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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2:46~50 누가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인가?

“누가 진짜 하나님의 가족입니까? 교회에 다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입니까?”



날씨가 너무나도 좋습니다. 한창 시애틀의 여름인데요. 제가 잠깐 뉴스를 봤는데, 한국은 40도… 아, 40도면 몇 도인가요? 113도 정도 되겠네요.참, 시애틀에 사는 거 여러분들 감사하면서 삽니까? 아멘.세계가 폭염으로 인해서 힘들어하고, “죽겠다 죽겠다” 하는데 우리는 날씨가 좋아서 죽지 않습니까? 시애틀에 사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여러 군데를 다녀 보셔도 시애틀만한 데가 없다고 고백하실 거라 생각이 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뉴욕에서 수련회가 있어서 갔는데, 뉴욕에 있는 가이드가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차를 타고 조금 가니까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서 “잠깐 거칠 겁니다” 했는데, 웬걸… 지하철까지 침수가 돼서 난리가 났습니다. 여러분들도 그 뉴스를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자그마한 것 하나에도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큰 것을 주신다 할지라도 감사함이 없습니다. 이 감사라는 것은 습관인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주면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하는 것, 이걸 가르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우리에게 참 좋은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식사를 하실 때마다 식기도를 하시죠?저는 항상 식기도를 할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이 음식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십시오.”식사할 때마다 우리가 끼니를 먹듯이, 하나님의 은혜도 매일같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죠. 그래서 식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여전하다는 것을, 지금도 지속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시오.”이렇게 식기도와 더불어 드리는 기도 또한 은혜로운 신앙의 습관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마태복음 12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께서 “누가 나의 형제요, 누가 나의 자매냐?”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하십니다.우리가 12장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영적인 상태는 정말 무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가르침과 행하신 일들을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 되심을 이미 나타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고 깨달으라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안식일 문제를 걸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무지했다는 것이죠.

오늘날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에 방문하신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맞이할까요?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실까요?

예전에 제가 신학 초기에 「서울의 예수」라는 책이 굉장히 유행했었는데, 그 책에서 예수님이 거지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런데 누구 하나 예수님의 그 모습을 환영하지 않고, 긍휼히 여기지 않고, 돕지도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실제로 그런 테스트를 했다고 합니다. 담임목사님이 교회 앞에서 거지 분장을 하고 쭈그리고 앉아 구걸을 했는데, 사람들이 모두 피해 가고 돌아서 가고, 쳐다보지도 않고 예배당으로 올라가더라는 것입니다. 누구 하나 그 거지를 보고 긍휼히 여기며 돕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목사님이 거지 복장을 벗고 단상에 올라오자 성도들이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아니, 저 사람이 그 거지였어? 우리가 밖에서 보던 그 사람이 아니었어?” 하고 놀랐다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가 늘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는데도 우리가 영적으로 무지하다면, 즉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며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 달라고만 구하는 초보적인 신앙생활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음에도 그가 그리스도이신 줄 알지 못했고, 많은 이적을 행하시고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자 시기심에 가득 차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민족들은 “우리가 택한 민족이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스라엘은 나라가 작지만, 세상 어떤 민족보다도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부르시고 먼저 찾아가신 그런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 선민 사상이 가득 차서 “하나님은 우리만 사랑하신다”라는 틀 속에 갇혀 버린 겁니다. 우리 외에는 다른 사람은 구원받을 자가 없다는 이 틀 속에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길 줄 몰랐습니다. 자신들은 아무 열매도 없고 행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늘 선민의식 속에서 이것을 자랑 삼아 살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정말 하나님의 나라 가족은 누구인가를 설명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46절을 먼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46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이 구절만 봐서는 그 분위기를 우리가 바로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 대해 심한 오해를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심하게 비판하고 있었는데,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형제들과 자매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만 보면 잘 깨닫지 못하는데, 마가복음을 보면 조금 더 디테일하게 설명이 나옵니다. 마가복음 3장 20절과 21절에 보시면 동일한 상황인데, 마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임으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이라.”

자, 분위기가 완전히 보이시죠? “예수가 미쳤다”라는 말을 들은 친족들과 그의 형제자매들이 예수님을 붙들러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들을 보고서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이런 일을 행한다”, “그가 미쳤다”라는 이런 소문이 그대로 친족들에게, 예수님의 육신의 가족들에게 전해진 겁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모든 행동이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식사할 겨를도 없다”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식사를 거르면서까지 열심히 사람들을 가르치고 선한 일을 행하셨으니 정상인과 다르다고 생각할 만도 했겠죠. 여기에 더해, 예수님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을 하신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이런 일을 한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러니 친족들뿐만 아니라 형제자매들까지 예수님을 데려오기 위해 찾아왔던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미쳤다”라는 표현은 “재정신이 아니다”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정신없이 행동한다, 정상적인 사람 같지 않다… 이렇게 본 것이죠.

그러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자매들과 모친까지도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재정신이 아닌 사람의 행동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또 마가복음에서는 이렇게도 이야기합니다.“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마태, 마가, 누가 이 세 복음서의 사도들은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어떤 사실을 말하고 있냐 하면, 여기에 마리아라는 이름을 분명하게 넣어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친의 이름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친이 앞장서서 그의 자매들과 형제들을 불러, “야, 우리가 오빠 데리러 가자. 우리가 형 데리러 가자” 하고 왔다는 겁니다. 마리아가 주축이 돼서 이 세 복음서에 마리아라는 이름이 다 등장하는 것이죠.

우리가 잘 알다시피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 친히 경험했던 사람 아닙니까? 그리고 요한복음 2장에서도 마리아가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했던 것을 성경을 통해 얼마든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마리아는 지금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느낄 법도 한데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동생들을 부추겨서 지금 형을, 오빠를 데리러 이렇게 찾아왔다는 것이죠.

결국 마리아가 예수님을 이해한 방식은 세상적인 이해였습니다. 영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세상적으로 먼저 예수님을 이해했던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마태복음 16장에 등장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마태복음 16장에는 사도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있죠.16절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 이후에 어떤 내용이 나오냐면, 21절과 2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이때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있은 이후를 말합니다)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여러분, 베드로의 행동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결론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베드로의 행동을 쉽게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당시 베드로의 마음을 생각해 보면, 내 스승을 위한 열심이 있었던 겁니다.

“주님, 선생님,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제가 목숨을 내걸고라도 그런 일이 없도록 지키겠습니다.”베드로가 이렇게 나서자, 모든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마리아도 동일했습니다. 베드로가 스승이 붙잡히지 않도록 자기 목숨을 내걸고 스승을 보호하려는 마음처럼, 마리아도 내 자녀, 내 핏줄 예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붙들려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빨리 붙들어다가 집으로 데려가려는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 뒤에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2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무엇인가?하나님의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다면, 우리는 그 일을 응원하고 그 일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는 것이 우선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일로 엮어서 그것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죠. 베드로를 책망하신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리 따르는 스승이라 할지라도, 네가 목숨을 바쳐 보호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우선이다. 그것을 사람의 일로 생각하고 막으려는 것은 오히려 사탄의 일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겁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딜레마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정말 사랑하고 기뻐하는 선교사님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은혜를 받고 와서 성령이 충만해 집안에서 은혜를 베풀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열심히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우리 아이가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께 붙들리는 종이 되게 해 주십시오.”신앙인으로 키우기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저 선교사로 나가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 네가 불림받았으니 가서 죽어라” 하고 흔쾌히 보낼까요? 아니면,“다시 한 번 생각해 봐라. 네가 성령의 음성을 잘못 들었을 수도 있다” 하며 말리겠습니까?

육신적인 생각이라면 충분히 말릴 수 있는 일이죠. 지금 마리아의 상황이 바로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들러 왔다는 현실, 그리고 베드로가 “주님은 죽을 수 없습니다. 제가 목숨을 걸어서라도 주님을 보호하겠습니다”라는 그 마음은, 꼭 내 자녀가 은혜받고 성령 충만해서 “저 선교사로 나가겠습니다”라고 하는 딜레마와 비슷한 상황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친족들을 모아 예수님을 데리러 오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사람의 생각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일이지만,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성령 충만해서 선교사로 나아가겠다는 것은 나름대로 고민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인데, 우리가 그것을 막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도 여러분, 한 번쯤은 만류해 보십시오. 잘못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아이가 확신할 때까지는, 신앙의 선배로서 또 부모로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결과를 보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47절에 보면, 한 사람이 예수께 여쭈되“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있습니다” 하니…

이것을 마가는 “무리가 왔다”라고 기록합니다. 마태는 어떤 한 사람이 와서 말했다고 했지만, 마가는 무리가 왔다고 기록했죠. 두 사도의 시각이 다른 걸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무리가 왔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께 직접 나아가지 못했고, 그 무리 가운데 형제자매들이 어떤 한 사람을 불러“네가 가서 전해라”이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마태가 볼 때는 한 사람이 나와서 전한 것으로 보였고, 마가는 무리들이 몰려온 것으로 본 것이죠. 그리고 한 사람이 예수님께 조용히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오셨고 형제들이 오셨고 친족들이 오셨으니, 예수님께서 당연히 나아가서 영접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48절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

오히려 반문을 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친족들이나 어머니를 무시하거나 배척하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도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보라, 네 어머니다”라고 하시면서 마리아를 부탁하셨던 장면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육신의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누가 내 어머니며, 누가 내 친족이며, 내 형제들이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 가족은 세상에서의 가족과 다르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가족과 인간 세상에서의 가족은 다르다는 것. 이 말씀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하신 것이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선민 사상에 찌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나는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이 감사하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녀다. 우리는 유대인이다”라는 자부심이 가득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모습을 보시고 책망하셨습니다. 지난번 성경 말씀에서 보았듯이, 나무를 보면 그 열매로 알 수 있는데,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면서도 아브라함이 맺었던 열매가 하나도 없지 않느냐, 이 점을 질책하신 겁니다.

그래서 “누가 나의 어머니요, 누가 내 형제냐?”라고 묻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떠들고, 유대인이라고 떠들지만,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순종했던 그 순종의 열매가 너희에게 어디 있느냐? 이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깜짝 놀랐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자신들은 유대인으로 살아온 자부심이 있었고,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프라이드가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혈연 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녀로서 아브라함이 맺었던 열매를 맺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이죠.

그래서 “누가 내 어머니며, 누가 내 형제냐?”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4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리키며 말씀하십니다. “이 제자들이 나의 어머니이며, 나의 형제들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제자들은 하늘나라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 관계보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유대인으로 사는 것보다, 아브라함이 맺었던 하나님께 순종한 순종의 열매, 그리고 선지자들이 맺었던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열매를 맺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이 순종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교회 식구들을 가리켜 “식구다, 가족이다”라는 표현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 말은, 우리는 신앙으로, 믿음의 고백으로 하나가 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권사님이 하는 신앙 고백이 다르고, 또 다른 권사님이 하는 신앙 고백이 다른 것이 아니라,“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님이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동일한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의 공동체요, 신앙의 형제요, 자매요, 가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 친구들은 만나기가 조금 어렵고 멀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살다 보면, 신앙의 친구들은 친척들보다 더 가깝게 느껴질 때가 많은데, 세상 친구들—예를 들어 학교 동창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어쩐지 어색하고 부담스러울 때가 있죠.

저는 12명에서 14명 정도 되는 친구들과 40년 동안 계속 연락을 하고 지냅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그 친구 집에 가서 식사하고, 속 깊은 이야기까지 다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교제입니다. 왜 이렇게 오랫동안 관계가 이어지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신앙의 친구들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시절에 함께 산에 올라가 손을 잡고 기도하고, 점심을 먹으며 하나님 이야기를 나누고, 사역에 대해 대화했던 친구들이기에, 지금도 어디에 있든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고 걱정해 주는 관계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친구들은 친척들보다도 더 가까이하고 싶고 더 자주 만나고 싶지만, 세상적인 친구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면,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비슷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집안이, 여러분의 가정이 모두 예수를 믿는 영적인 가정이라면 얼마나 즐겁고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현실에서는 명절이나 모임이 되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함께 모여 친척이면서도 나뉘어 다투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뿐만 아니라 나라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상도 사람들만 모이는 정치 세력이 있고, 전라도 사람들만 모이는 정치 세력이 있죠. 교회조차도 이북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 전라도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 경상도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잘못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지역적, 혈연적 구분을 따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족들은 그런 것들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가족은 누구냐?”라고 말씀하시며 5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니라.”

여기서 주님은 아주 중요한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인정받는 사람은 누구입니까?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살고자 하고,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그 사람들이야말로 주님의 진정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유대인들은 선민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혈연으로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자부심은 있었지만, 아브라함이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그들 삶에는 전혀 없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라고 말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50절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들이 바로 나의 가족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우리 신앙인들이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할지라도, 내가 유대인으로 태어나 자랐다 할지라도, 믿는 가정이거나 유대인이거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신앙생활이며, 진정한 믿음의 가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열매를 요구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입으로만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말하지 말라. 입으로만 교인이고 성도라고 말하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깊이 스며들어, 그 말씀을 행하며 믿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는지, 교회 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열매입니다.

12장 33절에서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즉, 유대인들이 맺고 있는 열매는 하나님 앞에서 악행과 거짓과 폐역뿐이었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좋은 열매가 없었던 것이죠.

나무가 좋다고 한다면 그 나무에 맞는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그 열매를 맺지 않고 있지 않느냐—주님께서 이렇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기서 열매를 요구하십니다.이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열매가 우리가 수고와 노력으로만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신앙의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고,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전에 살펴본 것처럼, 신앙의 행위로 은혜를 얻거나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 중요한 예가 바로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나오는 포도나무의 비유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나는 포도나무다.”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다면,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은 단순히 신앙적인 행위나 겉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붙어 있는 것은 열매를 자연스럽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아멘.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님께 붙어 있느냐, 붙어 있지 않느냐입니다. 내가 예수님께 붙어 있다면, 예수님의 열매는 자연적으로 맺힌다는 것이죠.

어느 순간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고, 어느 순간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닮아가고 싶고,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내 속이 불편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다는 증거이고, 우리 안에서 열매가 맺히는 과정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유대인들은 그 부르심을 잘못 이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불러 주시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로 태어났다면 그것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네가 아브라함의 자녀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순종이 너희에게도 있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주에도 여러분께 설명드린 것처럼, 귀신이 나간 집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죠. 유대인들은 귀신이 나간 빈집처럼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는데, 문제는 그 빈자리에 누구를 모셨느냐였습니다.

아무리 깨끗하게 치운 집일지라도, 그 안에 그리스도 예수를 모시지 않으면, 오히려 귀신이 일곱을 더 데리고 와서 그 집이 더 악하게 된다고 주님은 책망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세대를 가리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표현하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랑은 무엇입니까?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 자매요, 한 형제요, 한 식구가 되었다면, 우리의 자랑은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우리의 자랑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데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 믿음이 있을 때,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 됩니다.

내가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교회 생활을 오래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랑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라도 하나님 말씀을 실천하고 행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 될 수 있고, “내가 아버지의 뜻대로 살고 있는가? 내가 예수 안에 거하며, 예수님과 한 가족으로 살고 있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꼭 기억하시고, 우리가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이 땅의 원리가 아닌 신앙의 원리, 하나님의 원리가 우리 안에서 작동하며 우리를 이끌어가는 축복된 한 주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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