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9장 18~31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 seattleomc
- May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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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May 15
어제는 오랜만에 우리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 밥도 먹고 성경 공부도 했습니다. 많은 학생들, 많은 청년들은 아니었지만 얼마나 즐겁고 기쁜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사의 행복이 어디 있느냐?” 많은 분들이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각자 다른 답을 하시겠지만, 저에게 있어서 행복은 성도들이 저에게 기도를 부탁할 때입니다.
믿기 힘드실 수도 있겠지만, 저의 진심입니다. 믿든지 말든지 상관없지만,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조그마한 아이가 있었는데, 그때는 초등학교 3학년 정도였어요. 그 아이는 배가 아플 때마다 저에게 달려와 자기 배를 쑥 들어 올리며 거기에 손을 얹고 기도해달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예쁩니까? 그런데 이게 멈추질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 아이가 중학생이 되어도 똑같이 자기 배를 뒤집으며 기도를 부탁했어요. 여자아이가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나중에 그 아이가 사모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름이 ‘정’이었는데, 그때를 기억하냐고 물어보니 “아이, 목사님 생각지도 마세요. 그냥 그땐 그랬어요.” 하며 웃더군요.
정말 순진한 마음으로 기도를 부탁했던 그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의 본문은 마태복음 9장입니다. 세 번의 병 고침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늘 말씀드리듯,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관과 믿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병자가 나았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병이 낫는구나 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신앙이 단순히 기적을 바라는 샤머니즘과 비슷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병을 고치신 그분이 누구냐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 믿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성찰해봐야 합니다.
믿음은 신앙의 본질이며 가장 기초가 되는 요소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유교 문화권, 그리고 샤머니즘적 배경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할 때도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생각처럼, 열심히 기도하고 울부짖고 금식하면 하나님이 손발 들고 들어주시겠지 하는 은연중의 믿음을 갖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도응답이 없을 때, “내 정성이 부족했나? 내 믿음이 약한가?”라는 자책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믿음’의 개념입니다. 즉, 어떤 대상에 대한 확신이나 신뢰를 말하죠. 그러나 기독교에서의 믿음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아느냐, 얼마나 알아가느냐에 따라 믿음의 크기와 깊이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아는 사람은 믿음이 깊은 사람이고, 하나님을 조금 아는 사람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여기에 우리의 믿음이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병 고침을 원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째는 죽은 소녀의 아버지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 절하며 말합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마태복음 9:18)
이 장면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금식에 대한 논쟁 중에 끼어든 사건입니다. ‘한 관리’라고 소개되지만, 마가복음 5장에서는 그가 회당장 야이로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회당장은 지역 회당을 총괄하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고, 보통 예수님과는 적대적인 관계였던 인물입니다. 율법을 지켜 자기 의를 드러내던 바리새인들과 함께,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메시지와는 정면으로 대립하던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자기 딸이 시름시름 앓다 죽자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딸의 병 앞에서, 고위직도 체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의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유교 문화권에서 살고, 또 샤머니즘이라는 문화권 속에서 살아온 민족이기 때문에, 우리가 의를 행하든지 의를 행하지 않든지 간에 그 속에 신앙적인 샤머니즘적 요소가 은근히 담겨 있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떼를 쓰고, 울부짖고, 금식까지 하면서 부르짖으면,
하나님도 결국 손발 다 들고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라는 마음이 은연중에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없으면
“내 정성이 부족했나?”, “내 믿음이 약한가?” 하는 의심과 불안 속에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믿음을 이야기할 때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이라 하면 어떤 사물에 대한 확신이나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전혀 다릅니다.
기독교에서의 믿음은 단순한 확신이나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 이해한 만큼 우리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일반적인 믿음과 기독교적 믿음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같은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단순하게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 믿음의 크기와 깊이도 달라진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많이 아는 분은 믿음이 깊은 분이고,
하나님을 조금 아는 분은 믿음이 아직 연약한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이해하느냐—거기서 우리의 믿음이 비롯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병고침을 바라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죽었던 소녀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나오는 장면이고,
두 번째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주님 앞에 나아가는 장면,
세 번째는 두 소경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이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믿음을 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단순히 “이 병을 고치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보셨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본문을 찬찬히 살펴보며 그 믿음의 본질을 이해해야 합니다.
8절을 먼저 읽어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여기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우리가 지난주에 묵상했던 것처럼,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금식에 관한 논쟁으로 함께 토론하고 있던 그때였습니다.
그때 누가 나왔냐면, 한 관리가 나왔다고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한 관리가 나왔다’고 했을 때는, 아, 그냥 평범한 관리인가 보다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여기서 말하는 ‘한 관리’는 통치자, 지배자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니까 일반 직급이 낮은 관리가 아니라, 아주 높은 고위직에 있는 그러한 관리로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마가는 5장에서 이 인물이 누구인지 밝히고 있는데, 이 사람을 가리켜 회당장 야이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회당장’이라는 말은, 지역마다 있는 유대인들의 회당을 총괄하고 감독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회당장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유대 사회에서는 장급으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지금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그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딸이 연약하고 병들고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방법을 써봤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을 불렀을 것이고, 여러 가지 방법도 동원해 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 딸이 죽었다는 것이죠.
게다가 우리가 알다시피, 회당장은 바리새인들과 더불어 예수님과 굉장히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반대편에 있던 사람이었죠.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을 열심히 지킴으로써 자신들의 의로움을 드러내려 했고,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선포하셨기 때문에,
이들이 지금껏 지켜온 도덕적 열심, 윤리적 열심, 신앙의 열심 같은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사이가 틀어져 척을 지게 되었던 것이죠.
이런 회당장 야이로가, 자신의 딸의 아픔 앞에 여러 가지 방법을 써봤지만 소용이 없자,
최후의 수단으로 예수님을 찾아가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공개적으로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가 저분을 만나고 찾아가면,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다”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가게 된 것이죠.
누가복음에서는 이 딸아이를 12살 된 외동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회당장에게 있어서 12살 먹은 외동딸이 시름시름 앓다가 지금 죽은 겁니다.
성경 18절에서는 "방금 죽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원어적으로 보면 지금 막 숨진, 바로 그 순간입니다.
완전히 죽었으면 보통은 포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막 지금 죽은 겁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들 가운데 한 분은 응급실 의사(ER 닥터)인데, 그 집사님 말씀을 들어보면,
죽은 사람도 응급실에 데리고 오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이미 숨이 멎었지만, 부모나 가족 입장에서는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닥 희망을 붙잡고 병원을 찾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이 회당장 야이로도, 12살 먹은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 죽음이 믿기지 않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이죠.
야이로는 자신의 문제를 주님께로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종교적인 지도자였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고위급 지도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이 상황에서 체면이 동원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위치가 걸림돌이 되겠습니까?
12살 먹은 딸이 막 죽었는데, 체면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을 겁니다.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딸의 문제를 안고 주님께로 나아간 것이죠.
주님께서 이제 야이로와 함께 그 집으로 따라가는 도중에, 누굴 만나게 되냐면 혈루증 앓는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20절 말씀을 보시면, 이때 혈루증 여인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12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자락을 만지니…"
12해 동안 혈루증을 앓았다고 설명합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는 이 여인에 대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악화되었다"
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8장에서는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한 여자가…"
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들을 종합해 보면, 이 여인은 12년 동안 자신의 재산을 모두 병을 고치기 위해 쏟아부은 것입니다.
어떻게든 낫기 위해, 가진 재산을 모두 탕진했고, 만나는 의사마다 다 찾아가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병이 더 악화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여자가,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한 채로…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세요.
12년 동안 자기 전 재산을 다 쓰고, 누가 좋다 하면 찾아가고,
누가 침을 잘 놓는다더라, 누가 마사지를 잘한다더라 하면 다 찾아다녔겠지요.
오늘날의 우리와 비슷한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이 꼭 정통 의사만 찾아다녔겠습니까?
민간요법, 미신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겠지요.
병을 낫기 위해 온갖 애쓰고 수고하며 노력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병이 왜 중요하냐면, 병 자체보다 그 사회적, 종교적 의미 때문입니다.
레위기 15장에서는 이 혈루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부정한 자라."
시간 관계상 뒷부분은 생략하지만, 여기에 보면 그 사람이 누웠던 자리도 부정,
앉았던 자리도 부정, 접촉하는 모든 것이 부정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들과의 접촉이 금지되는 겁니다.
사람을 만날 수조차 없는, 철저한 사회적 단절 상태였던 것이죠.
그 사람이 옷만 만져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딸로 태어났지만,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물려 있었지만, 가족들로부터도 버림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에게 혈루증이라는 병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만지는 모든 것마다 부정하게 되고, 그 부정이 가족에게까지 전염되기 때문에
이 여인은 가족들과도 접촉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세요.
예배할 때나, 사회적 관계 속에서도 최소한 가족만큼은
아무리 병이 심해도 받아주는 그런 집단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여인은 가족조차 가까이할 수 없는 병에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도 못 드리죠.
사람들과 교제도 하지 못하죠.
가족도 만나지 못하죠.
그야말로 아주 비참하고, 저주스러운 병에 걸린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이 그 마을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 앞에 나아간 겁니다.
그러면서 이 여인에게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던 그 고민을 예수님께 가지고 가서,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낫겠다는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여러분, 12년 동안 용하다는 의사들 다 찾아가 봤을 겁니다.
침도 맞아 봤겠지요. 민간요법, 약도 다 먹어 봤겠지요.
그런데 어떻게 ‘옷만 만져도 낫겠다’는 믿음을 갖게 됐을까요?
정말 신기하고, 신비롭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이 여인은 정말 믿음이 좋은가 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까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 믿음의 주체가 누구냐를 놓치면 안 됩니다.
이 여인은 바로 그 주체, 예수님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이 무슨 효력이 있겠습니까?
예수님 자신, 그분에게 능력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내가 낫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마가와 누가는 이 여인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에서 능력이 나간 줄 아시고,
“누가 나를 만졌느냐?”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마태는 이 장면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며 밀치고 스치고 있었던 그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향해 “누가 나를 만졌느냐?”고 말씀하신 것이죠.
이 여인은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병든 사람이 남의 옷자락만 만져도 부정하게 되는데,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다는 것은 예수님을 부정하게 만드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마가는 이런 행동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고,
그때 예수님께서 “누가 나를 만졌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분명 그 여인의 행위를 드러내려는 의도처럼 보였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2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 여자는 그 즉시 구원을 받았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자신의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갔듯이,
이 여인도 자신의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간 것입니다.
사람들은 책망받고 야단맞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딸아”라고 부르십니다.
이 호칭은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회로부터 격리된 존재였던 이 여인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다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안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예배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가족들로부터도 버림받은 인생이었지만,
예수님은 “안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여인은 자신의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나아갔을 때,
자신이 기대했던 육신의 질병만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 사회적 회복, 가족 관계의 회복 등
삶의 전반적인 회복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사회로부터의 격리에서 해방되었고,
예배에 참여하지 못했던 자리에서 해방되었으며,
가족으로부터 단절되었던 자리에서 다시 가족의 일원으로 회복된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던 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가 모든 것을 회복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것이죠.
그리고 이 일이 있는 사이,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를 따라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아이는 이미 죽은 상태였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여기 보면 ‘피리를 불고, 떠들고 있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유대인의 장례 문화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옷을 찢는 행위, 슬픔의 표현이었습니다.
둘째는 통곡입니다.
통곡이 부족하면 돈을 주고 전문 통곡하는 사람들을 불러 함께 곡을 하게 했습니다.
우리나라 옛날에도 ‘곡 잘하는 사람’이 있었지요.
“아이고 아이고” 하며 얼마나 구슬프게 우는지요.
유대인들도 그런 슬픔의 분위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로는, 피리를 불며 얼마나 구슬픈 소리를 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피리 소리는 결코 신나는 소리가 아니었겠지요.
그리고 사람들이 떠들었다는 그 표현은,
이 딸아이가, 12살 먹은 이 아이가 완전히 죽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아까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나왔을 때는, 딸아이가 막 숨을 거두려는 순간이었지만,
지금 예수님이 도착해 보니, 아이는 완전히 죽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도 더 이상 소망이나 희망이 없는 상태였던 것이죠.
그때 예수님께서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그러자 그들이 비웃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죽음의 그림자가 물러갑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귀신이 떠나가고,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그 현장에 도착하셨을 때,
그 죽음은 물러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
무덤 속에 사흘이나 갇혀 썩어 냄새가 나던 그곳에 도착하셨을 때도,
죽음의 그림자는 물러갔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 놀라운 소식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다는 소망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죽음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죽음이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슬프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우리 안에 자리 잡는다면,
그 평강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평안이며,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은,
예수님이 누리셨던 기쁨이며,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은,
예수님께 속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죽음의 그림자가 물러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소녀야,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25절에 나옵니다.
25절을 보시면,
“무리를 내보내신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니 일어나는지라.”
마가와 누가는 이 장면을 “달리다굼(탈리다 쿰)”,
즉 아람어로 “소녀야, 일어나라”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우리 성도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부활의 생명 속에 살아가게 되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소녀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이 장면,
나사로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난 장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 장면은,
우리가 믿음으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다음 27절에서 31절까지는,
두 명의 소경이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와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 때,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왜 이 말씀이 중요하냐면,
이 맹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곧,
“당신은 메시아입니다.”
라는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종교 지도자들 모두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이다”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고백은 공식적인 메시아 선포였습니다.
맹인은 눈이 감긴 상태입니다.
얼마나 걷기가 힘들겠습니까?
둘이 함께 가다가 한 명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도 함께 넘어질 수 있는 그런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외침을 듣고도 바로 고쳐주시지 않으시고,
한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이 소경들은 처음엔 바로 고쳐주실 줄 알았겠지만,
기대와 달리, 예수님을 따라가며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쫓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쩌면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서 바로 고쳐주실 수도 있었겠지만,
이 소경들의 신앙 고백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조차 예수님을 아직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지 않던 그때에,
이 두 맹인은 그렇게 부르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당시 제사장도, 바리새인도, 서기관도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맹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서론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란,
단순히 상황이 좋아지기를 바라는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고백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두 소경의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아로 믿는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상황을 바꾸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맹인이 눈을 뜨는 일은 성경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소경들이 예수님께 나와
**“당신은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12살 된 딸이 죽지 않았다면 예수님께 나왔겠습니까?
아니었을 겁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그 어려운 상황이 아니었다면,
예수님께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두 맹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상적으로 살았다면, 예수님 앞에 나올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말한 것처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 절박함이 이들을 예수님 앞으로 이끈 것입니다.
세리 마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혈루증 여인만큼은 아니지만,
사회에서 외면받고 ‘매국노’ 소리를 듣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데 체면이 필요할까요?
뭐가 중요합니까?
명예가 있으면 더 낫고, 없으면 덜한 걸까요?
아직도 예수님 앞에 내려놓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건 생명을 얻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이십니다.
그분이 메시아이십니다.
우리가 가진 어떤 체면이나 지위나 조건도,
그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저 생명 앞으로 나아가,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역전의 기회로 사용하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그 역전을 이루시는 분,
그분이 바로 메시아이시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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