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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2:15~21 온유와 긍휼하신으로 찾아오신 그리스도

우리가 혹시 꺾여지는 갈대와 같다 할지라도,꺼져가는 심지와 같다 할지라도,등불처럼 위태롭다 할지라도,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다시 회복시키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날씨가 참 좋죠?네, 좋은 겁니까? 더운 겁니까? 잘 모르겠습니다.저번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시각에 따라서 다 틀려지는 것 같습니다.좋아하시는 분들은 너무나도 좋은 날이겠고, 더위를 싫어하시는 분들은 "덥다"고 얘기할 것 같습니다.

거의 한 20년 전쯤으로 기억이 되는데요,우리가 지난주에 안식일에 어떻게 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은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그들의 수고로움, 안식일 안 지킴, 이런 것들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20년 전쯤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아마 더 오래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우리 교회에 예전에 커다란 밴이 하나 있었습니다.그런데 그날이 주일 오후였는데, 우리 성도들이 그 밴에 올라타고서 가까운 머스 아일랜드로 피크닉을 다녀왔던 적이 있습니다.

갈 때는 좋았는데, 올 때 그만… 아이고, 차가 서 버리고 말았습니다.기름이 없어진 거죠. 기름이 없는 것도 모르고 그냥 신나게 달렸습니다. 아, 그만 하이웨이에서 차가 서 버리고 말았습니다.기름이 없어진 거죠. 기름이 없는 것도 모르고 그냥 신나게 달렸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도, 그때 그 자리에 타고 계셨던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운전수 잘못이니까요.

마침 그 차 안에 기름통이 있어서, 그 기름통을 들고 백토리아까지 뛰기 시작했습니다.빅토리아까지 막 뛰는데, 갑자기 어떤 차가 제 앞에 이렇게 서더라고요.그 앞차가 제가 기름통을 들고 뛰는 걸 보더니,"기름을 사러 가는가 보다" 하고는 제 앞에 서서 자기가 태워 주겠다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머스 아일랜드에서 밸뷰 쪽 방향인데,"아, 고맙습니다" 하고 그 차를 탔죠.그리고 나서 그 청년이 저를 빅토리아 기름집에 내려주었습니다.

기름을 다 받을 때까지 그 청년이 계속 기다리길래,“다시 태워 주시려나 보다” 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그 차를 다시 얻어탔습니다.머스 아일랜드로 돌아가는 길, 중간쯤 다리쯤에 이르러서 기름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기름을 넣는 와중에도 이 사람이 안 가는 거예요.‘어, 돈을 달라고 하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는데,기름을 다 넣고 나니까 “시동을 걸어 보세요”라고 하는 겁니다.시동이 걸리는 걸 보고서야 그때서야 자리를 떠나더라고요.

그러니까 시동이 안 걸렸으면 자기가 한 번 더 도와줄 용의가 있었다는 의미였겠죠.아마 저 혼자만 기억할 듯도 합니다. 워낙 오래된 일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어디를 가든 그 얘기를 합니다.미국에 와서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경험한,“아, 이렇게 긍휼한 마음을 베푸는 곳이 이곳이구나”라는특별한 경험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이걸 살짝만 여러분들 마음에 한번 바꿔 보십시오.내가 예배를 드리러 가고 있는데, 차를 타고 가다가 어떤 차가 앞에 섭니다.그리고 어떤 사람이 개스통을 들고 막 뛰기 시작해요.

여러분들, 예배 시간 늦을까 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그냥 생~ 지나치시겠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면,아마 차를 태워서 기름집에 데려다주고, 기름을 넣어 주고, 차까지 와서 시동이 걸리게 해주는 것,예배는 늦을지언정 그런 긍휼한 마음을 베푸는 것을 하나님께서 더 원하시지 않을까—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그 예배가 마음을 다하지 않고, 정성을 다하지 않고, 뜻을 다하지 않고 드리는 예배라면,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이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예배다—이렇게 정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아주 좋은 경험이었어요.오늘 처음 나누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20년이 훌쩍 지났지만 그 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 일이 안식일에 일어났고,또 그 일이 내가 예배를 드리러 가는 도중에 일어났다면,나는 그 사람을 도왔을까? 말았을까?이건 참 고민하게 되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 12장 15절부터 21절까지인데요,14절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 하는 것을 보고서주님께서 그 자리를 피하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예수님께서 병자들의 병을 다 고쳐주셨다는 것만이 초점이 아니라는 겁니다.이 본문에서 더 중요한 초점은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하셨다는 점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하셨을까?이걸 우리가 함께 추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치유 사역이었고,귀신을 쫓아내셨고, 병든 자들을 고치셨고—그런 일들이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많이 펼쳐졌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예수님의 사역은 단순한 치유가 아니었습니다.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를 자유케 하신 건,단지 그들이 불쌍해서 하신 것만이 아니라메시아로서의 표적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이러한 기적들은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리던 그 메시아다!”라는사인을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치유 사역과 귀신을 내쫓는 일,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일들을 통해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15절과 16절을 보시면,이제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드러내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15절: 예수께서 아시고 그곳을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니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16절: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시니...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면서도, 자기를 드러내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에 대한 깊은 의미는, 이어지는 17절 이하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설명됩니다.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단순한 인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는 메시아 사역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17절 이하 21절까지 나오는 이사야 42장의 예언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성취였고,예수님이 메시아 되심의 증거였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릴게요.조금 말씀이 엇갈릴 수 있으니까요.

자, 15절과 16절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라고 하시죠?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17절 이하에 나오는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그리고 그 예언 자체가 바로 이분이 메시아이시다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말씀이죠.

그러니까 "나를 나타내지 말라"는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메시아는 이런 모습으로 오신다는 예언을 이루시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오늘날뿐만 아니라,아마 당시에는 더더욱 그랬을 겁니다.메시아에 대한 기대, 굉장히 컸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다들 있죠.

  • 나를 부요하게 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

  • 나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는 기대,

  • 내게 복을 주시고,

  • 내 자녀들이 잘되고,

  • 사업장이 잘되고…

예수를 믿어서 이 땅에서 누릴 복들을 기대하면서 믿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예수님이 나의 구원자, 내 영혼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깊은 깨달음에 이르기 전까지는,예수님을 삶의 축복을 주시는 분으로 먼저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죠.

그런 기대가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로,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훨씬 더 강한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단지 영적인 구원자가 아니라,정치적 해방자,로마의 압제를 끝낼 왕,다윗의 왕권을 회복할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예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하신 것은그 잘못된 기대를 향해 메시아의 진짜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주시기 위한 행위였고,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조용히 성취해 가시는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메시아,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다르게,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상은 전혀 달랐다는 것이죠.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것은,메시아가 오신다면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구원할 자라는 생각이었습니다.그래서 메시아가 오시면 이스라엘 자체를 회복시키고,원수의 손에서 건져 주시는 분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메시아가 오면,저 이방 민족들을 다 진멸하시고,유대인들이 솔로몬 시대에 누렸던 그 영광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강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어떤 모습으로 와야 하냐 하면,정복자의 모습,권능과 능력을 가진 자,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오시는 위엄 있는 존재,이러한 메시아상을 그들은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 아주 가난한 자의 모습,

  • 연약한 아기의 모습,

  • 고운 모양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도 없는,

  •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위엄도 없고, 사람들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는,

그러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상과실제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던 것이죠.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하지 않습니까?그처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며 혼란과 실망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들리며,예수님께서 나타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고,말씀을 전하시며 사람들의 굶주림을 해결하시고,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시고,가난한 자를 일으키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신들의 기대와는 다르지만,“저 능력을 행하는 분이 정말 메시아가 아닐까?”하는 생각으로 예수님께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기대를 품고 예수님께 다가가 보니,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십니다.그들이 금지한 일을 안식일에 하십니다.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마치 누워서 떡 먹듯 행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품었던 기대감과그분이 실제로 행하시는 모습 사이에서혼란과 갈등이 생겼다는 것이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도,아까 말씀드린 것처럼,처음에 예수를 믿을 때는우리가 잘되고, 우리가 복받고,이 땅에서 누구보다도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떳떳하고 즐겁게 살기 위한 그 목적으로예수를 믿은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예수님의 모습을점점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가 실망을 하거나 낙담하는 경우가참 많다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물론 그 권능으로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실 수도 있고,앉은 자를 일으킬 수도 있는전능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철저하게 이 땅에 오셔서하시고자 하셨던 일,그 목적은 무엇이냐면—

우리의 외면적인 문제보다도먼저 우리 영적인 문제를 회복시키는 일에더 주력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문제가 해결될 때,우리의 외적인 문제도 자연스럽게 풀려나갈 수 있는 것이지,외적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우리 마음에 참된 평안이 오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살다 보면 또다시 비슷한 일들이 생기게 되고,심지어 그보다 더 힘든 일들이우리 삶에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예수님께서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영적인 문제,우리의 마음 중심을 치료해 주셔야만,우리의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외적인 환경이나인생의 풍랑, 인생의 풍파들을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는 힘,평안을 지킬 수 있는 마음이우리 속에 자리 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외적인 것에 먼저 치우치게 되면우리의 내적인 평안함과 풍요로움은 결코 누릴 수 없다는 겁니다.

유대인들도 이와 동일한 모습을지금 여기에서 갖게 된 것이죠.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어떤 권능과 능력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긍휼을 베풀고, 온유하고 겸손하며,섬기는 모습으로메시아의 오심을 나타내셨다는 것이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17절 말씀을 한번 보시면,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를 이루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 이유,그것은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그 직책을 수행하시기 위해서,예수님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셨다는 것을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 내용이 바로 18절부터 21절까지,이사야서 42장을 인용한 말씀에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12장 18절–21절 말씀: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내가 사랑하는 자로다.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아무도 길에서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하심을이루려 하심이니라.”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예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고 하신 것은바로 이 18절부터 21절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메시아로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이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 성취되었음을,예수님은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18절부터 21절까지 나오는 이 내용들을 가만히 살펴보면,기적적인 일이나 승리 같은 것들은 전혀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오히려 온유함이 있고, 긍휼함이 있으며, 섬김이 있는그 메시아의 모습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보면,**“내가 택한 나의 종이다”**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이 ‘종’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는‘하인’, ‘노예’, ‘부리는 사람’ 등으로 많이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종’(ebed)이라는 표현은그런 단순한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내가 신뢰하는 자”, “내가 총애하는 자”**라는더 깊은 의미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즉, 이라는 것은하나님께서 부리시는, 하나님께 속한 노예처럼 종속된 존재라는 의미만이 아니라,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신뢰하시는 존재라는 뜻도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성경의 여러 곳곳에서도예수님을 하나님의 종으로 표현하고 있고,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나의 택한 자, 나의 종”이라고 말씀하시는 장면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신뢰를 받은 사람,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사람,그를 가리켜 ‘종’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메시아는 종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유대인들의 기대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바랐던 메시아는 종의 모습이 아니라,주인의 모습이었고,다스리는 자, 권능으로 무장된 자,능력으로 임하는 정복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기를,“내가 택한 나의 종”이라는 표현을 통해메시아가 올 때는 종의 모습으로 올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빌립보서 2장 6절로 7절을 보시면, 예수님의 ‘종됨’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설명하고 있는데: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라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모습을 볼 때,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시지만,그 하나님과의 동등됨을 취하려 하지 않으시고,우리의 모양, 곧 종의 모습,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까 우리가 기대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우리의 기대나, 당시 유대인들의 기대—바라고 있었던 메시아, 바라고 있었던 예수님—은이 세상에서 우리가 잘 살고, 축복을 더 많이 받고,자녀들이 잘 되고, 병 없이 건강하게 살아가길 원하시는 분이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기대했던 예수님의 모습은권능과 능력으로 우리 삶을 바꾸어 주시는 모습이었지만,예수님께서는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까?

  • 우리를 섬기기 위한 종의 모습으로,

  •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자비의 모습으로,

  • 우리를 위해 은혜를 나누어 주기 위한 섬김의 모습으로,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0장 28절에 보시면,예수님께서 당신이 오신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도리어 섬기려 하고,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예수님은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 도리어 섬기기 위해 오셨으며,

  • 목숨을 취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 많은 백성들에게 그 목숨을 내어주기 위해 오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실질적으로 예수님의 삶을 돌아보면,예수님의 삶 전체가 섬김이었고,예수님의 삶 전체가 긍휼함을 베푸는 일이었다는 것을우리는 성경을 통해, 또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섬김의 모습으로 오셨던 것처럼,지난 산상수훈 5장에서 예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에 대해 말씀하신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너무나도 잘 드러내는 내용인데요,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냐면,"우리가 누구냐?"라는 것이죠.예수 믿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냐는 것인데—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자,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그리고 그 빛을 통해 사람들이 너희를 보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빛과 소금—이것은 무기가 아닙니다.빛으로 싸우고 소금으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빛과 소금은 오히려 희생이고, 섬김의 대표적인 대명사입니다.예수님은 우리가 그런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자체가 “나는 섬기기 위해서 왔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목숨을 너희들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왔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그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그 직책을 주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이러한 직책을 주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빛을 비춤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에게 어둠이 있음을 알리게 하고,또 많은 사람들이 어둠 가운데 있다면 빨리 빛 가운데로 오게 하는 것,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이,너희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우리의 행동을 보고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빛 가운데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우리를 부르셨다고,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뚜렷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 믿는 자가 무엇이냐?예수를 믿어서 이 땅에 축복을 받고, 생명의 연장을 받고,이 땅의 물질이나 자녀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우리의 섬김의 모습, 겸손한 모습, 긍휼한 모습—이런 모습으로 살아내는 것을 보고,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빛 가운데로 나오게 하는 역할,빛을 비추는 역할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원수를 사랑하라”**는 그 말씀도, 바로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하신 겁니다.**“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지만,그것보다도 더 뛰어넘어서,원수까지도, 너희들을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라고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가 아니라,겸손한 모습으로, 긍휼한 마음으로, 섬김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아임을이사야 선지자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때,그 나라는 하나님을 담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의 공동체입니다.그리고 그 나라의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이냐면,사람들 앞에서 착한 행실로 빛을 비추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성경에 사사기라는 책이 있습니다.특히 사사기 2장 10절 말씀—(제가 2장인지 3장인지 헷갈리지만)—그 말씀은구약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핵심 말씀 중 하나입니다.

그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그 세대 사람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직접 경험했던 세대는 모두 그들의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새롭게 등장하게 된 시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신 이유는,그 땅에 우상이 가득한 그곳에서,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삶으로 보여주고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하나님을 직접 경험했던 세대는 모두 죽고 사라졌고,그 후에 남은 세대는 그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누구도 그들에게 바르게 가르쳐 주지 않았고,그 결과로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게 된 겁니다.

결국 사사기가 주는 교훈은 분명합니다.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이 땅에서 살아갈 때,겸손과 순종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하나님은 원하셨지만,그들은 오히려 세상의 힘을 추구하며,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섬기는 쪽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우리는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우리의 헌신과 섬김은,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과 위로하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는,그 힘이 세상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하며,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세상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들을 들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기 시작하십니다.그리고 나서 그들이 "하나님, 제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하나님은 사사들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보내셔서 이방 민족들을 물리치게 하시고,그들은 한동안 평안함을 누리게 되죠.

그런데 문제는,그 평안함을 누리는 동안 또 다시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그들은 그 평안을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이 아니라"우리의 수고와 노력의 결과다"라고 생각하며 교만에 빠집니다.그리고 다시 하나님을 배반하고,물질을 힘 삼고, 세상을 의지하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또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들을 들어서 그들을 치십니다.이러한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 바로 사사기의 중심 내용입니다.이 사이클이 구약 전반에도 반복되며 나타납니다.

사사기서를 보면,하나님께서 사사로 부르신 사람들은 우리가 기대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를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 드보라: 여선지자입니다. 당시 여성 지도자가 얼마나 드물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 기드온: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는 매우 속이 좁고,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습니다.

  • 삼손: 어떻습니까? 그는 여자만 밝히다가 비참하게 죽어간 사람입니다.

    • 제사장 집안, 레위 지파 출신으로 배경이 가장 좋은 사람이었지만가장 비참하게 삶을 마친 사사입니다.

  • 입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조폭 출신입니다.

    • 어머니는 기생이었고, 형제들에게 버림받아 광야에서 용병 대장처럼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들어 사사로 사용하셨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모든 심판과 구원의 역사 가운데 중심에 계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사람들이 능력 있어서 된 것도 아니고,훌륭해서 쓰임받은 것도 아닙니다.하나님이 택하시고, 하나님이 역사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를 들어서 쓰실 때도,우리는 그저 도구일 뿐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배경이 좋지도 않고,물질로 쌓아놓을 정도로 풍성한 사람들도 아님에도 불구하고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실 때는,그 뒤에 누가 계시냐면 바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 모든 것을 잊어버렸습니다.하나님께서 지금 이 일의 주인이시고,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움직이고 계시며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그들은 잊었습니다.

결국 사사기서가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너희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이 메시지가 사사기 전편에 흐르고 있고,구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메시지도 동일합니다.

“너희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오직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것이 바로 성경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라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일하심은,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권능과 능력의 방식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 눈먼 자가 눈을 뜨고,

  • 앉은 자가 확확 일어나고,

  • 기적이 파워풀하게 일어나는 놀라운 장면들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게,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시면서,겸손하게 섬기는 모습으로하나님의 일하심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42장에서,메시아의 오심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메시아가 올 때는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로 올 것이다.”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속에서 올라오자하늘이 열리면서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다.”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님을 기뻐하신다는 음성을 들려주신 것이죠.

마찬가지로,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오신 메시아,다시 말씀드리면 아무리 섬김의 모습이고,아무리 초라한 모습이고,아무리 낮은 모습이라 할지라도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아마 변화산 이야기일 텐데요.변화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지 않습니까?

그때도 하늘이 열리면서,하나님께서 또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기뻐하는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이 땅에 오신 메시아는그 모습이 아무리 초라하다 할지라도,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사실을성경은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18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메시아의 모습이 여기에 또 등장하죠: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자,그리고 성령을 받은 자로 메시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는 이 표현은,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죄인에게는 벌, 의인에게는 상”이런 형벌 중심의 심판 개념보다는,복음적 의미가 훨씬 더 강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그가 복음을 이방에 알리리라.”

이렇게 바꿔서 이해하면,우리에게 훨씬 더 명확하게 다가온다는 것이죠.

사실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심판’이라는 단어는,‘정의’라는 개념으로도 함께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심판’, ‘복음’, ‘정의’이 세 개의 단어가 믹서기처럼 함께 섞여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에는 ‘심판’으로 번역되어 있지만,그 의미는

“복음을,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이방인에게도 알리시리라.”라는 복합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훨씬 성경 전체 흐름에 부합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을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요즘 우리 교회가 굉장히 큰 위기 가운데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가 정치와 만나게 되면,교회는 항상 큰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면 괜찮은데,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교회마저도 함께 흔들리게 되는 것,이게 바로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의 실체입니다.

속담에 뭐라고 하죠?

“검으로 흥한 자는 검으로 망한다.”

예수님은 그 누구에게도 변명하지 않으셨고,그 누구와도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어떤 모습입니까?“투쟁”이라는 말도 쓰고,“폭력”이라는 단어도 사용하면서,정말 예수님답지 않은 모습,교회답지 않은 모습을우리 스스로 너무 많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은그들의 정치적 투쟁이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면,그것은 무엇입니까?

“억울함을 당하고, 원망을 받는다 할지라도메시아는 다투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싸우지 않으셨습니다.예수님의 방법은 사랑이었고, 품어주심이었습니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심으로그들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와 다투거나 설득하거나,이해시키려고 애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품으셨고,그들이 스스로 무릎 꿇게 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이사야서 53장 말씀을 함께 기억해 보시죠:

“그가 번역을 당하여 괴로움을 받을 때에도그는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서 "들레지 아니하였다"는 말의 뜻은크게 외치지 않았다, 소리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예수님께서 억울함 속에서도 침묵하셨고,고통 속에서도 잠잠히 순종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로서, 또 그리스도인으로서잃어버린 것은 바로 이 침묵의 능력,이 사랑의 품음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야단스럽게 떠든다.이 표현의 의미가 좀 더 깊어지면, 마치 개가 막 짖는 것처럼,그렇게 야단스럽게 막 떠드는 걸 의미합니다.이게 바로 “들낸다”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떠들고, 소리 지르신 적이 있습니까?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도,심지어 십자가에서 조롱을 당하실 때조차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네 자신도 구원해 보고,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이런 조롱 앞에서도,예수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이게 바로 "들레지 아니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했던 건 사탄이었습니다.

“내게 절하라. 그러면 이 천하 만국을 다 네게 주겠다.”

그런 시험 앞에서도,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죠.

“사탄아, 물러가라.”

그 외에는 소리 내지 않으셨습니다.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아무 길에서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자기를 주장하거나,누구를 비난하거나,누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신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만약 누군가 여러분을 조롱하거나 야단친다면,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나도 한때 잘 나갔었어!”“당장 그 말 취소해!”

우리는 쉽게 감정적으로 반응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으로 섬기는 예수님,우리가 따르기를 원하는 그분은그런 상황 속에서도 잠잠하셨습니다.

그렇다면,우리는 어떤 삶으로,어떻게 그분을 따라야 할 것인가?

예수님의 그 침묵 속에서우리는 진정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절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여기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여러분, 우리 모두 얼마나 연약합니까?겉으로는 강해 보여도,사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손가락 하나만 까딱, 이렇게 ‘탁’ 건드리시면 꺾일 수밖에 없는 존재,그게 바로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강한 것 같지만,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조금만 어떤 이낌을 보이시면우리는 대번에 쓰러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그 연약한 상태를 아신 겁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오시면,그 메시아는 어떤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냐면,상한 갈대 같은 우리들을 꺾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우리가 연약하고,아무리 초라한 모습이라 할지라도,또 아무리 상처투성이의 삶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예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기를 원하시지,결코 꺾으시는 분이 아니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러분, 상한 갈대…멀리서 보면 그냥 보통 갈대처럼 보입니다.하지만 가까이 가 보면, 그 상처와 꺾인 흔적들이 보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누구도 예외가 없고,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연약한 가운데 있고,요즘 같은 시대엔 누구나 마음속에우울함이라는 것이 조금씩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우울함이 조금만 깊어지면우울증이 되지 않습니까?

그만큼 우리는 다 약한 존재라는 것이죠.

그런데 주님은,멀리서 보지 않으십니다.

가까이에서 우리를 보십니다.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아신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또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이렇게 표현합니다:“꺼져가는 등불이다.”

그런데 그런 꺼져가는 등불조차도,주님은 끄지 않으신다는 겁니다.오히려 다시 되살리신다는 겁니다.

이제는 젊은이들이 잘 모를 수도 있는 표현이지만,**“심지”**라는 단어, 예전에는 참 익숙했죠.

요즘은 다 건전지, 배터리를 쓰니까등불의 심지에 대한 개념이 좀 멀어졌을 수도 있지만,예전엔 기름 등불에 아주가루 기름을 썼습니다.

아주가루 기름으로 이렇게 심지에 노근을 해서 불을 붙이고,그 기름이 다하면 불이 ‘꺼질락 말락’ 하는,정말 위태로운 상황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우리가 기름이 다 되었을 때,그대로 꺼져가는 모습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다시 한 번 기름을 채워 주시고,우리를 격려하시고,우리를 위로하시고,우리가 다시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일이 언제까지 계속되냐면요?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까지,이런 일들을 계속해서 행하시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겁니다.

요한복음 8장을 보시면,가늠 중에 잡혀서 예수님 앞에 끌려 나온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그 여인을 끌고 온 거죠.

어린아이부터 시작해서 어른에 이르기까지손에 돌멩이를 하나씩 다 들고 있었습니다.

여차하면 돌멩이를 던져 그 여인을 쳐서 죽일 상황,아주 위태로운 장면이었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무리들을 향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 말씀을 듣고,많은 사람들이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조용히 돌을 내려놓고 다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앞에 나오면,문둥병자도 살아납니다.

주님 앞에 나오면,눈먼 자도 눈을 뜨게 됩니다.

어느 하나도 주님께서는겸손하고 궁휼한 마음으로 나오는 자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마다,그 마음을 얼음만져 주시고,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사께오를 비롯해서,그 사람이 도둑이든, 강도든,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오기만 하면,주님은 다 받아 주셨습니다.

등불 앞에 있던 그 여인도예수님께 나아가자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요?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라.”

이 말은 곧,복음이 승리할 때까지,주님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어제도 계셨고, 오늘도 계셨고,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삼으셨고 자녀 삼으셨다고 한다면,복음이 승리하는 그날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혹시 꺾여지는 갈대와 같다 할지라도,꺼져가는 심지와 같다 할지라도,등불처럼 위태롭다 할지라도,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다시 회복시키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을 때,그분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셨지만,결코 군사력이나 권능으로 세상을 정복하신 것이 아니라,겸손한 모습으로,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그리고 순종하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예수를 믿는 우리 모든 성도들 또한그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겸손과 섬김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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