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2:41~46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 seattleomc
- Jul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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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제 22장음이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짧은 아 구절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이렇게 담겨져 있습니다. 아 여러분들이 아이 말씀을 좀 이해를 해야 될 텐데 아 전화는 제가 너무나도 부족해서 아 여러분들이 준비한만큼 제대로 전달할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러나 아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이 묵상하는 가운데 아이 문제가이 얘기가 그런 얘기구나라는 그러 깨달음도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22장 처음 어 시작했을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예수님께 나와 질문을 하죠.
아, 납세의 문제로 다시 말씀드리면 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맞느냐라는 문제로 예수님을 공격하는 그 질문의 뜻이라 것을 보게 됩니다. 두 번째로는 사계인들이 나와서 부활에 관한 그 문제를 제기했고 어 세 번째로는 율법 교사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라는 그 물음을 예수님께 나와했습니다.
아, 어느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예수님께서는 아, 상상하지 못하는 아 그러한 말씀으로 지혜롭게 아, 이런 문제들을 벗어나는 것을 우리들이 보게 됩니다.
아, 질문한 사람들을 여러분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대제사장도 있었고 서기관들도 있었고 율법 교사들도 있었고 뭐 사두개인들도 있었고 헤롯 당원들도 있었고 아 각각 각세계 많은 아 다시 말씀드리면 그 분야의 가장 최고 전문가들이 이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질문을 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질문이 질문 속에서는 어떤 방법을 찾아도 빠져나갈 수 없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질문을 했겠죠.
아 그러나 예수님께서는이 모든 올을 너무나도 쉽게 벗어서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아 그들에게 아 질문을 하는 그 장면이 오늘 본문에 있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이 모든 질문에 대한 아 답 정답 아 이것을 말씀을 하시고 어떻게 보면은 어 마태 1장 1절에서 나왔던 그 9절부터 시작해서 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그 질문 속에 함축되어져 있는 아이 새로운 질문을 예수님께서 질문을 해 왔던 사람들에게 공격을 해 왔던 사람들에게 의 반문이라 내용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42절 말씀을 여러분들이 한번 보시면 42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아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통쾌하게 그들의 질문을 갖리자 할 말이 없게 되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질문을 하십니다. 아, 그러니까는 아, 지금까지 해 왔던 반박해 왔던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여기이 말씀 안에 담겨져 있는 것을 오늘이 알게 됩니다. 마태복음 16장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버리실 때에 제자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아,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라고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아 그러자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여러 가지 말들을 전해 주게 되는데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선지자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라는 이러한 말씀을 예수님께 하는 거를 보게 됩니다. 아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다시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때에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아 우리의 히어 베드로께서 나오셔서 과감하게 말씀하시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그 말씀을 하게 됩니다. 아 예수님의이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이 이 질문 아이 질문은 당시의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라 할까? 또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는가? 그 예수님은 나와 어떤 연관이 있으며 나의 삶에 그 예수님은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 분인가?
우리가 끊임없이 질문하고 끊임없이 해답을 찾아가야 되는 그러한 말씀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사울이라는 청년은 예수를 믿는 하나님을 섬기는 율법에 대한 열심이 다녔던 그러한 사람입니다. 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아, 잡아서 감옥에 걷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하나님을 섬기는 거에 대한 열심으로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기 위해서 저 멀리 있는 아, 지금 예루살렘에서 시대아 땅까지 달리면은 굉장히 멀지 않습니까? 예루살렘을 벗어나국까지 예수 믿는 사람을 어 잡겠다는 인력으로 그 길을 달려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 다메색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게 되죠. 아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는 아 그러한 질문 앞에 예수님께서 사울을 하는 청년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내가 핍박하는 그 예수다라는 말씀 한마디로 사울은 완전히 그의 삶이 뒤바뀌는 아 완전히 그의 삶이 변화되는 그러한 장면을 우리들이 어 보게 됩니다. 아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말씀을 합니다. 나는 아 당신이 믿는 예수다라는이 말씀 앞에 정말 내가 아 예수를 믿는데 그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가? 아 우리들이 다시 한번 사울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 앞에 묵상해야 될 부분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43절과 45절 말씀을 보시면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의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내 원수를 내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 하느냐라고 묻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다윗의 자손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할 때에 예수님께서 그러면 다윗이 성령의 감동되어서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했느냐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나타나면 다윗이 어떻게 그 메시아를 가려서 그의 후손을 가르쳐서 주라고 얘기를 하겠느냐라는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아,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나온 말이죠. 헬라어로 그리스도죠. 그리고 어 히브리어로는 메시아 그리스도나 메시아 동일합니다.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그러한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라는 이름 앞에는 아 그리스도 어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을 받은 자 선지자로 또 우리를 [목을 가다듬음] 어 하나님과 연결하는 제사장으로 그리고 왕으로 우리를 통치하고 다스리는 왕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분 그리스도 어 메시아라는 그러한 뜻입니다. 어 그런데이 질문이 어 지금 너희들은 메시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그러 의미죠. 너희들의 생각은 어떠냐? 메시아에 대해서 너희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라는 그 질문을 얘기하고 있는 거죠.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 누구의 자손이냐 했을 때에이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입니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오늘 43절부터 45절에 나오는이 말씀은 시편 [콧방귀] 110편에 나오는 말씀을 그대로 예수님께서 인용한 아 그러한 내용입니다. 시편에 나오는 말씀을 예수님이 인용을 하셨다는 것이죠.
아, 그리고 나서 지금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왜이 질문을 하는가?
왜 바리새인들에게이 질문을 하고 있는가? 아, 그리고 어, 바리새인들에게 했던 그 대답 아, 다시 말씀드리면 다윗의 자손입니다라고 이렇게 됐을 때 그렇다면 왜 다윗은 그의 자손에게 주라라는 이러한 칭으로 붙였는가?
그 질문을 여기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라면 이 사람들이 대답을 못하는 것을 보고, 다윗이 그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주라고 칭호를 붙였다는 것은 그의 후손 이상으로 어떠한 의미가 이 안에 담겨 있다라는 것을 우리들 먼저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으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예수님을 가리켜 그의 후손으로, 그의 자손 가운데 한 사람 예수를 가리켜서 나의 주라라고 얘기를 했을 때 이 의미는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 외에 더 큰, 더 소중하고 더 귀한, 더 깊은 뜻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다. 그렇게 우리들이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44절에 특별히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주께서 내 주께”라는 유명한 표현을 씁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여기서 주라는 말이 두 번 연속해서 등장을 하게 되죠. 그러니까 우리말은 똑같이 주라고 이렇게 표현이 되는데, 앞에 나오는 주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나오는 주는 성자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뜻이 우리들이 이해하기가 쉽겠죠. 그래서 구약 성경에도 앞에 나오는 주를 여호와라는 이 단어를 썼고, 두 번째 나오는 주를 아도나이, 주님, 주인님이라는 그 단어를 썼습니다.
앞에 나오는 것과 뒤에 나오는 그분이 다른 거죠. “내 원수를”, 예수님의 원수가 사탄이죠.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사탄은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였지만, 예수님은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하겠다. 창세기에서 나오는 뱀이 하와를 유혹하고 나오는 그러한 새로운 복음, 창세기에 나오는 원시적인 복음의 내용이 여기에 담겨져 있는 거죠.
그러니까 원수를 물리칠 때까지 하나님의 발등상,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였도다라는 말씀이 44절에 있는 그러한 내용이죠. 다시 말씀드리면 성부 하나님께서 사탄을 물리치기까지, 물리치기 위하여서 성자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내겠다라는 그 의미가 여기에 담겨져 있는 그러한 내용입니다.
그러고 나서 사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았다라고 승리의 함성을 불렀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발꿈치만 상하게 한 것뿐이지 예수님을 완전히 물리치지 못하였다는 것이죠. 오히려 사탄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뜻을 이루신 거죠. 그리고 승리의 함성을 부르고 있는 사탄에게 하나님께서는 죽음에서 예수님을 일으키사 부활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육신의 혈통으로만 아브라함의 자손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우신 하나님의 자녀를 확증시키는 그 사건이 십자가에서 나타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44절에 그렇게 말씀을 한 겁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를 임마누엘이라 하라”라는 그러한 말씀이 있죠. 처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다시 말씀드리면 이게 이제 신약 시대로 와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서 성령께서 잉태하게 하시고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가 나오는 그런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그러한 분이 아니라,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 하나님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분이다라는 것을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를 한번 볼게요. 로마서에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1장에 보시면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이 말씀은요, 다시 말씀드리면 시편에 나오는 그 말씀은, 시편 110편에 나오는 그 말씀은 유대인들이 암묵적으로 이 말씀에 대해서 동의를 했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에서 나오실 분,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분. 이 암묵적으로 유대인들이 알고 있던 그러한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신약 시대를 지나가면서 이 메시아가 하시는 일에 대해서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을 거기서 보게 되죠. 그러니까 육신으로만 다윗의 혈통으로 오시는 분이 아니라, 성결의 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다시 이렇게 세우시는 영적으로도 메시아가 되시는 그분,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여기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한 가지 얘기를 해야 될 것은 뭐냐면 의문이 하나가 생기죠. 다윗이 그의 자손에게서 오실 그 후손이 메시아라면 왜 주라고 얘기를 하는가? 그 후손이라면 주라고 얘기를 할 이유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손주한테 주인님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보다 한참 예수님께서 후손으로 이렇게 오셨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당시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향한 그러한 질문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될 그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왜 다윗이 이랬을까? 왜 다윗은 그 후손에게 주라는 이러한 칭호를 했을까?
우리들이 다시 한번 이 문제를 깊이 생각을 해 봐야 됩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이 지난 지가 한참 됐지만, 거기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이 말씀으로, 1장 1절을 여기서 세계다라고 얘기를 할 때 계자가 이 계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이다라는 그런 말을 쓰듯이, 지금 성경은 어떻게 돼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족보라는 것을 알게 되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라고 마태복음 1장 1절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데, 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이렇게 칭했을까?
이것을 성경에서 이렇게 설정을 해 놓은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분으로 성경은 기록을 해 놓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성경이 그렇게 기록한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내가 다윗의 자손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리고로 가르치는 길에 두 소경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이렇게 외치죠. 그때에 이제 예수님께서 암묵적으로 그 질문에 대해서, 그 말에 대해서 동의를 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알게 되죠.
두 소경이 말을 했던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그 의미는 성경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그분 메시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그분 메시아, 예수님 당신은 바로 그분입니다. 그분으로 오셨습니다. 이 고백이 이 맹인들의 고백 속에 담겨져 있는 거죠.
제가 그때 여러분들이 그때도 이렇게 동일하게 말씀을 드렸고요. 그러니까 이 두 소경이 가지고 있는 이 신앙 고백은 대단한, 엄청난 그런 내용을 여기 함축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이야말로 성경에서 말씀하셨던, 약속하셨던 그분이십니다. 메시아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눈이 세상의 의술로는, 세상의 어떠한 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거지만 당신은 하실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 고백이 두 소경의 고백이 여기에 담겨져 있는 거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메시아로 오시는데, 이스라엘 민족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게 되는데, 26장 64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여기서 여러분들 한 가지 오해 없기 바랍니다. 하늘 구름을 타고 온다. 손오공처럼 하나님의 구름을 타고 온다는 게 아닙니다. 이 성경에서 구름을 표현할 때는 영광 중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구름으로 가렸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름으로 가렸다. 이런 표현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왜냐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면 죽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구름으로 가리신 거죠. 여기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라는 얘기는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오신다라는 그러한 의미가 여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완성하실 그 왕국은 어떤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와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는 온 세상에 대한 회복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잘못 보고 있는 것은 오직 자신들만의 하나님이고, 자신들만의 메시아의 역사 이렇게만 생각을 했던 거죠. 그러니까 자신들만 회복시키기를 원했던 그러한 오해가 여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그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주라 얘기한 것을 우리들이 조금 쉽게 이해를 해야 되는데, 사무엘하 7장을 가 보시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7장에 가 보시면, 자, 지금 우리가 추적해 나가고 있습니다. 왜 다윗은 그리스도를 주라 불렀습니까? 서로 보는데, 거기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무엘하 7장 11절을 보시면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이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여기에서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리라라는 이 말씀이 정확하게 이 안에 담겨져 있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 12절을 보면 “내 몸에서 날 네 씨”라는 표현을 씁니다. 왜 씨라는 표현을 썼을까? 내 몸에서 내 자손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내 씨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죠. 아브라함아, 동서남북을 바라봐라. 쭉 얘기를 하면서 내 몸에서 날 네 씨라는 이 표현을 씁니다. 내 자손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에게로부터 나올 그 자손이 자손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내 씨라고 이렇게 표현을 했을 때는, 그 씨를 다시 말씀드리면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의미로서의 이 씨라는 단어를 여기에서 썼습니다. 그러니까 내 후손이라는 단어보다 더 중요한 그러한 의미가 있는 거죠.
시간이 많이 지나가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썼구나라고만 이렇게 여러분들이 넘어가시고, 다시 말씀드리면 다윗의 자손, 그다음 바로 자손이 이제 솔로몬이지 않습니까? 솔로몬부터 이제 그의 왕국이 쭉 이루어지는데, 솔로몬까지만, 다윗 가문의 다윗 왕국을 이루는 그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이 나라가 영원하리라라는 그 말씀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후손으로 올 그들의 후손들만 국한되어져 있는 약속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나라는 영원하리라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 씨가 그리스도가 되어서 그의 통치하심이 영원한 것이다라는 그 의미로 여기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려는 그러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나중에 그의 아들 솔로몬이 대성전을 완성하게 되지만, 다윗이 솔로몬에게 부족함이 없이 다 준비를 해 놓습니다. 그 어느 날 다윗이 이제 평안함 가운데 있을 때에 나단 선지자에게 질문을 하지 않습니까?
나는 이렇게 화려한 궁에 있는데 하나님의 장막은 저렇게 초라하게 있어서 내 마음이 너무나도 아프다라고 얘기를 하면서, 성전 건축에 대해서, 계획에 대해서 나단과 상의를 하는 그런 장면이 있지 않습니까? 그때 이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런 말씀을 합니다.
야, 내가 언제 너에게 집을 지어 달라고 했느냐라는 그러한 말씀을 하시죠. 출애굽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내가 언제 집을 지으라고 얘기한 적이 있느냐라는 그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오히려 내가 너를 양을 치는 목자에서 들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는 왕으로 삼은 것 아니냐라는 그 말씀을 다윗에게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말씀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우리가 이제 가끔 그런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열심을 다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 뭐 이런 얘기들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이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야라는 그런 말들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이게 이렇게 거기와 비교되는 말인데, 모든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끼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다윗이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린다.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어떠한 행위, 어떠한 것을 하나님께 내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걸로 기뻐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은혜의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흘러나오는 것이지, 우리가 열심히 말씀을 잘 지키고 열심히 주의 일하고 봉사하고 해서 하나님께 올려 드린다. 이런 개념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 얘기를 하시는 것이죠.
내가 오히려 너를 양떼를 치는 목자 가운데서 불러서 너를 왕으로 삼은 것이 아니냐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다윗은 양을 치는 그러한 목자였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부르시게 되는데, 사울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시고 사울을 폐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나서 다윗이 블레셋에 있는 골리앗이라는 장군을 죽임으로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이렇게 떠오르게 되죠. 근데 아직까지 사울을 폐하겠다고만 말씀을 하셨지, 그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윗은 도망자 신세가 돼서 도망다니는 그러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사울이 그의 아들들과 함께 죽자 이제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두 지파가 다윗을 왕으로 맞이합니다. 나머지 지파들은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죠. 이게 기간이 무려 7년 반이라는 기간입니다.
그러니까 야, 하나님께서 나를 왕으로 삼을 것이다라는 이 기대 속에서 이제 사울도 죽었구나. 그러면 내가 왕이 되는가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무려 7년 반 동안이나 두 지파만 다윗을 왕으로 삼죠. 그러다가 이렇게 통일 왕국을 이루고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됩니다. 왕이 되자 다윗이 첫 번째로 한 일이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시 가져오는 그 작업을 진행하게 되죠.
그러고 나서 이제 나라가 안정이 되자 첫 번째 일어났던 사건이 어떤 사건이냐면 바세바의 사건입니다. 바세바의 사건인데, 한 가정이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 엄청난 일을 겪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다윗이 그것이 죄인지를 모르고 있더라는 겁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남편은 죽고 아내는 다윗에게 새로 가야 될 그러한 상황을 받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것이 잘못인지를 몰랐다는 겁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죠. 그리고 나서 그를 책망하게 됩니다.
책망하자 다윗이 그 사건을 통해서 자세하게 자기의 심정을 기록해 놓은 것이 시편 51편이죠. 시편 51편에 참회의 시, 밧세바를 범한 후에 나단이 들어온 그때에 그 내용을 이렇게 쭉 기록하는 것이 시편 51편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무엇이냐면 자기가 저지른 그 죄가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이었다라는 이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면서 자기 안에 이런 죄의 본성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그런 사람인 겁니다. 그런데 이 바세바의 사건들을 통하여서 나단 선지자의 질책을 받게 되자, 돌아보게 되자, 아니 내 안에 이런 본성이 있나? 내 안에 이런 더러움이 있나? 내 안에 이런 추함이 있나? 내 안에 이런 악함이 있나? 살아 있단 말인가?라고 다윗이 그때야 이제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믿는 가정에서 대대로 믿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쭉 태어났어요. 어릴 때부터 또 가정 예배 잘 드리고 부모 말씀 잘 듣고 교회 십일조 내고, 내가 죽으면 천국 간다. 당연히 이렇게 생각을 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어느 날 자기가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는 거예요. 그런 종교적인 상황 가운데서 자란다 할지라도, 내가 개인적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지 아니한다라면,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다라면, 이거는 천국하고 멀어지는 상황인 겁니다.
뒤늦게 이제 이거를 깨닫게 되는 케이스죠. 다윗이 곧 그런 상황인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으로, 이스라엘 민족으로 태어나서 자기는 너무나도 신앙이 좋은, 좀 괜찮은 그런 사람으로 생각을 했더니 사건을 통하여서 자기의 죄성이 막 드러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제 51편에 보면 “내가 죄 가운데 출생하였음이여”라고 시작하면서 자기 안에 있는 죄성을 이 사건을 통해서 다윗이 알아보게 된 거죠.
그러고 나서 고백하는 것이 선한 것이 나에게는 하나도 없습니다라는 그런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나서 여러분들 40편 2절에 보면 그런 얘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지시고, 나의 발을 반석 위에 올리셨다라는 이 표현이 시편 40편 2절에 나온 그런 표현인데, 다윗이 고백하는 게 그겁니다.
나를 기가 막힌 수렁에서, 하나님이 빠져나올 수 없는 그 절박스러운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를 건지시는데 어떠한 방법으로 건지시느냐? 다윗의 후손에서 오실 메시아라는 그 방법을 통하여서, 이 다윗이 가지고 있는 죄성을, 다윗이 악들고 있는 이 기가 막힌 수렁에서, 이 상황 속에서 건지실 분으로 오실 것이다라는 그 고백을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왜 예수가 필요한가? 주일날에는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크리스천으로 웃으면서 즐거우면서 “권사님 오셨어요? 집사님 오셨어요? 한 주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이렇게 하다가도 우리의 죄성이 어디서 나타나느냐? 문만 열고 딱 저 친 교회로 들어가고 우리의 죄성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주님이 죄성을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들을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누가 필요하냐? 그래서 예수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래서 이 이스라엘 민족들, 다시 말씀드리면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택한 민족으로만 생각해 왔던 사람들이었고, 그 가운데 다윗은 우리들이 시편을 통하여서 다윗의 신앙을 보게 되는데 얼마나 위대한, 야,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나가 기도하는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저렇게 침착한 모습을 보이는구나.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많이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밧세바 사건이 다윗에게는요, 굉장히 뭐라고 할까? 그의 삶을 완전히 터닝시키는 터닝 포인트가 이 밧세바 사건인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다윗의 이전과 다윗의 이후를 기록을 할 때에 밧세바 사건을 항상 중간에 놓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이전 길로 행하였다라고 얘기를 할 때 밧세바 사건 이전에 섬겼던 그 하나님, 다윗의 이후 길이다라고 얘기를 할 때는 밧세바 사건 이후의 그 길을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자기 안에 착한 것, 선한 것,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것들, 아무것도 없는 것을 발견을 하고 하나님 앞에 그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상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지, 하나님께 뭐 어떤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기뻐하실 만한 그런 것들을 드리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다윗이 가지고 있는 그 상한 심령이 바로 그런 겁니다. 하나님, 우리 안에 죄성이 있습니다. 나는 태어나면서 죄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누구도 나를 건질 수 없고, 누구도 나를 구원할 수 없는, 나는 죄투성이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말만 하면 죄악된 말만 하고, 말만 하면 남에게 상처 주는 말만 하고, 행동만 하면 남들이 싫어하는 그러한 행동만 합니다. 그 이유가 죄 가운데서 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손으로 오실 메시아, 그분을 통하여서 나를 하나님께서는 이 기가 막힌 웅덩이에서, 이 수렁에서 건지시는 그 하나님이심을 압니다. 그래서 다윗이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향하여서 주라는 이러한 표현을 쓰고, 주라는 이러한 칭호를 사용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에 그 예수는 우리와 어떤 연관이냐? 그 예수는 나에게 누구냐? 다만 나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신 그 하나님이시냐?라는 겁니다. 오늘날도 동일한 질문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다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당신은, 나는 예수를 누구라 하는가? 라는 그런 질문을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라고 얘기를 하면서, 오직 오실 메시아로 말미암아,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로 말미암아, 오직 오실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를 이 죄악 가운데서, 이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려야 빠져나올 수 없는 웅덩이에서 건지신 그 하나님이시다라는 이 고백이 이 말 안에 여기에 다 담겨져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 생각을 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면, 왜 우리가 주님이 필요한가 먼저 생각을 해야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항상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냥 우리가 이렇게 못나고 죄악 가운데 있고, 말하면 또 행동만 하면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이 모든 것들로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은혜로 이렇게 덮으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한 겁니다. 이 얘기를 하자 이 바리새인들은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못합니다. 이 질문의 가치가 얼마나 귀중하고, 이 질문에 대한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이들이 감히 하나님께 얘기를 하는, 예수님께 얘기를 하는 사람이었죠.
46절 마지막 절 한번 보세요. 한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그러니까 이 유대인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율법 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의 사상은 이 나라를 로마의 복정, 로마의 통치, 이런 것에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 다시 말씀드리면 이 힘들고 피곤하고 지치고 한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 나의 주님이 되셔서 좀 평안하게 지나갈 수 있게끔 이런 것만 요구를 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이 질문 앞에 이들은 할 말이 없었다는 겁니다. 아,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구나.
근데 이런 표현이 좀 죄송하지만, 그렇게 이들은 바리새인이라고, 유대인이라고 알면서도 끝까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 고집들을 우리들이 보게 되죠. 여러분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율법 교사고, 지금으로 얘기를 하면 율법에 관해서는 박사들이지 않습니까?
누구보다도 율법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위치에 있던 그런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성경 지식을 많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그리스도 예수가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라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지식적으로만, 성경 지식으로만 하나님을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 신앙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요.
그러나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이 오늘도 내 삶에서 역사하시고, 인격적으로 나에게 말씀하시고, 내가 걸어갈 때 함께 동행하시고, 내가 부르면 언제나 말씀하시고 응답하시는 그 인격체로서의 하나님을 우리가 섬기면, 다시 말씀드려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섬기고 나아간다라면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오셔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 앞에 베드로의 대답처럼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이러한 답변을 우리들이 들을 수 있다는 것이죠.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성경을 많이 안다 할지라도 그들은 영적인 무지함, 이런 것들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또 율법 교사들처럼, 율법의 박사들처럼 성경을 많이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한 가지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예수는 나를 죄악 가운데서 건지신 구원자로, 성부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다라는 이러한 믿음이 있고, 내가 당해야 할 고난 예수님이 대신 당하셨고, 내가 죽어야 할 죽음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성이고,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예수를 믿는 그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덮어 주사 예수로 옷 입게 하시는 그 은혜, 은총 속에서 살아가게 하신다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고, 한 가지 더 부탁합니다.
여러분들, 지식적으로만 하나님을 만나지 마시고 삶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만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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