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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20:29~34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렇게 안 올 것 같았던 눈이 이어 내렸습니다. 시애틀이 참 좋은 게 그렇게 눈 구경을 한 번 하고, 눈 치울 일 없이 하루만 지나면 또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고 그래서 좋은 것 같습니다.

바람도 많이 불고, 한 주가 참 이상한 날씨로 여러분들을 많이 고생시켰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정에 눈 피해나 아니면 바람 피해는 없었으리라고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아주 중요한 말씀을 접하게 되는데요. 오늘 이 본문에 나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행하신 마지막 기적입니다. 이 기적을 행하시고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시고, 그리고 나귀를 타고 그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성 안으로 들어가셔서 십자가의 사건으로 바로 연결되는 내용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마지막 기적으로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는데,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예수님의 수난 당하시기 몇 개월 전의 일이고, 오늘 이 소경을 고치는 일은 고난주간 며칠 전에 이루어진 그러한 일입니다.

물론 부활하시고 나서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이 많고, 2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러 곳곳에서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들이 보게 되지만, 예수님께서 성경상에 살아 계셔서 행하신 마지막 기적이라고 우리들이 보면 됩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셨고, 다시 말씀드리면 처음부터 예수님이 오심은 죽으러 오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그 방법 외에는 우리를 구원할 만한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속하신 속죄양으로 오셨다는 것을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33년의 짧은 생애,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3년의 공생애 동안 가르치셨던 모든 말씀이나 행하셨던 모든 기적들,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은 십자가를 가리킨다고 기억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아무 공로 없는 우리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십자가임을 보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면서 여러 가지 불가한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잘 알다시피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마치 떨어지는 핏방울과 같이 변했다는 것을 보면서, 십자가를 지시는 그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감당하시기에 참 무거운 짐이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역의 마지막 정점을 찍는 이 중차대한 일, 이 일을 바로 목전에 두고 행해지는 일이 소경들을 만나는 그 사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오해했죠. 제자들을 비롯해서.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그 모습을 보고서 드디어 메시아께서 오셔서 우리를 정치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해방할 그때다라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반겼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때 소경 둘이 이제 예수님 앞에, 예수님의 행진을 가로막는 그러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수많은 군중들이라고 이렇게 표현했는데, 이 소경 둘의 외침이 그 수많은 군중들의 소리를 잠잠케 할 정도로, 그 소리를 잡아먹을 정도로 이 두 소경이 외친 소리가 컸고, 예수님은 그 소리를 들으셨고, 그 행렬의 흐름을 멈추사 그 소경들을 낫게 하셨다는 게 오늘 말씀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사건을 통해서 한번 확인해 봐야 될 바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될 텐데, 예수님께서 소경을 낫게 하시는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메시아 되심을 분명하게 밝히는 그러한 내용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나?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그 메시아의 직분은 과연 어떤 직분일까라는 것이 오늘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사건 속에서 밝히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뿐만 아니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이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소경들이 둘이 아니다, 한 명이다라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고, 또 이 소경들에 대해서 맹인이라는 사실과 더불어서 이들은 거지였다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가는 이 사람의 이름을 밝혔는데,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유독 마태복음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맹인들,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신다면 맹인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들,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도움을 요청할 때 예수님의 도움이 꼭 필요한 그러한 사람들이 여기에서 등장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야 될 그런 사람들은 빌어먹더라도 하루 한 끼를 해결해야 되는 참 가난하고 불쌍한 처지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이 보게 되는데요.

마태복음에서는 한 명이 아니라 바디매오 한 사람이 아니라 두 명이었다고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데, 제자들의 관점이 다른가, 아니면 성경이 지금 잘못 기록되어 있는가, 우리들이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마태복음을 처음 시작할 때 뭐라고 말씀드렸냐면,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해서 쓰여졌다고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들을 거지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라는 표현을 씁니다. 거지가 아니라 그냥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의 지나가는 행렬을 보고서 예수님께 나아왔다고 표현합니다.

왜 마태는 유대인을 위하여 쓴 이 복음에서 한 명이 아닌, 바디매오 한 사람이 아닌, 소경 두 사람을 이렇게 내세웠다. 그리고 이들을 거지라고 표현하지 않고 길가에 앉아 있었다고 이렇게 표현했을까?

여러분들, 그 부분은 율법을 보시면 율법 속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때 이것이 진실이라고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만 됩니다. 그래야만 그것이 진실된 증거가 되는 거죠.

그리고 또 그 일이 진실되다고 증거한 사람들도 여자들은 안 됐습니다. 만 명 있어도, 여자들이 100명 있어도 안 됐습니다. 어린아이들도 안 됐습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도 안 됐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이 사람을 거지라 표현하지 않고 길가에 앉아 있던 사람들로 이렇게 표현하고,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 이상으로, 두 사람으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죠.

그래서 이 소경 둘이, 맹인 둘이 예수님을 가리켜 뭐라고 얘기하냐면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맹인 두 사람이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요, 그는 진실된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다라는 이 증언을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겁니다. 진실된 거죠. 이 사람들의 증언은.

그래서 이 이후로 21장에도 우리들이 보겠지만, 예루살렘 성에 올라가서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외칠 때 이들도 마찬가지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호산나.” 이렇게 외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이 외침의 시발점이 바로 이 소경 두 사람들에게 있었다고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맹인 두 사람이 예수님을 가리켜, 다시 말씀드리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는 이 표현을 쓸 때, 어떻게 이 사람들은 예수가 다윗의 자손인 줄 알았나,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나라는 이 궁금증을 여기서 한번 우리들이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라 3년 동안 같이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메시지, 예수님께서 하셨던 설교 말씀을 3년 동안이나 들었고, 또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수많은 기적들을 곁에서 아주 가까이서 보면서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가 지난 몇 주 동안 계속 살펴보았던 것처럼 결국은 누가 크느냐, 누가 천국에서는 크냐, 누가 헌신에 대한, 또 순종에 대한, 모든 것들을 버리고 주를 좇은 것에 대한 그 상급을 누가 더 많이 받느냐, 여기에만 관심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제자들은 눈을 떴으나 소경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럴 때 예수님께서 이 두 사람을 불러다가 낫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누가 참된 소경이냐, 누가 참으로 눈을 뜬 사람이냐라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는 거죠.

이들은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겠죠. 그것으로 이들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들이 소원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눈을 뜨는 것이 이들에게는 큰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섬기고 또 예수님을 왕으로 믿고 따르고 있었던 제자들과 이 두 맹인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은 너무나도 다른 그 모습을 우리들이 보게 되죠.

오늘 두 맹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를 만나자마자 “다윗의 자손이다.”라는 이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우리가 이미 마태복음 9장에서 나오는 내용처럼, 두 소경이 예수님께 나와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고백했을 때, 그 다윗의 자손이 갖는 의미가 어떤 의미라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시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이렇게 부르는 것은 “당신은 구약 성경에서 많은 선지자들이 예언하셨던 그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이 고백이 이 안에 담겨져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제 예수님은 소경 두 사람을 고쳐 줌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에게 메시지를 던지는 겁니다. “누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보라.”라고 이야기하죠.

우리 본문 말씀을 한번 봅시다. 29절부터 30절을 보시면,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맹인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여기서 본문을 이렇게 가만히 보면 이렇게 추측이 가능합니다. 맹인으로서 살아가는 그 삶이 얼마나 부담되고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앞을 못 본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합니까?

우리들도 문명의 혜택을 받으면서도 잠깐 한 5분간 정전이 되면 얼마나 불편합니까? 지금은 가까이에 휴대폰 같은 게 있어서 바로 플래시라도 켤 수 있는 세대를 살아가는데, 예전에 우리 어르신들은 정전이 되면 얼마나 불편했습니까? 다시 초를 찾아야 되고, 등잔을 찾아야 되고, 등잔 밑에 있으면서도 어려움이 나오면서 얼굴이 새파래지는 줄도 모르고 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지 않습니까?

이처럼 잠깐 우리들이 불이 나간 것도 이렇게 불편한데, 맹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걸해서 먹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그러한 길목에 이들은 자리를 잡고 그 사람들에게 구걸을 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귀에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사렛에서 어떤 청년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 자를 일으키기도 하고, 귀신도 나가고, 또 벙어리가 말도 하고,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고, 이런 소문들이 계속적으로 들렸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큰 땅이 아니기 때문에, 물론 땅이 작다 해도 사람들이 모여 있을 수 있는 곳이 많이 없기 때문에, 분명히 이들에게도 이러한 소문이 들렸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만나기를 간절히 원했겠지만, 이들을 예수님 앞에 데려다 주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절망 가운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와 함께,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지금까지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 자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게 되는 그 소문을 듣던 그 실체가 지금 자신들 앞을 지나간다고 하니까, 이 소경들의 마음은 얼마나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겠느냐는 것을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겠죠.

그리고 나서 이들은 소문으로 듣던 그 예수님을 불러 세웁니다. 30절을 보시면,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이렇게 우리들이 간단하게 이야기하지만, 이 맹인 두 사람은 이 소리를 간절하게 지금 예수님 앞에 외쳤다는 것이죠.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갈 때 자기 두 사람의 소리가 예수님께 들리려면 얼마나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불러냈겠습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맹인들이 드디어 그 소리가 예수님께 닿았던 겁니다. 그리고 나서 소문으로만 듣던 그 예수님께서 친히 앞에 나타나신 것이죠. 그러니까 이 맹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을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는 이 표현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앞으로 메시아가 올 텐데, 메시아가 오시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예수가 우리가 그렇게 지금까지 기다려 왔던 그 예수로 이 두 맹인을 받아들였다는 것이죠.

이사야서를 한번 보세요. 메시아가 오시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지금 예언하는 그 장면을 여기에서 보게 되는데, 두 맹인도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있었다고 우리들이 생각이 됩니다.

이사야서 35장을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원하시리라.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이라.”

이사야가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이것을 예언으로 남겨 놓았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맹인들이 그가 행한 일들을 소문을 통해서 들었을 때, 맹인이 눈을 뜨고 앉은 자가 일어나고, “아니, 그러면 이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사야가 기록하고 있는 그 메시아가 아닌가?”라는 이 믿음을 가졌겠죠.

그래서 여러분들 성경 공부 열심히 하시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는 성경을 통해서 위로받아야 됩니다.

이 맹인들은 열심히 아마 성경을, 물론 유대인들로 태어나서 성경을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보면서 자라왔기 때문에, 이사야서에 기록되어 있는 메시아도 오시면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이 맹인들의 기대감, 이 맹인들의 소망, 이런 것들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그런 일들로 나타나게 된 것이죠.

그래서 31절을 보시면 뭐라고 얘기하냐면,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수많은 사람들의 소리를 잠재우고 예수님의 귀에 들릴 정도면 얼마나 이들이 몸부림치면서 외치면서 예수님께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시끄러워서 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여기서 우리들이 살펴보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라는 이 말이 있는데, 원어로 보면 이제는 비명을 지른다, 이렇게 표현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비명 지를 때 “아이고, 좋겠습니다.” 이렇게 살짝 하겠습니까? 아니면 큰 소리로 외치면서 비명을 지르겠습니까?

이들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말을 지금 내질렀다고 이야기합니다. 아까 초반에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것처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도 동일하게 기록을 하고 있는데, 그들은 더욱 심히 소리를 질렀다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소리는 얼마나 조그맣겠습니까? 그런데 그 수많은 사람들의 소리를 잠재우고 예수님의 귀에까지 들릴 정도면 얼마나 크게 예수님께 불러짖어야 되겠습니까?

결국 이들의 부르짖음이 예수님의 귀에 들린 겁니다.

그래서 32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반응하시는 것을 거기에서 보게 되는데,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우리들이 마태복음 19장에서 어린아이들이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제자들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고 얘기합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다.”라는 그 표현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연약한 맹인 두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앞을 가로막은 겁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은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들의 소리를 듣고 반응하셨다는 것이죠.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때 33절을 보시면 이 맹인들이 예수님께 이야기하는데, “이르되 주여, 우리가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이 “내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하셨을 때, 이들은 “눈을 뜨기를 원합니다.”라고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들이 원하는 것을 몰라서 그들에게 되물은 것은 아니겠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주실 때 우리의 필요한 것을 몰라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듯이, 예수님께서 이들의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들에게 물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보기 위함인 것이죠.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공관복음을 막론하고 맹인이 눈을 떴다는 이런 일들은 없었지 않습니까? 우리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우리들도 하나님을 믿지만 이 맹인의 믿음만큼 우리들이 따라가지를 못합니다.

맹인들은 이분이 정말 메시아시고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믿음으로 가지고 있었던 거죠.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얘기했을 때, 거지로 살면서 구걸이 잘 되어서 먹을 것을 더 많이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별에서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소소한 것을 예수님께 아뢰지 않았다는 겁니다. 불가능한 것을 예수님께 아뢰었다는 것이죠.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눈을 뜬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잖아요. 우리들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 되면 기도 제목에 포함되지도 않죠.

혹시라도 여러분들의 손주가 세계에서 제일 부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 분들 계세요? 없을 거예요. 그것은 불가능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아예 내려놓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일론 머스크가 나올지 어떻게 알았습니까? 오늘도 일찍까지 부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보다 더 큰 부자가 나올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 엄마가 기도를 했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믿음만큼만 하나님께 구하지 우리의 믿음 이상을 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어떤 일들을 만나고 할 때, 우리가 그 일을 만나서 그 이상을 하나님께 요구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리고 문제만 만나면 우리가 늘 이렇게 문제 앞에 정말 우리의 믿음이 작아진 것들을 얼마나 많이 경험합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하고 얘기를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하나님께서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고 얘기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여전히 어떤 문제를 만나면 두렵고 떨리고 염려와 근심과 걱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 맹인은 이 문제 앞에 담대하게 나갔습니다. 정말 이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정말 이분이 메시아라면 불가능할 게 뭐가 있느냐? 성경에도 메시아가 오시면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아니 우리가 못 믿을 게 무엇이냐 하고 나갔던 것이죠.

그래서 34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곧 보게 되어, 곧 보게 되었다. 여러분들, 영어 잘 아시니까 여기 “곧 보게 되었다.”라는 그 얘기가 원어로는 그들이 다시 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죠. 그러니까 이들이 나면서부터 맹인이 아니라 어떤 문제, 어떤 사건이 일어나서 시력을 잃어버렸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죠.

회복시키셨다. 이들이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보다가 시력을 잃어버린 사람과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과는 그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무엇을 보다가 시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더 답답할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져 주시고 다시 회복시키셨는데, 마찬가지로 메시아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희생당하시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표현하는데, 이 구원하셨다는 말이 회복시키셨다는 그 의미입니다.

무엇으로 회복시키느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회복시키셨다. 그러면 우리가 예전에는 그랬던 사람이었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전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죄가 우리 가운데 들어오고 그 아름다운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죠.

그때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치르심으로,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아름다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이 모습을 다시 회복시킨 겁니다.

그래서 이 맹인이 지금 회복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누가복음에는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42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못 보던 것에서부터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말씀은 뭐냐면, 네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너의 눈을 뜨게 한 것이다. 네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너희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 맹인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이 뭡니까? 많은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소문에 의하면 이 사람은 분명히 메시아일 것이다. 이 예수라는 사람은 메시아가 아니면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없다는 이 믿음을 가졌겠죠.

그러고 나서 예수님이 그 자리를 지나가실 때, “당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는 이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왔더니, 예수님께서 그들을 회복시키셨다는 것이죠.

아까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주님이시라고 믿고,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예수님만이 우리를 지키는 그런 분이라고 우리들도 동일하게 고백합니다.

그런데 문제 앞에서 어떤 상황이 우리들에게 주어지면 우리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믿음은 온데간데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믿음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여러분들 한번 보십시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소경에 비해서 종교 지도자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성경을 얼마나 더 많이 봤겠습니까? 얼마나 성경을 더 달달 외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죠. 그리고 예수님을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는 그 일을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되는데, 아무리 우리들의 성경 지식이 확실하다고 할지라도 어떠한 문제 앞에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그 믿음의 크기가 좌우될 겁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그 믿음이 그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물론 성경을 많이 모르는 사람과 비교한다면 도움은 되겠죠. 그리고 그 지식이 어떨 때는 믿음으로 이렇게 발동하기도 하겠죠.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해도 믿음으로 발동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냐면, 예수를 믿지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기는 하지만, 우리는 지식적으로만 예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알게 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현장에서 역사하는 거죠. 우리가 지식적인 하나님만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으로만이 아니라, 이 성경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면 이 발견되어진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도록, 우리의 생활의 곳곳에서 일하시도록, 우리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어야 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이 두 소경은 그렇게 믿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이들은 작은 지식이라고 해도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었기 때문에 이들의 믿음이 그들을 구원한 거죠. 그리고 나서 눈을 뜨게 된 거죠.

이들은 주저 없이, 다른 성경을 보면 바디매오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데, 우리들이 19장, 20장 앞에 보았던 것처럼 제자들은 지금 어떻습니까?

제자들의 머리는 온통 예수님을 좇은 것에 대한 보상, 제자들의 어떠한 희생, 그리고 섬김, 이런 것에 대한 보상, 어떤 욕망의 눈이 멀어 가지고 그의 나라가 오면 우리들에게 좌의정, 영의정이라는 이 높은 자리를 주실 것이라는 이 기대감 속에, 지금까지 따랐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다는 것이 이들의 피부에 와 닿지 않았던 겁니다.

다른 성경을 자세히 보면요, 예수님은 죽으러 가시는데 제자들은 노래하면서 가요. 그러니까 얼마나 참 욕망의 눈이 멀면, 욕망이 우리를 사로잡으면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는 겁니다. 이 제자들의 모습이 그랬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이 기적을 통해서 정말 메시아로서 오신 예수님, 다시 말씀드리면 메시아를 보내신 하나님의 자비하심, 하나님의 사랑하심, 메시아가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그 구원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이 소경들을 깨끗하게 낫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메시아가 오셨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우리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우리가 이제 몇 주간에 거쳐서 또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계속해서 묵상하겠지만, 실질적으로 예수님이 희생하심으로, 고난당하심으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회복시키시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자비하신 그 결과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오직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그 구원자 예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십니다.” 이 믿음을 가지시고, 여러분들 지식적으로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닌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만나시고 믿으시고, 그 하나님과 동행하시며, 여러분들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게 된다면 그 하나님을 끄집어내서 여러분들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대비하시고, 그 믿음이 그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 복된 한 주간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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