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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21:33~46 건축자들이 버린 모퉁이의 머릿돌



오랜만에 “멀리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괴로워 정처 없이 다니니…” 1980년대에서 90년대 사이 우리나라는 굉장히 큰 부흥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기도원 운동이 굉장히 들불처럼 번지고, 많은 사람들이 기도원에서 기도하면서 큰 은혜를 누린 적이 있습니다.

그 찬양 가운데 하나가 “멀리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또 “탕자처럼 방황할 때” 이 찬양을 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리고 주님께로 돌아왔던 그러한 내용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이 찬양하고 우리의 삶하고는 많이 차이가 납니다. 어떤 차이냐면,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가장 연약한 부분이 어떤 부분이냐면, 우리의 삶의 열매를 보고서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참 많다는 겁니다.

우리가 일주일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열매를 흡족할 만큼 내놓는 그런 사람들은 전혀 없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요. 그런데 우리들이 그런 것들을 보면서 “나는 구원을 안 받았나 봐. 왜 내 입에서 자꾸 이런 말이 나오지? 내 행동은 왜 자꾸 이러지?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왜 이럴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가 생각 가운데, 낙심 가운데, 낭망 가운데, 좌절하는 것은 내가 구원을 받지 않아서 이런가라는 그러한 생각이 많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붙드신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떠한 경우를 만나도 하나님께서 되돌리십니다.

아멘.

우리가 지금 이 상황, 이 타임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 일생을 계획하시고 인도하시고, 그 가운데 섭리하시고 이끌어 가죠.

아멘.

그래서 언제, 어떻게, 어느 곳에서 우리들이 무릎을 꿇고 “주님, 주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라는 이 고백이 터져 나올 줄은 모르는 겁니다.

오늘 우리들이 포도원의 비유를 함께 나눌 텐데, 건축자들이 버린 모퉁이 머릿돌이 하나님께서 귀하게 머릿돌로 쓰시는 그러한 내용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이 포도원의 비유 말씀은 우리가 지난번에 묵상한 것처럼 23절에 있는 내용의 비유인데, 성전을 정화시키는 사건과 열매 없는 무화과를 보면서 저주하자 그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린 사건과 두 아들의 비유, 이런 것들을 통하여서 대제사장들과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묻는 말이 “어떤 권세로, 당신은 무슨 권한이 있어서 이런 일들을 행하느냐?”에 대한 답변이 오늘 나오는 말씀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메시아의 직분을 행하실 때, 그 메시아의 직분이 어떤 내용으로 되어져 있는가? 메시아의 직분이 어떠해야 되는가에 대한 답변으로 이 본문 말씀이 등장한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오시면 당연히 해야 될 일에 대한 세 가지의 비유 내용을 말씀하셨는데, 그 첫 번째가 두 아들의 비유의 내용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간다고 하고서 가지 않은 아들과, 또 가지 않겠다고 하고서 간 아들. 누가 더 아버지의 뜻에 맞겠느냐라는 내용으로, 너희들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선택되어졌다고 믿고 있고, 또 종교의 지도자들이고, 너희들 스스로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갈 사람들이다라고 여기지만, 너희들의 삶을 보면 그것이 전혀 아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너희들이 저주하고 너희들이 멸시하는 저 세리들과 창녀들처럼, 그들은 처음에는 가지 않겠다고 얘기한 아들과 같았지만 나중에는 메시아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서 하나님께로 나온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그 얘기를 지금 한 겁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시는 내용이 포도원의 비유가 두 번째의 내용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되어질 일, 하셔야 하는 일들에 대해서.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가 우리가 다음 주에 함께 묵상할 후반부 초두에 나오는 혼인 잔치에 대한 비유. 이 세 개가 아주 중요한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개의 내용들이 예수님은 메시아구나라는 것을 알게 하는, 또 메시아가 오셨으면 당연히 이루셔야 될, 하셔야 할 그러한 내용으로 되어져 있다는 겁니다.

오늘 나오는 이 비유의 말씀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어떤 무능함과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잘못 가르치고 있는 그 내용들, 이런 것들을 지적하는 그런 말씀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먼저 성경 말씀 33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33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한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이렇게 이 비유가 시작이 됩니다.

어느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올까 봐 거기에다가 울타리를 쳤고, 그리고 이제 곡식이 열매가 맺히면 거기 포도즙을 짜기 위해서 그 구유를 파고, 그리고 혹시라도 이것으로 안 될 것 같아서 망대까지 세워서 혹시라도 서리하는 사람이 있는가, 침입자들이 있는가 지켰다. 그것을 망대를 세웠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집주인이 다른 농부들에게 이 포도원을 세로 주고 멀리 타국으로 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결실할 때가 되어서 주인이 그 결실에 대한 결과물, 과일을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냐면 농부들이 이 종들에게 결실한 과실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종들 중에 하나는 심히 때렸고 또 한 사람은 죽였고 한 사람은 돌로 쳤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주인이 화가 나서 더 많은 종들을 보냈지만, 이런 방법으로 여전히 똑같이 행하였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주인이 이것으로는 안 되겠다 생각을 해서 이제는 아들을 보내겠다. 그래서 아들을 보내면 저들이 아들의 말은 순종하겠지라고 얘기를 했지만, 많은 농부들이 아들 것을 보고서 서로 모의하기 시작합니다.

“야, 저 상속자를 죽이면 이 포도원은 우리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저 아들을 죽이자”라고 모의합니다.

이 농부들은 오랫동안 포도원에서 일을 하다 보니까 이 포도원에 주인이 있는 것을 잊어버린 겁니다. 이 포도원이 자신들의 것인 것으로 생각을 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주인이 선한 의도로 농부들에게 이것을 세로 주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는 이 농부들의 모습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포도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들을 비유하고 있는데요. 이 비유의 내용이 이사야서에 가면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5장 한번 살펴보십시오.

이사야서 5장을 보시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이로다.”

여기서 “내가 사랑하는”, “내가 사랑하는” 것이 세 번 이렇게 등장을 해요.

그다음에 2절 말씀을 보시면,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이 포도원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을 의미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의 주인이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이것을 하겠다. 그리고 극상품, 아주 굉장히 질이 좋은 포도나무를 여기다 심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망대도 짓고 술틀까지 팠지만 좋은 포도 열매를 맺기를 바랐더니 아무 쓸모없는 들포도를 맺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망각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형상을 망각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다 보니까 당연히 맺어야 할 열매를 맺지 못하고, 아무 쓸모없는 들포도 열매를 맺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포도나무, 포도원의 비유에서도 여러 가지를 설명하는데,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설명하는 것을 이사야를 통해서 우리들은 본 거예요. 농부는 누구를 의미하냐면 당시의 영적인 지도자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장로들, 이런 종교 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다음에 주인이 보낸 종은 선지자들을 의미하고 있죠. 그다음에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당연히 포도원의 주인은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준비해 놓으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내놓지 못하였더라는 것이죠.

그래서 농부들이 탐심을 품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다시 말씀드리면 그 포도원을 마치 자기의 소유로 착각하고 있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35절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이 농부들이 어떻게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그러한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선지자들의 책무죠. 제사장은 백성의 입장에서 백성들의 잘못, 백성들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 그 죄의 사함을 청구하는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이게 제사장의 직분이죠.

그러니까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아서 백성들에게 잘못을 선포한다라면, 제사장은 그 선포되어진 말씀을 바탕으로 죄인인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오게, 제사를 통하여서 제사를 지내 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 길을 열어 놓으신 거죠.

선지자와 제사장의 역할이 뚜렷하게 이렇게 구분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 당시에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겁니다. 그러고 나서 종들을 대하듯이 심히 때리고, 그리고 죽이고, 돌로 치는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참 아이러니한 것은 무엇이냐면요.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하여서 보내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를 오히려 죽였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아이러니한 그런 일들이 있는데, 결국은 선지자를 죽였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이죠. 선지자를 죽였다는 그 얘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겠다는 그런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선지자들을 죽이게 된 거죠.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서 무엇을 요구하는지 한번 보십시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포도원에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어서 어떤 열매를 원하는지 한번 이사야서가 다시 5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5장 7절에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열매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정의라는 이 열매를 바라셨다는 거죠. “도리어 포악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여기서 부르짖음이라는 얘기는 뭐냐면, 하나님께서 공의를 바라셨잖아요. 그런데 부르짖음이라는 얘기는 공의를 베풀어야 할 지도자들, 종교 지도자들, 아니면 정치적인 지도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착취하고,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빼앗고 겁박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호소할 데가 없어서 하나님 앞에 와서 부르짖는 그러한 것이죠.

그러니까 공의를 하나님께서 바라셨는데,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호소를 하고 있더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그런 구체적인 열매는 정의를 행하는 것, 공의를 행하는 것,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러한 열매들인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그 열매를 맺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만 이루어졌던 것들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역사에서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 보시면 37절과 39절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아들을 보냈지만 아들을 존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들을 죽였는데, 죽인 이유가 뭐냐면 자신들의 유익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상속자 된 아들을 죽였다는 것이죠.

그리고 나서 그 이유가 지금 이야기한 것처럼 주인의 유익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아들을 죽였는데, 종교 지도자들의 이 악행, 이런 것들은 온 이스라엘 전체에서 나타나는 그런 악행들인데, 이러한 종교 지도자들의 악행이 조상 때부터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여러 선지자들을 그렇게 보냈건만 이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은 겁니다. 여러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했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겁니다. 결국은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갔던 그런 모습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이 포도원의 주인과 이 농부들의 가장 큰 갈등이 어디서부터 일어났느냐? 소유권에 대한 갈등에서 일어난 겁니다. 누가 이 땅을 가질 것이냐? 원래는 이 땅이 주인이 있는 주인의 땅인데, 이 땅에서 오래 일을 하다 보니까 자기도 마치 주인이 된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들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상속자를 죽인 이유는 이 땅에 대한 소유권을 자신들이 가지기 위해서 상속자의 아들을 죽인 것이죠. 이런 갈등이 여기에 있었다는 겁니다. 농부가 자신의 소유로 착각했을 때 일어나는 그러한 갈등이라는 것이죠.

우리 성도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마치 내가 아주 믿음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 조상은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아서 내가 이렇게 신앙이 좋은 거다. 우리 집은 대대로, 가문 몇 대부터 예수를 믿는 사람들로 되어져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겁니다.

우리는 대대로 믿음의 집안이다. 그래서 내 믿음이 좋은 거다라고 생각하는 그런 경우가 있다는 것이죠. 마치 농부가 오랫동안 그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이 땅에 대한 주인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이 땅이 내 땅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겁니다.

이 주도권이 항상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내용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은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서 그리스도 예수라는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심으로 말미암아 그 피값으로 우리를 샀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되어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진 겁니다. 그 피값으로 우리를 사신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의 삶의 주인이 누구냐?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 소유권이 있는 거죠. 왜냐하면 그 피값으로 사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냥 어디서 불러다니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피값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주권자, 우리의 삶의 소유자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삶이 이 하나님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옛날에 어떤 노래인가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노래가 아주 유행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와의 그 싸움에서 10대가 이제는 내가 생각할 수 있고 내가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부모가 간섭하지 말라. 이렇게 반항했던 적이 있습니다. 왜 그것은 금지곡이 안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한때 굉장히 유행했던 노래인데, 이 10대가 마치 부모들과의 싸움에서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라고 얘기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내 삶의 주인은 나구나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참 많이 있다는 것이죠.

이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농부들이 이 소유권의 다툼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과. 그래서 이 소유권의 주도권이 하나님이 아니라 나로 생각을 하는 그런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죠.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다라고 생각했을 때 그들에게 나타난 결과가 결국은 패배였었고 멸망이었고 절망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40절부터 여러분들 다시 한번 보시면 40절과 41절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지금 40절에서 예수님에 대한 질문이 있었고 41절에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악한 자들을 거침없이 죽이십시오. 진멸하십시오. 그리고 제때에 소출을 낼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그 포도원을 맡깁시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자신들에 대한 지적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무지했다는 겁니다. 그만큼 마치 무엇과도 마찬가지냐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라고 외쳤을 때 저들의 잘못, 그러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결과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십시오. 그 결과가 어떤 줄도 모르고 무지하게 그렇게 얘기했던 사람들과 비슷한 내용으로 되어져 있죠.

그러니까 자기들이 받을 형벌을 자기들에게 돌려 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너희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족속이기 때문에 열매를 맺는 다른 민족들에게, 다른 족속들에게 이 포도원을 맡기겠다고 얘기를 하는데, 이 말씀이 조금 어렵습니다.

다른 민족을 이야기하는 겁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을 회복시키는 걸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러면 다른 민족을 이야기하는 건가? 다른 나라를 이야기하는 건가? 조금 헷갈리는 그런 부분인데, 이 포도원 비유의 내용상 다른 민족이라기보다도 어떤 개인으로 우리가 해석을 하면 이 내용이 조금 부드러워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민족으로 헷갈려 할 것이 아니라, 포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한 개인의 신앙, 이렇게 생각하면 좀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굉장히 사랑하신다고 말씀을 하셨잖아요. 아까 이사야서에서 우리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극상품 포도나무까지도 심고, 울타리를 치고, 망대까지 세우고, 포도즙을 짤 수 있는 그 기계까지 다 설치해 놨다고 설명을 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때 그것을 빼앗아서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이게 23장에 가면 나중에 보겠지만 이렇게 주님께서 설명을 합니다. 23장 13절을 보시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그러니까 이것을 빼앗아서 한 민족에게 준다기보다도 지금 주님께서 책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개인적인 어떤 삶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아서, 이게 개인적인 어떤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 책망, 이런 것들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뒤에 이제 결론적으로 무엇이라고 얘기를 하느냐면, 4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에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 말씀 중에서 우리들이 한 가지 생각을 하셔야 될 것이 무엇이냐면, 열매를 맺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잘못 가르친 이런 것들로 인해서 백성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우리들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참 묵상하면서 제가 개인적으로 굉장히 많은 묵상을 하게 됐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습니다. 주님을 만난 그런 경험과, 그리고 주님 앞에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거듭남의 확신, 다시 말씀드리면 구원의 확신, 이게 뚜렷하게 있는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성도들을 항상 대하면 어떤 말씀을 드리냐면, 구원의 확신을 가지십시오. 거듭남의 확신을 가지십시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이후로의 신앙생활과 거듭남,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했을 때의 신앙생활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천지 차이입니다라는 이런 얘기를 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하는 입장에서 이 전해지는 그 말씀으로 여러분들이 구원의 감격을 가질 수 있는가? 거듭남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말씀이고 그런 내용들인가? 이런 것들을 묵상할 때 참 좀 더 구원함에 대해서 말씀을 나눠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가진 거죠.

왜냐하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 것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하여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죠.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을 지금 책망하는 그런 내용으로 되어져 있는데, 13절을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다시 보시면, 너희도 들어가지 못하고 천국을 들어가는 사람들의 길을 너희들이 지금 막고 있지 않느냐라고 주님께서 이렇게 책망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함축되어져 있는데, 종교 지도자들이 천국을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자신들이 지금까지 신뢰하고 소망해 왔던 율법과 제사 제도와, 다시 말씀드리면 윤리와 도덕, 이런 것들로 인해서 이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을 생각했다는 것이죠.

백성들에게 윤리를 가르치고,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백성들에게 도덕을 가르치고, 백성들에게 선한 것을 가르친다라면 그걸로 인해서 백성들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겠지 이렇게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을 지적하는 이유는 뭐냐면, 봐라. 너희들의 한계가 있지 않느냐? 너희들의 삶을 봐라. 너희들의 생활을 봐라. 율법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 제사 제도로 아무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놨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방법은 오직 하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이 하나님께 가는 길이다라고 지금 이들을 책망하고 있는 거죠.

실질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내가 착하게 살면, 다른 사람도 도와주고, 또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착하게 보시겠지. 그래서 천국을 들어가는 데 큰 문제가 없겠지. 이런 착각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간다는 겁니다.

절대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우리를 하나님께서 인치셨느냐, 이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를 가리켜서 성경에는 나중에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의 죄 된 모습들, 우리의 부족한 모습들, 우리의 범죄한 그런 모습들,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으로 감춰 주시고, 그 옷을 입은 자들만이 하나님께로 간다.

그 속에는 더러운, 온갖 더러운 것들이 있다 할지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냐? 그것만 본다는 것이죠.

그러나 반대로 아무리 그 속에 선한 것이 있고 착함이 있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준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는다면 천국의 게이트에서 삐 하고 울리면서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시오”라는 경고음이 울린다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도 율법으로 살고, 도덕으로 살고, 윤리로 살고 했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은 그걸로 되더냐라는 겁니다.

그걸로 되더냐? 너희들이 백성들에게 그렇게 가르쳤지만 백성들이 그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원하시는 그 열매를 가지고 오느냐?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오직 예수라는 방법 외에는 하나님께 들어갈 자가 없느니라. 율법은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사람만이 율법을 뛰어넘는 그 의로움이 나타난다는 것이죠.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율법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만큼만 하면 되는데 우리는 그만큼도 제대로 하지를 못합니다.

하나 예를 들어 봅시다. 선진국으로 가면 갈수록 법이라는 것은 조금 있습니다. 후진국으로 가면 갈수록 법이라는 것은 많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 법으로 묶어 놓지 않으면 사람들이 지키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 지금도 그런 법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창문 열고 담배꽁초 버리면 벌금 얼마? 가다가 침을 뱉으면 벌금 얼마? 가다가 껌을 뱉으면 벌금 얼마? 이런 법들이 있는 거죠. 사람들이 방탕하지 못하게.

그런데 장발하면 잡아서 장발을 깎는 그런 법도 있었습니다. 여자들이 치마를 입는데 무릎 위로 몇 센티가 올라가면 잡아서 교육하는 그런 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들이 없어요. 자신 마음대로 살아라는 것이죠. 자신들이 알아서 하라는 그런 의미도 있지만, 그런 것들을 굳이 법으로 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선진국으로 가면 갈수록 알아서 지킨다는 그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이 우리를 묶고 있지는 않지만, 시키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율법에서 하지 말라고 얘기한 것까지 우리들은 알아서 자발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그 일을 행하더라는 겁니다.

율법에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그러나 율법에 나와 있다고 해서 그것만 딱 지키고 다른 것들은 안 지키면서 “내가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라고 이렇게 얘기를 하면, 그 사람은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과 같은 그런 모습을 갖는다고 설명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르신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아들의 직분, 딸의 직분을 갖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리 선한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얘기죠.

42절과 43절을 한번 보십시오. 이 악한 농부들을 위해서 뭐라고 예수님께서 얘기를 하시냐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백성들의 반응은, 여기서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은 “우리는 조상들과 다릅니다. 조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때려 죽이고 그랬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지금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너희들도 마찬가지인데, 예수라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대한 비유가 시편 118편에 등장하게 되는데, 22절과 23절 한번 보시면,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법은 우리의 설명, 우리의 지식에 대한 설명으로 되어지지 않고, 우리의 눈에 너무나도 기이하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이 그의 아들을 보내사 고난을 당하게 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느냐? 너무나도 기이하다는 겁니다. 우리의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여기 시편에 있는 내용이 당시의 상황이 어떤 상황이었냐면, 이스라엘 민족이 완전히 초토화되지 않습니까? 다 멸망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다 뿔뿔이 흩어지고, 다른 나라에 다 포로로 잡혀가지 않습니까? 많은 주변에 있는 나라 사람들이 저 나라는 이제 끝났다. 저 민족은 이제 더 이상 소망이 없다. 가망이 없다라는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70년 기한이 차자 이스라엘 민족들을 다시 이 땅으로 불러들이시고, 그들로 말미암아 무너졌던 성벽을 다시 세우시고, 다시 허물어졌던 것을 쌓아 올라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볼 때, 아니 어떻게 저렇게 다 멸망한 나라가 저렇게 살아날 수 있느냐? 실질적으로 이스라엘 민족들이 70년 이후로, AD 70년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초토화되고 다 멸망당하지 않습니까? 유리하고 방황하고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고, 그리스 땅으로, 또 러시아 땅으로, 또 여러 곳곳으로 막 흩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의 2,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들이 그렇게 살아서 이제는 유대 민족이 없는 줄 알았다는 것이죠. 이제는 유대 민족이라는 그 민족 자체가 없어지고 이스라엘이라는 땅 자체가 없어졌다고 생각을 한 거죠. 그런데 1948년도에 하나님께서 그 땅을 회복시킵니다.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을 그 땅으로 다시 불러들이고, 그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무너졌던 그 기초를 다시 세우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지금 뭐 중동에서 전쟁 빵빵하면서 나를 따르라 하면서 얼마나 교만합니까? 콧대가 하늘을 찌르지 않습니까? 그렇게 민족이 다시 선 겁니다. 기이한 거죠. 우리 눈에 너무나도 신비한 거죠. 하나님께서 저 민족을 이렇게 세우지 않으면 이렇게 세울 사람이 없다. 우리는 이것밖에 설명할 수가 없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건축자들이 지금 버린 돌이 모퉁이의 돌이 되었다고 얘기를 하는데, 여러분들 조금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설명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옛날 그림을 보면 다리가 이렇게 지어져 있는데 동그란 아치형으로 기둥을 세운 게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 이 건물도 지금 아치형으로 지어져 있죠. 이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디일까요? 이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제일 중요한 부분이 어디일까요?

본당인지.

본당인데 본당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디일까요? 이 건물을 받치고 있는.

그리스도 십자가.

그거 말고, 십자가, 목사 이런 얘기 말고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이 건물들이 다 있잖아요.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디일까요?

보세요. 천장을 보세요. 천장을 보시면 저 중앙에 있는, 중앙에 있는 세로 된 거 있죠? 저거 빼면 건물이 무너집니다. 저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예요. 아치형 건물에 있어서는.

그러니까 아치형으로 되어 있는 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어디예요? 왼쪽과 오른쪽이 이렇게 이렇게 만나는 이 중앙에 있는 돌.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이게 쏙 빠져 버리면 그거는 무너져요.

그래서 이거를 만들 때 위에는 넓고 밑에는 좁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눌러도 아무리 눌려도 위가 넓고 밑이 좁기 때문에 그 아치형은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모퉁이 돌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떨어진다고 얘기를 하잖아요. 사람 머리 위에. 그러니까 제가 처음에 이해를 못 했을 때, 왜 모퉁이 돌이라는데 버릴까? 기초석이라는데 왜 이거를 버리지? 기초석이면 가장 튼튼하고 가장 좋은 것을 갖다가 기초석으로 삼아서 그 위에다가 건물을 올려야 되는데, 왜 버렸던 것을 다시 주워 와서 기초석으로 삼을까? 굉장히 의문이 들었었는데, 성지순례를 가서 하는 말에 제가 “아 그렇구나. 이게 모퉁이 머릿돌이라는 말이 모퉁이가 서로 연결하면서 이게 머릿돌이 되는구나. 이게 떨어진다는 얘기가 그래서 떨어지는구나.” 어떻게 모퉁이 돌이 튀어 올라서 이렇게 떨어지는 거 이해를 못 했는데, 가서 보고 배운 겁니다.

여러분들도 가서 보고 배우십시오. 우리들에게 100만 금을 준다 할지라도 성경 하나 깨달은 게 더 귀한 겁니다. 그게 이제 모퉁이 머릿돌인 것이죠. 그러니까 왼쪽과 오른쪽이 만나서 이 두 등이 허물어지지 않게끔 지탱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건축자들은 이게 아무 쓸모 없다고 버린 거겠죠. 그러다가 건축을 이어가다 보니까, 이 쓸모 있는 돌을 찾다 보니까 그게 눈에 띄어서 그거를 들었더니 딱 맞는다는 그 의미가 있는 겁니다.

이 의미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이 성경에 나오는 본문 그대로 이야기하자면 사람들은 아무 쓸모 없다고 버렸다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뒤집어 여기 계셔서 우리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 길을 열어 놓으셨고, 사람과 사람이 성도로 연결되고, 하나님과 사람이 연결되고, 교회를 만나는 그런 것으로 하나님은 쓰셨다고 이야기하고 있고요.

베드로도 이 말씀 그대로 베드로서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우리들에게는 그 돌이 너무나도 보배이죠.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모퉁이 돌이 너무나도 귀한 보배가 되는 겁니다. 왜?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생명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 주신 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귀중한 보배가 되는 것이죠. 그러나 믿지 않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모퉁이 돌밖에 되지 않는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고 나서 8절을 보시면,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그렇게 정하신 것이라.”

그러니까 하나님을 통하여서 세워지는 그 나라, 오늘날 교회를 얘기하죠. 그리스도 예수라는 모퉁이 돌이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결코 무너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방법에 순종을 해야 되지, 교회가 사람의 뜻과 사람의 방법으로 순종을 하게 된다라면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44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그죠? 위에서 떨어지죠. 이 돌이 위에서 떨어지는 겁니다. 이 모퉁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다시 말씀드리면 심판의 기준은 율법과 윤리와 도덕이 되지 않고, 우리를 심판하는 심판의 기준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 우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결국 이 비유의 핵심이 무엇이냐면, 윤리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과 이런 방법으로 되지 않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법으로 되게 하겠다. 그렇게 구원하겠다는 게 이 비유에 대한 핵심인 거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주로 고백한다, 신앙 고백을 한다고 얘기를 할 때도 율법적인 것, 윤리적인 것, 도덕적으로는 되지 않던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법으로 되는구나. 이 고백이 우리의 신앙 고백 안에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의로움도 아니고, 율법을 잘 지킴도 아니고, 우리의 윤리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되는구나. 이게 지금 포도원 비유에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주도권, 우리 삶의 주도권,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붙들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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