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있는 도로들은 다 녹은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눈길에 미끄러울까 봐 걱정하시고, 또 댁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참 많이 계십니다. 아, 참, 좋은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음을 느낍니다. 누나도 예배를 잊지 않고 집에서 영상으로라도 예배한다는 것이, 아, 이게 축복인 것 같습니다. 예배할 수 있으니까, 어디서든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예배 장소와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복된 예배—를 통해 복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 무엇이라고 할까요? 아마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순간일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인 거죠. 그래서 우리 주변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일이 우리에게 가장 슬픈 일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을까 고민하겠지만, 현재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에서는 그 죽음의 문제만큼은 아직까지도 해결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결국 모두에게 죽음의 날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며칠 전, 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 한 분이 집에서 샤워를 하다가 나무가 떨어지는 바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죽음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보게 됩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에 대해 설명하시고 가르쳐 주셨음을 기록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는 장면을 함께 나눴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 가셔서, 열병으로 누워 있던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는 장면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저녁이 되자 수많은 귀신 들린 자들이 예수님께 나오자, 예수님께서는 일일이 그들에게 손을 얹어 안수하시고, 귀신들이 쫓겨나는 놀라운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사건은 마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마가복음 1장과 누가복음 4장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기록된 베드로의 장모 고치는 사건은 시각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누가복음에 나타난 시각을 통해 예수님께서 그분을 어떻게 바라보셨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치실 때, 귀신들이 떠나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신앙 고백으로 “당신은 주님,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하는 것과 약간 다릅니다. 귀신들에게는 “당신은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의미로 들린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실 때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의 장모에 얹고 치셨다”라는 표현이 있으나,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장모에게 붙어 있던 귀신을 향해 꾸짖으시며 “귀신이 즉시 떠나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실 때는 단순히 병자 자체를 고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그 병 뒤에 감춰진 영적인 문제를 꾸짖으시는 모습도 보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향해 꾸짖으실 때, 거친 파도가 일어나고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 때, 사단은 그 두려움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단은 어떤 사건을 통해 사람의 믿음을 흔들고 방해하려 합니다. 사람뿐 아니라 만물도 인격적 존재로서 예수님을 대하고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영적”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 이유는, 사단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 멀어지도록 온갖 상황과 문제, 어려움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질병을 만날 때 약을 먹어 치유하는 경우도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꾸짖으실 때는 병 자체보다 그 뒤에 숨어 있는 사단의 문제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마태는 나병환자, 백부장의 하인, 베드로의 장모, 그리고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신 사건들을 통해 그 목적, 즉 선지자 이사를 통하여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라는 말씀을 이루시려 하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 죽으심은 단순히 병을 물리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죽는 사람은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되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갈 소망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천국의 소망과 평안을 주시기 위해, 고난 당하시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와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고, 베드로의 장모와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신 사건을 통해, 단순한 치유의 기적 너머에 숨은 영적인 문제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자 합니다. 즉,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단지 죽은 후 천국에 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육신, 그리고 우리의 온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포함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살아갈 때, 내일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포함하여 우리를 지키신다는 믿음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하나님 나라, 천국에 가지만, 그 구원은 단지 내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증거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순환과 고난에 대해 설명합니다. 로마서에서도 아담의 죄의 유전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멀어졌음을 밝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의 신분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그 변화는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과 삶 전반을 아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우리의 질병이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녀로서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단지 우리의 건강, 부,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만 이해한다면 복음을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참된 평안과 기쁨, 감사의 삶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 고백하자, 예수님은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시며, 그 신앙 고백이 단순한 인격적 자랑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위에 세워진 신앙임을 강조하십니다. 교회나 우리의 신앙 행위가 단순한 자랑거리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이나 기도, 금식 등 모든 종교적 행위가 오직 하나님께 받기 위한 보상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위에 우리의 신앙이 굳건히 세워져 있어야만 어떠한 어려움도 견딜 수 있고, 우리의 영적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곧 우리의 죽으심이며, 그 죽음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자녀가 되어 언제 어디서든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디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힘들고 고생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도망자의 생활 가운데서도,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아버지께 달려갔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아무리 건강이나 물질, 자식 문제 등에서 어려움을 겪더라도, 언제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세, 다윗, 베드로, 스데반, 바울 등 성경의 인물들이 그러했듯,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 부름받았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 모든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눈이 오더라도, 어려움 속에서도 승리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라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온 마음이 따뜻하게 녹여지는 복된 한 주간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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