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예배: 부활!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 (고전 15:35~44)
- seattleomc
- 2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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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분들과 인사 한번 하시죠.“주님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들, 부활절 하면 추억이 있죠?부활절에 대한 추억이 누구에게나 다 있는 줄로 압니다.
저희가 신앙생활을 하던 한국에 있을 때는,부활절마다 꼭 연합예배를 드렸던 기억이 나요.커다란 홍성 운동장에 모여서,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렸던 기억들이 많이 납니다.
이곳 지역에서도 연합예배를 몇 번 시도하고,또 몇 번 드리기도 했지만…참 잘 안 모이는 것 같아요.
“각 교회별로 하자.”“아니면 지역별로 하자.”이렇게 얘기하다가, 결국“그럴 바엔 아예 하지 말자.”뭐, 준비는 많이 했지만사람들도 많이 안 모이니까 굳이 할 필요 있냐,어차피 각 교회에서 부활절 예배 드릴 텐데…
이런 식으로 해서 그냥 없어져버린 것 같습니다.참 아쉬워요, 그런 걸 보면요.
부활절 새벽—우리가 잠을 설쳐가며 맞이했던그 주님의 부활의 기쁨,이런 것이 분명히 있는데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든,2부 예배, 3부 예배, 하루 종일 예배를 드리든지 간에,이제는 그런 분위기가 없어져서,참 나름대로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부활의 종교라는 말, 왜 그렇습니까?다른 종교들을 보면, 사실 부활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왜냐하면, 대부분의 종교는자신들의 소망이나 꿈을 이루기 위해 사람이 만든 종교이기 때문에,부활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부활이라는 것은,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것이고,하나님께서 친히 사랑을 실천하신 사건이기 때문에,
오직 기독교만이이 부활이라는 신앙과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어릴 적 부활절 추억 있으시죠?계란을 먹으면서,계란을 색칠하면서,그림도 그려 넣으면서 자랐던 그런 추억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죽으셨지만,
죽음이, 무덤이, 주님을 가둘 수 없었습니다.묶어 놓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살아나셨고,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활절에 주의해야 할 한 가지는,이 날이 단지 1년에 한 번 지키는 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우리가 교회력에 따라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부활절은 매일이 부활절이어야 합니다.아멘?
매일이 부활절이고,주님께서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날마다 느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그날이 바로 ‘오늘’이고,매일의 삶이 부활절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이라는 말 자체는,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우리가 서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활절을 지키는 이유는예수님이 과거에 한 번 부활하셨기 때문만이 아니라,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나,영적으로 깨어 있는 성도들은부활절을 1년에 한 번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매일매일 주님이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함께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힘이 있었고,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민감한 성도들은날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그 주님이 그들의 삶에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민감할 수밖에 없고,영적으로 깨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많이 암송하고, 지식이 깊다 해도—
주님이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없으면,그 모든 것이 우리 삶에 큰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반대로,비록 성경을 다 외우지 못하고,많이 알지 못하더라도,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의 삶에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나고,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주님의 부활은 단지 과거의 한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 아닙니다.오늘도 살아계신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매일의 현실입니다.
현재적으로도, 계속적으로 진행되는 날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그 당시나 지금이나 이 부활에 대해서 설명하기도 어렵고,어떻게 부활이 일어나는가에 대해많은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시면,33절에 이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 나옵니다.
특히 35절을 보시면요—“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냐?이해할 수가 없다.그리고 어떤 몸으로 부활한다는 말이냐?
지금식으로 얘기하면,“이미 다 화장해서 태평양에 재 뿌렸는데,무슨 몸으로 다시 오느냐?”이런 의문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당시에는 헬라 문화가 지배하고 있었던 사회였죠.헬라 문화는 이원론을 기본으로 합니다.그래서 죽은 자의 부활 같은 건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부활에 대해 더 의심이 많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서는,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25년이 지난 시점에 기록된 성경입니다.
25년이란 말은,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살아 있던 때라는 얘기입니다.
그들이 살아 있어서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전파하고, 외치고 다녔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점에,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주님이 부활하셨다는데,죽은 자들이 도대체 어떻게 살아나느냐?”,“어떤 몸으로 부활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 안에서우리가 하나 깨달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얘기는,예수님만 부활하신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 성도들 또한,예수님과 함께, 같은 모습으로 부활한다는 소망을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부활은예수님에게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고,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건입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설명하겠지만,"죽은 자들이 어떤 몸으로 살아나는가?"에 대해일단 37절과 38절을 보시면요—
사도 바울이 이렇게 비유를 들었습니다:"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일 뿐이로되,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셨느니라."
다시 말씀드리면요,우리가 밀을 거두고 곡식을 거둘 때,그 모습 그대로 심지 않죠?
곡식의 모습이 아니라 씨앗을 뿌리는 겁니다.그 씨앗은 지금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그 안에 미래의 형체가 담겨 있죠.
그리고 죽어 땅에 들어가서,미래의 모습으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우리가 죽지만 지금의 육체 모습으로 다시 나오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생명의 형체로 부활하게 되는 겁니다.
바울은 이것을 밀과 곡식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씨앗은 지금 봐서는 어떤 모습이 나올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마치 지금의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죽으면,어떤 모습으로 부활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전혀 새로운 영광의 몸으로우리를 다시 살리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거예요.
이 곡식의 비유를 통해바울은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톨스토이가 쓴 『부활』이라는 책에도굉장히 의미심장한 구절이 있습니다.
“생명이란, 아무리 동토의 땅이라 할지라도,때가 되면 자라고, 싹이 튼다.아무리 무거운 바위로 눌러놓아도,싹이 올라온다.아무리 다 뽑아내려고 해도,또다시 자라난다.”
생명의 신비는 정말 놀랍다는 거죠.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지금 집을 가지고 계신 분들—요즘 얼마나 분주한 철입니까?
잡초들을 뽑아도 뽑아도,계속적으로 다시 자라납니다.
민들레 같은 건 더하죠.
예전에 밭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데옆집 할아버지가"그거 whole life 그렇게 될 텐데" 하고 지나가시더라고요.
속으로 생각했죠,“이게 나이프지 whole life가 아니라.” 하면서계속 뽑았습니다.
그 할아버지 말씀은,“그거 뽑아도 뽑아도 또 나올 텐데,그거 뭐하러 계속 뽑냐?”는 뜻이었겠죠.
그래도 저는 마음속으로,“그래도 이건 뽑는 게 right다.” 생각하면서계속 뽑았습니다.
그래서 저희 집은 다른 집에 비해잡초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게,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죽은 것 같고,끝난 것처럼 보여도,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기 때문에,언젠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활의 생명체로우리가 자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의 신비는 정말 놀랍습니다.
한번 애벌레를 보세요.지금은 징그러운 벌레 같지만,나중에 화려한 나비로 변하잖아요?
잠자리 유충—그 조그만 생명체가,성장이 되면 아름다운 잠자리가 됩니다.
매미는 17년 동안 땅속에서 군뱅이로 지내다가,잠깐 몇 달 동안온 힘을 다해 울음소리를 내기 위해지상에 올라오잖아요?
그 군뱅이 때와 매미는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완전히 다른 차원의 생명입니다.
이처럼,우리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든지 간에,하나님께서 부활의 날에 우리를영광의 몸으로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소망을우리는 붙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비와 애벌레일 때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 썩어질 육신의 상태와,거룩하고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될 때의 차원은완전히 다르다는 것을,지금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생명의 신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기는 태어나서 엄마의 모유만 먹습니다.그런데 거기서 뼈가 자라고,살이 자라고,
그리고 어느 정도 신기하냐면—엄마를 닮고, 아빠를 닮아갑니다.
어떻게 엄마의 젖만 먹는데도그렇게 다 닮아갈까요?
거기서 머리도 자라고,말도 하고,지식도 자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생명이라는 것,우리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우리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그런 깊고 놀라운 신비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기독교의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 부활을 그렇게 외쳤고,두려움 가운데 있었던 제자들이부활을 목격하자마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외쳤던 것이 바로 부활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41절과 42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달의 영광이 다르며,별의 영광도 다른데,별과 별의 영광도 서로 다르도다.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썩을 것으로 심고,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우리의 육신은 죽어 땅에 묻히고 썩는다고 이야기합니다.그러나 우리가 부활할 때는,썩지 아니할, 영원한 것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활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요,이전 것들이 완전히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단지 생각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육신이 바뀌고,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부활을 경험한 사람,살아계신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모든 것을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뿐만이 아닙니다.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들,환난들, 핍박들—
부활을 통과하지 않았을 때는이런 것들이 참 힘들고, 어렵고,정말 좌절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믿음을 가진 사람,즉 부활을 통과한 성도는,이 모든 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계기를 얻게 됩니다.
이게 바로 주님께서 부활하시며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언젠가는 부활하게 될 텐데,그 부활의 모습,그 부활의 생각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바로 그것이 신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은데,썩을 것으로 심고,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
욕된 몸이,즉 죄악된 우리의 육체가—거룩한 몸으로 변화될 것이라 말합니다.
약한 몸은,강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육신의 몸이,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가장 좋아하시는 말—
“못생긴 내가,잘생긴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다.”
아멘?
이 모습을 그대로 하나님께서 보시겠습니까?그대로 받으시겠습니까?
아니요!
여러분, 우리 연세 많으신 권사님들 많이 계시지만,그 모습 그대로 주님을 맞이하는 게 아닙니다.
변화된 모습으로,영화로운 몸으로,아름다운 모습으로,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보톡스 맞을 필요 없습니다.꾸밀 필요 없습니다.뭐 찍고, 뭐 꿰매고, 뭐 고치고—그럴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때,주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기뻐하시는,그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왜냐면,성경은 죽은 사람의 부활만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서에 보면 이렇게 말하죠:어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에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걸 재림, 혹은 휴거라고도 표현하죠.
죽은 자는,육체가 썩은 상태에서 새로운 생명을 입어 부활할 것이고,살아서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연세가 많다 하실지라도,육신에 질병이 있다 하실지라도,그 모습 그대로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완전한 신령한 육체로,거룩하고 예쁜 몸으로 변화되어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이 자리에서 살아서 주님을 만나실 분이 계실지,정말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활은,죽은 사람만이 맞이하는 일은 아닙니다.
살아서도,얼마든지 우리의 육신이 변화되어,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날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해당될지는 모르겠습니다.여러분들 중에 나중에 300년 이상 사신다면,그때쯤은 소망을 가지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부활이라는 것은 죽은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이 썩어질 몸에서,썩지 아니할 영원한 것으로,육신적인 것에서,거룩하고 영원한 것으로 변화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4장 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어두운 데서 빛이 비치라 하셨던 그 하나님께서,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다시 말씀드리면,그리스도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어둠 속에 거하며 하나님을 보지 못하던 우리들에게,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비추셨다는 것입니다.
그 빛이 우리의 심령 속에,우리 마음 속에 비춰졌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어땠습니까?하나님을 보면 곧 죽음이라고 여겼습니다.그래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는,항상 구름으로,또는 불로 그 영광을 가리셨습니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뒷모습만 잠깐 보여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그리스도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있는 조건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이라는 것은,단지 옛날 사건이 아니라,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사건입니다.
이건 곧,생명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부활은 다른 말로 하면 변화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이고,썩어질 것이 영원한 것으로,속된 것이 영적인 것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제자들은전도할 때 가장 먼저 외친 메시지가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다.너희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하지만,그 십자가는 끝이 아니다.
부활하시기 위한 시작이었다.이렇게 외쳤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없는 겁니다.그래서 제자들은 십자가를 외쳤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핍박하고,옥에 가두고,채찍질하고 위협해도—자신들이 직접 목격한 그 부활,그 십자가의 사건을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메시지는 이것이었습니다:“예수께서는 다시 살아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 가운데 임하였는데,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부활하심으로 비로소 열린 나라라는 것입니다.
처음엔 두려움 속에 도망갔던 제자들이,이제는 예수님이 서셨던 법정에 서게 됩니다.예수님이 맞으셨던 채찍을 자신들도 맞게 됩니다.
혼란 속에 벌거벗고 도망갔던 제자들도 있었지만,그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그 마음 속에 새로운 심령이 솟아오르기 시작합니다.
왜입니까?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은,2천 년 전에 예수님께만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지금도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망이 되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우리가 흔히 “부활장”이라 부르는 이 말씀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헛되지 않습니다.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왜요?그 수고가 ‘생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죽고 그것으로 끝이라면,우리의 모든 수고는 헛된 겁니다.
그러나,우리가 죽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고,거룩한 몸으로 살아나는 소망이 있기에,우리의 수고는 절대 헛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나와 함께 죽으셨습니다.왜 죽으셨습니까?나를 다시 살리시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죽습니다.하나님께로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입니다.
죽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바로 그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살아 계신 주님을 가장 잘 나타내는 예식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하는 성찬 예식입니다.
이 성찬 예식은,주님께서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며,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예식입니다.
지난주 우리가 성막을 공부하면서 나눴던 말씀이 있습니다.주님께서 떡을 떼셨다는 의미는,하나님 나라의 가족, 백성으로 우리를 받아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심으로,그 몸을 찢으심으로,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한 백성,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이 성찬 예식을 통해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신앙 고백을 가진 자들로,한 가족으로 부름 받았다는 의미를 다시 새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예식을 통해주님을 기념하고,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다시금 고백하게 됩니다.
여러분,혹시 부활 신앙이 흔들릴 때,성찬 예식을 통해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살아 계십니다.지금도 나와 함께하십니다.주님의 잔치 자리에 나를 초대하셨습니다.나는 그분의 가족입니다.
이 사실을 마음 깊이 붙잡고,단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지금도 내 안에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매일의 삶 속에서 부활 신앙을 살아내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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