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1:1~11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만왕의
- seattleomc
- Jul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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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에 봄이 찾아왔습니다. 여러분들 괜히 막 설레죠? 안 설레나요?
제가 설레게 해 드릴게요. 예배 끝나고 저희 집으로 오십시오. 저희 집 앞에 핀 히아신스가 이제 제법 향기를 아주 많이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을 들어갈 때, 나올 때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제가 정성껏 히아신스를 심어 놓았습니다.
두더지가 침범하지 못하게 우리 황족수 권사님, 여러 군데 둘러둘러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습니다. 선물 많이 사 가지고 오셨죠? 해외를 다녀오시는 분들은 빈손으로 오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가 마태복음을 묵상하고, 마태복음 21장에 들어가는데, 우리 성경을 이렇게 보시면 항상 두 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전편은 예수님께서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시는 그 과정, 그리고 후반은 그 고난을 통해서 어떤 일이 펼쳐졌는가에 대한 설명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28장까지 있어요. 28장까지 있는데, 21장부터 27장까지 거의 7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 일주일 동안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중심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꼭 마태복음뿐만이 아니라 다른 복음서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거의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했는가? 왜 우리를 위하여 메시아로 오셨다는 그분이 약한 자의 모습으로, 연약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조롱과 사람들의 채찍을 맞으시고, 때리면 맞으시고, 끌려가면 끌리는 대로, 끌어당기면 끌려가는 그러한 연약한 모습으로 왜 오셨는가에 대한 설명들이 뒷부분에는 쭉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1장부터 마태복음 27장까지도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신 마지막 일주일에 대한 그 기간을 많은 장을 할애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쓴 마태 또한 역시 동일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 그리고 또 예수님의 메시아 직에 대한 본질이,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의 본질, 신앙의 본질, 이런 것들이 무엇인지 또 어떠해야 되는지를 아주 지혜롭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자세하게 우리들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고 그 이야기들을 쭉 이어가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시작이 되죠. 그리고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로 주님께서 이 길을 걸어가실 때 어떠한 고난이 있었고,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가, 이런 것들을 마태는 자세하게 관찰하면서 하나도 빠지지 않게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마태복음을 살펴보면 자세하게도 예수님이 이런 일을 당하셨구나라는 그 이야기들을 볼 수가 있다는 거죠.
오늘 우리들이 말씀을 보시면 지난주에 묵상했던 바디매오와 또 다른 소경, 이 사람들을 고쳐 주신 이후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그러한 장면입니다.
절기상으로는 유월절이 가까웠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유월절 행사를 위해서 성전으로 모여들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는 그러한 때, 지난주에 우리들이 묵상했던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로 그때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 대한 소문, 예수님에 대한 어떤 이적들이나 행적들, 이런 것들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도 있겠고, 아니면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겠고, 아니면 아주 오랜만에 예루살렘에 올라오면서 그 소문이 진짜인가, 맞나 안 맞나 사실 여부를 따지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오는 그런 사람들도 있겠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유월절을 맞이해서 예배드리러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있는 바로 그때라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그러나 이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는 달리 예수님은 성공을 위해서, 또 유명세를 타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입성은 예수님의 고난과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그 말씀입니다.
다른 성경 한번 보세요. 마태복음 20장 18절을 보시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그러한 장면인데,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이유는 제사장들에게 넘겨지기 위해서, 그리고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주께서 죽음을 당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간다고 제자들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탄생부터 시작해서 모든 예수님의 사역, 삶, 예수님의 생애, 이런 것들은 예루살렘의 입성을 위한 것이었다고 이렇게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이름 가운데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이 땅 가운데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보여 주십시오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거늘 어찌하여 다시 하나님을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귀한 말씀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도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아니하는 그러한 것들이 없이, 완벽하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러한 삶을 살아내신 분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우리와 같은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오신 것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이야기하면서,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 가운데 비침에 어둠이 그것을 알지 못하더라.”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이죠. 이 생명이 우리 가운데 오셨는데 하나의 빛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빛으로 오셨는데 어둠을 비추자, 어둠이 그 빛을 알아본 것이 아니라 어둠이 그 빛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 가운데 오셨지만, 죄악된 세상 가운데 오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여전히 어두움의 영적인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서 환영하거나,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서 기뻐하거나 즐거워했던 사람들이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성경이 우리들에게 증언하는 그런 내용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입성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늘 성경에 나와 있는 것처럼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쳤던 그 외침이 정말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수난을 향하여 달려가는 그 예수에 대한 환영이요, 그 예수에 대한 호산나라는 외침이었나? 그것은 아니었다는 것이죠.
그들의 어떠한 가지고 있는 욕망,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 이런 것들을 채워 주실 분으로서의 메시아를 그들은 바라보고 환영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일주일 전,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어디를 들리시냐면 베다니를 들리십니다. 베다니는 우리들이 잘 알다시피 죽음 가운데서 부활한 나사로가 살던 그러한 동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집에서 하룻밤을 유하게 되는데, 거기에 마리아라는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서 자신이 아주 귀하게 가지고 있었던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발 앞에 부어 드리고, 그리고 그의 존귀한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닦는 그러한 사건을 우리들이 보게 됩니다.
그때 가룟 유다가 나와서 책망을 하죠. “어찌하여서 이 팔면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이 귀한 것을 허비하느냐, 낭비하느냐. 이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면 얼마나 좋은 일이냐.”
참 멋있죠. 가룟 유다가 하는 말이 우리들이 생각할 때도 그렇습니다. 이것을 아껴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면 얼마나 좋겠느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가룟 유다를 책망하십니다.
“그대로 놔두라. 이 여인이 나에게 하는 행동, 이런 것들은 나의 죽음을 예비한 행동이다.”라고 설명하죠. 그래서 그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서 주님 발 앞에 부어 드리고, 머리로 주님 발을 닦는 그 행위를 예수님은 그대로 수용하십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라는 이 한 여인, 한 개인 홀로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그 예배를 하고 있죠. 그러니까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홀로, 여러분도 혼자서 아주 조용한 가운데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만남, 이런 것들을 가질 때,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 얼마만큼 경험해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그 안에서 두는 영적인 기쁨, 영적인 충만함, 주님과 내가 일대일로 만나서 지금 말씀을 나누는구나라는 그런 기쁨, 이런 것들이 이 마리아에게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마리아는 홀로 주님의 그 죽음을 예배하는 그러한 여인으로 성경에 기록됩니다. 한 사람에게 주님은 예배를 받으시는 거죠.
본문 말씀을 한번 읽어 보시죠. 1절과 2절을 보시면,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이런 요구를 하십니다. 건너편으로 가면 거기에 나귀와 나귀 새끼가 매어져 있을 텐데 그것을 풀어 가지고 와라라고 이렇게 부탁합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이 나귀는 누구도 타지 않았던 어린 나귀다. 새로운 나귀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이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장면을 이렇게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왕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왕 같은 대접을 받지 아니하시고 겸손하게 낮아져서 어린 나귀 새끼를 타는 모습을 우리들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예수님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렇게 철저하게 우리의 주님이시고 왕이시지만 자기 자신을 낮추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우리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면, 어떤 대접을 내가 받아야만 나를 스스로 결정한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이 대접을 받는 만큼 내가 나타나야 된다는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민 사회도 마찬가지고, 어떤 종교적인 행사도 그렇고, 또 국가적인 행사도 그렇고, 행사가 길어지는 이유가 뭡니까? 내빈들을 다 소개해야 됩니다. 혹시라도 한 사람을 빠뜨리면 난리가 나고, 또 소개한 내빈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시키고 어떤 사람은 안 시키고, 인사말 같은 것도 다 시켜야 됩니다. 안 시키면 난리가 나는 거죠. 후원금이 끊어지는 것도 후원금이 끊어지는 것이겠지만, 그러다 보니까 행사가 길어집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나를 좀 알아봐 줘야지 내가 대접을 받는다는 것으로 자기 위치를 결정하는 그러한 것을 보게 되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는 겁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이렇게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거죠.
주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뭐냐면, 영적인 사람은 그냥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으로 그것으로 끝, 더 이상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김에 대한 대가 같은 것, 이런 것들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그런 것들을 요구하죠.
나의 섬김에 대한,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축복이나 이런 것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자들처럼 우리가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는데 거기에 대한 대가가 뭡니까라고 얘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습과 예수님을 주로 믿고 하나님으로 믿고 우리의 무릎을 꿇어 그 앞에 경배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얼마나 많이 다른가라는 것을 보게 되죠.
3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좀 의아한 말씀을 하시는데, 나귀를 끌어오라고 명령하셨고, 3절은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라.”
제자들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라. 주인에게 무슨 양해를 구해 가지고, 주인을 설득시켜서, 아니면 돈을 가지고 값을 치러서 가지고 오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무조건 가지고 오라는 겁니다. 굉장히 의아한 장면을 여기서 보게 되는데, 만일 누가 묻거든, 여기서 누가라는 사람은 아마 이 나귀의 주인이겠죠. 누가 묻거든 “주가 쓰겠다 하라.” 그러면 내어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쓰신다면 다 내어줘야 되는가? 여기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주가 쓰시겠다.”라는 이 말이 어떤 의미가 있냐면, 우리의 주인이 쓰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 곧 하나님께서 이것을 사용하시겠다는 그러한 의미로 “주가 쓰시겠다 하라.”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호칭이 여기에서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이 주인이 얼마만큼 신앙이 좋은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주인에 대해서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주가 쓰시겠다, 하나님께서 나의 것을 쓰시겠다고 한다면 기꺼이 내놓아라. 내놓을 것이라고 주님이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도 가끔 기도하다가 그런 얘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이런 표현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나를 다스리시는 주님이실 뿐만 아니라 나의 주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표현을 쓰는 것처럼, 이 주인에게 이 얘기를 하면 그 사람이 아낌없이 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쓰시겠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물론 인색하고 아깝게 생각하고 그러겠지만, 이 쓰임이 하나님께 대한 쓰임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우리 교회도 그런 분들이 참 많이 계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하면 아낌없이 내놓는 그런 분들이 참 많이 계시는데, 그런데 이 사건이, 이 말씀이 그냥 단순하게 우연히 이렇게 주어진 그러한 말씀이 아니라 이 말씀은 구약 성경에 예언되어져 있는 그 말씀이 지금 다시 반복되어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4절과 5절 말씀을 보시면, 이게 성경에서 예언된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고 이야기하는데, 4절과 5절 말씀을 보시면,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그대로 이루게 하려 함이라고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라는 것이죠.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은 스가랴서 9장 9절을 한번 봅시다. 스가랴서 9장 9절을 보시면 뭐라고 얘기하고 있냐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왕이신 메시아는 겸손하여서 어린 나귀를 타실 것이라고 스가랴서가 이미 예언하고 있죠. 그런데 그분은 어떤 분이시냐?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그러한 왕이다. 그런 분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실 때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지 않습니까? 그것은 성경을 이루게 하려 함이라. 다시 말씀드리면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그 아기 예수님은 곧 메시아다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성경에 있는 말씀들을 그대로 이루려는 것들을 참 많이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그런데 왜 그렇게 하셨느냐? 성경에서 예언하고 있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예언, 오시리라 약속하신 그분이 곧 나다. 예수님이다라는 그 얘기를 하는 거죠.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셨다. 그리고 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고 얘기하는 그 이유는 뭐냐면, 내가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그 메시아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함으로 말미암아 성경을 이루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구원의 주 예수님은 어떤 목적으로 입성하시냐? 이방인들에게 평화를 전하는 그러한 왕의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그러한 구원의 모습으로 올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성경에 보면 나중에 제자들이 이 사실을 깨달았다는 이러한 표현을 쓰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왜 굳이 이렇게 하셔야 됐느냐? 왕의 모습으로 오시려면 말을 타고 당당하게 정복자의 모습으로, 메시아다운 그런 모습으로 오시는 게 맞지 않느냐고 제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텐데, 아무튼 예수님께서 나귀라도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고 하니, 제자들은 이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함성 속에서 아마 그들은 들뜬 마음에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든지 말을 타시든지 관계없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고 기뻐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예수님에 대한 헌신, 수고, 보상, 모든 것들을 버리고 따랐던 것에 대한 갚으심, 이런 것들이 이제 곧 이루어질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라는 거겠죠.
그런데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것은, 제자들은 이것이 무슨 뜻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셔야 되는지, 왜 겸손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제자들은 전혀 몰랐다는 것이죠.
스가랴 9장 10절, 그다음 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져 있습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의 활도 끊어지리라.” 그 전쟁이 그친다는 거죠.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을 끊겠다는 거죠. “그가 메시아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 말씀을 추려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메시아로 오시는 분이고, 화평을 전하는, 평화를 전하는, 그것을 누구에게까지냐면 이방인들에게까지, 유브라데에서부터 땅끝까지 있는 모든 족속의 이방인들에게까지 이 평화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지금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지만 겸손하신 분으로 오신 겁니다. 일반적인 우리 입장과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을 보게 되는데, 여기서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다, 겸손의 왕으로 오셨다고 얘기할 때 이 겸손이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냐면 가난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의미가 있습니다. 낮아짐에 대한 의미도 있고, 또 비천함에 대한 의미도 있습니다.
겸손하다는 얘기는 누구의 도움이 없이는 내가 살아갈 수 없는 모습이라는 그런 의미가 겸손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시각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낮아지고, 가난한 모습으로, 비천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이게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에 있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오셨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우리들이 여기서 하나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내용이냐면, 예수님의 오심,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그리고 부활의 승리, 이 모든 것들은 세상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정복자의 모습으로 오신 그런 메시아가 아니라,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그것을 우리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오심은 세상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고, 삶을 사셨고, 고난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세상의 축복과 세상의 잘됨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 8절과 9절 말씀을 이렇게 보시면 뭐라고 얘기하냐면,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제자들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다 폈습니다. 겉옷을 펴고, 예수님이 어린 나귀 새끼를 타자 그 위에 이렇게 깔고, 제자들이 옷을 벗는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서 카펫처럼 그 길에 깔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종려나무 가지를 잘라서 꺾어서 그 길에다가 이렇게 깔았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이제 저기만 올라가면 끝났다.”라는 그 생각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는 그 함성 소리에 제자들은 또 얼마나 들떴겠습니까?
여기 백성들의 시각을 한번 보십시오. 아마 유월절 그 행사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각국에서 예루살렘으로 왔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는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 사람들 가운데서는 예수님의 기적과 이적, 눈먼 자가 눈을 뜨고, 귀신이 쫓겨 나가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봉사가 다시 보는 것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들, 이런 것들을 눈으로 직접 본 그런 사람들도 있겠고, 아니면 그것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어서 말로만 안 그런 사람들도 있겠고, 그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서 얼마나 외쳤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오시는 이여.” 하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치는 가운데 신나했겠습니까? 이것이 예수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시각이었다는 것이죠.
여리고로 오는 그 길에서 눈먼 사람 두 사람의 눈을 뜨게 한 바디매오도 아마 이곳에 같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우리가 기대했던 그 사람이 맞다.” 확신 가운데 있지 않았겠습니까? 아마 벳새다들에서 행하셨던 오병이어의 기적, 그것을 직접 경험한 많은 사람들도 있었겠습니다. 아마 5천 명 이상을 먹이셨다고 하면 그 사람들도 분명히 이 자리에 있었겠죠.
이들은 분명히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확신하고 이렇게 이야기했을 겁니다. “이분이 오시면 우리의 고생과 우리의 수고와 우리의 눈물과 우리의 한숨은 다 씻어 주실 것이다. 이분이 오시면 로마가 다스리는 이 정치적인 상황, 정말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끝날 것이다.”
이런 기대감 속에서 아마 예수님을 맞이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상황을 가리켜서 뭐라고 얘기하냐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19장 38절을 보시면,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하니.”
그러니까 온 성이 소동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우리를 다스려 주십시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합니다.” 이런 소리들이 막 섞여서 외치고 있는 거죠.
이때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등장해서 이 소리를 외치는 사람들을 향하여서, 또 제자들을 향하여서 잠잠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은 메시아가 아니다.”라는 그러한 의미겠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돌들이, 무생물체가 그들이 아마 소리를 지를 것이라고 주께서 이야기하시죠.
그러니까 주님께서도 그렇게 이야기하시니, 이 많은 사람들이 “드디어 이스라엘을 회복할 그때가 지금이다.”라고 생각했던 거겠죠. 그러니까 더욱더 소리를 질렀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아까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예수님을 어떤 모습으로 바라보았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은 묵묵히 자신이 해야 될 일을 행하고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길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요, 당신이 오시면 우리의 고통이 끝납니다.”라는 기대와 환호 속에서 외친 그러한 외침이라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고난을 당하고 그 고난 속에 십자가로 향하는 그 길을 향하여서 예수님은 지금 입성하신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분명하게 이 예수님의 행동들을 통하여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치셨고, 또 제자들은 분명하게 성경에 기록했고, 우리는 그런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의 시각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성도들의 시각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죠.
정말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의 눈물과 한숨과 근심과 걱정이 다 끝나는 걸로, 우리들은 그 모습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이런 행동들, 이런 행위들, 이런 섬김과 이런 헌신과 수고와 봉사를 하게 된다면 나의 이 헌신에 대해, 노력에 대해, 수고에 대해 예수님은 반드시 갚아 주실 것이다라는 이런 시각을 가지고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섬기고 따르고 있느냐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쩌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쳤던 그 군중들, 그 무리들과 비슷한, 아니면 똑같은 그런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왕이 아니다. 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죠.
제자들도 이것을 몰랐다고 이야기합니다. 제자들도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요한이 이렇게 제자들의 당시의 모습을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을 한번 볼게요.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그렇죠? 요한은 분명하게 성경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이 이렇게 되는지 깨닫지 못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자기들의 모든 수고가 이제 끝나는 걸로만 생각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그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처럼 한 제자는 우측에, 한 제자는 좌측에, 또 베드로는 그 높으려면 대통령을 하든지 말든지, 자기네들의 어떤 자리, 자기네들에게 주어질 어떤 축복들, 세상의 수고, 세상의 고난, 세상의 근심과 한숨들, 이 모든 것들이 다 끝나는 줄로 생각하고 이것을 지금 따랐다는 겁니다.
이 일을 제자들은 이런 뜻인지 몰랐다. 그런데 한 가지 밝히는 것은 무엇이냐면,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을 때,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을 때, 그들은 그때 “이것이 그런 뜻이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죠.
실질적으로 제자들의 깨달음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왕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성령께서 그들에게 깨달음을 주셨을 때 그들은 깨달았다. 성령 받기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성령께서 오심으로 제자들이 깨닫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을 한번 보십시오. 우리는 성령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성령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시겠다, 우리 안에, 우리의 마음 안에, 우리의 영적인 그 안에 내주하시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일을 제자들은 몰랐지만 성령 받은 이후에 알게 되었다, 깨닫게 되었다고 분명히 활자로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어집니다. 성령께서 가르치시고 있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오신 이유, 예수님이 겸손한 이유, 왜 나귀를 타셨는지에 대한 이유, 왜 그런 연약한 모습으로 죽어야만 되었다는 이유, 이런 모든 설명을 성경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이죠.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혹시 성경을 읽을 때 감동이 없고 깨달음이 없을까 봐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셔서 성경을 읽을 때 그것을 깨닫게 해 주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오늘날의 신앙생활이 성령을 받은 이후에 “이것이 이런 뜻이었구나.” 깨달았던 제자들의 모습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죠.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예수님을 섬기고 있느냐는 것이죠.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우리들의 외침,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시오. 우리는 성경이 주어지고 성령이 내주하시고 성경에서 밝히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는 이 외침이 오늘날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외침이라고 생각됩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 나의 나라는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것이다. 나의 백성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나라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자들이다.”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다시 한번 옛날로, 처음으로 돌아가셔서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시고, 우리의 외침이 꼭 주님께서 원하시는 “나를 불쌍히 여기십시오.”라는 그 외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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