서 우리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는 이 비교하는 신앙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또 책망을 하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 때는 괜찮았을 것이다. 우리 조상 때 한 잘못에 대해서 그렇다라고 얘기를 하는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렇지가 않다.

너희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하나님인 예수님께서 너희들에게 그 천국 복음을 전했다 할지라도 너희들은 여전히 마찬가지다. 너희들의 조상들의 모습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라고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들도 중요한 내용 하나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나의 신앙을 정립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있기 때문에, 그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최선을 다해서 봉사하고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고 또 최선을 다해서 전도하고, 이러면 그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그 은혜에 대한 감사의 행위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저 사람은 안 해 하고 안 하는 사람과 나의 신앙을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지금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행위들이 바로 이런 겁니다. 자기 자신들의 조상들과 신앙 행위를 비교하면서 자신들은 그때 살아 있었다면 우리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라고 얘기를 했다는 것처럼.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사람들의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을 책망을 하시면서, 나중에 그렇게 장담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그런 비참한 일들을 저지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신앙을 점검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비추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해서 우리의 신앙을 정립해 나가야지, 다른 사람의 어떤 신앙생활과 나의 신앙과 비교를 해서 나의 신앙이 옳고 그름을 정립해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을 여기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변화된 삶이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 보시면 아마 예전의 나보다 지금의 나가 조금, 많이는 아니고 조금 괜찮을 겁니다. 그게 이제 변화된 모습이죠.

그러나 사람들은 완악한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온전한 변화를 기대할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들은 뭐 그렇게 태어났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한 거죠.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들은 붙잡고 가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31절에 말씀을 하시는데,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라고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조상들의 잘못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너희들의 마음 자세가 여전히 그렇다면,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아니하고 너희들의 행위에, 너희들이 하는 행동들에 집중을 하게 된다라면 여기서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러니까 겉과 속이 다르다라는 그 얘기는 겉으로는 존중하지만 삶에는 전혀 열매가 없는 그 사람, 그 모습, 이것을 겉과 속이 다른 신앙이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32절에 하시는 말씀은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너희 조상들의 분량을 채우라는 그 말씀은 너희들은 그냥 너희 조상들이 가는 그 길로 가라라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너희들의 조상들의 부족한 죄악된 부분들을 그냥 채워라. 너희들도 너희 조상들과 다를 바가 없다라는 그 의미로 너희가 너희 조상들의 분량을 채우라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네 갈 길로 가라라는 그런 의미죠. 그래서 “화 있을진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는 그 책망을 주님께서 계속 하시는 겁니다. 너희들은 뭐 다를 것 같냐? 너희들은 전혀 다르지가 않다라고 얘기를 하시고, 지금까지 주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본 그러한 모습은 작은 규칙들 하나 때문에 생명이 죽어 나가도 전혀 쳐다보지 않는 아주 냉혈한 그러한 사람들 같은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계속적으로 책망을 하죠.

이사야 선지자가 한탄하는 그런 내용을 보시면, 수많은 제물들을 가지고 성전을 들어오지만 저들은 성전의 마당만 밟을 뿐이다라고 한탄하는 모습이 이사야서에 보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마음에 예배를 드리러 와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드리는 예배는 성전의 마당만 밟고 그냥 갈 뿐이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 그러한 신앙, 그러한 믿음, 그러한 예배, 이런 것들은 마당만 밟고 갈 뿐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한탄이 오늘날에도 똑같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 하나님께로 향해야지요.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향해야죠.

그래야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 텐데, 마치 사사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이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던, 자기 마음대로 이것이 옳으면 옳은 대로, 저것이 옳으면 저것이 옳은 대로 그런 식으로 행하였기 때문에 주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33절에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공식적으로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의 저주된 그런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도 공식적으로 얘기를 합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너희들이 그렇게 행하고도 아직까지도 깨닫지 못하느냐? 율법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정신으로 다시 돌아오라. 너희들이 만약에 그런 식으로 계속적으로 살게 된다라면 이 지옥의 판결을 너희들은 피할 길이 없다라고 주님께서 안타까운 그런 마음으로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얘기하는 그런 장면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은 뭐냐면, 우리가 찬송을 할 때 또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선한 행동, 다시 말씀드리면 이웃을 향한 구제를 행할 때 그 한 영혼의 불쌍함, 한 영혼에 대한 긍휼함, 이런 마음들을 가지고서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고 구제를 하고, 예를 들어 뭐 온디스를 돕든지 아니면 밀알 가서 봉사하든지, 그런 긍휼한 마음, 한 영혼에 대한 긍휼한 마음으로 우리가 봉사 생활을 하느냐라는 것이죠.

아니면 자기만족을 채워서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느냐라고 지금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묻는 겁니다. 우리가 찬송을 할 때 내가 기쁨이 되는 거, 내가 눈물이 나오고 내가 기쁨이 내 만족이 된다라면 그게 찬송으로 우리들은 생각을 한다는 거죠.

우리가 찬송을 할 때 좀 주의해야 될 그런 부분들이요. 복음성가를 할 때 그 가사의 내용들을 여러분들 한번 이렇게 쭉 살펴보십시오. 나를 위로하는 노래가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찬양이 구분이 됩니다.

뭐 여러분들 수요 예배에 나오시는 분들은 대부분의 수요 예배 때 찬양이 그런 식으로 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많이 깨달으시리라고 이렇게 생각이 되는데, 나의 위로가 되는 찬양이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일어나 걸어라 같은 그런 거겠죠. 그러니까 그 찬양을 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일어나 걸어야 돼. 그러니까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세워 줘야만이, 주님께서 나를 일으켜야만이 내가 일어날 수 있는데, 나의 의지로 일어나는, 그게 잘못되면 그렇게 될 수가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 영광 받으시옵소서라는, 예를 들어 찬송가에 나오는 천지 창조에 대한 그 하나님의 찬양, 이런 것하고 구분이 되느냐를 여러분들이 한번 판단을 해 보셔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 찬양이 또 기도가 온전한 찬양이 되고 온전한 기도가 되느냐. 우리가 기도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중언부언하지 말라라고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이방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느끼지 못하고 하는 기도는 중언부언이라는 겁니다.

우리 말로 이제 중언부언을 여러 말로 떠드는 거, 이렇게 정립을 하지만 주님께서 원래 얘기하시는 중언부언이라는 얘기는 이방인들이,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무생물에게 중얼중얼대고, 또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뭐 해님, 달님, 별님 하면서 외쳤던 그런 내용으로 기도하지 말라는 겁니다.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마음으로 그렇게 기도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정신을 잊어버리고 나는 몇 시간 동안 기도했다, 나는 뭐 며칠 동안 기도했다, 나는 며칠 동안 뜻을 정해서 기도한다. 그거는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기도일 뿐이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을 하셨지 않습니까? 모세가 40일을 금식하지 않습니까? 나도 40일을 금식해야 되겠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뭐 그러면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되는 줄 아나 봅니다.

제가 그래서 참 못마땅한 것이 나는 40일을 몇 번 금식했다라는 사람들이 참 못마땅한데, 기도하다 보니까 40일이 된 거죠. 기도하다 보니까 예수님은 40일이 된 겁니다. 기도하다 보니까 모세가 40일이 된 겁니다.

40일을 딱 정해 놓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40일이라는 이 숫자에 맞춰서 사역을 위해서 기도를 하신 게 아니라, 무릎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 보니까 기도한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것을 정해 놓고 기도한다는 것, 조심해야 될 그러한 부분인데, 기도의 정신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내가 하나님의 백성인,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그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자리, 그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자리,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끼는 그러한 자리라는 이 정신은 우리들이 놓치지 말아야 될 그러한 부분이라는 것이죠.

예배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우리의 봉사나 우리의 기도나 우리의 찬송이나 우리의 예배나 이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서 우리는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봉사를 하는가를 먼저 깨우칠 것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선적인 신앙을 가리켜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책망하는 그러한 장면을 보게 되는데, 이러한 사람들의 운명이 결국은 33절 후반절에 보는 것이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렇게 된다라면 너희들은 지옥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34절을 보시면, 34절에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며”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의, 다시 말씀드리면 유다 민족의 후손들이라고 해서 우리 조상들의 잘못을 내가 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하나님 앞에 온전하느냐?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들이 아무리 선지자들의 비석을 세워 주고 무덤을 단장한다고 해서 그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 깨끗하게 씻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들이 겉모습이 그렇다면 속마음이 변하기를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이죠. 속이 너희들이 변하지 않으면 절대 그 모든 행위들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너희들에게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보내 줄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하죠. 여기에서 선지자라고 얘기를 하는데 복음을 전파하는 그들을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전도자를 얘기를 하고, 그리고 지혜 있는 자를 보낼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런 사람들을 성경은 지혜로운 자들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왜냐면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뜻으로 행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하나님의 뜻으로 행하기 때문에 지혜롭다라는 이 표현을 씁니다.

그리고 나서 서기관들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서기관들은 교사를 뜻하죠. 그러니까 이것을 추적을 하면 구약 시대 때는 선지자들을 보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려준 반면에, 신약 시대에 오면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려줄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해서 너희들이 핍박하고 너희들이 감옥에 가두고 너희들이 그들을 죽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보낼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왜 그러냐면 그들이 변명하지 못하게 하라는 그 의미를 씁니다.

변명하지 못하게. 그러한 얘기는 하나님, 우리에게 선지자를 보내 주지 않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런 변명이 나타나지 않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하나님의 메신저들을 보내겠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라는 핑계가 없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보내겠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다시 말씀드리면 복음을 전하는 그런 사람들을 핍박할 것이고 죽일 것이고 이들을 가둘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실질적으로 이제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스데반 집사가 그렇게 죽었죠. 그리고 야고보가 그렇게 죽었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안드레는 X자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그것을 우리들이 보게 됩니다.

제가 성지순례를 하면서 가장 가고 싶었던 곳, 궁금해했던 곳이 어디냐면 터키, 사도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지였었는데 갈라디아 지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가다가 다소에서 갈라디아 지방으로 이렇게 넘어가는 그런 것을 보게 되는데, 거기를 제가 꼭 한번 가 보고 싶다라고 해서 드디어 꿈을 이룬 적이 있습니다.

근데 그 타우루스 산맥이라는 지역이요. 우리나라 백두산이 어느 정도 높입니까? 2,779인가? 네, 2,770 뭐 3천이 좀 안 되잖아요. 제가 지리 시간에 2,770분과 뭐 그렇게 외운 것 같은데, 근데 이 타우루스 산맥은 어느 정도냐면 3,700 정도 되는 높이입니다.

그러니까 험산준령을 넘고 넘었다라는 그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해안가에서부터 3,700이나 되는 그 고지를 넘어간 겁니다. 거기에서 복음을 전하죠. 그 지역이 갈라디아 지방이에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뚜렷한 목적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이 복음을 생명이 없는 곳에 가서 전하여서,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하리라라는 이 뚜렷한 비전, 목적을 가지고 그 산을 넘었겠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거기까지 쫓아옵니다. 어떤 목적? 사도 바울을 죽이겠다, 잡겠다라는 그 목적으로 쫓아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대단한 열심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딱 맞는 말씀이죠. 너희들이 거기까지 쫓아와서 핍박할 것이다.

사도 바울이 돌에 맞게 돼서 다른 지역으로 또 도망가는 것을 우리들이 사도행전을 통해서, 아니면 신약 성경을 통해서 이렇게 바라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조상들 같지 않다라는 것들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이죠. 너희들도 여전히 죄 가운데서 그렇게 살고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계속적으로 그런 복음에 대한 핍박이 있다 할지라도 어떤 경로, 어떤 루트를 통해서라도 계속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겠다. 전달하겠다라는 그 하나님의 의도와 마음이 여기에 담겨져 있죠.

그리고 나서 35절과 36절에 보시면,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가랴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라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서 책망하는 그런 장면입니다.

아벨의 피, 가인으로 말미암아 최초로 피를 흘린 그러한 인물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기에서 보면 사가랴의 피가 여기서 등장을 하게 되는데, 왜 이 사가랴가 피를 흘리느냐?

요아스 왕 때 이스라엘이 극도로 종교의 어떤 피폐함이라고 얘기를 할까요? 극도로 우상을 섬겼던 그러한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므낫세를 지나서 요아스 때 이렇게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이 있었는데, 이때 누가 등장을 하게 되냐면 사가랴라는 선지자가 등장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왕 앞에 가서 왕의 잘못에 대해서 책망을 하는 그런 장면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여호와 전을 버리고 여호와의 전에다가 온갖 우상들을 가득 채운 것, 여기에 대해서 너희들이 잘했다고 생각하느냐? 거기에 대해서 회개하고 돌아와라고 이야기를 하죠.

선지자들을 통하여서 너희들에게 경고를 했지만 너희들은 듣지 않았다. 왕이여,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방백들이여, 정치 지도자들이여,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라고 얘기를 했지만, 그러나 왕은 그 소리가 듣기 싫었던 겁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그 소리가 듣기 싫었던 겁니다.

그러고 나서 이 스가랴라는 선지자를 성전 안에서 돌로 쳐서 죽이는 그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죠. 지금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볼 때 이런 일이 일어났었구나라고 얘기를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선민 국가에서 하나님께서 보낸 메신저를 그것도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돌로 죽였다라는 것은 지금 뭐 신문 일면의 톱으로 크게 나올 대형 사건이라는 얘기죠.

이런 일을 행하고도 너희들이 아무런 잘못 없다라고 있는 그러한 모습에 대해서 주님께서 책망하는 그런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고 해서 너희들도 다를 바가 없다라는 것이 예수님의 책망이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라고 한다 할지라도 온전한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 온전한 이웃을 향한 그 사랑, 그 정신을 모르고 하는 모든 신앙의 행위들에 대해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책망하는 그런 내용들로 되어져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중요하고, 이 모든 것들은 중요한 것들은 벗어버리고 이 사소한 것으로 인하여서 정쟁을 펼쳐 나가는 이 행위에 대해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정말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살피고, 내가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그 목적에서 우리들은 성경을 읽어야 되는데, 제가 그랬습니다. 성경을 읽어 가면서 막 줄을 다 쳤어요. 그래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끝까지 제 성경에는 줄이 다 쳐져 있습니다. 다 중요하죠.

중요해서 줄 친 게 아니라, 봐라, 내가 이렇게 성경을 읽었다. 그래서 그 성경이 보관은 하고 있습니다만 지금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다음에는 성경에다가 깨알같이 막 적었습니다. 깨달아지는 것들에 대해서 막 이렇게 적었어요. 근데 다른 사람들이 와, 성경 열심히 읽었네. 이렇게 얘기할까 봐 깨알같이 제가 적었다는 겁니다.

지금 와서 성경은 뭐 이 종이 저 종이로 막 덕지덕지 발라져 있습니다. 딱 볼 때 아, 이때 이거는 내가 이때 이렇게 메시지를 묵상한 거구나라는 것으로 조금 성경이 많이 정리가 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 예수를 믿을 때와 중간과 지금 제 성경을 보면, 아, 내가 이렇게 바뀌었구나. 옛날에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이 줄 저 줄 막 색연필로 쳤던 그러한 성경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깨알같이 적었던 그런 성경이, 지금 보니까 많이 깨끗해졌구나. 그러나 아직도 지저분합니다. 아직도 온전히 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 성경을 읽을 때도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의 어떤 의로움을 나타내려고 우리들은 성경을 읽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의 삶에 그 하나님의 음성을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성경을 읽는 것이고, 우리가 기도할 때도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금식하고 우리가 또 전도할 때도 정말 한 영혼이 중함과 귀중함을 통해서 저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에서 우리들이 전도를 하게 되고 그러는데, 그래서 우리 교회는 전도왕이라는 제도가 없습니다.

어떤 교회는 전도 많이 한 사람에게 금반지 한 돈을 주고 그런다고 얘기를 하는데, 금반지가 탐나면 그 교회에 가서 열심히 전도하십시오. 우리 교회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 앞에 아무리 훌륭한 모습을 가진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는 우리가 어떤 모습일까? 우리가 붙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되어야지, 우리가 붙드는 것이 세상의 것이 되지 않고, 우리가 붙드는 것이 나의 의로움을 세우기 위한 것들이 되지 않기를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을 하시는 거죠.

여러분들, 붙잡고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냐 확인하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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