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3:1~12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seattleomc
- Jul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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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모처럼 시애틀의 여름다운 여름을 맞이합니다.
어떤 분들은 날씨가 좋다라고 생각을 하시는 분도 있겠고, 어떤 분들은 좋기는 그냥 덥다라고 생각하는 그런 분도 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똑같은 상황 속에서 살아도 생각의 차이가 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여건이 힘들고 나쁘고, 그리고 또 어려움이지만 그것을 잘 극복하는. 여러분들 바닷가 가면 서핑하는 거 보시잖아요. 그 파도를 어떤 사람들은 두려워해 뒤로 물러가지만, 어떤 사람은 서핑을 하면서 그 파도를 뛰어넘는, 그리고 그것을 즐기는 것을 이렇게 우리들은 볼 수가 있습니다.
지난주에 선교사님을 모시고 우리들이 예배를 드렸고, 함께 모시면서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제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시애틀은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다라고들 얘기하는데, 아마 이거는 시애틀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외지에서 너무나 몰려오니까 우리끼리만 잘 먹고 잘 살려고 만들어 낸 그런 유머가 아닌가?
그런 얘기를 하면서 비가 오기는 오지만 시애틀에는 유달리도 세계적인 기업들이 참 많이 있다. 보잉이나 마이크로소프트나 아마존이나 스타벅스나, 우리들이 잘 아는 이런 대기업들이 참 많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시애틀은 우울증으로도 1위지만 독서량으로도 1위다.
그러니까 똑같은 상황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극복하면서 독서를 통해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이렇게 창출해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속에서 좌절하고 견디지 못하고 우울증에 있는 사람도 있다라는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똑같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좋은 이유고, 또 어떤 사람은 더운 이유가 아마 거기에 있지 않나 생각이 되고요. 우리들의 삶이 똑같은 현실 속에서도 어떤 사람은 기쁘고 즐거워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 현실을 이기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얼마나 다행인지요. 우리는 그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고 일어나는 그러한 믿음의 어떤 근거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굉장히 복된 것 같습니다.
23장을 우리들이 묵상을 하게 되는데요. 사실 23장에 있는 내용은 굉장히 무거운 그런 내용입니다. 쉽게 우리들이 넘기기가 조금 어려운 그러한 내용들로 되어져 있고요. 이 23장에서 나오는 이 모든 내용들은 개개인의 어떤 잘못을 지적한다라기보다도, 신앙의 근본적인 본질이 무엇이냐를 우리들이 생각하게 하는 그러한 말씀입니다.
여기 보면 제자들과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라고 성경은 기록을 하고 있는데,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 책망을 받고 질책을 당하셨나를 이렇게 묵상을 하게 되면, 오늘날 우리들이 우리의 신앙은 어떤 상황인가, 우리의 신앙의 현실은 어떠한 입장에 있는가.
다시 말씀드려서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신앙을 말씀을 하신다면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책망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주님께서 기뻐하실까. 이것을 다시 한번 우리들이 깨닫고 묵상하는 그런 본문의 내용으로 되어져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한 어떤 개인에 대한 질책이라기보다도, 신앙의 근본적인 본질을 이야기한다고 말씀을 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한 질책 또한 우리 자신에 대한 책망이라기보다도,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어떤 식으로 본질에 가까이 접근을 하고 있는가.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그 뜻 가운데 우리의 신앙이 세워져 있는가. 이것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그러한 본문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앞에 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책망의 이유를 율법을 기준으로 해서 예수님께서 책망을 하십니다. 그다음에 뒷부분에 가서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책망의 이유가 겸손과 사랑이라는 이 시각에서 예수님께서 뒷부분에 책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도 여기 1절에서부터 12절에 있는 것처럼, 아니면 후반부에 30장 36절까지 나오는 그 모든 내용들 속에 이제 다음 주부터 “화 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해서 책망하는 아주 깊은 책망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책망들이 나의 신앙생활을 향한 그러한 책망이 아닌가를 다시 한번 우리들이 깨닫게 된다라면, 우리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면서 다시 주님과 누리는 기쁨 속으로 회복될 수 있는 은혜가 이 말씀 속에 있다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본문 내용 가운데 조금 특이한 부분들은 어떤 부분이냐면,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선생이라 칭함을 받지 말라. 또 아비라 하지 말라. 아비라 함을 받지 말라. 또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이런 내용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들 앞에 우리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어떤 대접을 받으려고 생각을 하지 말라는 이런 내용들로 되어져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여기서도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랍비나 아버지나 지도자나 이런 모든 내용들이 쭉 나오는데, 우리의 신앙의 본질이 어디에 세워져 있길래 우리가 이렇게 칭함을 받지 말아야 될까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그런 내용으로 되어져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서 꾸중을 하시는데, 이 꾸중이 나중에 뭐라고 말씀을 하시냐면, 저희는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라는 쪽으로 이 꾸중이 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한번 잘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주님으로부터 만약에 꾸중을 받는다라고 한다라면, 그 꾸중은 어떤 꾸중이냐면 우리는 말만 하고 행함이 없기 때문에 받는 꾸중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 구절을 참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뭐 우르가나 좌르가나 화장실이나 뭐 길을 걷든지, 성경을 내가 원하는 것을 틀기만 하면 귀로도 들을 수 있고 눈으로도 볼 수 있는 그러한 세대 속에서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죠. 그야말로 말씀의 홍수 속에서 우리들은 살아갑니다.
제가 거의 한 40년, 35년 전 그때 중국 심양이라는 곳을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예배드리는 가운데 여자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분은 문화 혁명 당시에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10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풀려나서 이제 말씀을 전하는데, 그 말씀의 내용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것은 뭐냐면, 아마 본문을 히브리서로 잡은 것 같은데요.
우리는 이제 프린터 같은 걸로 아주 아름답게 주보 같은 것도 인쇄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근데 여러분들 옛날에 이 가리방이라는 거 들어보셨어요? 글씨를 이렇게 철필로 써서 먹물에 붙여서 이렇게 긁으면 인쇄가 되는 그런 형식입니다. 일본말로 가리방이라고 그랬는데, 주보를 거기에다가. 프린터 제가 집에 어디에 하나 있을 텐데, 모르겠습니다. 그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 이 여자 목사님께서 메시지를 전하는데 제가 그날 참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떠냐면, 야, 어떻게 이 땅은 주석도 많지 않고 참고할 만한 서적도 많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목사님은 어쩜 저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잘 전하냐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국에 있을 때는 뭐 여기저기 참고할 만한 도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은 인터넷으로 그것을 검색하면서 참고를 하니까 속도 면에서는 굉장히 빠르지 않습니까? 제가 느낀 게 어떻게 저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저렇게 잘 전하나?
그런데 반면에 말씀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너무나도 이 재료들이 풍성하고, 이렇게 참고 도서들이 많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들은 말씀을 전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충격적인 그런 생각을 한번 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열악함 가운데 있다고 해서 그 말씀이 죽어 있는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함 가운데 있다고 해서 그 말씀이 살아 있는 그런 말씀은 아니라는 것이죠. 아무리 열악하다 할지라도, 아무리 풍성하다 할지라도 그 말씀이 나의 삶에 적용이 되어지고 그 말씀이 나의 삶에 영향력을 끼치는 그 말씀인가, 우리들이 한번 묵상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꾸중이 바로 그런 겁니다. 저들은 말만 한다. 말은 참 좋다. 저들의 말을 하는 것을 들어 보면 참 은혜스럽다. 그런데 그 삶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 말씀대로 행함이 없다라는 이 질책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들도 이 말씀은 너무나도 많이 듣지만, 그 말씀을 은혜받았다라고 얘기를 하지만,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 영향력을 끼치고 우리의 삶에 살아 움직이는 그런 말씀인가 우리를 묵상을 한다라면, 이 시간 주께서 우리들에게 오셔서 책망할 때도 동일한 그러한 책망을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 신앙을 여러분들이 점검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무엇이냐면, 내 신앙 안에 감사가 있느냐라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내 삶 안에, 내 기독교적인 신앙생활 안에 자랑이 있느냐, 아니면 감사가 있느냐. 이것이 우리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데 가장 큰 기준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만약에 자랑이 많다라면, 자랑할 것이 많다라면 그 신앙은 주님께서 원하지 않는 신앙이 될 수 있고요. 그러나 내 신앙 안에 은혜가 많다라고 생각이 된다라면 그 신앙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이 은혜라는 것은 내가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상대방으로부터의 어떤 보답, 이런 것들을 은혜라고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나에게 줬을 때 그 은혜 감사합니다라고 얘기를 하는 거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서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 부르고, 그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 되었기 때문에 하는 그런 행위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우리의 신분이 어떻게 주어졌느냐? 우리가 열심히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정말 하나님 말씀을 잘 들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시는 어떤 보상으로 인해서 우리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러한 조건과 그러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시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은혜다라는 이러한 표현을 쓰죠.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에 그렇다라는 이 말을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삶에 은혜가 많으면 감사가 넘치는 겁니다. 그런데 자랑으로 가면 우리는 감사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내 노력과 내 수고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랑으로 가는 것이고, 감사가 있을 이유가 없는 거죠.
그러나 내가 수고하지 아니하고 내가 노력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결과를 얻었을 때는 은혜라고 이야기를 하고, 그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있다는 것이죠. 이게 우리의 신앙생활을 점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래서 내 신앙은 무엇 때문에 자랑하고, 무엇 때문에 자랑하고, 예를 들어서 우리의 사업장이 번창해서 자랑하고, 내 자녀가 잘돼서 자랑하고, 내가 건강해서 자랑하고 이런 자랑들이 많이 있다라면 그 자랑은 나의 수고에 대한 어떤 결과로밖에 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내가 그런 것들을 누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내가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할지라도, 내가 무엇, 이거 물 한 잔 마시는 것, 내가 숨 쉬는 것, 내가 먹는 것, 입고 자는 것,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거기에 대한 감사가 넘쳐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 가장 중요한 그런 문제임을 여기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현대 신앙인의 문제를 이야기를 하지만, 현대 신앙인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의 문제도 동일한 것임을 우리들 보게 됩니다. 그래서 내 개인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가 있느냐? 우리 교회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서 감사가 있느냐라는 것이죠.
제가 한국에서 섬겼던 교회가 1915년 5월 15일이 창립된 날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26년이니까 벌써 110년이 넘게 흐른 그런 교회죠.
이렇게 오래된 교회로 가면, 오래된 교회로 갈수록 어떤 것들이 그 교회를 지배하게 되냐면 원칙이 지배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의 어떤 법들이 많이 지배합니다. 어떤 룰들이 지배한다는 것이죠.
왜냐면 그 오랜 기간 동안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을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어떤 원칙, 이런 틀을 세우지 않으면 이 교회가 무너지기 때문에 이런 원칙들을 이렇게 세워 나갑니다.
그런데 교회가 오래되지 아니하고 막 시작이 될 때든지, 연약한 그러한 교회면 교회일수록 이 원칙이라는, 어떤 틀이라는 것들이 잘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한 사람이 귀중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붙잡아야 되기 때문에, 이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들도 우리는 은혜라는 그 틀로, 사랑이라는 틀로 감사할 수 있기 때문에 이 틀이라는 것들이 제대로 작동이 안 되는 것이죠.
그러나 교회가 이제 크고 교회가 교인 수가 많아지고 하면 이 원칙들이 이제 그때는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이 원칙들이 작동하면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이냐면 은혜가 사라진다는 겁니다.
덮어 줘야, 덮어 줘도 될 그런 일들을 이 원칙이라는 이 틀 안에 집어넣고 판단을 해야 되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은혜가 사라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작은 교회로 가면 갈수록 이 원칙을 중요시하지 않다 보니까 은혜로 감싸는, 은혜로 품어지는, 사랑으로 감싸는, 사랑으로 품어지는 일들이 더 많아지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도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온데간데없고, 하나님의 사랑은 온데간데없고, 우리는 어느새 성경 말씀에서 이렇게 했느냐, 저렇게 했느냐, 이런 모든 것들을 가지고서 우리 자신을 판단하고 상대방을 판단하는 이런 일들에 하나님의 말씀이 쓰이게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들,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고 정죄하고, 이 원칙에서 너 벗어났어, 너 잘못됐어, 이런 정죄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어 가는 영혼을 살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상처 입은 영혼을 회복시키는 데 그 의미가 있고 그 원칙이 있는 것이지, 예를 들어서 간음 중에 현장에서 잡혔던 여인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끌려왔을 때에 원칙이라는 것은 이런 여인은 돌로 쳐서 죽일 수밖에 없는 원칙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가자 예수님은 사랑으로 그 여인을 품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라는 이 사랑으로 그 여인을 감싸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개인이나 우리 교회나 이 하나님의 말씀이 원래 의도하는 것, 다시 말씀드리면 사람을 살리는 것, 은혜를 베푸는 것, 여기에서 벗어나게 되면 우리도 틀 속에 갇혀서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밖에 없는 쪽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들이 정말 조심해야 될 그러한 부분인 거죠. 교회가 커져도 이런 사랑의 원칙, 이 은혜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말자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교회는 사랑이 있는 곳이라는 이런 마음을 갖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을 보면 교회가 사랑이 없다는 이유로 떠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살리는 일에 쓰여져야 됨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정죄하는 일에 쓰여졌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발생을 하게 된다는 것이죠.
1절과 2절 말씀 여기 한번 보세요. 이들의 신앙의 실패가 어디에서 왔는지 지금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여기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정확하게 필사를 해서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볼 수 있도록 자신의 어떤 재능들을 기부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여러 번 말씀을 드렸죠. 서기관들은 성경을, 이 당시에 다 베꼈으니까요. 성경을 이렇게 베껴, 필사를 하는 그런 가운데 어떤 거룩한 단어들이 나오면, 오죽하면 그들이 다시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쓰던 붓이 아니라 다른 붓으로 그 거룩한 이름을 이렇게 써 나가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엄격한 상황 속에서 이들은 살았던 사람들인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변해야 변할 수 없는 그런 역할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나서 바리새인들은 이들이 이처럼 정확하게 번역되어져 있는, 필사되어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삶 속에서 지키려고 노력했던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까, 이것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했던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이들을 책망하는 겁니다. 서기관들을 책망하고 바리새인들을 책망하는 겁니다. 그들이 말씀을 안 지켰기 때문에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원칙에서 그들은 벗어났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서 그것을 지키기는 지키지만, 이것이 은혜의 자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자랑의 자리로 가다 보니까 이 말씀의 의미가 변질이 되어 버리는 그런 일들이 여기에서 발생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는 그런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자기 자랑으로 가는 순간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는 그런 자리로 가는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얼마나 참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위치에,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기의 자랑으로 가는 순간 책망받는 그런 일들이 이들의 앞에서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보시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라고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의 회당을 가게 되면 모세의 자리라는 게 있습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18장에 모세가 자리에 앉아서 밤새도록, 아침저녁으로 사람들을 재판하는 그런 일들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아침저녁으로 오는 사람들을 율법으로 판단하고 재판했던 그 자리를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때문에 모세의 자리가 따로 있었지만, 이제 이게 후대로 넘어오면서 회당이라는 제도가 자리를 잡으면서 이 모세의 자리가 주어졌다는 것이죠.
그 모세의 자리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고, 또 율법으로 선포하고, 때로는 재판을 하게 되는 그런 자리. 이런 자리가 모세의 자리라는 것이죠.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모세의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다는 겁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라는 이런 마음이겠죠. 내가 율법을 판단하는 사람이고, 내가 법을 재판하는 그런 사람이고, 내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야라는 자기 자만에 빠져 있는 그러한 형태라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는 그러한 장면을 여기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권위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하여서 주어지는 권위라면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박수쳐 주고 기뻐하는 그러한 자리가 되지만, 이 자리가 자기 스스로 만들어 가는 그러한 자리라고 하면, 속된 말로 우리들이 표현하는 식으로 재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이 사람들이 지금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잘 필사했고 하나님 말씀을 잘 지켰다고 해서 세워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나는 이런 사람들이다라는 이 권위 의식을 나타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서 주님께서는 3절에서 말씀을 하시는데,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이런 죄를 범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쓰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지만, 이들은 자기 자신의 자랑을 위해서 이런 것들을 행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세워 주고 다른 사람을 덮어 주기 위해서 이런 일들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이런 칭찬,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이런 영광, 이런 것들을 자기 스스로 낚아채어 버리는 그런 경우를 이들은 저질렀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오늘날에서도 교회가 번성해지고 또 교회가 크게 부흥되고 그랬을 때 가장 주의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끼리 잘할 수 있습니다라는 그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없어도 교회가 잘 굴러가고, 주님이 운영하지 않아도, 간섭하지 않아도, 주님이 함께하지 않아도 교회가 더 번성되고 부흥되고 잘 굴러가면 굳이 주님이 필요 없는 이 마음을 갖는 겁니다. 그게 이제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런 일들을 저지른 거죠.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는 그런 일들을 우리들이 보게 되는데, 여기에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지금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이 없어도 하나님이 없어도 율법은 잘 굴러가고, 재판은 잘 되고, 자기 스스로 존경을 받는 그 자리에 있고 하다 보니까 하나님이 개입할 여유가 없는 겁니다.
여러분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아침 일찍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중에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사람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이들에게는 은과 금이 없었죠. 가난했죠. 그런데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느냐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은이 없어도, 금이 없어도, 재산이 없어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앉은 자를 일으키는 놀라운 역사를 나타낸 겁니다.
그런데 이 신앙이 중세 시대로 가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냐면, 중세 시대 때 아주 유명한 교부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얘기를 했냐면, 초대 교회에서는 금이 없고 은이 없다 할지라도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가짐으로 말미암아 앉은 자를 일으켰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금도 있고, 현대 교회는 대리석으로 그 바닥이 치장이 됐고, 아름답기는 너무나도 아름다운데 그리스도 예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능력도 우리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라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을 여러분들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모든 것들이 형통합니다. 평안해요. 모든 것들이 다 잘돼요. 사업도 잘되고, 자녀도 잘되고, 나도 건강하고, 아무런 뭐 병원에 가도 약 지을 것도 없습니다. 병원에 가도 아유, 올림픽에 나가도 되겠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는 자만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찾을 만한 여유가 우리들에게는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 앞에 무릎 꿇는 사람들이 없는 거죠.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것처럼 약할 때 강함 되신다. 내가 약하지만 내 약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님을 붙든다면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유익이고 나에게는 강함이다.
이렇게 얘기를 한 것처럼 교회가 또 우리의 개인이 우리의 삶에서 누구를 바라보고 누구를 의지해야 되는가? 내가 아무리 풍성하고 모든 것들이 다 잘된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알면 우리들에게는 감사가 넘쳐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은 교만의 자리로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잃어버리지 않는 거죠. 우리가 붙잡는 십자가, 우리가 붙잡는 예수 그리스도를 여전히 우리들은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중세 교회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번에 스페인에서 성당이 144년 만에 완공이 됐어요. 그런데 그 완공이 된 것도 완전히 완공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한 10년 정도 더 있다가 완전히 피니시를 한다고 그랬는데, 제가 거의 한 30년 전에 한번 그곳에 가서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뭐 짓느라고 정신이 없었는데, 안에도 들어가는 것도 겨우겨우 들어가고 그랬을 텐데 그렇게 아름다운 건물을 지었어요.
아마 이 세상에 있는 교회 중에 가장 높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건물이 너무나도 화려해요. 그 화려함에 빠져 버리면 우리들은 주님을 찾을 만한 여유가 없어진다는 거죠. 이게 어떤 교회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인의 신앙도 모든 것들이 잘되고 화려함에 빠져들게 되면 우리는 주님을 찾을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놓쳐 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고, 바리새인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 바리새인들을, 서기관들을 향하여서 주님이 이야기를 하는 것, 너희들은 높은 자리에 앉아 있지만 실질적으로 갖춰야 할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그 마음, 이런 것들을 잊어버렸다라고서 주께서 이렇게 질책하는 그러한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5절과 7절에서 지금 이들의 행태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데, “그들은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여기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죠.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들의 모든 행위, 그들의 신앙 행위, 이런 것들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라는 겁니다.
제가 남 얘기는 잘 안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여러분들이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하겠습니다. 전문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아주 가까이 지내는 목사님이 자기는 하루 두 시간 동안 기도한다. 그 말에 제가 기가 질린 적이 있습니다.
야, 나는 3분도 채 못 하고, 어떨 때에는 30분도 못 해서 다리가 아파서 다리를 뻗었다 폈다 몇 번을 해야 되는데, 두 시간을 기도하는구나. 그게 존경합니다라는 마음으로 가지 않고요. 꼴값하네로 가는 겁니다.
여러분들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여러분들 가운데 나는 목사님 두 시간을 기도합니다 그러면 존경합니다 이럴 것 같죠? 안 그렇습니다. 꼴값으로 가는 겁니다. 이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할 때 그렇다는 겁니다.
물론 두 시간이 아니라 그 이상도 하나님과 겸손하게 대화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들은 음성을 우리의 삶에 실천하기 위해서 기도 생활하는 건 뭐 두 시간이 아니라 10시간, 하루 종일, 24시간을 해도 존경하죠.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는 것이 지금 사람에게 보이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을 한번 여러분들이 돌아보시면, 자랑이 있다는 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은혜가 있다는 것, 감사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시면 되는 걸로 우리들은 결론을 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이 이것이, 이 행위가 여러분들이 하시는 봉사 행위가, 여러분들이 하시는 전도 행위가, 여러분들이 하시는 예배 행위가, 여러분들이 하시는 신앙생활이 하나님께로냐, 하나님 앞에서냐, 아니면 사람 앞에서냐 이것을 항상 물으라는 것이죠.
우리가 성경 말씀에서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혹시라도 왼손이 알면 우리의 자만으로, 우리의 교만으로 갈까 봐 우리의 몸에서도 오른손으로 하는 거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신 그 주님의 의도를 우리들이 한번 생각해 봐야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정말 이 사회에 봉사 생활을 하고, 훌륭한 그런 일들을 행하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우리는 칭찬을 받게 됩니다. 여기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초창기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죠.
다른 사람들로부터 야, 참 존경한다. 저 사람 어쩜 나도 못 하는 것을 저 사람은 할 수 있지. 자꾸 이런 말을 듣다 보니까 이제 귀가 커져 버린 것이죠.
그러다 보니까 경문을 넓혔다라고 얘기를 하는데, 여러분들 뭐 TV나 혹시라도 사진 같은 데 이렇게 보면 유대인들이 이마에 이런 상자 같은 것을 이렇게 쭉 달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아니면 손목에 이런 상자 같은 것을 달고 있는 것을 이렇게 볼 겁니다. 아마 못 보신 분들은 자세하게 한번 관찰을 해 보세요.
그 말씀이 뭐냐면, 신명기 6장 4절인가요? 거기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그런 말씀이죠. “이스라엘아 들으라. 이스라엘아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시니 너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 말이 있잖아요.
그 말을 갖다가 양피지라는 조그마한 쪽지에다가 그 말씀을 기록해서 이 상자 안에 놓고 매달고 다니는 겁니다. 아니면 팔에다가 이렇게 하고서 매달고 다니는 겁니다.
그 본래의 뜻이 무엇일까요? 어디를 가든지 이 말씀을 묵상하고,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살아라는 의미로 성경은 그렇게 지시했다라고 우리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것을 더 크게 하는 것이죠. 나는 더 많은 말씀을 달고 다닌다. 더 많은 말씀을 나는 지키면서 살아간다. 자, 너희들을 봐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이스라엘의 호텔에는 문을 열자마자 거기에 뭐가 있냐면 이 상자 같은 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거기에 써 있죠. 너희는 들어가면서 나오면서 그 말씀을 묵상하라는 의미로 그 말씀이 이렇게 쓰여 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철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들을.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그 근본적인 것에서 떠나서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의 공동체를 자랑하고, 자기 나라를 자랑하는 이 위에 잘못된 것에 빠져 버렸다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옷술을 길게 했다라고 얘기를 하는데, 옷 끝에다가 술들을 이렇게 달지 않습니까? 뭐 실 같은 것을 이렇게 길게 달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이냐면 그 술들이 옷 끝에 달려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항상 너희들과 함께한다.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성경은 그렇게 하라라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잘못 해석을 해서 길게 하면, 옷술을 길게 하면, 더 많이 하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까 생각을 해서 경문을 넓히고 옷술을 길게 하고 이런 일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이죠.
결국은 그 모습을 바라본 주님께서 그들을 책망하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 의미가 아니다. 너희들이 옷술을 바라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너를 따른다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라고 말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런 일들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죠. 원래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다라면 그 말씀을 지키려고 하기보다도, 그 말씀을 지키는 내가 기특한 겁니다. 아, 내가 또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구나. 참 기특하다. 너 정말 착해. 이런 우리의 자랑으로 가게 되니까 이게 잘못된 그런 이유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서 5절에 주님께서 말씀을, 꾸중을 하시는데 “저희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사람에게 보이고자 한다라고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이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고, 이 말씀을 많이 암송하는가? 이게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암송하는 것은 좋죠. 우리가 기도할 때 암송되어진 말씀들이 기도 가운데 그 말씀이 나오면 우리에게 기도하는 가운데서 굉장히 큰 힘이 되죠. 그러나 내가 하나님 말씀을 많이 암송한다고 이게 자랑이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로마서를 달달달 외워요. 16장까지인데. 그래서 제가 그분들하고 한번 차를 타고 지나간 적이 있는데, 야, 우리 고린도전서 외우기 시작할까요? 그러면 앞에서도 고린도전서를 쭉 외웁니다. 한 일곱, 여덟 사람이 그 차에 탔는데 뭐 돌아가면서 다 외워요. 지금은 우리 로마서 외웁시다. 그러면 로마서 16장까지 아예 그냥 다 외워요. 마태복음 외웁시다. 그러면 마태복음 앞에 뭐 이렇게 다 외우고. 앞에 마태복음 1장에 보면 누구는 낳고 낳고 낳고 얼마나 많습니까? 그 사람들 이름 외우기도 힘든데 그것을 다 외우는 사람들이 있어요.
근데 다 외우는 것은 좋죠.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 말씀이 내 삶을 위로하고, 그 말씀이 내 삶에 힘이 되고, 그 말씀을 내 삶에서 지켜낼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만 아셔도, 하나만 외우셔도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고 내 삶에 실천되어지는 것, 그걸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것이지, 아무리 성경 전체를 달달달 외운다 할지라도 내 말씀은, 내 삶은 전혀 그 말씀이 적용이 안 되면 하나님의 책망거리다라는 것을 여기에서 지금 알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죠. 그래서 사람들보다 높아지려고 하는 것, 모세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 이거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8절에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랍비는 이제 선생이라는 의미죠.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여기서 하나 주목할 단어가 너희는 다 형제라는 그 내용입니다.
우리 교회는 직분들이 있습니다. 직분들은 사실 섬기라는 목적으로 직분을 주는 겁니다. 근데 어떤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우리 교회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누굽니까? 그럼 목사가 제일 높다 그래요.
그다음 높은 사람이 누굽니까? 장로님이 높다고 그래요. 그다음 높은 사람 누굽니까? 권사님이 높죠. 높은 사람으로, 우리들은 계급으로 잘못 알고 있어요.
목사는요, 높은 것이 아니라 직분입니다. 직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어떻게 성도들에게 이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전달될까 이거를 공부하고 전달하는 그런 직책이죠. 역할이죠. 이게 계급을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권사님이나 장로님들도 마찬가지죠. 어떻게 하면 성도들을 돌볼까? 성도들이 힘들고 어려운 것들을 돌아보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있으면 가서 구제하고, 또 힘들고 연약해서 쓰러지고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 격려해 주고 다독여 주고 위로해 주고 이렇게 세우는 것, 이거 하라고 우리들에게 주신 그런 직분이지 않습니까?
언제 교회를 계급 세우라고 이런 직분을 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금 주님께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너희는 다 형제다. 다 똑같다. 교회 오래 나왔다고 해서 그게 감투가 되는 것이 아니고, 헌금 많이 한다고 해서 그게 감투가 되는 게 아니다. 봉사 많이 한다고 해서 그게 자랑이 아니다. 너희는 다 형제다.
누가 앞선 자가 없고, 누가 뒤선 사람이 없다. 너희는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받은 한 사람들이다라고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제자들이 누가 더 높은가에 대해서 그렇게 다툴 때 주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우셨겠습니까? 그 제자들을 향하여서 너희들이 높고자 하느냐? 낮아져라. 낮아지면 너희들이 높아진다라고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거죠.
9절 말씀 보세요.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여기에서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라고 얘기를 하는 것은 우리의 육신의 부모를 가리켜서 아버지라 하지 말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 육신의 아버지는 아버지라고 얘기를 해야 되죠. 우리 육신의 어머니는 어머니라고 얘기를 해야 되죠. 그런데 하지 말라라는 얘기는 뭐냐면, 유대 사회에서의 어떤 풍습은 스승들, 그러니까 가르치는 자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아버지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도 옛날에 군사부일체 해 가지고 임금과 스승과 부모님은 일체다. 그래서 똑같이 존경해야 된다라는 이런 내용이 있지 않습니까? 유대 사회도 마찬가지로 자기를 가르치는 스승을 향하여서 아버지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는 내 아들이라고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육신의 아버지를 가리켜서 아비라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아버지는 한 분이다. 우리가 존경해야 될 스승 되신 분은 한 분이시다. 곧 그리스도 예수다라고 여기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스스로 아버지를 하지 말라. 너희들이 아버지를 하면서 내가 그 사람에게 속했다라는 것을 나타내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한 가지 깨달아야 되는 것은 무엇이냐면, 나를 가르치는 사람, 나에게 영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 우리들이 존경은 할 수 있죠.
왜냐면 그로 말미암아 내가 영적인 눈이 뜨이고,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내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더 가까이 하게 되면 영적인 스승이고 영적으로 고맙기는 하죠. 그러나 그것이 아버지의 표현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버지의 표현이 아니면서 무엇을 우리들이 생각을 해야 되냐면, 내가 누구에게 속했는가를 먼저 생각을 하라는 겁니다. 내가 나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끼친 사람에 속해 있는가, 아니면 하늘 하나님 아버지께 속해 있는가, 이것을 먼저 깨달으라는 얘기죠.
원래 큰 교회들은 훌륭한 목사님이 그 교회를 사임을 하면 성도들이 많이 흔들립니다. 타격을 입습니다. 왜냐면 그 목사님도 잘못이죠. 예수를 가르쳐야 되고 예수를 알려야 되는데 자신의 훌륭함, 인격적인 뭐 도덕적인 윤리적인 훌륭함만 나타나다 보니까 저 목사님이 아니면 안 돼. 이런 식으로 가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물론 목사님도 잘못이 있겠죠.
이것을 지금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나는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우리 교회 안에서 나는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이지, 나에게 영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나의 스승이나 나의 아버지가 될 수 없고, 오직 아버지는 하나님 한 분뿐이다라는 그 얘기를 9절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마지막 10절을 한번 보세요. 10절을 보시면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여기에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우리의 스승은 곧 그리스도 예수 한 분뿐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이 마지막으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그러한 말씀이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세상과 전혀 반대의 개념이죠. 세상은 다르죠. 내가 높아지기 위해서는 남을 밟고라도 올라가서 높아지는 게 세상의 이치인데,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들이 높아지고자 하느냐? 그러면 차라리 낮아져라. 그 낮아짐으로 인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존경할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큰 자가 되기를 원하면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될 것을 우리들에게 요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당시에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유대 나라, 그 사회, 그 사람들이 지금 잘못된 길로 걸어가고 있는가. 이것을 주님께서 이렇게 지적을 하고 있는 거죠.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형제 모두가 다 형제요, 모두가 다 자매다. 모두가 다 동일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는 이 질서 안에, 십자가라는 이 질서 안에 움직이는 장소가 돼야 됩니다. 교회가 만약에 계급을 나누고, 교회가 높고 낮음을 나누면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결론적으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조용히 이 말씀들을 다시 한번 더 묵상을 한다라면, 정말 나는 바리새인인가, 아니면 이 말씀을 통하여서 주님 정말 나는 아직도 내 안에 바리새인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라는 이 회개의 자리로 우리들은 나아가야 된다는 것이죠.
주님의 말씀 안에서 회개를 한다는 것은요, 새로운 은혜를 부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우리가 회개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잘못됨을 시인하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그 모양 그대로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결국은 그 모양 그대로 살아가다가는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23장에서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그 질문이 그겁니다. 우리 안에 바리새인이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신앙생활을 이렇게 오래 했지만 정말 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타나야 됨에도 불구하고 정말 내 안에 바리새인과 같은 성품이 아직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이 회개가 우리들에게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세리를 보세요. 세리는 하나님 정말 내가 죽을 죄인입니다. 이것을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은혜를 회복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리새인은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라고 얘기를 했을 때, 그는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는 그 자리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이 마태복음 23장을 놓고 세리와 같은 그러한 기도가 우리들에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주님 정말 나는 죄인이고, 정말 내 안에 바리새인적인 요소가 있고, 정말 주님의 말씀을 내가 아노라, 주님 앞에 기도하노라 하지만, 내 삶 속에서는 그 주님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역사하지 않는 이런 것들을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고백한 것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고백을 하면서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라는 이 십자가를 붙드는 그 자리로 나아가야 된다는 것이, 이게 회개가 가지고 있는 그 능력입니다.
우리를 그 자리에서만 멈추게 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내모는 것이 회개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능력이라는 거죠.
여러분들 마지막으로 주님 앞에 한번 묵상을 해 보세요. 우리가 높아지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주님을 닮기를 원하느냐라는 이 질문을 일주일 동안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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