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2:34~40 최고의 계명/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 seattleomc
- Jul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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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총회가 미국 땅에서 할 때는 장중에서 이렇게 잘 끝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항상 긴장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 예를 들어 케냐나 또 아프리카나 남미나 이런 곳에서 총회를 할 때는 모두가 다 긴장이 많이 됩니다. 건강의 문제도 그렇고 안전의 문제도 그렇고.
이번 총회에 누가 참여를 하셨느냐면, 지난번에 제가 터키 간다고 기도 좀 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지 않습니까? 그 터키 현지인, 터키인이죠. 현지에 올한이라는, 우리 한국으로 “라스트 이 한”이라는 뜻이 아니라 올한이라는 터키 이름인데, 그 목사님 부부가 이렇게 참여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혹시라도 지나가는 말로라도 말씀을 드렸을지는 모르겠지만, 작년에 터키를 방문하고 공항에 이렇게 내렸더니 밖에 장갑차며, 경찰들이며, 총을 들고 있는 군인들이며 이런 사람들이 쭉 있길래, 이 나라는 이런가 보다 이렇게만 생각했었죠.
그런데 나중에 뒤늦게 알고 보니까 크리스천들이 한 교단 공도에 온다는 정보가 있어 가지고, 그 사람들이 혹시라도 저희들이 모여서 소요를 일으키나, 아니면 혹시라도 전도를 하나, 여차하면 잡아가려고 그곳에서 배치하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전혀 그런 것들도 모르고, 이미 비밀 경찰들이 예배드리는 곳에 와서 네 명이 이렇게 감시를 하는 것도 느꼈는데, 이 올한 목사님은 터키 사람인데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느냐면, 저번에도 한번 말씀드렸지만 한국에서 고려대학을 나오시고 외무고시를 패스하시고 LA로 영사로 오신, 지금은 이제 예수를 믿고 목사님이 되셨죠. 그 영사님이, 외교관들은 3년마다 이렇게 발령지가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LA에 잘 있다가 어디로 발령이 났냐면, 아프리카, 이름도 생소한 그곳으로 발령이 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분이 가만히 생각을, 야 내가 이러려고 외교관이 되었느냐? 그 낙담 가운데 간 곳이 터키가 자리가 마침 비어 가지고 터키로 갔다는 거죠.
거기서 예수를 전한 겁니다. 그 예수를 전한 것도 참 정말 희한한 그런 일인데, 이 올한 목사님이 예수를 영접할 때 요한복음의 쪽복음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한복음에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 이런 간단한 성경에 있는 말씀으로 이어져 있는 그 복음의 쪽을 이렇게 받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청년이 그 복음을 받아들이자마자 충격에 빠졌다는 거죠. 하나님이 누구냐에서부터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줄 수 있느냐, 이런 신앙 간증을 하려면 굉장히 시간이 걸리니까, 이 쪽복음을 들고서 예수를 영접하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이분은 터키에서 정식적으로 출국 금지되어 있는 그러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번 총회에 어떻게 왔냐? 우리가 터키에 있는 영사관이죠. 거기다가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분은 꼭 우리 모임에 필요해서, 이분을 강사로 초청하는 거니까 영사관에서 비자를 내 달라는 식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뿐만이 아니라 여러 명이 많이 기도를 했죠. 비자가 제대로 나오기를. 그런데 감사하게 이 목사님과 그 아내가 비자가 나와서 미국을 방문하게 됐고, 또 중국 땅에서 미국으로 들어오는 게 요즘 굉장히 힘들지 않습니까? 비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황인데 중국 땅에서도 이렇게 왔고.
제가 왜 이 올한 목사님을 소개해 드리냐면, 터키는요. 지금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혀야 됩니다. 이 얘기는 뭐냐면 우리가 다 아이디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신분증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런데 터키는 거기 밑에 종교란이 있어 가지고 종교가 어떤 종교냐라는 것을 쓰게 되어 있다고 그래요.
대부분이 터키가 무슬림 국가이니까 무슬림이라고 쓰겠죠. 그런데 이 올한 목사님이 예수를 믿고 청년 때에, 장가 전에 자기는 크리스천이라고 이렇게 썼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거를 접수하는 행정 요원이, 행정직 사람이 그것을 받아주는 걸 굉장히 망설이더래요.
받아줄까 말까, 다시 “너 정말 이 란에 크리스천으로 기록을 할 거냐?” 여러 번 이렇게 물었는데, 이 올한 목사님은 끝까지 “내가 크리스천이다. 그렇게 써도 상관이 없다”라고 얘기를 했다는 거죠.
무슬림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지금도 생명을 내놓고 믿어야 되는 그 상황입니다. 터키는 그래도 미국과의 관계가 좋기 때문에 조금 이런 종교적인 문제로 인한 인권 문제, 이런 것들은 긴장을 하는 나라지만, 이런 아이디에다가 쓰는 그 순간 이 사람은 취직도 안 되죠. 또 사회 활동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취직할 때 이력서를 써서 제출하라고 그러면 종교란이 크리스천으로 이렇게 쓰이면 받아주는 문제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그 순간, 믿음을 지키겠다, 신앙을 지키겠다고 자신이 선포하고 아이디에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기록되는 순간, 그 사람은 무슬림 사회에서는 영원히 추방되듯이 불이익을 당하는 그런 경우라는 거죠.
참, 그러고 보면 우리는 예수님을 너무나도 쉽게 편안하게 믿습니다. 조금만 몸이 안 좋아도 우리는 영상으로 예배를 제공하기 때문에 집에서도 예배를 드리는 그러한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게 우리가 어떤 불이익을 당하는지, 우리는 전혀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면서 살아갑니다.
감사할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다, 이런 것을 망각하는 순간 그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지식적으로만 알게 되는 하나님으로 전락한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우리의 모든 자세가 달라질 거고, 또 우리의 예배가 달라질 거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달라질 거라는 그런 얘기죠.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이 말씀은 이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어떤 것으로 올무를 엮을까? 예수님을 어떻게 말의 그물에 걸리게 해서 예수님을 잡을까 연구를 하던 가운데 나온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두개인들이 형제들이 일곱이 있는데 하면서 쭉 예수님께 얘기를 하고, 너희들이 참 어리석다. 천국은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는다는 그런 말에 사두개인들이 이제 뒤로 물러선 거죠. 예수님은 도대체 말로다가 잡을 수가 없구나.
세금을 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라는 그 질문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드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라는 것으로 첫 번째 그 올무에서 벗어났고, 두 번째, 그리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오는 것이 이제 세 번째 올무로 예수님을 엮을까라는 그러한 내용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34절 말씀을 이렇게 보시면, 34절에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사두개인들이 물러가자 바리새인들이 다시 왔습니다. 지난번에도 설명을 한 것처럼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없고, 내세도 없고, 천사도 없고, 우리의 육신이 죽으면 영과 함께 소멸된다는 그러한 사상을 가졌던 사람들이고,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경제력이 집중이 되어서 모든 정치와 경제를 주도한 당시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그러한 부류였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이와는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다른 겁니다. 부활도 있고, 천사도 있고, 내세도 있고, 죽으면 하나님 앞에 간다는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죠.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사실 이 신앙적인 이유로 말미암아 같이 어울리려야 어울릴 수 없는 그룹들로 우리들이 보게 됩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말로 올무에 엮으려고 하다가 실패하자 이제 바리새인들이 다시 한번 나섰습니다. 그러고 나서 바리새인들이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말로 올무에 엮으려고 지금 예수님께 나왔다는 거죠.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누구를 대표 선수로 내보냈느냐? 여기 율법사를 내보냈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도 율법을 너무나도 잘 아는 그런 사람들이고, 율법을 너무나도 잘 지키는 그러한 사람들인데, 그 가운데서 특출한 사람들을 뽑아 가지고 예수님께 내보냈다는 거죠.
그러니까 다른 성경은 이 율법사를 가리켜 서기관이라고도 표현하고요. 또 다른 성경은 이 율법사를 가리켜 교법사, 그러니까 법률을, 율법을 교육하는 사람으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식으로 쉽게 얘기하면 한 신학대학교 교수님 정도 되겠죠. 그러니까 신학생들도 하나님 말씀을 잘 알고 있는데, 거기다가 말씀을 가르치는 교수님을 예수님께로 내보낸 거죠. 이유는 말로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올무에 엮을 거라고 이렇게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율법에 관한 전문가 수준들이죠. 그런데 전문가들을 길러내는 교육자로서 선생님이 예수님 앞에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요. 우리들이 쉽게 생각할 때는 십계명이 있지 않습니까? 열 가지. 그게 대표적으로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는 것들과 하지 말라 하시는 것들이 남겨져 있는 그러한 내용들인데, 이러한 율법들을 세분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제사할 때는 제사법이 필요했고, 일반적으로 생활을 할 때는 일반적인 생활들 속에 있는 의식들, 예를 들면 어떤 음식을 먹느냐 마느냐, 이런 의식법들이 그 안에 담겨져 있었다는 거죠. 그런데 그 숫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가르치는 이 선생님들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그마치 613개로 잘라서 했습니다. 그 가운데 지켜야 되는 적극적인 내용으로 된 게 248개. 그러니까 우리가 십계명도 제대로 지키지 못해 가지고 쩔쩔매는데, 적극적으로 해야 될 것이 248개라고 하니 어떤 것 하나 걸려도 다 걸려 있는 거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소극적으로 지켜야 할 그런 율법들은 1년에 365개, 365일 날마다 지켜야 된다는 의미에서 365개로 이렇게 율법을 나눈 겁니다.
그러니까 이 바리새인들이 613개의 율법들을 세밀하게 잘라 가지고 살면서, 우리가 어떤 것을 지키고 어떤 것을 해야 되고, 이런 모든 그들의 삶이 율법 속에서 시작하고 율법 속에서 하루를 마치는 그러한 일상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일주일에 한 번 모여서 드리는 예배도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뜻과 정성을 다해서 정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데, 이들은 1년 365일 내내 삶 속에서 이것도 지켜야 되고 저것도 지켜야 되고, 이것을 말아야 되고, 이런 율법 준수 속에서 살아간다고 하니 그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이들이 알고 지키겠느냐?
정말 어떤 것들을 하라 했을 때에, 아 이거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셨으니까 이거는 해야지. 어떤 것들은 하지 말라라고 얘기를 했을 때, 아 이거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안 해야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극히 드물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습관적으로 이것들을 행했다는 것이죠. 습관적으로 행하다 보면요, 어떤 일들이 발생이 되냐면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정신을 잃어버립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것을 이렇게 하라고 하셨지라는, 율법을 주실 때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마음, 정신, 지켜야 되는 이유, 이런 것들을 습관적으로 하면 잃어버리게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얼마나 유대인들이 참 심하다고 이렇게 표현할 정도로 율법을 이렇게 나눠 놨다는 것을 우리들이 보게 되는데, 당시에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자랑이 무엇이었냐면 항상 율법을 연구하고, 연구한 율법을 서로 토론하고,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 줄 그들은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그 정신을 모르고 억지로 이것을 지키면서,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구나라고 스스로 생각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들은 열심히 율법을 연구하고, 연구한 율법을 서로 토론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 이런 것들을 나누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중세 시대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냐면,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함께 모여 가지고 율법을 연구하고 토론하면서 어떤 토론까지 일어났다는 기록에 의하면, 저 바늘 위에 천사가 몇 명이 앉을까? 몇 명의 천사가 저 바늘 꼭대기에 앉을까? 이것을 놓고 토론을 했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한심한 겁니까? 이 내용의 중심에서 벗어났을 때 일어나는 그런 일들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들이 이제 나오는데, 35절과 36절을 보시면, “그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절에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613개의 계명, 이런 것들을 쭉 해 놨다고 얘기를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들 가운데서 어떤 것이 제일 큰 계명이냐? 여기서 이제 크다는 얘기는 우선순위가 뭐냐라는 의미가 여기에 담겨져 있는데, 이 613개의 계명들이 쭉 있는데 어떤 것을 우선순위로 지켜야 되고 어떤 것이 먼저냐라는 그 질문을 여기서 던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이제 올무가 된 것이죠. 율법사가, 교법사가 나와 가지고 예수님께 던진 질문. 예수님을 책잡기 위한 그 질문이었다는 겁니다.
당신은 우리들이 이 율법을 이렇게 쭉 나눠 놨는데 어떤 것이 제일 크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얘기를 하면서, 어떤 것이 크고 어떤 것이 나쁘고라고 얘기를 하면 율법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것들인데, 어떤 것을 지키고 어떤 것을 지키지 않으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다라는 것으로 예수님을 책잡기 위함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 어떤 것이 큽니까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어떤 것이 우선순위냐?
율법들이 가끔 보면 충돌하는 그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십계명 안에 있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그 계명이 있고, 또 너희 부모를 존경하라라는 이러한 계명이 여기에 남겨져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부모님을 존경하는데 부모님의 생신이 안식일에 딱 걸리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안식일을 먼저 지켜야 되는 겁니까? 부모님을 먼저 공경해야 되는 겁니까? 그 어느 것이 더 크냐에 딱 걸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 계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건데 이건 안 지켜도 되는 것이냐라고 이제 올무에 걸리는 거죠. 어느 것이 중요하고 어느 것이 먼저냐는 겁니다.
뭐 아침에 예배드리고 저녁에 부모 생신을 차려드리면 되겠다, 뭐 이런 빠져나갈 구멍도 있겠지만, 이들은 이런 충돌하는 그런 것들이 많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서로 토론을 하면서 어떤 것들을 우선순위로 할까를 쭉 정리해 놓았다는 것이죠. 그것을 예수님께 이제 들고 간 겁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물어요.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 어느 계명을 우선순위로 해야 됩니까라는 그 질문을 여기서 하게 되는데, 예수님이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37절에서 38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여기에서 지금 율법에 대한 핵심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율법을 지킬 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어떤 직무를 지키느냐?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우리의 목숨을 다하고, 우리의 뜻을 다해서 우리가 이것을 지키느냐?
우리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여기라라고 얘기를 했을 때에 지키는 그 안식일이,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우리가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지키는 안식일이 되느냐?
오늘 식으로 얘기를 하면, 너희들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라고 주께서 우리들에게 명령하실 때, 그 거룩하게 지키는 의미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우리의 목숨을 다해서 우리가 이것을 지키는 것이냐라는, 그것을 주신 정신이 무엇이냐, 그것을 주신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우리들이 먼저 생각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인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크고 먼저 되는 우선이냐?
이스라엘 민족들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신명기 6장에 이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신명기 6장 5절 전에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이스라엘아 들으라”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하나님은 오직 유일하신 여호와이시니”라는 그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우리의 마음과 뜻과 우리의 정성과 목숨을 다해서 그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요구합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느냐?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애굽 땅에서 그들이 노예로 살아갈 때, 자유가 없을 때, 아무런 힘이 없을 때, 유일하신 그 하나님께서 이들을 건져내사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시며 그들에게 자유를 주시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신 그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 안에 담겨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께 저번에 한번 그런 말씀을 드렸어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얘기를 했을 때에, 첫 번째 창세기에서 나오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 안식하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의 그 창조하심에 대해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명령하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명령하는 것이 어떻게 바뀌게 되냐면, 이제는 출애굽기에 와서 이스라엘 민족들이 애굽 땅에서 노예로 살 때 구원해 내지 않습니까? 그러고 나서 광야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모세가 십계명을 비롯해서 그 율법들을 주게 되는데, 여기에는 어떤 내용으로 드려져 있냐면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너희를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내신 여호와로 말미암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가 있는 거죠. 창조주 하나님께, 또 우리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께,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들이 묵상하고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얘기하는 거거든요.
그것을 지금 예수님께서 이야기하고 있고, 이것을 요한 사도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라는 그 얘기를 성경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도 계속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얘기를 하면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쭉 이야기한 것을 우리들이 알게 됩니다.
여러분들 중국말로, 한자로 사랑 자, 여러분들이 한자 잘하시는 분들이 있으시니까 알 겁니다. 그 사랑 자를 보게 되면 중국 한자들은 참 성경에 있는 말씀과 굉장히 많이 복음적입니다. 전부 다가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복음적이에요.
그러니까 배 선자 같은 경우도 노아의 방주 안에 사람들이 타지 않습니까? 여덟 식구가 그 안에, 배에는 여덟 사람이 탄 것처럼 이제 표현을 했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사랑 애자 같은 경우는 이렇게 보면 어떤 내용으로 되어져 있냐면, 마음을 감싸 주고 같이 걷는 것을 사랑이라고 얘기합니다. 사랑의 자가 그렇게 쓰여 있어요. 안에 마음 심자가 딱 들어 있는데, 마음을 감싸 주고 함께 걷는 겁니다.
그러니까 한자에서의 사랑이라는 표현은 어떤 표현이냐면, 말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함께하는 것. 저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중학교 때부터 조선일보를 봤어요. 거기에 이규태 코너라는 게 있어 가지고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그걸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거기에 한참 가다 보면, 제가 그 작가의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미국 작가예요. “사랑이란” 이런 시리즈를 계속 만화로, 그림으로 그려서 연재한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두 사람이 함께 한 방향을 바라보는 것, 뭐 이런 여러 내용으로 사랑에 대해서 쭉 얘기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 가운데 참 웃긴 게 뭐냐면, 그녀가 스파게티를 좋아하면 함께 먹어 주는 것. 그러니까 나는 짜장면을 좋아하는데 그녀가 스파게티를 좋아하면 함께 먹어 주는 것, 이게 사랑이라고 얘기를 해요.
그러니까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것이죠.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얘기를 할 때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으로, 행위로 옮기는 것을 사랑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도 아하브라는 이런 단어가 사랑이라는 단어인데, 이것도 우리의 마음으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으로 함께하는 것, 이것이 사랑이라고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그러니까 가장 대표적으로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하면서 쭉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보면 전부 다 이 사랑이라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상대방을 위한 것들이에요.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이런 내용들이 쭉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부 다 다른 상대방을 위함들이라는 것이죠.
그 얘기는 뭐냐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리고 사랑의 원인,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우리들이 사랑을 흘려 내보낼 수 있다고 얘기를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이야기는 하지만 행동으로 우리 이웃들에게 이것을 옮기지 않는다면 온전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이 말씀을 성경에서 우리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 모세가 우리에게 전해 준 율법, 유대인들이 세분화했던 613가지의 율법, 모든 것 안에 함축되어져 있는 모든 것을 지탱하고, 한마디로 딱 축소를 한다고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 온 율법이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그 내용이고, 선지자들이 지금까지 와서 외쳤던 그 내용 모든 것들이 함축되어져 있는 내용이라고 우리들에게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아까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절대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근원이 흘러와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이 말씀을 하신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냐면, 율법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알라는 그 얘기로 지금 율법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신앙생활이나 아니면 우리 이웃들의 교회나 우리 교회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여러분들이 한번 들여다보시면 실질적으로 가져야 할 이 율법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우리들의 삶 속에서 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여러분들이 다시 한번 깨우치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느냐? 그렇다면 남을 대접하라. 내 이웃을 먼저 사랑해 봐라. 이것이 율법이다. 이것이 선지자다. 선지자들이 이 얘기를 한 거다라는 그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 얘기를 들은, 율법의 정신이 어디서 나오느냐라는 얘기를 들은 율법사가 누가복음에 보면 이런 질문을 합니다. 누가복음을 한번 살펴볼게요.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나,” 여기서는 율법 교사라고 얘기를 하죠.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여기서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을 하죠. 마태복음에서는 어느 계명이 큰 겁니까라고 질문하죠. 질문의 차이가 조금 다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쭈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님께서도 하시는 말씀이 네 대답이 옳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내용이다. 네 대답이 옳다. 가서 너도 이렇게 행하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로만 고백하지 말고 사랑을 실천하라고 얘기를 하자, 이 율법 교사가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그렇다면 누가 내 이웃입니까? 내가 사랑해야 될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입니까라고 예수님께 다시 질문하죠.
그러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여기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그런데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 예배를 드리러 가야 되니까 바빠서 그냥 갔고, 레위인이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 소를 잡는데, 양을 잡는데 거룩해야 되는데 이것을 도와주면 내가 한 주간을 쉬게 되니까 못 도와줘서 그냥 지나갔고,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 정성껏 치유해 줬다. 누가 내 이웃이냐라고 그 율법 교사에게 묻죠.
어떤 행동을 한 사람이 정말 내 이웃이냐라고 율법 교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가 조금 잘못하는 게 그런 것 같아요. 우리 교회는 다른 사람들에게 장학금을 안 주니까 우리는 잘 없습니다. 아예 안 주니까. 그런데 교회에서 장학금을 주면서 꼭 예수를 믿는 자, 세례교인 이상, 뭐 이런 조건을 붙여놔요.
장학금을 주면 필요한 사람한테 주는 게 맞죠. 사랑도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게 맞죠.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면 저 사람이 엉뚱한 행동을 할까? 내가 저 사람에게 장학금을 주면 저 사람이 엉뚱한 행동을 할까? 저 사람은 예수를 안 믿으니까 우리 교회에서 장학금을 줄 수가 없어. 이런 잘못된 것을 우리들이 하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 이웃이 누구냐라고 얘기를 할 때에, 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으로 한계가 없이 이 사람을 치유해 주고 적극적으로 도와줬다는 그 내용을 이 율법 교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얘기를 했다라면, 여기에서 나오는 율법 교사는 자기가 스스로 이 율법에 대해서 설명하는 그런 내용으로 되어져 있다는 거죠.
39절에 아까 말씀을 드린 것처럼,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첫째, 둘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동일한 선상에서 하나님을 사랑했다라면 당연히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그 샘물이 흘러나와서 사랑할 수가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 결론적으로 예수님과 지금 바리새인들과의 다툼이지 않습니까? 신앙을 형식적으로 하고 잎만 무성한 그런 무화과나무와 같은 바리새인들과 예수님과의 그런 다툼이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장 마음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은 무엇이냐면, 저 사람은 참 종교성도 아니고, 일주일에 두 번을 금식하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하고, 종교성은 너무나도 좋은데 그것이 형식적이다 보니까 예수님의 마음이 너무 아픈 거죠.
그래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은 신앙이라고 이렇게 표현한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모든 것들이,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또 전도를 하고 우리의 이웃을 돕고,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나타내기 위한 형식적인 것으로 흘러가 버린다라면 오늘날 우리가 현대를 살아가는 바리새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가 꼭 그렇게 하라고 해도 우리는 할 수가 없는 것들이 더 많지만,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정말 아직까지 안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하나님 아직까지 안 됩니다. 어떻게 하죠?” 물어보는 겁니다.
마음을 내놓는 것이죠. 안 되면 하나님께서 주시겠죠. 사랑할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을. 그런데 안 되는데 억지로 해서 그냥 겉모양에만 나타내는 것보다, 안 되면 하나님께 안 된다고 고백을 하라는 것. 이게 그 율법에 있는 정신을 온전히 알고 있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죠.
그러고 나서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모든 것들이, 성경이 얼마나 두껍습니까? 하라는 것들도 많고 하지 말라는 것들도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딱 압축을 해 버리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안에 다 담겨 있다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이 기억하시고, 여러분들 안 되는 것 한번 해 보십시오. 가까이 있는 이웃 한번 사랑해 보십시오.
그러고 나서 다음 주에 또 뵙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나오는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목숨을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뭐냐면, 유일하신 그 하나님만이 우리의 창조주 되시고, 유일하신 그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주관자가 되시고, 우리의 주인이 되시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살아갈 때에, 아무런 소망이 없이 살아갈 때에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되,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신 구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동시에 이렇게 이루어지죠.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그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되 그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신 그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지금 예수님께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 내용 안에 참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가 뭐냐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모든 것들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겁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얘기를 했는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이웃을 도저히 사랑할 수가 없는 것. 그러니까 이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와서 이웃 사랑으로 나아간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어떤 것이 중요하고 어떤 것이 가볍고 이런 것들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에서 우리의 이웃을 바라보니까, 저 영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영혼인데, 저 영혼도 하나님께로 돌아올 영혼인데, 이런 긍휼한 마음,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서 우리 이웃들을 사랑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웃들을 어느 정도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냐면, 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너를 좋아하고 너를 따르고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것은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사랑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은 내 원수를 사랑하는 거다. 그리고 너를 미워하는 사람, 너에게 해코지하는 사람,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이 하나님께서 요구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수까지 어떻게 사랑하느냐,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느냐라고 우리들은 많이 생각을 하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와 우리의 이웃들을 사랑하되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까지, 우리의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그 사랑을 우리들이 하게 된다는 거죠.
이탈리아 사람들이 자랑하는 그런 성자가 있습니다. 성 프란체스코라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평화의 사도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이탈리아 사람들이 굉장히 프라이드하게 생각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성자가 있다라고 얘기를 할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나라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라고, 우리나라도 이분이 별명이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그 별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손양원 목사님은 우리나라 교회 역사에 있어서 참 내세울 만한 그런 목사님입니다.
그분이 어떤 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그분을 기뻐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느냐 하면, 여수·순천 사건을 통해 북한 쪽에서 이렇게 쭉 밀고 내려왔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내 친구들 또 내 이웃들 그런 사람들이 공산당으로 살기 위해서겠죠. 공산당으로 돌아서서 공산당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그런 사건이 있었지 않습니까? 우리 역사의 비극이지만.
그렇게 친하던 친구들이, 같이 있던 이웃들이 어느 순간 이렇게 공산당으로 변해서 사람들을 막 고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손양원 목사님이 얼마나 고발하기가 좋습니까? 목사님입니다라고.
그런데 그 손 목사님께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이 청년 하나가 공산 청년이죠. 청년 하나가 그 두 아들을 고발해서 죽이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손양원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보니까 원수도 사랑하라 얘기를 하셨는데, 목사인 내가 저 사람을 저주하면 안 되겠다라고 해서 그 사람을 사랑했는데, 어느 정도까지였냐면 자기의 양자로 이렇게 들이게 되죠.
그러니까 그냥 용서한 것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는데 내 양자로 우리에게 들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 이게 할 수 있는 겁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인 겁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그분을 자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낸 위대한 사람 정도로 우리들이 생각을 하는 거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가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원수들을 절대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우선순위가 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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