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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9:32~38 죄와 사망 아래 있는 자와 구원 얻은 자의 차이





아, 이제는 길거리를 다니면 제법 꽃향기가 나는 계절이 되었습니다.올해는 부활절이 참 늦게 있어서, 예년 같으면 벌써 지나갔을 시기인데, 이번에는 한 달이나 늦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봄기운은 어김없이 우리 곁에 찾아왔습니다.


아직 봄내음을 맡아보지 못하신 분들은 저희 집에 한번 오십시오.히아신스 향기가 아주 그윽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벙어리가 된 사람을 고쳐 주시는 내용입니다.여러분, 마태복음 9장을 통해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실 때 주저함이 없으시고 전혀 어려워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오히려 아주 자연스럽고 쉽게 고치시는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오랫동안 불치병으로 자리에 누워 고생하던 이들도 예수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손쉽게 치료되곤 했습니다.이런 장면을 통해, 우리가 섬기고 믿는 하나님은 참으로 불가능이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때로는 말씀만으로 병을 고치셨고, 때로는 손을 얹어 치료하시기도 하셨습니다.어떤 때에는, 주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낫겠다는 믿음을 가진 여인의 병까지도 고쳐 주셨습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들은 평생을 병고에 시달리며 고생했지만, 예수님 앞에 나아가 그 문제를 내어 놓았을 때, 주님은 그들을 손쉽게 고쳐 주셨습니다.이런 장면들을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 32절 말씀을 보시면, “그들이 나아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 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라고 되어 있습니다.보통 벙어리들은 듣지도 못한다고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친구가 장난을 쳤는데, 저희 동네에 말 못 하는 분이 국어 시간에 학교에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수업이 끝난 뒤 그분이 돌아가는 길에, 그 친구가 “아저씨!” 하고 불러 본 겁니다.그러자 그분이 돌아보며 “왜 부르느냐?”는 듯이 놀란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그 일을 통해, 꼭 말 못 하는 분들이 다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성경에서도, 이 사람은 단순한 장애가 아니라 귀신에 들려 말을 못 하게 된 상태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아?” 하며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고,

“왜 부르느냐?”는 듯한 황당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말 못 하는 분들은 귀도 듣지 못한다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32절에 나오는 이 사람은 다른 질병 때문이 아니라, 귀신에 들렸기 때문에 말을 하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소경은 그래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문을 듣고, 자기 힘으로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벙어리는 말도 못 하고, 소문조차 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벙어리는 어떻게 예수님 앞에 나아올 수 있었을까요?

본문에 따르면 “사람들이 그를 예수께 데려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주변 사람들의 믿음으로 인해, 이 벙어리 또한 예수님 앞에 나아오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인해 그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 33절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 하던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더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너무나 놀라며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직접 치유된 당사자들은 어땠을까요?


지난주에 살펴본 두 명의 소경도 예수님께 나아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받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지요.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마라”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두 소경은 나음을 입자마자 곧장 동네를 돌아다니며, 자신들이 어떻게 치료받았는지 널리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온 동네에 퍼졌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은 평생 동안 말도 못 하고, 보지도 못했던 병자였습니다.

그런 이들이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병을 고침받았는데, 예수님께서 아무리 당부하셨다 한들 그 감격을 가슴속에만 묻어둘 수 있었을까요?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우화처럼,

그 기쁨을 어디 가서든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가 진심으로 감사하고 감격스럽다면,

그 은혜를 외치지 않고는,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고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이죠.


본문에 나오는 두 소경이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되는 반응도 있습니다.

34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어떻게 반응했는지 나와 있습니다.


“그가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이렇게 말하며,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왜곡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분명히 눈으로 기적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적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아, 그런데 그 기적이 믿기지가 않는 겁니다.

분명히 일어난 기적인데도 바리새인들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이미 완전히 다른 곳으로 돌아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들의 마음이 ‘꼬부러져 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리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 싶으셔도,

우리의 마음이 닫혀 있다면 그 은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은혜가 임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은혜를 흡족하게 받고,

어떤 사람은 전혀 그 은혜가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셨을 때, 동일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내려졌습니다.

그것을 믿고 감사한 자들은 기쁨으로 만나를 거두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 불평과 원망에 빠졌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여기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꼬부러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기적을 베푸시고 능력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해서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로,

하나님의 일을 왜곡하고, 모욕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드러내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바리새인들이 이토록 마음이 꼬부러져서

기적 같은 일을 눈앞에서 보고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을까요?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종교생활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노력과 수고로 하나님을 섬겼고, 그에 따른 보상을 기대했지만

정작 그 보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반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종교적인 열심이나 수고를 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 겁니다.


이 모습이 바리새인들에겐 너무 한심하고,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얼마나 종교적으로 헌신했습니까?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11조도 드리고, 구제도 하고, 열심히 기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행위들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께서 하신 일조차도 인정하지 않고,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그런 일을 행했다고 오해했던 것이죠.


🙏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은혜의 방식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문제, 곧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우리의 육신의 평안함을 먼저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 뜨이고, 마음이 열리고, 입이 열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적인 문제엔 큰 관심이 없어 보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는 늘 먼저 다가오시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

전혀 생색을 내시거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 적이 없습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3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고,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치시고,

두 명의 소경을 고치시고,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말 못 하던 벙어리를 고치십니다.


그 모든 일들을 행하시고, 3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방황하는 이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즉각적으로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

우리의 삶을 이끌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고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은혜가 맹목적인 구원,

즉 죽고 나서 천국에 간다는 정도로만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살펴보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처럼 고생하고 지친 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렇기에 목자를 얻은 양들,

즉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은 그 상태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 “불쌍히 여기시니” – 깊은 의미

여기서 중요한 표현 하나가 등장합니다.

바로 **“불쌍히 여기시니”**라는 구절입니다.


옛 성경에는 이것을 **“민망히 여기시니”**라고도 번역했는데,

이 말에는 굉장히 깊고 강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상대방의 고통과 슬픔을 바라볼 때

내 속이 뒤집히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도 “속이 뒤집어진다”는 표현을 들어보셨지요?

창자가 뒤틀리는 것 같은 고통을 함께 느끼며,

그 사람의 아픔에 동참하는 마음—그것이 바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정리하자면,

불쌍히 여기심이란 상대의 고통을 보며

내 내장이 비틀리는 듯한 고통 속에서 그를 바라보는 것,

그 애끓는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 탕자의 비유에서 본 '치근히 여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기억하시죠?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요구하고 집을 떠났다가

모든 것을 잃고 돌아오게 되는데,

멀리서 그 모습을 본 아버지는 신을 신을 틈도 없이 달려가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탕자는 돼지 우리 속에서 지염 열매를 먹으며 지냈기 때문에

그의 몸은 냄새와 오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그를 껴안아 주셨습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치근히 여겼다.”


이 ‘치근히 여기심’은 바로 **‘불쌍히 여기심’**과 같은 말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겉모습이나 과거를 보지 않고,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심정으로

그 아들을 사랑의 품으로 끌어안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마음입니다.


🐑 목자 없는 양이란

여러분, 목자 없는 양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요한복음을 통해 ‘목자와 양’에 대해 함께 묵상했던 것처럼,

양은 스스로 물을 찾을 수도,

맹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푸른 초장이나 쉴만한 물가로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목자의 보호 아래 있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그것이 양입니다.


그런데 양에게 목자가 없다면 어떨까요?


스스로 먹을 것도 찾지 못하고


마실 물도 알지 못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모른 채


배고프고 목마른 상태로


위험에 그대로 노출된 채 살아가게 됩니다.


바로 이런 절박한 상태,

그것이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신 상태였던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황하는 그러한 상태, 물이 먹고 싶지만 마시지 못하는 상태,

무언가 먹고 싶지만 먹지 못하는 상태. 이런 상태를 바로 목자가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이런 우리를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셨고, 찾아오셨고,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단지 우리가 죽은 후 천국에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만을 구원이라 말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아주 작고 약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기 위해서는,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셔서 나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위험이 닥칠 때 보호하시며,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시고, 목마를 때 마실 물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구원의 개념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은 훨씬 더 풍성해지고,

삶에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상태이며,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맹목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이란, 성경에서 말하듯 존재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즉, 번데기에서 나비로 변화된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은 이런 변화된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를 잘 대비하여 표현합니다.

로마서 1장을 함께 봅시다.


(예배를 온라인으로 드리는 분들도 옆에 성경을 펴 놓고 함께 보시길 권장합니다.

주일에 교회에 오실 때는 가급적 성경책을 직접 들고 오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로마서 1장 28절부터 31절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현실, 즉 목자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근수근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의 삶은 혼란과 악행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우리는 이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보호 아래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상태에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목자 없는 상태로 다시 돌아가지 않도록 지켜주십니다.


또한 '불쌍히 여기셨다'는 표현은 정당한 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이

그 대접을 받지 못할 때 느끼는 애절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셨고,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뻐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이 관계가 깨어지고, 우리는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통해 이 모습에서 해방되었고, 주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단순히 죽어서 천국 가는 것 이상의 의미로 구원을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 나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는 믿음으로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삶에는 하나님의 향기가 나타납니다.


로마서 6장 6절과 11절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즉,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고, 이제는 하나님께 속한 자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11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니라."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상태입니다.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또 에베소서 4장 18~19절을 보면,


"그들의 총명함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삶은 무지함과 감각 없음으로 가득합니다.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 진리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죠.


오늘날 시대를 봐도 그러한 현실이 잘 나타납니다.도덕과 윤리의 기준이 흔들리고,

하나님 없는 사람들은 망하는 길로 가는 줄도 모르고 그 길을 걸어갑니다.


이런 세대를 바라보는 우리는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은 단지 죄 사함만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을 회복시키는 은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제 죄를 보면 싫어할 줄 알고,

불의를 보면 견디지 못하며,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보면 손을 내밀 줄 아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목자 없는 양에서, 목자 있는 양으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마태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를 믿은 사람에게는 예수의 향기가 납니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말투, 행동, 표정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또 에베소서 4장 18~19절을 보면,


"그들의 총명함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삶은 무지함과 감각 없음으로 가득합니다.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 진리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죠.


오늘날 시대를 봐도 그러한 현실이 잘 나타납니다.도덕과 윤리의 기준이 흔들리고,

하나님 없는 사람들은 망하는 길로 가는 줄도 모르고 그 길을 걸어갑니다.


이런 세대를 바라보는 우리는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은 단지 죄 사함만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을 회복시키는 은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제 죄를 보면 싫어할 줄 알고,

불의를 보면 견디지 못하며,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보면 손을 내밀 줄 아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목자 없는 양에서, 목자 있는 양으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마태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를 믿은 사람에게는 예수의 향기가 납니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말투, 행동, 표정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누군가가 제게 말했습니다.

"제가 한번 맞혀볼게요. 목사님이시죠?"

그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그냥 대강 차려 입고 있었는데도 말이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요, 감출 수 없습니다.

형상 속에서, 말투 속에서, 행동 속에서 예수 향기가 나는 법입니다.


하지만 마태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적 열심은 대단했지만,

속은 온갖 불의로 가득 차 있었고,

양심이 죽어 있었으며 감각이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들아."

겉은 아름답지만, 속은 썩은 것으로 가득한 상태.


그런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연약한 우리에게 오셔서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목자 없이 방황하지 마라. 내가 너희의 목자가 되어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리라."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선언입니다.


우리는 이 구원이 값없이 주어진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값비싼 희생이 따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겉모양만 신앙인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까지 변화되어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며,

우리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할 예수의 향기입니다.


함께 찬송합시다. 찬송가 34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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