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1:23~32 예수님의 권위와 두 아들의 비
- seattleomc
- Jul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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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설교입니다.
지난 주간에는 예배를 드리는 도중에 영상이 끊어져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신 분들이 많이 불편하셨으리라 이렇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오늘은 걱정할 거 없습니다. 이유를 알고 하기 때문에. 역시 기계에 도전을 하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기계가 사람보다 편리한 것 같습니다. AI가 가차 없이 딱 잘라 버려 가지고 예배가 막혔습니다.
여러분들, 다시 한번 기도의 제목을 하나 드립니다. 우리 교회에 의해서 지원하고 기도하고 있는 선교사님이 중동 땅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데, 중동 사태가 굉장히 힘들고 어렵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그 배가 지나가니까 오렌지 빛이 나와 있는 방송을 봅니다. 가끔씩 이제 총 맞는 소리가 들린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선교지나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좀 간절하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저들이 세상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좋은 것 다 뒤로 미루고 그 땅, 사막 땅에 가서 한 영혼을 살려 보겠다고 그 땅으로 달려갔지 않습니까?
저들이 젊음을 바친 곳이고, 땀을 흘린 곳이고, 눈물을 흘린 그 땅인데 하루아침에 그 선교의 근거가 사라지는 것이 조금 염려스러운 겁니다. “야, 너희들이 죽는 것은 뭐 하나님 부르시면 언제나 어디서든지 가는 건데,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그 부분이다”라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나실 때마다 중동 땅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 그리고 중동 땅의 전쟁으로 인해서 아프리카로 난민들이 요즘에 많이 들어온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동유럽으로, 유럽으로 이렇게 난민들이 넘어갔었는데 요즘에는 아프리카로 넘어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년에, 재작년에 우리가 조금 도왔나요? 선교사님에게 소 두 마리 정도 사다 준 적이 있는데, 요즘에는 학생들 사역보다 난민 사역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난민들에게 속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 선교사들을 위해서, 중동 땅과 아프리카 땅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그다음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사역하는 남창식 선교사님, 우리 교회가 기도로 후원을 하는데 요즘 백인들과 흑인들의 갈등이 굉장히 심한 상황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양 사람들도 두려워해요. 흑이냐 백이냐 두 가지 인종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많이 어렵다. 밖으로 나가기가 좀 어렵다고 이렇게 하는데, 그 땅을 위해서도 여러분들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면 본문에 있는 내용이 조금 길긴 하지만 그렇게 힘든 부분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맞이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나서 첫 번째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이 성전을 정결케 하신 그런 사역이었죠. 그리고 지난주에는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그 사건을 이렇게 봤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일주일을 남겨 놓고 하신 일들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고, 주님은 지금 무엇과 싸워 나가냐면 율법주의, 유대주의, 인본주의와 싸워 나가는 중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구원을 얻는가? 예수라는 방법 외에는 아무리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청결하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갈 방법이 없다. 이것을 놓고서 지금 주님께서 싸워 나가는 중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그러한 사건이 있었는데, 하나님께 예배해야 될 장소, 하나님께 기도가 있어야 할 그 장소, 이 장소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심과 탐욕으로 인하여서 하나님께 예배와 기도를 드리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의 소리, 인본적인 그 소리만 성전에 가득했다는 겁니다.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께 영광이 돼야 되고,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과 영광 관련된 그러한 일들이 진행돼야 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유익과 사람들의 목적을 위해서, 사람들의 배만 불리게 하기 위해서 이런 제사 행위들이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 예수님께서 하신 그 일이 모든 율법적인 제사 제도를 폐지하시고 하나님으로, 예수님으로 회복시키는 그것이 성전 정화 사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죠.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아야 할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그냥 이 세상에서 죽어가는, 아무런 소망 없이 죽어가는 우리들에게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상, 우리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회복시키고,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를 회복시키시고, 우리의 일반적인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어디에 있든지 기도를 회복시키는 그 일들이 주님께서 일차적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 중에 가장 중요한 사역이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것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주님은 고난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죠.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얘기를 하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했다고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옛 것을 폐지했다고 얘기를 할 때, 그 옛 것은 성전으로 말미암아, 제사로 말미암아, 율법으로 말미암아 나아가는 그것을 이제는 더 이상 행하지 못하게 폐지를 시켰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 길을 열어 놓으신 거죠.
그래서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 죽어 버렸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예전 것은 다 이제 폐지가 됐다는 그러한 의미가 여기에 담겨져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 율법주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행위, 이런 행동들에 대해서 굉장히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신앙의 어떤 전통이잖아요. 성전 안에서 제사를 드리고 기도하고, 그리고 또 이스라엘 민족들의 어떤 규범, 그리고 필수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 이런 것들이 있었는데 이런 것들을 다 허물어 버리셨다는 것에 대해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굉장히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어찌하여서 신앙의 규범과 신앙의 전통들, 신앙의 내용들, 율법들, 이런 것들을 폐지하는가라고 예수님께 대들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과 정면 충돌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1장 앞부분에 15절에 이렇게 되는데, 21장 15절 말씀 한번 볼게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 반대했다고 얘기를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요, 호산나라고 찬송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거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이 메시아 됨을 나타내고,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볼 때는 이것은 굉장히 불경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예수님께 대드는 그러한 장면이 오늘 있는 내용이죠.
그리고 나서 이제 성전을 정결케 하시고, 무화과나무가 마른 그 사건이 있은 그다음 날, 성전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그 와중에 유대인들, 종교 지도자들, 백성들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있습니다.
그것이 23절에 있는 말씀인데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충돌이 일어났고 이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누이 당신께서 메시아라고 밝혔지만,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두 가지의 질문을 여기서 하고 있는데, 한 가지의 질문은 뭐냐면, 네가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하느냐? 성전을 정화시키는 이러한 일들뿐만 아니라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는 것, 모든 것들을 이야기하면서 무슨 권세로 도대체 당신이 누군데 허락을 받지도 않고 이런 일들을 행하느냐라는 그러한 의미가 여기에 담겨져 있죠.
그다음에 두 번째로는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냐라는 겁니다. 당신이 어떤 권세로 이 일을 행하느냐가 첫 번째 질문이고,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냐라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죠. 그러니까 당신이 도대체 누구인데 병자들을 고치고, 당신이 도대체 누구인데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여기서 가르치고 이상한 교리를 가르치는가라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뭔데 성전에 마음대로 들어와서 이렇게 하느냐? 성전은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들, 레위 지파에서 세워져 있는 사람들만이 제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고, 또 유대인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랍비만이 성전 안에서 가르칠 수 있는 권세가 있는데, 당신이 뭔데 여기 와서 성전을 소란하게 하고, 정결케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다 쫓아내 버리고, 또 말씀을 가르치느냐라는 그러한 질문을 거기에서 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여기에서 보시면 이 사람들의 질문은 단순한 것 같지만, 예수님에 대한 함정을 지금 파고 있는 중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들을 하느냐”라고 얘기를 했을 때, “이 권세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면, 이 사람들이 신성 모독으로 예수님을 잡을 그런 생각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권세를 사람들이 나에게 주었다”라고 얘기를 한다라면, 아니 자신들이 대제사장이고 장로고 서기관이고 바리새인들이고 사두개인들인데,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세를 주었느냐? 우리는 준 적이 없다. 랍비만이 이것을 가르칠 수 있다.” 그래서 만약에 사람으로부터라고 얘기를 하면, “당신은 이단이다. 우리는 당신을 세운 적이 없다”라고 얘기를 하는, 바둑으로 얘기하면, 장기로 얘기하면 통수를 친 겁니다. 사람들이 꼼짝 못하게.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을, 예수님을 제거할 목적으로 백성들의 장로,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와서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을 알고서 예수님이 오히려 역으로 질문하는 그러한 장면을 보게 되는데, 24절과 25절 말씀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이르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예수님은 자신을 옭아매려는 제사장들의 질문에, 장로들의 질문에 오히려 역으로 질문하면서, “그렇다면 요한의 세례는 어디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 왔느냐, 아니면 사람으로부터 왔느냐?”라는 이 질문을 지금 그들에게 다시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주 예수님의 어떤 재치 있는 답변으로 우리들이 얘기해 볼 수 있는데, 문제는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부터 왔느냐 하는 겁니다. 요한의 권위,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쳤던 그 권위, 많은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그 권위, 이것이 어디서 왔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이게 만약에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얘기를 한다라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께서 메시아 앞서 보낸 요한의 말을 당신들은 듣지 않았다. 당신들은 그 말에 순종하지 않았다. 요한이 너희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들은 회개하지 않았다라고 지금 이야기할 수가 있는 겁니다.
만약에 이 요한의 세례가 사람들로부터 왔다고 얘기를 하게 된다라면, 많은 백성들이,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백성들의 장로, 백성들의 우두머리, 종교 지도자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반란이 일어나는 그런 상황인 거죠.
그러다 보니까 이들은 대답을 못 했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에 의하면 세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메시지는 동일하지 않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다 가까이 왔다”라는 겁니다.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오라는 거죠. 그러니까 너희들이 할 일, 너희들의 상황, 너희들의 삶을 돌아보고 빨리 예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던 예수님의 메시지,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여기 담겨져 있는 겁니다.
실질적으로 이사야서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내가 메시아를 보낼 텐데, 그 이전에 엘리야를 너희들에게 보내리라고 얘기를 하죠. 그런데 이게 누구냐 하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데 세례 요한을 메시아 앞서 너희들에게 보내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이 분명히 메시아 앞서 엘리야, 세례 요한을 보냈는데 너희들이 그를 믿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어떤 직분을 맡았냐면,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겁니다. 너희는 회개하고 돌이키고 예수님께로 가라. 이 역할을 세례 요한은 맡은 거죠. 그래서 이 메시지를 선포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도 마찬가지인 거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냐면, 너희들이 요한에 대해서 이해를 했느냐, 안 했느냐라고 지금 묻는 겁니다. 요한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를 했다라면 메시아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 얘기를 하는 거죠.
그래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라고 묻는 겁니다. 요한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메시아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요한을 이해했느냐라고 지금 예수님께서 묻는 겁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들이 대답을 지금 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마태복음에 보면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7절에서 9절을 보시면 세례 요한의 날카로운 그러한 말씀이 여기에 등장을 하는데 한번 보세요.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굉장히 심각하죠. 여기에 보면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종교 지도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던 그러한 종교 지도자들이 광야에서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 나와서 지금 요한과 대화를 하는 중에, 요한이 의외로 그 사람들을 가리켜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좀 심한 말로는 “마귀 새끼들아”라는 거죠.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상상이나 가는 일입니까?
지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사두개인들은 우리 아니면 누가 천국에 가겠느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회개는 어떤 사람들이 해야 되느냐? 저 세리들이나 도둑놈들이나 창기들이나 그 사람들이나 회개하는 거지, 우리는 회개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런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세례 요한은 “이 마귀 새끼들아”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얘기를 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느냐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면 되겠죠.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우리들은 회개할 부분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을 조롱한 겁니다. “하나님, 우리는 일주일에 몇 번 금식하고,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고 하는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성전에 엎드려 가지고 기도하고 있는 세리보다 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했던 그런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서 회개하라고 얘기를 하니까 회개할 것이 이 사람들에게는 전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이 이야기하고 있죠.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라 너희는 회개해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생각을 할 때에 아브라함은 자신들의 믿음의 조상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한 것처럼, 아브라함으로부터 우리는 혈통을 이어받아서 그의 자손들이 된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할 리가 없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시는 그러한 말씀은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들이 요한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메시아 되신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도 너희들에게 답변을 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하죠.
그런데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데도 예수님께서 메시아 되심을 아주 비유를 들어서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는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28절부터 32절 마지막에 있는 그 장면이 그 얘기인데,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아주 쉽습니다.
두 아들이 있는데 아버지가 얘들아, 누가 가서 일을 좀 해야 되겠다. 큰아들에게 그 이야기를 한 겁니다. 큰아들이 “예”라고 말을 해 놓고 안 간 겁니다. 그런데 안 가자 둘째 아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아들아, 포도원에 가서 일을 좀 해라”라고 얘기를 했더니 둘째 아들은 “싫습니다”라고 얘기를 했는데, 좀 가만히 보니까 아버지가 나를 그래도 먹여 주고 재워 주고 키워 줬는데 이러면 안 되겠다 하고 생각을 해서 뉘우쳐서 다시 포도원으로 들어갔다는 겁니다.
이 얘기를 지금 나온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유대인의 장로들에게 하고 있는 겁니다. 두 아들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둘째 아들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러니까 아마 이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가장 쉬운 비유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되는데, 그런데 사실 이 비유 속에서 우리가 하나 생각을 해야 될 것은 뭐냐면,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실천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가 중요하다는 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구나 이렇게 많이 우리들이 생각을 하는데, 사실 그것보다 조금 더 깊은 그러한 내용이 여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쉽지만 조금 깊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두 아들을 놓고서 비유하는 것은 포커스가 어디에 있냐면, 아버지의 말을 듣고 포도원으로 간 둘째 아들, 싫다고 했지만 나중에 뉘우쳐서 간 둘째 아들에게 포커스가 있는 게 아니라, 첫째 아들에게 사실은 포커스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과의 어떤 논쟁을 지금 하고 있는 중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포커스도 역시 그들, 논쟁하는 사람들에게 맞춰져 있다는 것이죠.
다시 말씀드리면, 어떤 의미가 이렇게 있냐면 초점은 첫째 아들에게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가겠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못 가는 그런 사랑, 못 가는 입장, 다시 말씀드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것, 이것, 이런 것들을 지켜라라고 얘기를 했는데, “네, 알겠습니다. 지키겠습니다” 하고 그 말씀을 다 받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살다가 보니까 그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실력이 안 되는 겁니다. 율법으로 그런 말씀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많은 율법이 이렇게 있는데, 그 가운데 딱 빼내서 열 가지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많은데, 계명들이 너무 많은데 열 가지도 우리들은 못 지키는 연약한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여러분들, 지키면 열 가지 다 지켜요? 못 지켜요. 여러 가지도 못 지켜요. 그 많은 율법들이 있으면, 첫째 아들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던져 주셨다는 겁니다. 그게 열 가지가 아니라 한두 가지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접수받았다는 겁니다.
하나님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얘기를 했지만, 이들에게 나오는 것은 그 말씀을 지킬 수 있을 만한 실력이 없는 겁니다. 능력이 없는 거죠. 첫째 아들처럼 아버지 가겠습니다라고 얘기를 했지만, 갈 만한 것이 안 되는 겁니다. 그 입장이 안 되는 것이죠.
우리가 살면서도 이런 일들을 참 많이 겪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뜻하는 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그렇죠. 때로는 어떻게 보면 나약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또 어떨 때는 게으르기 때문에도 그럴 수가 있고, 우리는 마음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대로 살지 못합니다. 이게 우리의 연약함인 것이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지금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은 바리새인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성전,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제사 제도,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윤리, 도덕, 착한 행실들, 이런 것만 가지고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왜? 너희들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너희들은 그런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왜 그러냐면 너희들이 근본적으로 속을 갈아엎지 않으면, 다시 말씀드리면 너희들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을 행할 만한 능력이 속에서는 나오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 보면, 거기에 열매 맺는 비유를 주님께서 들고 계시는데, 열매 맺는 비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뭐냐면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히지,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쁜 나무에서는 나쁜 열매가 맺히는 것이지,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포도나무에서 포도 열매가 맺히는 것이지, 가시나무에서, 엉겅퀴에서 포도를 맺지 않는다는 것이죠. 엉겅퀴에서 무화과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겁니다. 엉겅퀴에서는 가시만 낼 뿐이지.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서 열매 나무 얘기를 하시면서 중요한 얘기는 뭐냐면, 너희들은 근본적으로 틀려먹은 나무이기 때문에, 나쁜 나무이기 때문에, 너희들 속에서 좋은 것, 착한 것, 선한 것, 이런 것들이 절대 나올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은 근본적으로 갈아엎어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듭나지 않으면, 주님께서 나의 왕이시요, 주님께서 나의 주인이시요, 주님께서 내 삶의 주관자이십니다라는 신앙 고백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의 삶에서는 절대 좋은 열매가 맺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온전히 무릎 꿇고, “주님, 정말 당신만이 내 삶의 주관자시여, 내 삶을 인도하시는 인도자이십니다. 당신만이 나의 왕이시고, 당신만이 나의 주인이십니다”라는 그런 회개, 어떤 거듭남이 우리들에게 있어야만 우리의 삶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러한 열매가 맺힐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근본적인 신앙의 고백이 없이 좋은 열매만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지금 주님께서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지금 이제 봄철이기 때문에 많이 피었습니다. 꽃들도 막 자라고요. 그런데 잎사귀가 다 떨어져 있는 겨울에는 이게 무슨 나무인지 전문가가 아니면 우리들은 보면서도 잘 모르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잎이 피고 열매가 맺히면 그 열매를 봐서, “아, 이게 대추나무였었구나. 이게 사과나무였었구나. 이게 배나무였었구나”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 말씀을 하신 것이죠.
그 아들은 갈 만한 능력이 없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너희들이 그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밖에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1절 말씀을 보시면 그래서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그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
여기서 첫째 아들은 누구를 가리키냐면, 바리새인들, 제사장들, 영적인 지도자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종교의식이 있어서 우리 아니면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그렇게 외쳐도 그들은 절대 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께로, 예수님께로 가지 않았던 그런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의 비유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둘째 아들에 있는 사람들은 삶이 불행한 그러한 사람들, 세리들, 많은 사람들로부터 다른 사람들의 물건을 빼앗는 아주 나쁜 사람들이라고 욕을 먹는 세리들과 같이, 또 창녀들과 같이, 도둑놈들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볼 때에 저 사람들은 당연히 천국에 못 들어갈 사람이라고 아예 낙인을 찍어 버렸던 그러한 사람들이 요한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는 소리를 듣고 나아가서 회개를 하고, 그들은 천국을 맞이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첫째 아들이냐, 둘째 아들이냐, 이게 너무나도 여기에서 지금 잘 나타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요한은 세례를 베풀면서 갈 길을 제시한 겁니다. 너희들이 그런 방법으로 절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그 길을 제시한 거죠.
그래서 자신들이 언제나 “우리는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회개할 것이 없어서 결국은 예수님께로 못 나갔고, 우리는 정말 우리의 핵심을 보아서 우리는 죽으면 지옥에 갈 사람들이야. 그래서 요한이 외쳤던 회개의 소리를 듣고 깨우치고 예수님께로 나아갔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출애굽을 하고 광야에서 살 때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십니다. 불뱀을 보내서 사람들을 물게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갈 때에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라고 얘기를 했을 때, 하나님께서 길을 제시하죠.
“모세야, 놋으로 뱀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높이 매달아라. 그리고 그것을 쳐다보면 너희들이 나을 것이다.”
여러분들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여러분들 쳐다볼 것 같습니까? 뭐 간장 갈고 된장 갈고 약국을 찾아다니지. 아니 저거를 왜 쳐다봐? 내가 지금 상처를 입었는데 간장을 바르는 게 낫고, 하다못해 치약이라도 바르는 게 빠르고 된장이라도 바르는 게 더 빠른 거지. 장대에 달린 놋뱀이 무슨 역할이 있다고 그것을 보겠습니까?
그러나 나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 아닙니까? 장대에 달린 놋뱀을 보면 낫는다. 낫는다는 그 길을 제시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나았고, 끝까지 믿지 않고 보지 않는 사람들은 죽었다는 겁니다.
예수를 보라는 거죠.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살 길이고 생명의 길이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라고 세례 요한이 이렇게 제시한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께로 가면 되는 거죠.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는 붙들면 되는 거죠.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윤리를 고집하고, 자신들의 율법을 고집하고, 제사 제도를 고집하고, 우리는 아니야, 우리는 회개할 것 하나 없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이 방법밖에 없어. 끝까지 이렇게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지 않고 죽은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들은 그렇게 살아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32절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여러분들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누가 천국에 갈 것인가? 우리도 한번 생각을 해 봅시다. 유대인들의 논쟁이 여기에 담겨져 있는데, 우리는 주변에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을 가리켜서, “야, 저 사람은 죽어도 천국에 갈 사람이야. 저런 사람이 천국에 안 가면 나는 천국에 안 갈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죠.
우리 주변들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윤리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거룩하고 정결함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 되는 일을 하나도 안 끼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그런 사람들은 회개하기가 참 힘듭니다.
회개하라고 그러면, “내가 뭘 회개하냐”라는 거죠. 나는 도덕적으로 열심히 살았다. 윤리적으로 흠이 없는 그런 사람이다. 내가 누구를 해코지한 적이 있느냐. 누구에게 잘못한 적이 없느냐. 봐라,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죽으면 저 사람 천국 갈 사람이라고 얘기하는데 회개할 게 뭐가 있느냐라고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이게 유대인들의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자신들에게 있어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 자랑, 우리는 성전을 가지고 있다는 이 자랑, 우리는 율법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이러한 자랑, 이런 것들이 늘 이들에게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지금 물어본다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천국에 가는 게 아니냐고 생각을 하겠지만, 성경은 우리들에게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회개하고, 우리의 갈 길을 여는 사람, 예수께로 갈 사람, 예수 안에 있는 사람, 우리의 갈 길이 어떤 윤리적인 것이나 도덕적으로 정결해서, 선해서, 의로워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방법으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께 가라는 거죠. 세례 요한이 얘기를 한 것처럼 예수님도 얘기를 하는 겁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라고 예수님이 단호하게 얘기를 하신 겁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 비유는 첫째 아들에게 포커스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첫째 아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 곧 율법적인 것들, 윤리적인 것들, 도덕적인 것들 다 버려 버리고 예수님께로 가야 산다는 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첫째 아들이 못 가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키겠다고 얘기를 했지만 못 간 것처럼 너희는 그 수준이 안 된 거다. 그러나 예수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 마음을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갈아엎어서, 우리 안에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하나님을 아는 영적인 눈이 뜨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그 마음을 우리들에게 주셨고, 실질적으로 우리가 예수를 가리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하며, 우리의 의지, 우리의 힘,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의 방법으로, 나를 위해 구속하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예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하나님께로 들어간다는 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듭나지 않고는 절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가 없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가장 중요한 포커스죠.
우리 현대인의 신앙생활에 가장 잘못된 그런 부분들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종교적인 열심히, 다시 말씀드리면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히 교회 출석하고, 열심히 우리들에게 한 행위, 종교적인 행위,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신앙의 열매를 얻는다는 이런 잘못된 생각들이 우리들에게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로 말미암아 신앙의 열매를 맺는 것은,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는 우리의 어떤 종교적인 열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으로부터의 보상을 요구하는 것을 우리들이 많이 생각할 때가 있다는 겁니다.
주일 예배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깊게는 말씀을 못 드리겠지만, 성경 공부 시간에는 깊게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로마서가 새로 시작이 되는데, 살짝 수박 겉핥기식으로 “이게 수박입니다”라고만 이야기하고 간단하게 끝날 건데, 여러분들 우리가 그렇습니다.
어떤 종교적인 행위로 신앙의 보상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열매를 맺는 것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듭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 열매를 맺는 것이지, 신앙의 어떤 행위들, 열심들,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해서 당연히 내가 그것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그래서 내 자랑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우리들이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가 그런 것들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한 주 동안 이 말씀을 가지고 좀 고민하셔야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지금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자랑하는가? 나의 열심? 아니면 그냥 아무런 것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드는, 십자가만 붙잡는 그런 믿음이 있다.
한 주 동안 여러분들이 고민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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