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3:13~26 누가 천국에 들어가는 자인가?
- seattleomc
- Jul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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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을 우리들이 묵상을 해 보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얘기를 하시지만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은 그렇게 많지는 않죠. 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해 왔는데,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하신 경우는 복음서 외에는 없는 것으로 우리들이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이 말씀들은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에게 올바른 진리에 대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에 대해서 그동안 오해했던 그런 문제들을 정확하게 짚어 주시고, 우리가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게끔 책망하시고 또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게끔 이끌어 가시는 그런 말씀임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묵상을 하였던 것처럼 23장 1절을 보시면, 바리새인들뿐만이 아니라 많은 무리들과 제자들도 그곳에 함께 모였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본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 그 자격, 이런 것들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동원해서 잘못 오해하였다라고 책망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틀렸는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지금 잘못하고 있고, 어떻게 이 말씀과 비교해서 틀린 그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나를 이 말씀을 우리들이 묵상하는 가운데 찾아내셔야 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그 말씀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을 알 수 있겠고, 원래 의도하시고 뜻하신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복음으로 와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또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하시는 그 교훈의 중요한 내용, 그것을 주의할 것을 이야기를 하고 있죠. 그리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틀린 점이 무엇인가를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은 지났지만 그 가운데 우리들이 그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라는 그 말씀을 주님께서 하신 적이 있는데, 오늘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과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는 이 말들과 아주 비슷한 그런 경우를 보게 됩니다.
어떤 비슷한 경우를 보게 되냐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할 때,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의로움이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라는 그 믿음을 가졌었거든요.
근데 예수님께서는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을 갈 수 없다라고 말씀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우리들이 가져야 되겠다라는 그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때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이 어린아이는 순진함을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얼마나 영특한지 모릅니다. 눈치도 얼마나 빠른지 어른 못지않습니다. 우리의 악함이 어린아이들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이 아니라, 어린아이는 모든 것을, 그들의 필요한 것들을 부모로부터 공급을 받는다라는 의미에서의 어린아이입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가 무엇인가를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지 않습니까?
어린아이가 공장에 가서 일을 하고 월급을 받아서 자기 필요한 것을 사는 것이 어린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모든 것들을 어린아이는 부모로부터 공급을 받는 그 존재, 그것과 같지 않으면, 다시 말씀드리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필요한 것들을 무엇으로 공급했었냐면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냄으로,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킴으로 그것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의로움이라는 이 필요를 채워 나갔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렇지 않다라는 겁니다. 이 어린아이와 같다라는 것은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그 은혜로 되어지는 것이지, 너희들의 의와 너희들의 수고, 너희들의 노력과 열심히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말씀과 함께 아주 적절한 비유가 어디에 나오냐면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이제 포도나무의 비유에 대해서 쭉 예수님께서 설명하지 않습니까?
15장, 16장, 17장에 예수님께서 아주 긴 기도를 하시면서 포도나무에 관한 그러한 비유를 말씀을 하시는데, 가지 끝에 포도송이가 열린다는 겁니다.
가지가 잘라서 그 끝에 포도송이가 열린 것이 아니라, 그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나무에 붙어 있을 때만이 그 가지를 통해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가지가 나무를 떠나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같이 너희들이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그 말씀을 주께서 하시는 것을 우리들이 기억합니다.
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 다시 돌아와서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 만들어 내고 이루어 내려는 그 앞에, 너희들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너희들이 지금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믿고 있고, 그것을 그 내용을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구나. 그건 잘못된 것이다. 그건 오해가 되는 것이다라고 책망을 하는 그 내용으로 되어져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다시 한번 되돌려 보고 돌이켜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들은 우리의 의로움을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가 종교라는 이름을 빌어서 열심히 행할 때 우리 어떤 의로움에 대한 만족함을 주었느냐라는 것이죠.
아니면 우리가 그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우리의 필요한 것들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우리가 믿습니다라고 주님께 무릎을 꿇으며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채워 달라고 요구를 했는지, 이 내용이 지금 이렇게 되어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께 붙어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들이 공급되고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들이 오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죠.
그래서 성도들의 힘은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겁니다. 성도들의 힘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죠. 나의 노력과 열심히 만들어 낸 세상에서 어떠한 성취로 말미암아 우리가 힘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만 붙어 있다라면 성도의 힘은 거기서부터 출발을 한다는 것이죠.
13절 말씀을 한번 보세요. 13절 말씀을 보시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향한 그러한 질책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떤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냐면 천국의 열쇠를 맡은 사람들, 이렇게 표현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면 그들이 부지런히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살펴서 그 말씀의 진위를 파악하고,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 말씀 그대로 살아가기를 가르치는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바리새인들은 서기관들이 연구하고 그들이 파악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하게 깨닫고, 그들의 삶으로 살아내야만 했던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지금 이 사람들을 책망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책망하냐면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 잠가 놓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그 말씀의 의도를 알고 깨닫고 배우고 가르치고 지켜야만 했던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를 그냥 설렁설렁, 변성으로 의도가 정확하든지 정확하지 않든지 상관없이 그냥 자기에게 기쁨이 되고 자기에게만 의롭고 하면 그대로 이제 살아갔다는 것이죠.
그렇게 살면서 야,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라고 얘기를 했던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들도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했지만, 그 오해한 부분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너희들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너희들이 가르치는 저 사람들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는 그런 내용이 이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가장 중요한 실수하는 부분이 무엇이냐면 모든 것들을 하나님 나라, 어떤 하나님 나라의 어떤 영적인 것들 속에 가둬 놔야 되는데 하나님 나라의 어떤 기쁨은 온데간데없이 이 세상의 즐거움과 세상의 기쁨을 위해서만 살아가게 됐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기독교의 신앙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 무엇이냐면 은혜라는 단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라는 단어가 기독교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거저 주셨기 때문에 은혜라는 표현을 썼다라면 영광은 당연히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맞죠.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은혜라는 것을 뒤로하고, 자신들의 의로움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 종교적인 열심과 신앙적인 행위로 그 의로움을 쌓아 올라갔다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까 자신의 의로움이 나타나는 것이지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게 자신 스스로가 천국을 들어갈 수 없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그들 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오직 천국은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만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어떤 신앙의 행위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정결하고 흠이 없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세상도 오해하는 부분이고 우리들도 잘못된 신앙으로서 가끔 오해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우리가 착하고 의롭게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히 따라오는 결과일 뿐이지, 우리가 예수를 믿는 가장 주된 이유는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기대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통치함을 기대하는 것이죠.
그 결과로 우리들은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다스림이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죠. 지금까지의 세상에서의 즐거움과 세상에서의 다스림 속에서 살았다면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즐거움과 세상의 다스림을 뒤로하고, 그것과는 이별을 하고 결별해 버리고, 어쩌면 배설물처럼 다 버려 버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과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로 걷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그 결과로 우리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죠.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의 즐거움과 이 땅에서의 그 유익함들, 아니면 많은 사람들로부터의 어떠한 종교, 많은 사람들로부터의 칭찬, 이런 것들을 듣기 위해서 이들은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이죠.
당연히 이들에게는 신령한 것들을 가르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로움에 대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이들은 당연히 가르치지 않았던 겁니다. 어떻게 하면 율법을 지킬까? 율법을 세부적으로 쪼개 놓고 그것을 지켜야만 된다라는 이 가르침 속에서 살아갔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틀렸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의롭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착하고 바르게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평생을 가도, 저희 어머님이 이제 구순이 넘었는데 평생을 가도 그 모습 못 버립니다. 지금 당장 예수님이 오시면 어떡할 거예요? 그 모습, 이 모습으로는 우리들이 천국에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연약한 우리들의 인간적인 모습 위에 예수님은 의로움, 의로운 옷이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입혀 주신 것이죠.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의로움으로 우리의 연약하고 우리의 못난 그 부분을 가려 주시는 것이죠. 그것을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보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시간 주님이 오신다고 해도 우리들은 천국에 갈 수 있는 믿음이 그래서 있는 겁니다. 우리의 의로움을 내세워서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수고와 그들의 노력, 이런 헛된 것들에 대한 가르침만 있었지 영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은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주님이 지금 책망을 하고 계시는 것이죠.
로마서 10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절과 3절을 보시면,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정확한 말씀이죠. 예수님의 책망과 지금 사도 바울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었지만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한 신앙의 행동이다.
지금 사도 바울도 지적을 하고 계시고, 또 주님께서도 지적을 하시는 이 내용인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 가운데 아까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굳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만 이 말씀을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오늘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질 그러한 말씀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지만 그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나의 의를 세우려고 하는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나타내는 열심이 돼야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들이 신앙의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행함으로 말미암아 누군가는 좀 알아주지 않을까라는 그 기대 속에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가 많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그러한 책망이요 질책이지만, 동시에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도 향한 주님의 책망이다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왜 우리가 때로는 우리의 열심히 많은 사람들을 시험당하게 할 때도 있죠. 그리고 또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나타내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시험을 들게 하는 경우가 있죠.
여러분들 가운데 혹시 그런 말도 들었을 겁니다. 나는 저 사람 때문에 교회 안 가. 이런 소리도 들었을 겁니다. 나는 죽으면 죽었지, 저 사람이 믿는 예수 나는 안 믿어. 이런 말들 여러분들 많이 들어보셨죠?
이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나타내지 못할 때 많은 사람들의 시험이 된다는 겁니다. 오히려 야, 나는 뭐 예수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고 다 모르지만 저 사람이 믿는 예수,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이면 나는 믿겠다. 이런 말들도 여러분들이 들어보셨으리라고 믿습니다.
어느 쪽에 여러분들이 서느냐? 내가 만난 그 하나님을 내 삶 속에서 나타내느냐? 아니면 내가 천국도 들어가지 못하면서 다른 천국 들어가는 사람들을 막고 있느냐라는 것을 우리들이 한번 묵상을 해 봐야 되는 그러한 말씀인 거죠.
나의 신앙의 열심은 나의 의를 내세우기 위해서, 만들어 내기 위해서 하는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나타내는, 돌려드리는 그러한 열심이다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고, 16절 말씀을 보시면 영적인 무지로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는데, 16절 말씀 한번 봅시다.
“화 있을진저, 눈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여기서 화 있을진저, 눈먼 인도자여.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여라고 이야기를 하지 않고 여기서는 눈먼 인도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맹인이 맹인을 인도한다라는 그런 말씀을 주께서도 하시는데,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두 명 다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지 않느냐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래서 외식하는 자요라고 책망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눈이 멀었다. 너희들은 눈을 뜨고 있지만 보지 못한다. 너희들이 세상적인 것들은 잘 바라보고 세상적인 것들은 잘 관찰하지만, 너희들의 유익을 위해서 세상의 흐름을 잘 바라보지만, 그러나 영적인 것을 바라보는 데는 너희들은 눈먼 소경이다. 눈먼 장님이다라는 것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바라볼 수가 없는 거죠. 이들은 영적인 것들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유익만 생각을 했었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영광을 나타내지 못한 그러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율법주의에서 가장 주의해야 될,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주의해야 될 부분이 무엇이냐면 자기 자랑으로 가는 것을 주의하라. 지난 주간에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기 자랑으로 기독교는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영광이 돌아가는 겁니다.
왜? 모든 것들이 하나님 주시는 은혜였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라는 찬송도 이제 주일 예배 때 할 수가 있을 것 같은데, 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숨 쉬는 것, 우리가 눈 뜨는 것, 우리가 입고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 교회에 오는 시간들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당연히 영광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죠.
아멘.
그 영광이 우리에게로 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의 자랑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의 열심, 우리의 신앙의 헌신, 우리의 신앙의 수고 이런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함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그 모든 행위의 결과들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지금 주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무엇을 예로 드냐면 맹세의 문제를 예로 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말과 행동, 이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 진실하냐 안 하냐라는 것을 묻는 것이죠. 너희들은 지금까지 말과 행동이 진실되지 못했다. 왜냐면 말과 행동이 다른 이유는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한 행동들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제 맹세에 대한 이야기로 주님께서 이 문제를 끌고 들어가시는데, 첫 번째로는 성전으로 맹세를 하느냐, 성전에 바쳐진 금으로 맹세하느냐라는 이 문제. 그다음에 17절을 보시면,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성전이 거룩한 거냐? 성전에 바쳐진 그 금이 거룩한 거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렇게 이제 맹세를 한 겁니다. 성전은 성전보다도 성전으로 바쳐져 있는 금이 더 귀중하기 때문에, 성전으로 맹세하면 우리들이 실수해서 안 지킬 수도 있지만 그 금으로 맹세한 것들은 반드시 지켜야 된다라는 이 가르침을 그들은 행했던 것이죠.
그래서 또 말씀하시기를 18절, 19절을 보시면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어다 하는도다.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제단에 예물이 드려짐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거룩하다 얘기를 합니다. 성물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리고 쌀도 예전에는 우리가 첫 번째 수확한 그러한 쌀 같은 것도 성미로 이렇게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그 성미를 먹고 지냈었죠. 그런 일들이 있었던 것을 봅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그냥 쌀이죠. 그런데 성전에 드려진 것을 가리켜서 성미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일반적인 것들은 그냥 물건이죠. 근데 성전에 바쳐진 것들을 가리켜서 성물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처럼 어느 것이 크냐라는 것이죠. 그것들이 드려지지 않았다면 일반 아무리 쓸모없는 것들이 되지만, 그것이 드려짐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됐다라면 무엇이 크냐라는 것을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들이 레위기에 나오는, 단 제단 위에 드려졌다, 번제단 위에 드려졌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단 위에, 번제단 위에 드려짐으로 말미암아 그것에 접촉되는 것들은 모두 다 거룩하게 여길지니라라고서 레위기서에 설명을 하고 있는데, 드려짐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것이지, 어떻게 그 거룩한 것보다도 드려진 것이 더 너희들은 소중하고 귀하다고 이야기를 하느냐라고 주님께서 책망을 하고 계시죠.
그리고 나서 22절까지, 20절에서부터 22절까지 말씀을 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주님께서 이것을 다시 정리를 하고 픽스를 하는 내용입니다.
21절 보시면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그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이 각각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제단으로 맹세하는 것, 성전으로 맹세하는 것, 하늘로 맹세하는 것.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보좌지 않느냐? 그렇다면 하늘로 맹세한 것은 하나님께 맹세한 것과 마찬가지다.
성전에 드려진 재물은 성전에 드려짐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됐다라면 그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성전으로 맹세하는 것, 제단으로 맹세하는 것과 동일하다. 성전의 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성전으로 금으로 드렸다라면 그 금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 때문에 그것이 거룩하게 된 것이다라고 주님께서 다시 말씀을 하는 것이죠.
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특히 이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이 왜 이런 문제를 분리해서 생각을 했냐면, 성전에 드려진 것은 일부는 자신들의 몫이기 때문에 그렇던 것입니다. 이게 성전에 드려진 것이 일부가 자기의 몫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렇게 당연히 가르치겠죠. 그러나 이 물질의 눈이 어둡고, 재물에 눈이 어둡고,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할 때 일어나는 그런 결과들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저것이 이제 내 몫이지라는 이 세상적인 욕심이 생기면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세상적인 물질만 바라보게 된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눈먼 소경들이여라고서 책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들의 관심이 하나님의 통치하심, 다스리심, 하나님의 거룩함 이런 것들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저것이 내 것이 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나의 의로움이 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나의 영광이 될 것인가? 여기만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이들은 바라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이 너희들은 눈을 떴으나 보지 못하는 소경이여라고 이야기를 하죠. 너희들이 걸어다니고 있지만 오히려 걷지 못하는 절름발이와 같다. 너희들이 보는 것, 이런 것들은 세상적인 것을 보기 때문에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한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맹세라는 것을 통해서 무엇을 나타냈냐면, 야, 봐라. 우리는 이렇게 맹세를 잘하고 있지 않느냐? 그리고 그것을 잘 지키고 있지 않느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이런 것들을 오용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런 부분들을 지적하시고, 하나님을 외면하고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면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주 비근한 예로 초대교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를 보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로부터 바나바가 영광을 받는 것을 보고 그들이 시기가 가득해서 자신들의 물건을 다 팔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서 성전에 바치려고 하다 보니까 이게 너무나도 아까운 겁니다. 그래서 일부를 감추고 일부만 성전에 내놓지 않습니까?
아니, 자기 건데 차라리 그것이 너무나도 아까우면 차라리 바치지를 말지, 내지를 말지,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들게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영광을 듣기 위해서 자신들의 소유물을 팔아서 성전에 바쳤던 것이 오히려 화가 일어나는 그 결과를 우리들은 사도행전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들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맹세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행위가 된다라면 우리는 그 내면에 있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놓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경고가 주님의 경고다라는 것을 우리들이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23절 말씀을 보시면, 23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에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에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한 십일조가 이렇게 등장을 하게 되는데, 십일조 그 얘기는 결국은 은혜의 시작이라는 얘기입니다. 언제 이것이 시작이 됐냐면, 아브라함 때에 그의 모든 가족들이 아말렉에 다 빼앗기게 되고 포로로 잡혀갔을 때, 거기에 그 멜기세덱이 등장을 하죠. 멜기세덱이 등장을 해서 그 싸움을 돕지 않습니까? 그때에 너무나도 감사해서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바치면서 시작이 된 거죠.
그리고 나서 이제 모세 때에 와서 이것을 율법으로 직접적으로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의 행위를 이렇게 보면 십일조는 너무나도 잘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하지 말아야 될 박하와 회향과 근채까지, 이런 것들은 다 향신료, 뭐 이런 것들을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향신료가 뭐 그렇게 비싸지는 않지만, 이 당시에는 향신료가 은값과 비교될 만큼 굉장히 비싼 그런 내용들이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십일조도 하되 이런 사소한 것까지도 다 한 겁니다.
오늘 식으로 이야기를 하게 된다라면 물질에 대한 십일조도 내지만, 우리들이 시간에 대한 십일조를 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24시간 중에 몇 분 정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야. 이런 신앙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고 또 꼭 그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선물을 받은 것, 어떤 것 이런 것까지도 다 꼼꼼하게 해 가지고 십일조를 내는 그런 사람들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지 않아야 될 것도 행함으로 이것을 통하여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야, 저 사람 신앙 참 좋다.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 저 사람들은 하는구나.
이런 영광 소리, 소리를 듣기 위해서 이런 행위들을 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의 행위가 얼마나 이 사람을 뭐 이렇게 좋아한다고 할까요? 아주 코너로 이렇게 몰아 버리고 숨도 못 쉴 정도로 숨 막히는 신앙생활까지도 이렇게 시킨다는 겁니다.
우리 교회에서 여러분들 물질의 십일조뿐만이 아니라 시간의 십일조도 하십시오. 뭐에 대한 십일조도 하십시오. 참 그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자유롭지 않습니까?
십일조 여러분들이 안 한다고 해서 목사가 십일조 하십시오. 이런 얘기 한 번이라도 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그냥 자유롭게 하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크면 그냥 하는 거고, 나는 오늘은 별로 하나님께 은혜가 안 돼. 그러면 뭐 안 해도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벼락을 내려서 죽이지 않습니다. 그거 안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뭐 책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손해 보게 안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주일날 가게 문을 여느냐 마느냐, 이 문제 가지고 심각하게 의논을, 심각하게 질문을 해 오는 그런 분이 있는데, 분명히 말씀을 드리는 것은 주일날 여러분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문을 닫고 일을 안 하게 되면 그만큼의 손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손해보다도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 귀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더 귀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더 귀하다라는 마음이 들 때 우리들은 그것 문을 닫고서 하나님의 날 온전히 지키는 그 믿음과 그 마음이 있는 겁니다.
이 근본적인 것을 우리가 놓쳐 버리고, 열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이 고민 가지고 맨날 집에 가면, 야, 이 수입이 들어와야 되는데 남편과 아내가 그것 때문에 싸우고, 이게 무슨 천국의 모습이 아니죠. 그 가정이 차라리 그러려면 열고서 편안하게 지내는 게 훨씬 더 나은 거죠.
우리는 뭐 1부 예배가 없어서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을 위해서 1부 예배드리고 가서 열고, 그걸로 인해서 주님이 책망하고, 그 근본적인 마음을 잊지 말라는 것을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을 하는 거죠.
이 유대인들이,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했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일반 사람들이 다 하는 십일조를 그들이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것까지 자신들은 하면서 자신들의 의로움을 세웠기 때문에 주님이 책망을 하시는 것을 여기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이 십일조를 드리되 그것보다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봉사하는 그런 마음을 하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율법은 열심히 지켰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공의로움이 담겨져 있느냐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담겨져 있느냐는 것이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거기에 담겨져 있느냐라는 것을 여기서 지금 주님이 묻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열심히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예를 들면 그런 겁니다. 여러분들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기도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시장문에서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서 하라라고 얘기를 하시죠. 너희들이 구제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알게 하지 말고 왼손이 하는 거,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은밀함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으신다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것과 같지 않았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우리에게 풍족한 중에서 하는 구제는 우리의 마음을 다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동일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내가 궁핍 가운데서 하는 구제는 우리의 마음을 담아낼 수가 있습니다. 구제할 때 내가 궁핍하지만 저 사람을 보니까 너무나도 측은해 보이고, 내가 돕지 않으면 저 사람이 힘들어 할 것 같고,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나도 궁핍하지만 그 상대방을 돕는 겁니다.
우리가 구제할 때 이 마음이 있는가를 살펴보라는 것이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해서 내 이름을 내느라고 신문에 내 이름이 안 나오면 그것으로 인해서 삐지고 하는 그런 행위들이 아니라, 나도 힘들고 나도 어렵지만 그러나 저 상대방을 볼 때 너무나도 힘들어하는 것 같고, 내가 돕지 않으면 그 사람이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 긍휼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마음으로 내미는 것, 이것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율법이 이야기를 하는 그 근본적인 내용이 이 안에 담겨져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으로 하라는 겁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들을 우리들에게 요구를 하라는 것이죠.
그리고 나서 여기에서 마지막 24절에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맹인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이 말씀을 하시는데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내용이라는 겁니다.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은 포도즙을 짤 때 하루살이가 이렇게 들어가면 그것이 부정한 곤충이다 해서 다 걸러냈다고 하죠.
근데 낙타가 나오는 겁니다. 낙타는 소중하고 귀중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 집안의 재산이지 않습니까? 그 낙타도 부정한 짐승이지만 이것은 괜찮아라고 이들이 밀어냈다는 겁니다.
영적인 의미로는 어떤 의미가 여기에 담겨져 있냐면 나는 이 조그마한 그러한 문제, 이런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 그러니까 상대방이 조그마한 율법을 어기면 그 사람들은 이것을 다 지적을 했다는 겁니다. 너 이거 어겼다. 너 이거 어겼다. 그런데 자기가 짓는 낙타와 같이 큰 것들에 대해서는 나는 괜찮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겠지.
그러니까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과 내가 내 자신을 바라보는 것과 기준점이 완전히 달라지는 그 기준에서 이 율법주의자들이 행하고 있더라는 것이죠.
사도 바울이 이야기를 한 것처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그러한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이 서기관들이요 바리새인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의 실수는 용납을 하지 못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마음에 찔리는 분들이 있을 줄 모르겠습니다. 상대방의 잘못은 너무나도 잘 보이는 거예요.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너무나도 많아. 그리고 나서 막 지적을 해요. 잘못됐다고 막 얘기를 해요. 근데 내가 실질적으로 잘못하고 있는 것들은 보이지가 않는 겁니다. 나를 통해서는 보이지가 않아요. 상대방이 나에게 얘기를 해 줘야 되는 것이지.
그런데 상대방이 얘기를 하면, 아 누가 얘기를 하는데 너무나도 기분 나빠. 내가 이런 것을 했는데 나에게 뭐 지적질하고 그래. 나를 가르치려고 그래. 이런 생각을 우리들이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혹시라도 여러분들 가운데서 찔리는 분들도 그렇게 했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그렇게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루살이는 다 걸러내지만,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서는 막 지적하고 책망하고 야단을 치지만, 낙타는 용납한다. 나의 실수, 나의 잘못들, 이런 것들을 용납하면서 넘어가는 신앙.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지금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냐? 눈은 떴으나, 눈은 가지고 있으나 영적인 것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세상적인 것들이 바라보이고, 영적인 눈을 가지고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놓쳐 버리고 상대방의 작은 실수만 들어오게 된다는 것을 여기에서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성도들이 정말 주의해야 될 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은 우리의 외형적인 모습을 보는 게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있는 것을 더 보시고 더 기뻐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우리가 구제할 때도, 봉사할 때도, 우리가 손을 펼쳐 하나님 전에 헌신할 때에도, 우리의 내면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하느냐,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하느냐, 그 마음으로 하느냐, 이것을 먼저 보신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하는 봉사나 우리가 하는 헌신들, 얼마든지 실수도 할 수가 있죠. 나는 열심히 한다고 해서 했는데 다른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할 수도 있죠.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했다라고 한다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했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지 않을 때는 다음부터 안 해. 이렇게 돼 버리는 겁니다. 여러분들, 다음부터 안 해. 이런 말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십시오. 하나님 주시는 은혜로 여러분들이 여기고 한다라면 누가 뭐래도 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받아서 먹는 그런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먹으십시오.
저분이 얼마나 섬기는 마음이 있으면 참 예쁜 마음으로 우리를 섬기려고 하고 교회를 섬기려고 하는 그 마음을 본다라면 감사한 거죠. 서로 덮어줄 수 있고 용납될 수 있는 그런 내용들이라는 겁니다.
자, 결론을 내립시다. 결국은 주님께서 책망하시는 기준이 무엇이냐?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 않으면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그 결과로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의 의로움, 이런 소리만 듣기 원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고 여러분들이 생각을 하시고, 정말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세워져 있느냐? 하나님의 은혜 속에 세워져 있느냐? 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
이 기준을 여러분들이 가지셔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리고 여러분들로 인하여 내가 예수를 믿겠다라는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생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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