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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21:12~17 강도의 소굴로 변한 기도하는 집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들이 묵상하였던 것처럼,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어린아이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고 외쳤던 거기에서 유래되어서 종려주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또 다른 말로는 고난주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한 주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고난을 당하신 그 주간을 기념해서 고난주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이것을 다르게 또 표현합니다. Holy Week라고 이야기합니다. 거룩한 한 주간이라고 이렇게 표현하는데, 마지막 것이 참 좋습니다. 거룩한 한 주간.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 아들을 보내시고, 우리를 위하여 대신 제물로 죽으시고, 고난당하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래서 금요일을 가리켜서 우리는 승리의 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한국적인 정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날이야.” 하고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너무 감성에 젖다 보면 실체가 우리에게 잘 와닿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가급적이면 감성은 좀 뒤로하고, 실질적으로 주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어떤 일을 행하셨나,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수밖에 없었나, 또 하나님께서는 굳이 되살리실 거라면 왜 또 죽게 하셨다가 되살리게 하셨나,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 깊이 묵상하는 한 주간이 되셔야 됩니다.

그래서 너무 슬픔 가운데 젖지 마시고, 거룩한 그 주님의 행적을 따라가시면서 한 주간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에는 부활주일로 지킵니다. 아울러서 성찬 예식이고요. 한 가지 특이한 사항은 친교 이후에 순별로 성경 퀴즈 대회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제 의지가 많이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선교회 회장님의 의지가 많이 반영이 됐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여러분들이 잘 기억하셔야 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아마 몇 개의 문제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한 주 동안 여러분들이 마태복음을 묵상하시면, 범위가 마태복음 안에서, 주일날 여러분들에게 전했던 메시지 안에서 여러분들에게 퀴즈를 낸다고 하니까, 퀴즈도 하시고 성경도 묵상하시고 또 상도 타시고 즐거운 부활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날을 꼭 맞추려고 이 본문을 책정한 것은 아닌데, 계속적으로 마태복음을 묵상하는 가운데 딱 공교롭게도 이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묵상하는 이 본문을 우리들이 맞이하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제 마지막으로 일주일을 보내시는데, 물론 지금 마태복음 28장까지 있는데 21장부터 고난을 계속 이야기하시는데, 이제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실 것이고, 지난주에 묵상하였던 것처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장면을 보게 됐습니다.

많은 갈릴리에서부터 순례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축하하고 함께 따라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말로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찬송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오늘 본문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냐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들어오셨다가 성전을 이렇게 둘러보시고 다시 베다니로 가셨다고 기록합니다. 베다니에서부터 올라오셨다가 성전을 둘러보시고 다시 베다니로 가신 거죠.

그리고 누가복음에는 이 앞에 한 가지 사건을 더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셔서 성 안에 들어오셨고, 예수님께서 성으로 들어오시기 전에 베다니에서부터 올라오는 길에 어떤 터가 있냐면 감람산이라는 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서 무릎 꿇고 기도하시죠. 겟세마네는 예루살렘 성을 정면으로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그런 골짜기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한번 가셔야 되는데, 전쟁의 소식이 있어 가지고 제가 말씀을 전하기가 조금 그렇습니다. 아마 갔다 오신 분은 머릿속에 그 장면이 연상되리라 생각됩니다.

거기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그러한 장면이 누가복음에는 있습니다. 그래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허물어지리라.”라는 예수님의 눈물 흘리시는 장면이 여기에서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 이후로 바로 성전 청결이라는 사건이 오늘 본문에서 일어나게 되죠.

성전 청결이라는 이 단어에 여러분들이 조금 한번 주의를 하셔야 될 필요가 있는데, 청결케 했다고 하면 그러면 다시 사용하기 위해서 청결케 했나, 청결하게 하셨나, 청소를 하셨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청결케 했다는 의미는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뒤집어 놓으셨다, 새로운 것으로 바꾸셨다라는 개념으로 여러분들이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성전 청결이라고 제가 이 단어를 택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할 텐데, 여러분들이 이 청결은 그냥 깨끗하게 해서 다시 재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뒤바뀐 것이라는 의미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니산월이라는 절기가 있습니다. 그런 달이 있습니다. 지금의 4월 달에 해당되는, 우리 달력으로는 4월 달에 해당하는 그런 달입니다. 니산월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1월 달을 이야기합니다. 하나의 첫 출발을 이야기합니다.

그 근거가 어디에서 시작이 됐느냐면, 유월절, 애굽 땅에서 유월절을 맞이하면서 시작되어진 이런 절기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하나의 첫 절기, 첫 달로 이렇게 삼습니다.

여러분들이 유월절은 아시다시피 출애굽할 당시에 장자들을 다 죽이겠다는 이 말 앞에 사는 방법이 있는데,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 좌우 인방에 바르면 그 죽음의 그림자가 넘어갈 것이다, 유월할 것이다라는 그 의미에서 유월절이 이렇게 출발된 거죠. 유월절의 유래가 그렇게 시작이 되죠.

그러니까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죽으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유월절 어린양으로 상징하는 것은 우리들이 물론 다 알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 유월절 어린양으로 예표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이것이 시내산에서부터 제사의 방법을 통하여서 어린양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얻는 규례, 이런 것들을 얻게 되죠.

그 제물이 바쳐진 곳을 가리켜서 우리는 성막이라고도 하고 성소라고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진 곳, 내가 죄 사함을 받은 곳, 다시 말하면 내 죄를 사하기 위하여 나 대신 어린양이 희생양으로 죽었던 곳, 그것을 성막, 성소, 성전 이렇게 표현하게 되죠.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처럼 속죄되어진 것,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함을 받은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의 노력과 나의 수고, 다시 말씀드리면 내가 제물을 가지고 가서 제사장을 만나고 하는 이런 과정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내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이런 착각 속에서 살아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런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해 주셨지라는 생각 속에서 살아갔다는 것이죠.

그 착각에 대한 강해가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성전을 청결하게 하는 그 내용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여기까지 이해하셨으리라고 생각되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 그리고 비둘기 파는 자들의 상을 뒤엎으셨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예수님께서 하시면서 이 행적을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하여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유대인들을 향한 분노, 이런 것들을 표현해 낸 말씀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 말씀 가운데는 더 깊은, 더 풍성한 의미가 이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꼭 성전을 청결케 하겠다는, 다시 말씀드리면 성전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사람들을 야단치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더 풍성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고 여러분들이 기억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유월절 어린양, 어린양을 통해서 이제 제물을 통하여서 죄 사함을 받는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유월절을 맞이하여 유대인들이 제물을 들고 성전으로 지금 들어오는 겁니다.

그 제물과, 그리고 친히 우리를 속죄하기 위하여 제물이 되셔서 오신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는 모습과, 그러니까 성전 안에 유대인들이 속죄함을 받기 위하여 그 속죄양을 가지고 간 모습과,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친히 속죄양이 되셔서 오신 예수님이 성전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함께 교차가 되는 그런 내용이죠.

그러니까 모형이 있고 실체가 한꺼번에 동시에 등장하는 그러한 성경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 아파트 같은 데 이렇게 보면 아파트를 짓기 전에 모형을 먼저 짓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 이렇게 짓고, 그런데 아파트를 지을 때 그 모형을 그대로 놔두나요? 다 부숴 버리죠.

왜냐하면 요한복음 2장에 보시면 이 똑같은 사건, 이미 성전을 정결케 한 사건이 한 번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예수님께서 이미 성전을 정결케 하셨던 그런 사건이 일어나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는 성전의 사건은 예수님의 말기, 예수님의 사역의 마지막 부분에 이 사역이 또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우리가 3년으로 보지 않습니까? 초기에 이미 성전을 청결케 했는데, 강도의 소굴로 만든 성전을 하나님의 전으로 온전히 되돌려 놨는데, 3년 있다가 다시 가 보니까 여전히 그 일을 행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것들을 보시고 어떤 말씀을 하시냐면, “너희들이 이 성전을 헐라.”라고 얘기하시죠. 그리고 “이 성전을 헐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지으리라.”라고 얘기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이 말씀은 성전 된 자기 몸을 가리킨 것이라고 요한이 이렇게 밝히고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제도들, 이 모든 것들을 다 걷어 버리고 당신의 죽음으로 이것을 다시 세우는 겁니다. 당신의 부활하심으로 이 제도를 다시 새롭게 하시는 것을 우리들이 보게 되는 거죠.

그래서 12절 말씀을 여러분들이 한번 보세요. 12절 말씀을 보시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지난주에 우리가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 하는 그 찬미 소리, 이 얘기는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얘기드렸는데, 오늘 메시아 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는 그 사건 또한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증거하는 것으로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아가 오신다면 성전에 이런 제도들을 다시 바로잡을 것이라고 구약 성경에 이미 예고하고 있는 그런 내용들로 되어져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 조금 특이하게 살펴볼 내용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이 사건인데, 예수님께서는 눈으로 보이는 성전을 폐하시고 다 헐어 버리시고 어떤 성전을 다시 세우시나? 여기 요한복음 2장 19절부터 한번 스크린에 보시면서 여러분들이 이 단어 하나하나를 좀 기억하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이렇게 이야기하시죠.

여기에서 우리들이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는데, 성전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성전이라는 단어.

성전이라고 일반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이 성전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 있는 뜰까지, 성전 주변에 있는 마을까지 모든 것들을 뭉뚱그려 가지고 성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교회 간다고 얘기할 때는 파킹장까지 이미 다 들어오는 거죠. 그게 이제 교회라는 개념인 것처럼, 성전이라고 이야기하면 꼭 제사를 지내는 거기뿐만 아니라 뜰까지, 그 마을까지 전체를 가리켜서 성전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여기에서 지금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 성전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로 쓰여진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오직 하나님께 예배하는, 우리가 여러분들 이해하기 쉽게 그러는 것이지만, 본당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나오는 성전은 본당을 가리키는 겁니다. 다른 것 다 빼고 그렇게 이해하시면 조금 쉽겠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라고 얘기하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그 장소를 헐어 버리라고 얘기하는 거죠.

그런데 이 단어가 또 어디에서 쓰이게 되냐면, 요한계시록 21장에 보시면 이 성전을 예수 그리스도로 표현해요. 그리고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이 성전을 “성령이 거하시는 너희들의 육체가 성전이다.”라고 이렇게 표현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헐으신 것은 무엇이고 다시 세우신 것은 무엇이냐? 성령께서 거하시게끔 우리를 완전히 정화시킨 것, 깨끗하게 하신 것. 그래야만 우리 안에 성령이 들어오시지 않겠습니까?

그 깨끗하고 거룩하게 정화시키는 작업을 어떤 방법으로 취하셨느냐?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신 거죠.

그러니까 과거 구약 시대 때 의무적으로, 아니면 하나의 요식적인 행위로 드려지던 예배하는 그 공간, 이것을 허물어 버리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새롭게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으로 삼으신 그 장면을 지금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 성전을 46년 동안 지었는데 네가 사흘 만에, 3일 만에 이 성전을 다시 짓겠느냐?”라고 조롱한 이유도 거기에 있는 거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몸 된 것을 이야기하신 것이라고 요한이 이렇게 밝혔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이 성전을 지금 정화시키고 성전을 청결케 하는 그 작업은, 지금까지 예배를 드린다고 하고 성전 안에서 율법에 의해서 예배를 드린 유대인들이 예배당에 와서 예배드릴 때와 저들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의 모습이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삶에서 유대인으로서의 모습이 안 나타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교회에 와서는 교인인데 밖에 나가서는 교인이 아닌 겁니다. 저 사람은 분명히 장로님이고, 저 사람은 분명히 권사님인데 그냥 자기 마음대로 사는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주님께서 보실 때 이것은 안 되겠다고 완전히 성전을 무너뜨리는 거죠. 그 제도 자체를 무너뜨리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새로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삼으신 것이죠. 그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 성전은 구약의 율법을 폐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세워집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새로운 사람으로서 다시 재창조하겠다는 그 주님의 메시지, 주님의 선언인 것이죠.

이 성전이 어떤 건지 한번 봅시다. 우리들이 성전이 어떤 것인지 시편 132편에 성전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성전을 우리들이 성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거룩한 집이라는 표현이지 않습니까? 왜 성전이 거룩한 집입니까? 거기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거룩한 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성전이 거룩하다는 얘기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에 성전은 거룩한 곳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해 계시고, 하나님이 그곳에서 찬송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예배를 받으시는 곳이기 때문에 성전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 하나님께서 기도 들으시는 곳,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리는 그곳, 예배가 임하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는 그곳, 그곳을 유대인들은 완전히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는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 안에서는 성도입니다. 예배를 잘 드립니다. 교회 안에서는 장로님의 거룩한 모습이 나타나고, 교회 안에서는 권사님의 거룩한 모습이 다 나타납니다. 어디를 봐도 얼굴이 안 쓰여 있어도 저분은 장로님, 저분은 권사님, 이런 것들이 교회 안에서 영광스럽게 잘 나타나요.

그러나 교회 나가는 그 순간 이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이 당시에 그랬다는 것이죠. 조금 안심이 되죠. 우리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유대인들이 그렇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모습을 보는 주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나야 되는 그러한 사람들인데 그것이 나타나지 않으니까 주님의 마음이 답답하신 거죠.

그리고 나서 13절을 보시면 뭐라고 얘기하냐면,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이라는 얘기는 구약에 이미 이것을 예언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보세요. 기도하는 집이라고 주님께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들은 그들의 혈기를 위해서 장사하는 것이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돈을 바꿔 주는 그러한 곳이 되었고, 하나님은 안중에 없고 그냥 자신의 편리함만 내세웠던 그러한 곳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내 집은 그런 곳이 아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이야기하죠. 이 말씀이 이사야서에 있는 말씀을 지금 주님께서 인용하신 겁니다.

이사야서를 한번 보세요. 이사야에 뭐라고 얘기했냐면,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이니라.”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 환전, 돈 바꾸는 행위, 짐승들을 파는 행위가 어디에서 있었다고 했죠? 이방인의 뜰에서 이것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사야를 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흘러 들어가서 이방인들이 만약에 나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게 된다면 그들에게 한켠 공간을 마련해 줘라. 그래서 이방인들도 와서 거기서 기도하게 해 줘라. 이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메시지죠.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곳에서 환전을 하고 짐승들을 팜으로 말미암아 그곳을 강도의 소굴로, 그러니까 이방인들의 권리를 빼앗는 곳으로 차지합니다. 그래서 강도의 소굴이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방인들이 실질적으로는 기도할 곳이 없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와서 환전하고 짐승들을 사고팔고 이렇게 하니까. 그런데 지금 이사야가 하는 말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이게 예수님 당시에 성전 타락의 모습을 여기에서 가졌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 예수가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뭐라고 해야 되나요? 안타까워하신다고 표현해야 되나요? 통곡하신다고 표현하면 좀 더 강하게 표현하는 거겠죠. 통곡하신다. 안타까워하신다.

여러분들, 우리가 한 주 동안 거룩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거룩하게 살았다고 하는 분들은 좀 이상한 사람이고요. 아무튼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또 성전에 와서 “주님, 정말 하나님의 자녀답게, 백성답게 살아야 됨에도 불구하고 내가 또 한 주 동안 마음껏 살았습니다.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이런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는 곳, 그곳이 교회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완벽하고 거룩하게 교회에 올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되는구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내가 안 되는구나. 나는 목사로서, 나는 장로로서, 나는 권사로서 그런 직분을 받고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목사답지 못한, 권사답지 못한, 장로답지 못한 그 모습이 나타났구나.”

그래서 교회에 와서 무엇을 하느냐면, 우리는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 내가 이 타이틀을 가지고 살아봤지만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됩니다.”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교회라는 것이죠.

여러분들, 우리가 지금은 건강을 위해서 술 드시고 담배 태우시는 분들이 많지 않지만, 옛날에는 아무 데서나, 식당에서나 담배 태우고 그러셨지 않습니까? “내가 담배 끊고 교회 갈게. 내가 술 끊고 교회 갈게. 내가 거룩하게 한 다음에 교회 갈게.” 그것은 절대 아니라는 겁니다.

오셔서 끊으라는 얘기죠. 와서 술도 끊고 와서 담배도 끊으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사람의 의지로는 되는 게 아니라는 얘기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지금 이러한 잘못을 저지름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다시 바로잡게 되는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들을 타이르고 이들을 야단치고 이들의 행위를 바로잡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 제사 제도 자체를 주님께서 없애 버리겠다고 얘기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율법으로 완전히 폐지시키는 그런 일을 하겠다는 것이 이 안에 가장 중요하게 담겨져 있는 내용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한다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기도한다고 이야기할 때, “기도가 무엇이냐?”라고 물어보면, 하나님 앞에 항복한 사람들,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하나님께 무릎 꿇은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힘이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안 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여러분들이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 기도하는 그곳에 와서, “하나님이 아니라도 됩니다. 우리가 돈 팔아도 되고, 물건 팔아도 되고, 하나님 잠깐만 교회 밖으로 나가 계십시오. 우리가 다 하겠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금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것을 완전히 폐하시는 그러한 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인 행위, 그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거예요. 여러분들, 일주일에 금식해 본 사람 있어요? 일주일에 세 번, 아니면 하루에 기도 시간을 딱 정해 놓고 세 번씩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 있어요?

여러분들 가운데 구제하는 사람들이 있고, 불쌍한 사람들이 있으면 막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가끔씩, 어제 밀알선교회에 간 것처럼 가끔씩 그렇게 가면서, “내가 종교인으로서 이런 것들을 하면서 만족함을 누리는구나.” 하는 그러한 수준이죠.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매일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하는 시간을 만들어 놨어요. 여러분들, 저번에도 한번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무슬림들 또 유대인들과 비슷하죠. 이제 라마단 기간이 거의 끝나 가는데, 그들은 기도 시간이 되면 하는 일 다 멈추고 가족 전체가 구석으로 가서 메카를 향해서 자리를 펴고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졸업식장에 제가 갔는데, 졸업식을 하다 말고 다 사라져요. 뭐 하나 하고 화장실 갈 때 이렇게 보니까 가족들 다 모여서 기도하더라고요. 이런 것들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무엇으로 가득 찼느냐? 온갖 악한 것으로 가득 찼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은 잎만 무성하구나. 그런데 열매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구나.” 이게 이제 다음번에 우리가 나눌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 그 모습을 볼 텐데, 지금 유대인들의 모습이 이렇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의지하고 자신만을 바라보는 그런 유대인들을 책망하는 것이 지금 이 안에 담겨져 있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이 다음에 나오는 그 구절로 소경과 저는 사람들을 온전하게 고쳐 주는 사건이 여기서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힘과 자신의 노력으로 고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은 주님을 만났을 때 눈을 뜰 뿐이지, 의학적으로, 의술적으로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앉은 사람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라볼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러니까 불치병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서 그렇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성전에서 그들이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한 겁니다.

“저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서 저렇게 눈도 멀고 절름발이도 있고 그래. 우리는 괜찮아. 아무렇지도 아니하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야.” 그런데 이 사람들은 뒤로 미루고, 주님께서 그들을 고치심으로 말미암아 무엇이 지금 너희들에게 필요한 것이냐, 이 성전이 지금 무엇이 행해져야 되는 것이냐라는 것을 주님께서 그 본보기로 이야기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전이 된 겁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과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과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예전에 우리가 누렸던 이 모든 것들을 다 폐지시키시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성전으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로 우리를 만드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만약에 형식적인 것을 내세우게 되면 이 본질적인 것이 사라지게 됩니다. 형식적인 것을 내세우게 된다면 사라져요. 외모 같은 것은 우리가 훌륭하게 만들 수 있죠.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지는 것,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되고, 어떻게 하면 이 전을 가득 채울까, 여기에 온갖 관심이 쏠리는 겁니다. 주님은 온데간데없이.

그래서 우리가 형식에 너무 치우치게 되면 본질이 사라지는 겁니다. 본질 되신 그리스도 예수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신앙이라는 것은 자신의 어떤 자아가 성취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를 비우는 곳, 자신의 자아를 부인하는 곳,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드는 곳, 이것이 교회가 되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교회의 모습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 내 안에 성령께서 거하셔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믿음을 가지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악한 것들이 사라지고, 기도할 때 귀신이 물러가고, 기도할 때 우리의 속에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그렇게 가르치시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역사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고, 세상 것으로 여러분들 만족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성도들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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