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2:23~33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 seattleomc
- Jul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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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이 기도해 주셔서 건강하게 잘 다녀왔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 아시죠?
아멘.
아멘.
보이지 않아도, 어디 있는지 몰라도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 기억하십시오.
우리 역태용 권사님 내외분이 계시는데, 그 어머니께서 저에게 가끔 만날 때마다 그러세요. “목사님 모르죠? 제가 새벽마다 기도하는지 모르지요. 충성된 말씀으로 수고하게 해 달라고 부탁해요.”
굉장히 오래전 일인데, 제가 그 얘기를 꼭 마음에 담습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위에 있던 걱정이 사라진다고 생각이 됩니다.
총회에 가서 귀한 선교사님을 만났어요. 저를 개인적으로 이렇게 부르더니 “목사님, 얘기가 있습니다”라고 한쪽으로 불러서 좀 얘기하고 싶다고 해서 쾌히 그 얘기를 좀 들어줬습니다.
하는 얘기가 뭐냐면, 선교지에서 너무나도 영적으로 외로움을 느낀대요. 파라과이에서 선교를 하시는 선교사님인데, 누구도 자기를 위로하는 사람들도 없고, 지금까지 물질로 후원했던 교회가 목사님이 바뀌는 바람에 목사님과 친분이 없다 보니까 이 후원금이 끊긴 거예요.
그러니까 후원금도 없고,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것은 뭐 먹고사는 문제야 여기나 저기나 붙지 않겠습니까? 전혀 문제 없는데, 누군가 나를 위해서 기도할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생각이 들어서 영적으로 굉장히 외로움을 느낀다는 이러한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선교사님 손을 붙들고, “선교사님은 모르지만 우리는 3년 전부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선교사님이 깜짝 놀라더라고요. 전혀 친분도 그렇게 많이 없는 교회가 기도로 돕는다 하니까 영적으로 힘을 얻는다고 생각이 됩니다.
제가 그 선교사님을 볼 때에는 총회를 가면 한쪽 구석에만 이렇게 무쌍하게 계세요. 어떤, 뭐라고 해야 되나요? 이런 표현이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비즈니스 잘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이 사람 찾아가고 저 사람 찾아가고, 많이 얘기하고 자기 편 얘기하고, 관심 끌고 하면서 선교지 헌금을 좀 많이 끌어들이는 유능한 사람들인 거죠.
못하는 사람들은 못합니다. 그런데 이분은 전혀 그거를 못하는 분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께서 귀하게 드린 선교비를 이분에게 많지는 않지만 전달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너무나도 감사한 거죠. 물질적으로도 끊긴 줄 알았는데 덜컥 이렇게 섬김도 받고, 우리 교회가 3년 전부터 기도한다는 그 말을 듣고 영적으로 그렇고.
그래서 “선교사님, 혹시라도 여유가 되고 시간적인 여유가 되면 들려오셔서 모습을 좀 나타내 보여라.” 그래서 6월 첫 주에 시간이 된다고 해서 오시기로 했습니다. 이제는 선교주일로 해서 우리들이 섬길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타국에서 사는 것 자체만도 힘든데, 거기서 20년 이상, 25년 이상을 그 땅에서 선교사로 살아가는 모습이 굉장히 가엾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러나 우리가 기도로 볼 수 있다는 소망이고.
우리 선교부장님 잘 들으세요. 우리가 저번에는 염소를 20마리, 우리 민영기 집사님 재능 기부하셔 가지고 기부했잖아요. 그 가정에 한 염소가 한 마리인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큰 재산인 거예요. 여러분들은 그냥 그림 하나 사 줬을 뿐이지만, 그 돈이 아프리카 우간다 땅에 전달이 되어서 염소를 20마리를 사고, 한 가정당 한 마리씩 이렇게 준 겁니다.
그래서 파라과이에서는 뭐가 필요하세요? 물어보니까 축구공이 제일 좋대요. 축구공 하나가 그 동네 아이를 살린다. 아주 축구공이면 보물을 얻은 것처럼 이렇게 한다고 얘기를 하셨습니다. 몇 개 준비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오만 땅의 선교사님 세 분, 각각 이름에 보냈고요. 그리고 우리가 돕는 최영희 선교사님, 그리고 중국 땅에서 김영희 선교사님 오셔서 도왔고, 또 파라과이 선교사님인데 6월 첫 주에 아마 오실 것 같고요. 그 선교사님, 또 여섯 분 선교사님께 여러분들의 귀한 헌금을 이렇게 전달을 했습니다.
멀리서는 아르헨티나에서, 또 멀리에서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도 함께 와서 굉장히 영적으로 즐거운 그런 시간이었고, 원래 임동선 목사님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임동선 목사님께서 이 모임을 만들어 보신 가장 큰 목적은 뭐냐면, 목사님들은 성도들의 대접으로 대접을 잘 받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모님들은 대접도 못 받고 교회에서 눈총만 받고, 그래서 사모님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이 모임을 만들었는데 정작 즐겨야 할 사모님들도 많이 안 오셔서 많이 서운했습니다.
아무튼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도 기억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떻게 믿습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죠.
아멘.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지금도 나와 함께하신다는 이 믿음을 가지고 있죠. 그러면 먼저 예수를 믿다가 돌아가신 분들은 어떻게 하고 있대요? 그분들은 죽어 있나요? 그분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거하고 있어요? 부처를 들고 있나요?
살아 있어요. 여러분들도 영원히 산다고 얘기를 하셨으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분들도 함께 살아 있는 거예요. 오늘 말씀에서 그 얘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만 믿었는데, 아니에요. 예수를 믿다가 죽은 그분들도 영원히 산다는 그 개념 속에서 살아 있는 겁니다. 우리 육신적으로는 볼 수가 없지만 영적으로는 우리들이 느낄 수가 있는 거죠.
23절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23절을 보시면,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예수님 당시에는 이 조그마한 이스라엘 땅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도 인구도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파가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 네 개의 기득권이 이렇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거죠.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바리새인들. 바리새인들이 한 부류를 이루었습니다. 가장 많고, 이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열심이 굉장히 강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세 번을 기도하고, 일주일에 두 번을 금식했던 그런 사람들입니다.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했던 그러한 사람들이죠.
지금도 여러분들이 유대인들을 보면 금방 표시가 나죠. 모자 쓰고 수염을 이렇게 기르고 다니는 사람들을 볼 겁니다. 그분들이 아까 바리새파로 이렇게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은 부활도 믿고, 또 우리가 죽으면 영원한 천국을 간다는 것도 믿고, 그리고 천사가 있는 것을 믿고, 최후의 심판이 있는 것을 믿었던 그런 종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예수님한테 항상 먼저 대놓고 야단을 맞는 종파가 바리새인이었지 않습니까?
문제는 뭐냐면 잎만 무성하다는 거죠. 열매는 없고. 다시 말씀드리면 종교적인 행위는 나무랄 데 없이 철저하고 정말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될 정도로 열심히 종교 생활을 하지만, 그들의 문제는 남들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거죠. 하나님께 드리는 건데, 하나님께 예배하는 건데 남들에게 나타나려고 한다는 거죠. 이게 가장 큰 문제였던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덤 같다라는 표현으로 말씀하셨어요. 너희 겉은 너무나도 아름답게 됐지만 속은 온갖 썩어 가는 것들,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다. 이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질책을 받은 그런 내용입니다.
두 번째 종파로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두개파가 있습니다. 사두개인이라고도 이야기하죠. 이 사두개인들의 출발점은 솔로몬 시대 때 사독 제사장, 사독을 시조로 합니다. 그러니까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을 담당한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면 돼요.
그런데 이 성전 예배를 담당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로마에 드리는 세금, 그리고 성전으로 드려지는 세금, 또 인두세, 그리고 성전에서 화폐를 교환하면서 얻어지는 소득들,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제물을 가지고 올 때 이분들이 판별을 합니다. 이것은 제물로 드리기에 합당한 제물이다.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빠꾸시키죠.
왜 그랬느냐 하면 이 사람들이 팔고 있는 것을 사야지, 흠이 있어도 제물로 합격을 시키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죠?
우리들이 경기장 가면 안에서 사 먹으라는 것처럼, 안에서 온갖 것들을 하는 것은 괜찮을 겁니다. 밖에서 들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밖에서 만약에 뭐라도 하나 들고 가면 이게 불합격적으로 마음대로 조종을 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1년에 세 번 남자가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서 제사를 지내니까 거기서 나오는 소득들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그래서 정치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쌓았던 사람들, 이게 사두개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 사람들의 문제는 부활을 믿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물론적인 거죠. 사람이 육신이 죽으면 정신도 육신과 함께 소멸된다는 이게 유물론이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부활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또 최후의 심판도 없다고 생각을 하고, 천사도 없다고 생각을 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로마 정부와는 굉장히 협력적인 그러한 관계고, 로마 정부가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사두개인들을 통해서 세금을 거둔 그러한 사람들이었던 것이죠.
그다음에 세 번째 정파로는 열심당이라는 게 있습니다. 열심당은 우리나라 일제강점기를 생각하면 극렬한 무장 단체, 한 이 정도를 생각하면 여러분들이 이해가 빠를 듯합니다.
이스라엘도 로마의 속국으로, 로마의 점령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독립을 간절히 원했던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겠죠. 그런데 무장 투쟁하는 방법에 있어서 이들은 항상 이 품 속에 칼이나 단검을 품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협력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위협이었던 이런 정파였던 사람들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나서 어떤 사람들을 우리들이 또 보게 되냐면 에세네파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세네파. 에세네파라는 그러한 사람들은 이 세상과 아주 단절한 사람들, 지금으로 얘기하면 산속에 들어가는 사람들로 표현하면 될 것 같습니다.
산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그 속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공동체 생활하는 사람들. 이게 이제 쿰란 공동체라고 얘기를 해서, 이 사람들의 주 목적은 구약 성경을 필사하는 겁니다.
이 말씀이, 우리가 우리의 민족이 소멸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진다는 그 두려움에 이 말씀을 항상 필사했습니다. 필사를 해서 보전하자. 그래서 지금까지 성경이 남아 있는 겁니다. 이게 이제 에세네파가 주로 이루었고, 아마 세례 요한도 에세네파에 속한다고 생각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열심당에 대해서 아까 말씀을 드렸는데, 여러분들 지금도 이스라엘 땅으로 가면 마사다라는 요새가 있습니다. 이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최후의 항전을 했던 그곳이에요.
로마 사람들로부터 이스라엘이 70년에 막 무너지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예루살렘을 버리고 광야 한쪽에 마사다 요새에 올라가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이 요새는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두레박으로 이렇게 올려 주고, 또 사람이 내려오려면 내려오고 이렇게 살아갔던 것이죠.
그러다가 우연히 발각이 된 겁니다. 로마 사람들이 너희들이 항복하면 살려 주겠다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항전을 해요. 무려 몇 년간을 항전을 하냐면 6년 동안 항전을 합니다. 그 안에 976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도저히 견디려야 견딜 수가 없었고, 여러분들 영화 보면 “최후의 요새 마사다” 해 가지고 영화도 보셨을지 모르겠는데, 로마 사람들이 얼마나 지독하냐면요. 커다란 요새에, 로마의 지체가 한 이 정도 되면 이 정도 높이에서 이렇게 살아갔는데, 로마 사람들이 노예들을 붙들어 가지고 흙을 쌓아 올라갔습니다.
이 높이, 여기를 점령하고 여기를 진멸시키려고 그 흔적들이 지금도 이렇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골짜기로 비슷하게 이 요새의 높이처럼 흙을 쌓아 간 거예요. 그러니까 마사다 요새에서 사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서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방법이 없다 해서 죽는데, 어떻게 죽냐면 서로 찌르는 겁니다.
자살하면 천국을 못 가니까 서로 죽이는 겁니다. 마지막 최후에 한 사람이 남을 거 아닙니까? 마지막 한 사람까지 찔러서 죽인 거 다 확인하고 자기는 절벽에 떨어져서 죽는 겁니다. 마지막 한 사람만 이제 천국을 못 가는 그런 구조로 되어 있는 거죠.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의 육군사관학교 장교 임관식은 이 마사다 요새에 올라와서, 우리의 선조들이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지켰던 곳이다 해서, 뭐 대단하죠. 976명이 그렇게 죽어 가고, 로마 사람들이 올라가 보니까 기가 막힌 겁니다. 사람들이 다 죽어 있는 거예요.
그러다 용케 그곳에서 여자 두 명하고 어린아이 다섯 명이 숨어 있다가, 그 아이들과 여자 두 명이 살아납니다. 당시에 역사를 기록했던 요세푸스에게 우리가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얘기함으로 역사가 기록을 하고, 그 내용들이 지금까지 보는. 그러니까 신앙을 지킨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들이 굉장히 대단한 거죠.
그런데 오늘 이 네 파 중에서 사두개인들,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그런 내용인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안 믿고, 그리고 또 죽은 사람들이 영원히 사는 것, 천사 이런 것들을 다 안 믿는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말로다가 올무에 걸기 위해서 이 질문을 던진 거죠.
지난 주간에는 우리가 세금을 어떻게 내야 되느냐, 가이사에게 드려야 되느냐 하나님께 드려야 되느냐라는 것으로 예수님을 말로 올무에 빠뜨리려고 했다라면, 이제 두 번째 이 올무의 내용은 사두개인들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형제가 일곱이 있을까?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전통으로는, 우리나라도 예전에 그런 게 있었지 않습니까? 딸만 낳는 집안에 대가 끊기게 하지 않기 위해서, 삼촌이면 삼촌, 작은아버지면 작은아버지, 아들이 둘 있는 집에 그 남자를 입적을 시키는 그런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집안의 대를 이어가게끔 우리나라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에서는 신명기 25장에 이게 나오는 내용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명기 25장에 나오는 그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서,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첫 번째 형님이 아내와 결혼을 했다. 그런데 후사가 없이 죽었는데, 둘째가 결혼을 해서 그 형수에게 이제 자손을 보게 하는 그런 일이 있었죠.
그런데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형제가 일곱이 있었는데 첫째도 죽고, 둘째도 죽고, 마지막 일곱째까지 다 죽어서 후사가 없었는데, 그 여인까지도 마지막에 죽었다. 그랬는데 천국에 가면 왜 안 되냐? 여러분들 어떻게 증거를 하겠어요? 엄청 헷갈리죠.
이 부활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정말 헷갈립니다. 누구의 아내냐? 첫째 형님의 아내냐? 마지막 일곱째의 아내냐라고 그들이 생각을 하잖아요.
화장을 했는데 우리가 가루로 다시 살아날까 봐 팍 불로 태우고, 그것도 못 일어나서 가루로 만들어서 바다에 뿌리고 산에 막 뿌리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참 부활의 신비가 다시 살아난다는 거예요.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부활하는데.
그런데 이제 사두개인들이 하는 말이 그겁니다.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라고 얘기를 한 겁니다. 결국 신명기 25장에서 나오는 그 얘기는 뭐냐면, 여러분들 다말이라는 여인을 알죠. 다말이라는 여인이 후사가 없자 시아버지와 관계를 해서 후손을 낳지 않습니까?
자손을 이었으니까 윤리적으로나 인륜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이지만, 결국은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이 여인으로 등장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 다말이라는 얘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그 말씀은 무엇이냐면,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시는 하나님. 그러니까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겁니다.
다말은 방법이 없고, 인간적인 방법은 시아버지와 관계를 해서 시아버지를 속여서라도 자기가 후손을 갖고 싶은 그러한 것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모든 방법을 무너뜨리고라도 하나님이 원래 계획하시는 것, 하나님이 뜻하시는 것들은 어떤 방법으로도 이루어 나가겠다는 게 다말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는 성경적인 교훈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이제 신명기 25장에 나오는 이, 무슨 단어라고 해야 돼요? 이 후사라고 합시다. 후사에 관한 그러한 문제는 한 가정이 끊어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기를 원치 아니하셔 가지고, 그 가정이 온전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후손이 없으면 둘째가 형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후손을 낳게 하는 그런 제도를 만들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원래 이게 하나님의 마음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후손이 끊어질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하나님께서 그 방법을 제공하신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그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혼에 대한 교리를 지금 설명하려고 이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그 후손이 끊어지지 않게 주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두개인이 그 질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 29절을 보시면 뭐라고 얘기를 하시냐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원래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너희들이 지금 오해를 하고 있구나라고 주님께서 이야기하죠. 성경도 오해하였고, 하나님의 능력도 오해하였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여기서 오해를 하였다는 얘기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그런 의미가 있는데요. 어떤 길을 잃어버렸냐면, 사람들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방향을 잃어버렸다는 그 의미가 오해하였다는 그 의미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성경도 오해하였다. 신명기 25장의 말씀은 그 말씀이 아니다. 신명기 25장 말씀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시는 하나님, 기업이 끊어지기를 원치 아니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이야기를 하는 건데 너희들이 그것을 오해하였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결혼 제도를 만들어 보셨지 않습니까? 원래의 의미는 뭐냐면 사람이 나누지 못하는 것.그래서 요즘 현대 젊은이들을 보면,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 얼마나 성격이 급합니까? 욱하면 “그래 알았어, 그럼 이혼하자. 그래 알았어, 그럼 도장 찍자.” 헤어지고 후회할 것을 얼마나 쉽게 결정합니까? 우리 한민족은 참 대단해요. 아무튼 잘 살기로도 대단하지만 성격 급한 걸로도 아무튼 대단합니다.
원래는 그게 아니라는 것이죠. 왜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셨느냐?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다음에 부활하였을 때는, 부활의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갈 때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거죠.
그러니까 이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해서 주님께서 오해하였다. 너희들이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중심적인 것, 핵심적인 것을 너희들이 알지 못하노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많이 알지 않습니까? 많이 외우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질문하면 대답을 너무나도 잘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감동스럽죠. 옆에 있는 분들도 “야, 저분은 성경을 많이 아는구나”라고 생각하죠.
문제는 뭐냐면요. 많이 아는 만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내야 됩니다. 입만 무성해 가지고 하는 거죠. 내가 하나님 말씀을 많이 아는 만큼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고, 내가 하나님 말씀을 많이 아는 만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열매를 내놔야 되는데, 우리들이 때로는 지식적으로만 하나님을 알려고 하니까 이런 부분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부족한 우리들의 모습임을 보게 됩니다.
왜 그러냐? 내가 성경을 많이 아는데 왜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안 나타나고 열매가 없느냐? 왜 그러냐면요.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유익을 위해서 적용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영적인 방향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따라가야 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되는데, 이 하나님의 말씀이, 예를 들어서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들, 여러분들이 외우시는 그 구절들, 그런 것들을 나의 유익을 위해서 이 말씀이 적용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적인 방향 감각을 잃어버려서 우리 삶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안 나타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인 거죠.
지금 사두개인들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것을 지적하고 있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였다. 부활할 때는 모두가 하늘의 천사와 같다. 부활할 때는 장가도 가지 않는다. 시집도 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으로 살아간다고 지금 주님께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두개인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질문하는 것은 우리 인간 세상적인 관점 속에서 어떤 질문을 내던지는 겁니다. 이 말씀을 좀 쉽게 이야기하면요. 인간적인 관점으로 우리는 천국을 사모하고 그리고 있습니다.
천국은 무슨 길? 황금길이라고 생각을 하죠. 천국은 온갖 각종 보석이 막 쌓여 있는 그런 곳이라고 여러분들 생각을 하죠. 거기서 한번 비즈니스 하시면 잘 될 겁니다. 길이 다 황금이니까 뜯어 가지고.
황금길이다. 뭐 고속도로로 눌러져 있다라는 것은 우리 인간 세상의 어떤 관점으로 이렇게 천국을 바라보는 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두개인들의 질문도 마찬가지인 거고요. 천국은 황금길 이상이겠죠. 그런데 인간적인 세상으로 보면 황금이 가장 귀하니까 천국은 가장 귀하다는 그 표현을 그냥 황금길이라고, 각종 보석이 있는 곳이라고 우리들이 생각을 하죠.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는 사두개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세상적인 관점에서의 그 질문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는 모든 것들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부활이라는 것은 새로운 질서로, 새로운 세계로,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말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적당한 말이 없다고 생각을 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거죠.
주님께서 어렵게 부활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며, 또 바울 사도께서도 부활이라는 것에 대해서 막 이렇게 설명하고 계시는데, 우리 인간들을 설득시킬 만한 그런 것들이 확 들어오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이유는 뭐냐면 우리는 항상 세상적인 관점에서 그 틀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새로운 나라의 틀 속으로 들어가는 데 우리의 지혜가 부족하고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럴 때가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지금 오해하셨다고 이야기하시는데, 31절과 32절을 보시면,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시니.
이 32절 말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 중요하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얘기를 하시면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얘기를 할 때에, 살아 있는 하나님,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우리들이 먼저 한번 묵상해야 됩니다.
이 얘기가 주님께서 어떤 내용을 가지고 오셨느냐면,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 그 내용을 주님께서 인용하신 겁니다. 출애굽기 3장에 어떤 내용이 나오냐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모세야, 이제는 내 일 좀 하자. 하나님 일 좀 하자”라고 모세를 찾아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모세를 미디안 광야에서 부르는 그러한 장면이 출애굽기 3장에 등장하는 장면인데, 길으니까 짧게 성경을 말씀하고 그렇죠?
출애굽기 3장에 좀 더 분명하게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의 의미가 뭐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의미가 뭐냐? 출애굽기 3장에 좀 더 구체적으로 등장하는데, 13절을 보시면,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여기서 이제 스스로 있는 자, 스스로 있는 자를 이야기하시는데, 영혼의 대명인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계셨고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의 그 의미로 스스로 있는 자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5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면서 이 얘기를 지금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누구십니까? 당신이 누구십니까라고 이름을 묻지 않습니까? 이 이름을 묻는다는 얘기는 당신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계십니까? 당신은 어떤 역할을 가지고 계십니까? 이게 이제 이름 아래 함축되어진 의미겠죠.
그러니까 우리 누구누구를 부르면 누구의 아빠, 어디 사시는 이런 것들이 딱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다는 얘기는 당신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무엇을 하시는 분입니까? 나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이런 성품, 성질, 성격, 이런 것들을 묻는 거겠죠.
그때 이제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는 그 표현을 하십니다. 왜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느냐?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것은요. 신경질이 묻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모세는 이제 애굽의 왕궁에서 왕자 교육을 받으면서 다녔지 않습니까? 40년간을. 그러다가 40년이 지나서 어느 날 자신이, 내가 애굽 사람이 아닌데 히브리 사람이구나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죠.
그러다가 이 정체성을 깨닫게 되자 나가서 일하는 자기 동족들을 보니까 동족끼리 막 싸우고 다투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막 나무라다가 그 사람을 쳐서 죽이고 이렇게 숨기고, 그러고 나서 이게 발각되자 도망가는 게 이제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가서 40년간을 양을 치지 않습니까?
모세가 하나님께 이름을 묻는 것은 왜 그때 오시지, 잘나갈 때, 애굽의 왕자였을 때, 혈기 왕성할 때, 40세 때 그때 오시지, 왜 지금이야 오십니까? 지금은 나는 80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사느라 내 주변 사람들도 없습니다. 힘이 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나보고 뭘 하라고요? 애굽 땅에 가서 너희 동족들을 이끌어내라고?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는 그 의미로서, 지금 하나님께 대항하면서 따지듯이 묻는 게 “당신의 이름이 뭡니까?”라는 그 뉘앙스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공손하고 겸손하게 묻는 것이 아니라, 모세는 따지듯이 왜 그때 잘나갈 때 오시지, 왜 지금에 오시느냐라는 이 투덜거림 속에서 이야기하는 거죠.
그때 이제 여기 15절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다”라는 이 얘기를 하세요. 주님께서도 지금 하시는 말씀과 똑같은 내용을 얘기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그런데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무엇이며,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그 의미가 무엇이고, 야곱, 이삭까지 다 그 의미가 무엇이냐?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그 의미가 뭐냐?
하나님은 너희 조상들 때만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아니다. 아브라함 때만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아니다. 이삭이나 야곱 때만 함께하시고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고, 나는 살아 있는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이, 너희 조상들이 죽은 것 같지만 아니다. 너희 조상들이 영원히 나와 함께 거한다. 너희들이 볼 때 한 인생이 죽어서 끝이 나고, 그 삶이 마감하고, 그 삶의 등불이 꺼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믿음의 눈을 떠서 살아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라면 아브라함도 살아 있고, 이삭도 살아 있고, 야곱도 살아 있고, 너희 조상들도 살아 있다. 그 하나님이다라는 의미에서 나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만 건져도 오늘 여러분들 큰 은혜를 누리고 돌아가시리라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믿잖아요. 우리의 믿음만큼 하나님이 보이잖아요. 안 믿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가 없죠.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부활이라는 것이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제 사랑하시는 가족들을 먼저 보내시고, 이 다음에 천국에서 만나자, 천국 소망을 가지고 우리들은 이렇게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가끔 여러분들이 눈을 감으시고 생각을 하시면, 내가 이 다음에 만날 분이 아니라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나의 사랑하는 가족이고, 나의 사랑하는 분이고, 나의 사랑하는 우리 이웃들이고, 여러분들 그런 믿음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꼭 죽어서 우리가 그 나라를 소망하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그들도 살아서 나와 함께 한다는 그 믿음이 우리들에게 더 중요한 거죠. 그래서 산 자의 하나님이다. 살아 계신 자의 하나님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 우리 성도들이 사실 현실에서의 고달픔들이 있지 않습니까? 몸이 연약해서 누리는 고달픔도 있고, 또 어떤 분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느끼는 그런 고달픔도 있고, 어떤 분들은 남편이 속을 썩여서 힘들고 어려운 분들도 있고, 자녀가 속을 썩여서 힘들고 어려운 그런 분들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우리의 기도가 참 이런 그 안에서 너무 하나님에 대해서 한정 지어서 우리들이 생각하는 때가 참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뛰어넘는데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 그냥 내 몸만 건강하면 좋겠고요. 내 자녀만 잘되면 좋겠고요. 남편 속만 덜 썩이면 좋겠고요.” 이런 것들 속에서만 우리들이 기도하면서 살아간다는 거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해서 계속적으로 우리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믿지 않는 그런 성도들에게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전서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지막으로 한번 볼게요. 15장 보시면 고린도전서의 부활장이지 않습니까? 길어서 그냥 다 뛰는 거고, 잘라서 읽어 드릴게요.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내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아니하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여러분들 씨 많이 뿌렸죠? 지금 막 뭐가 막 자라나죠.
“어리석은 자여, 내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42절로 넘어가면,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리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우리가 약한 것을 심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강한 것으로 다시 나오게 하시고, 우리는 육신적인 것을 심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것으로 나오게 하시고, 우리는 연약한 것을, 아주 약한, 보잘것없는 것들을 심었지만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것으로 채우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들 코스모스 씨 보셨죠? 얼마나 볼품없습니까? 최소화 씨 같은 거는 꼭 뭐 어떻게 생겼어요? 쭈그러진 것 같이 이렇게 생기기도 하고, 씨를 보면 얼마나 볼품이 없습니까? 씨를 보면 지금 가지고 있는 꽃의 형상은 없지 않습니까?
씨를 보면 얼마나 형편없는, 물론 보기에 좋았더라라는 그런 씨들도 있겠지만, 그러나 코스모스가 피어나고 들꽃들이 피어나고 할 때에 그 씨들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들이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씨에서 어떤 희망을 가집니까? 전혀 희망을 가지지 않지 않습니까? 그냥 이거 뿌리면 나겠지라는 그런 믿음만 있을 뿐이지, 이게 아름다운 꽃의 모양으로 나올 거야라는 이 기대감으로는 우리들이 꽃을 심지 않잖아요. 그냥 뿌렸더니 꽃이 피어나지 않습니까?
나이가 들면 꽃이 아름다워 보인다라고 뭐 이런 얘기가 있는데, 여러분들 꽃을 보시면 우리 집도 어떤 권사님이 다른 꽃을 갖다 놔 가지고 들어갔다가 나올 때마다 야, 이게 참 아름답다. 꽃들을 견딜 수 있는 그런 꽃들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무늬도 똑같고, 색깔도 어쩌고, 거기는 하얀색이야. 여기는 뭐 누가 이렇게 색칠을 한 것처럼, 누군가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색칠을 하신 것처럼 그렇게 꽃들마다 모양마다 색깔이 있어야 되는데 색깔이 있고, 이 색깔이 있을 때는 거기에 그 색깔이 있고, 얼마나 보면 아름답습니까?
이런 얘기 하는 것 보니까 저도 이제 나이 아무튼, 우리가 씨를 보고서 그 형상의 즐거움을 보고서 씨를 뿌리지는 않지 않습니까?
여기서 지금 하시는 말씀이 육의 몸으로 심었는데 신령한 몸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썩을 것으로 심었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우리들이 나타난다고 얘기를 해요. 욕된 것으로, 볼품없는 것으로 심었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나타난다고 얘기를 해요.
여러분들 애벌레가 얼마나 징그럽습니까? 그러나 곤충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비가 그 화려한 날개를, 그 애벌레를 봐서 이게 이렇게 되지, 우리가 생각을 못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는 얼마나 초라합니까? 볼품이 없습니까? 하나님께 내세울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모습을 없애 주시고, 애벌레와 같은, 씨앗 같은 우리의 모습을 없애 주시고, 부활의 이 창조 세계의 새로운 질서에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우리들이 보기에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그런 모습으로의 변화, 이것이 이제 부활이라는 얘기죠.
그래서 주님께서 너희들이 오해했다라는 그 얘기는 성경 구절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세계의 질서, 회복하시는 이 하나님, 죽음을 물리치시고 그것을 뛰어넘는 그 하나님의 은혜, 너희들이 그것을 알지 못한다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모습은 씨앗 같은 볼품없는 그러한 모습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붙들고, 또 그 하나님을 믿고, 이런 모습에서 변화시켜 주실, 바꿔 주실 새로운 모습으로의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 이게 지금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과 답변하는 그 내용 가운데 남겨져 있는 그러한 내용들입니다.
여러분들, 어렵고 힘든 현실로 인해서, 또 혹시라도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마시고, 이 고귀한 것을 여러분들 놓치지 마시고, 하나님과 은혜 속에서 동행하시는 여러분들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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