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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22:1~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참 미국에 살면서 감사한 게 뭐냐면, 제가 딱 스탠더드입니다. 그래서 구제에 가면 허리 사이즈, 기장 딱 맞는 옷들이 수두룩하게 있습니다.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없어요. 허리 사이즈며 기장이며 지금도 잘 입고 있습니다.

네.

2주간에 걸쳐서 우리가 계속 포도원의 비유, 열매 맺는 비유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요. 오늘은 혼인 잔치에 관한 비유인데, 이 비유를 잘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비유가 어디서부터 출발했는가를 생각하셔야 됩니다.

오늘도 혼인 잔치의 비유로 연결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21장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그때부터 시작이 되는 거죠. 성전을 청결케 하시고, 그리고 아들에 대한 비유를 드시고, 포도나무, 포도원의 비유를 드시고, 그리고 나서 이제 오늘 말씀하시는 혼인 잔치에 관한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은 독립적으로 떨어져 있는 내용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 유대인들의 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 정치 지도자들, 장로들 앞에서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 비유로 드는 내용인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몇 주 동안 이 비유의 내용들을 잘 받아들이시고 잘 이해하셨다면, 그 맥락에서 오늘 본문도 이해하시면 어려울 것이 없다고 이렇게 생각되어집니다.

두말할 것 없이 이 혼인 잔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 우리가 가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그 잔치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그 아들이 혼인 잔치의 주인공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혼인 잔치를 할 때 주인공이 있듯이, 이 비유에서도 예수님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혼인 잔치의 비유를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이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청하는 사람과 가까운 사람들이 이제 청함을 받는 거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이유가 없이는 그 청함을 거절하는 것이 없을 텐데, 이들은 그 청함을 거절했고, 오기를 싫어했고, 부르러 온 종들을 잡아서 쫓고 죽였다는 것이죠.

이해를 못 하는 거죠. 여기에 임금이 노하여서 군대를 보내서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사르기까지 한 그런 일들이 전개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로 보기에는 납득하기가 어려운 내용으로 전개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2차로 이 임금이 종들을 보내서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는 그런 장면을 보게 되는데, 이 2차는 누구나 가릴 것 없이, 이제는 가까운 지인들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사람까지도 아무나 누구나, 그 사람이 젊은이든 그 사람이 장님이든 가릴 것 없이, 그 사람이 죄인이든 뭐 정욕 생활을 했든지 간에, 그 사람이 세리든지 창녀든지 가릴 것 없이 누구나 다 초청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 사람들이 잔치 자리에 들어오자 그 잔치 자리가 가득 찼다라는 이런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왕이 이렇게 들어와서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왕이 베푼 예복을 입었는데 어떤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묻기를 “형제여, 어찌하여서 네가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라고 이야기하자, 이 사람은 입은 있는데, 입은 있으되 말은 하지 못하는, 아무 말도 못 하는 그런 상황에 이르렀다는 거죠.

그때 임금은 노하여서 이 사람을 붙잡아다가 바깥 어두운 데 내쫓아 버리라고 얘기했더니, 그 사람이 바깥 어두운 데서 내쫓겨 이를 갈고 있었다라는 이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비유의 결론이 어떻게 이루어지냐면, 청함 받은 사람은 많지만 택함 받은 사람은 적다라고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 사실 이 본문의 내용이 굉장히 풍성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도 풍성한 것들이 많이 있고, 내가 어렸을 때부터 장로교회에서 자랐느냐, 아니면 웨슬레안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했느냐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내용도 다 각각 다른 그런 내용들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이런 신학적인 부분, 이런 교리적인 부분은 다 배제하고, 우리가 이 말씀 가운데서 성도들이 신앙생활할 때 어떤 모양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될까만 몇 가지 추려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 비유는 앞에 나오는 두 아들의 비유와 포도원의 비유와 연결된 그러한 비유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유대인들의 종교 지도자, 정치 지도자들 앞에서 그것을 증명하는 데 이 말씀이 사용되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택함이 무엇이냐? 예복이 무엇이냐? 이런 일반적인 것을 이해하려고 여러분들이 생각하지 말고, 그냥 포도원에 사람들을 보냈는데 나중에 종들을 다 잡아 죽이고, 아들까지 보냈지만 안 죽였더라는 이 내용을 여러분들이 열쇠로 생각하셔서 이 비유의 내용을 조금 이해하시면 좀 더 편안하리라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여기에 신학적인 생각, 여러분들이 개입하지 마시고. 그러나 설교가 끝나면 여쭤 보셔도 됩니다. “이게 이런 거 아닙니까?” 얘기를 하면 충분히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왕이 초청한 사람들은 이스라엘로 이렇게 비교를 할 수가 있겠죠. 그리고 초청한 종들은 선지자들로 우리들이 표현을 할 수도 있고요. 그리고 나서 그 아들은 메시아로 이렇게 표현을 할 수 있겠습니다. 메시아까지도 이들은 다 거부를 했다는 거죠.

그런데 4절 말씀을 한번 보시면, 오기를 싫어하는 이 사람들을 향해서 왕이 다시 한번 초청을 합니다. 4절을 보시면,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여러분들, 현대 시대가 아니라 고대 시대에는 먹을 것이 거의 없던 그러한 시대입니다. 여러분들 건빵들 다 들어보셨죠? 우리가 간식으로 건빵을 먹던 세대 아닙니까? 거기에 별사탕까지 하나 나오면 이게 웬 횡재냐 해 가지고, 그것만큼은 뺏기지 않으려고 싸웠던 그런 세대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랄 때만 하더라도 먹을 것이 그렇게 풍성하지 않은 그런 세대를 살았지 않습니까? 해외에서 온 원조 같은 보급품들을 받아서 거기에 나오는 깡통이나 이런 것들을 먹었던 그런 기억도 있고요.

고대 사회를 우리들이 생각하면 이때는 먹을 것이 굉장히 풍성하지 못했던 그런 때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루에 두 끼밖에 못 먹었어요. 아침 10시, 저녁 6시, 두 끼밖에 먹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이게 습관이 돼서 현재도 유대인들이 두 끼밖에 먹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죠. 우리나라도 원래는 아침과 저녁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말이 점심이라는 것은 중국 말이죠. 오찬을 먹는다, 이런 것들은 다 중국말이죠. 우리나라만 해도 아침, 저녁만 먹었던 그런 때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학교에 도시락 싸서 가면 선생님이 도시락을 검사했던 그런 시절도 있었습니다. 쌀만 싸 왔느냐, 아니면 보리쌀이냐. 그래서 그걸 뒤집어서 또 먹는 그런 아이디어도 생기기도 했고요.

아무튼 먹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던, 힘들었던 그런 때를 살았는데, 이때 고대 시대 때 왕이 잔치에 초청을 한다. 여러분들 우리에게 초청장이 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아마 몇 끼 정도 굶고 이때 왕창 먹으려고 준비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그렇죠?

그런데 왕이 초청을 했는데 이들은 가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왜 안 갔을까? 이들에게는 그 잔치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이 생각할 수가 있겠죠. 그러니까 하나님 편에서 보면 굉장히 미련한 것인데,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잔치보다, 그 음식들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가 그들에게는 있었다는 것이죠.

그 무언가가 무엇이냐면 그들의 일상입니다. 그들의 일상적인 생활들, 그러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소유, 이런 것들이 더 중요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현대식으로 얘기하면 내가 운동 가는 게 더 즐겁고, 내가 사우나 가는 게 더 즐겁고, 내가 영화 보러 가는 것이 더 즐겁지, 귀찮게 왜 나한테 잔치에 오라고 그래, 막 이런 것과 마찬가지죠.

그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게 굉장히 중요한 건데, 그것을 청함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기의 일상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것들이겠죠.

그런데 이 내용이 마태복음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에서도 비슷하게 이렇게 등장을 합니다. 왜 안 갔느냐? 그 안 간 이유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누가복음으로 한번 가 볼게요. 14장에 뭐라고 얘기를 하고 있냐면,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여기에 보면 전부 다 자기의 일상, 자기의 소유, 자신의 재산, 이런 것들을 챙기기 위해서 그 잔치를 거절하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거절을 하느냐면 남은 자들이 종들을 잡아서 능욕하고 죽일 정도로 이들은 그것을 거부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어떠한 수고, 자신들의 노력, 그 결과, 이런 것들이 더 중요하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그런 것들을 여기에서 보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나의 수고와 나의 노력으로 이루어질 나의 어떠한 결과물, 나의 영광, 이런 것들을 포기하고 내가 별로 사랑하지 않는 왕의 그 아들을 위해서 그 잔치에 가는 것은 거부를 했다는 것을 우리들이 보게 됩니다.

여기서 보게 되죠. 그런데 이 사람들의 인생의 목적이 지금 여기에서 등장하죠. 한 사람은 밭으로, 한 사람은 사업장으로, 한 사람은 현재의 이익을 위하여서 이들은 왕의 초청을 거절한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은 왕의 초청을 거절한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랬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라고 얼마나 부르짖고 얼마나 외칩니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교회를 가야 됩니다. 예수를 믿어야 됩니다라고 이 영적인 자리에 초청하는 일들이 참 많이 있는데, 자신들의 일상을 위해서, 자신들의 어떠한 이익을 위해서 그들은 우리의 초청을 거부하는 것을 우리들이 잘 보게 되죠.

결국은 현실의 이익이 영적인 이익보다도 세상 사람들은 더 좋고 더 유익하기 때문에 영적인 이익을 얻는 것보다 세상적인 이익을 얻는 것을 그들은 선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지금 왕이 이렇게 초청한다는 그 얘기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들어오기를 초청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들은 자신들의 삶의 일상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를 거부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는 아 사도께서 로마서에 보면은이 하나님께서 어떤 심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청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로마서 10장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순종하지 않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서 하나님께서 손을 벌리시는데 종일 손을 벌리고 있었다라는 일이라 표현을 씁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손을 벌리고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 여기로 와야 되는데 얼마나 애한 그러한 심정을 가졌으면 지금 하나님의 입장에서 내가 좋은 일 손을 벌렸다 이런 표현을 썼겠느냐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 영적인 자리, 이것을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어떤 것과도 가꿀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게 더 소중한 줄 알고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 영적인 자리를 거부한다라는 것을 여기에서 어 보게 되죠. 결국은 이들이 왕의 청을 거절했을 때에 그 결과가 어떤 결과를 낳았냐면은 왕이 심판을 하죠. 사는 자는 죽이고 공는 불살고 초청을 거주 어 거절한 그러한 사람들이 공들여서 싸울 공전들을 다 무너뜨리고 다 진멸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는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소중한 거지만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미련한 것들이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 가운데서 하인들이 돌아와서 주인에게 다시 한번 어 사람을 설명합니다. 아, 그리고 나서 임금이 8절과 9절에서 이렇게 명령을 내리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자체는 준비되었을 때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예그리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보라한데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내 가까운 지인들이 아니라 내가 그때부터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너무나 다 불러와라고 종들에게 다시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에는 이방별도 물론 표현이 되고요. 여기에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경하고 싫어하든 죄인들도 표 어 다 포함이 되고 세비들도 포함이 되고 또 창기들도 다 포함이 되고 이방인들 뿐만이 아니라 강도들까지 뭐 도둑들까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아 왕의 초청의 자리로 이들을 초청하는 것을 여기에서 어 보게 됩니다. 아, 그런데이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 잔치 자리에 들어왔는데 한 가지 제동이 걸립니다. 어떤 제동이 걸리냐면은 예복이 문제가 된 겁니다. 아,이 예복이 도대체 무엇일래 예복 때문에 자체의 자리에서 쫓겨나야 되는가?

[목을 가다듬음] 아,이 예복이 우리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그러 메시지를 던지고 어, 있는 거죠. 11절 말씀을 여러분들 한번 보시면 11절에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은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 때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는 한 사람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예복을 입지 않는 사람을 보고 자이 잔치자리에서 당시 왕의 잔치에서는 임금이 그 잔치의 어떤 그 분위기 아니면 잔치의 레벨 이런 것들을 올리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예복을 어 제공을 했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는 어 처음에 온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옷들을 뭐 갖추고 왔을지라도 예으로 가য়া겠지만 나중에 불림을 당해서 오는 사람들은 아무 때나 돌아다니던 사람들지 않습니까? 길가를 돌아다니다가 분류를 받았고 시장통을 지나가다가 분을 받았고 뭐 하다가 분류을 받아서 어떤 준비도 없이 왔는데이 자리에 왕이 예복을 준비하고 예복을 갖춰 놓고 그들에게 제복을 했다는 것이죠.

어 그리고 나서이 임금이 제공한 그 자치에이 예봉을 잃지 않는 사람이 임금의 은혜 들어온 겁니다. 그러고 나서 임금이 제동을 걸게 되는 거죠. 12절 말씀을 보시면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 하거늘 이분 있지만 말을 못했다. 그러니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염명도 하지 못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라고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바울들이 당연히이 예복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 있는 그리스도 예수로 입혀진 그런 거룩한 곳을 여기서 상징을 하겠죠. 그러니까는 호도원의 비유뿐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나오는 혼인 잔치의 비유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런 방법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라는 것을 지금 설명하기 위해서이 장면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니까는 예수 그리스도를 옷을 입지 않고는이 자리에 들어갈 수 없다라는 것을 이야기를 하는 거죠.

왜 예복이 주어졌음에도이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을까? 아마 자기 자신의 어떠한의 아니면 자기 자신의 수고 자기 자신의 노력 그것이이 예복보다도 더 소중하고 더 규정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예복을 거부하지 않았을까? 우리들은 이렇게 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우리 성도들이 입는 그러한 옷에 대해서 여러분들 설명을 어 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갈라디아서 3장을 보면 갈라디아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온입었느니라.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를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그런 사람들은 무엇을 입었냐면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었다라는 이런 어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는 세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과거에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사는 것 이것을 우리들이 세례라고 표현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과거에 나는 다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다시 살아나는데 이것은 내가 입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선물로 옷을 입혀 주셨다. 그러니까이 사람들이 신앙 통해서 불림을 받아서 잔치자를 가는데 자기가 준비해서 간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왕이 그것을 다 준비해 놓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왕이 베푼 은혜를 이들이 받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옮겨다라고 얘기를 했을 때는 우리가 열심히 종교 생활해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고 헌금하고 이렇게 봉사하고 해서 입혀진 그러한 옷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우리들에게 내린 준비하신 그러의 옷이라는 것이죠. 그 옷으로 우리들의 옷을 입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요한 계시록에 가면 이것을 다르게 이제 표현을 합니다. 마지막 혼인 자체에서 우리에게이 표주는 옷이 있는데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아이 이르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하라 하였으니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자, 세바옷을 입혔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다라고 얘기를 하는데 성도들의 옳은 행실 뭐 여러 가지 해석이 있겠지만 여기에서 이렇게 해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성도들의 오는 행실 내가 예수를 선택한 거 얘가 내가 예수를 믿는 거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거 이게 성도들이 너 옳은 판단을 했다. 옳은 행동을 했다라고 이렇게 표현을 어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사도께서 로마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심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청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로마서 10장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에게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순종하지 않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서 손을 벌리시는데, 종일 손을 벌리고 있었다라는 이러한 표현을 씁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손을 벌리고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 여기로 와야 되는데, 얼마나 애타는 그러한 심정을 가졌으면 지금 하나님의 입장에서 “내가 종일 손을 벌렸다” 이런 표현을 썼겠느냐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 영적인 자리, 이것을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게 더 소중한 줄 알고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 영적인 자리를 거부한다는 것을 여기에서 보게 되죠.

결국은 이들이 왕의 청을 거절했을 때에 그 결과가 어떤 결과를 낳았냐면 왕이 심판을 하죠. 사는 자는 죽이고, 성은 불사르고, 초청을 거절한 그러한 사람들이 공들여서 쌓을 성전들을 다 무너뜨리고 다 진멸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소중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미련한 것들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 가운데서 하인들이 돌아와서 주인에게 다시 한번 사람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나서 임금이 8절과 9절에서 이렇게 명령을 내리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내 가까운 지인들이 아니라, 내가 그때부터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누구나 다 불러와라고 종들에게 다시 이야기합니다.

여기에는 이방인들도 물론 표현이 되고요. 여기에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경멸하고 싫어하던 죄인들도 다 포함이 되고, 세리들도 포함이 되고, 또 창기들도 다 포함이 되고, 이방인들뿐만이 아니라 강도들까지, 도둑들까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왕의 초청의 자리로 이들을 초청하는 것을 여기에서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 잔치 자리에 들어왔는데 한 가지 제동이 걸립니다. 어떤 제동이 걸리냐면 예복이 문제가 된 겁니다. 이 예복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예복 때문에 잔치의 자리에서 쫓겨나야 되는가? 이 예복이 우리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거죠.

11절 말씀을 여러분들 한번 보시면 11절에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 때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고.

이 잔치 자리에서 당시 왕의 잔치에서는 임금이 그 잔치의 분위기, 아니면 잔치의 레벨, 이런 것들을 올리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예복을 제공했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온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옷들을 갖추고 왔을지라도, 예복으로 갈아입었겠지만, 나중에 부름을 당해서 오는 사람들은 아무 데나 돌아다니던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길가를 돌아다니다가 부름을 받았고, 시장통을 지나가다가 부름을 받았고, 뭐 하다가 부름을 받아서 어떤 준비도 없이 왔는데, 이 자리에 왕이 예복을 준비하고 예복을 갖춰 놓고 그들에게 예복을 입혔다는 것이죠.

그리고 나서 이 임금이 제공한 잔치에 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임금의 눈에 들어온 겁니다. 그러고 나서 임금이 제동을 걸게 되는 거죠.

12절 말씀을 보시면,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 하거늘.”

입은 있지만 말을 못했다.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변명도 하지 못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당연히 이 예복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 입는 그리스도 예수로 입혀진 그런 거룩한 옷을 여기서 상징하겠죠. 그러니까 포도원의 비유뿐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나오는 혼인 잔치의 비유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런 방법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지금 설명하기 위해서 이 장면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지 않고는 이 자리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죠.

왜 예복이 주어졌음에도 이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을까? 아마 자기 자신의 어떠한 의, 아니면 자기 자신의 수고, 자기 자신의 노력, 그것이 이 예복보다도 더 소중하고 더 귀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예복을 거부하지 않았을까? 우리들은 이렇게 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우리 성도들이 입는 그러한 옷에 대해서 여러분들 설명을 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갈라디아서 3장을 보면 갈라디아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그런 사람들은 무엇을 입었냐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었다라는 이런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 세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과거의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사는 것, 이것을 우리들이 세례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과거의 나는 다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다시 살아나는데, 이것은 내가 입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선물로 옷을 입혀 주셨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신앙을 통해서 부름을 받아서 잔치 자리에 가는데, 자기가 준비해서 간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왕이 그것을 다 준비해 놓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왕이 베푼 은혜를 이들이 받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었다고 얘기했을 때는 우리가 열심히 종교 생활해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고 헌금하고 이렇게 봉사해서 입혀진 그러한 옷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우리들에게 내리신, 준비하신 그러한 옷이라는 것이죠. 그 옷으로 우리들이 옷을 입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요한계시록에 가면 이것을 다르게 표현합니다.

마지막 혼인 잔치에서 우리에게 입혀 주는 옷이 있는데,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세마포 옷을 입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나서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얘기하는데, 성도들의 옳은 행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 내가 예수를 선택한 것, 내가 예수를 믿는 것,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 이게 성도들이 너 옳은 판단을 했다. 옳은 행동을 했다라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를 믿는다는 그 말 속에는 나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 그것을 확인하는 사람, 예수를 믿는다는 말 속에는 이런 의미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하다못해 내가 숨 쉬는 것, 내가 살아가는 일상 속의 모든 것들,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내가 살아간다는 고백이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예수를 믿는 사람,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냥 예수만 믿고, 그냥 십자가만 믿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나의 삶을 이끌어 가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고, 이 고백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 표현 속에 다 등장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에서 살아왔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잘 지키며, 도덕적으로 살아가면, 윤리적으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불러 주시겠지, 이런 착각 속에 살아갔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결과가 아무것도 없는, 잎만 무성한 그러한 내용이 되어져 있다는 것이죠.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면 예수를 믿는다는 이 의미를 자기들이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보면 부처를 믿든지, 아니면 다른 종교를 믿든지 결국은 한 가지가 아니냐? 착하게 살자는 것 아니냐? 선하게 살자는 것 아니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착하게 살자는 거죠. 그런데 착하게 산다는 얘기는 어떤 의미가 있냐면, 자신의 어떤 의지, 자신의 수고, 자신의 노력이 담겨져 있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선하게 살아야지. 내가 이렇게 살아야지. 그래서 그렇게 선하고 착한 사람들은 “저 사람은 법이 없어도 천국 갈 사람” 이렇게 이야기하더라는 것이죠.

그러나 성경은 절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 있지 아니하면.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그러한 의미는 나무와 가지가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거를 잘라 버리면 곧 죽는 겁니다.

우리가 꽃병에 있는 꽃들이 화려하게 보이지만, 이거 일주일만 지나면 다 죽어 버리는 것과 이치가 마찬가지인 겁니다. 뿌리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죠.

지금은 잠시 남아 있는 물로서 영양분을 공급받아서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할 것 같지만, 그것까지도 그칠 때는 그것은 말라 비틀어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나무와 가지는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선하게 살고 착하게 산다 할지라도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하나 어떤 것이 있냐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비극입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바깥 어두운 데 내쫓겨서 영원한 고통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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