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0: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과 희생이니라
- Jul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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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이제 봄이 됐습니다. 지난 수요일 날 권사님께서 천리향, 만리향, 그곳을 이야기하시는 것을 들었는데, 실질적으로 아침에 이렇게 산책을 하다 보면 그 꽃향기들이 제법 나게 됩니다.
여러분들, 아무리 시애틀의 겨울이 길어도, 비가 많이 와도 언젠가는 그칠 날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 힘들고 어려운 일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게 비추는 것을 경험하리라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오늘 주께서 우리들에게 “인자가 온 것은 섬김과 희생이다.”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의 생각과 시각,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주님을 바라보는 시각,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그것과 주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이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우리들이 본문을 통해서 이렇게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들로서 이 땅에서 살아간다.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하나님의 다스리심 가운데 우리가 그 음성을 들으며, 그 음성에 순종하며,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이 땅, 이 세계,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그 뜻이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 우리들에게 주기도문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고 또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하나님의 통치함을 받지 아니한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아직까지 임하지 않은 겁니다.
여러분들 성경을 보실 때 야곱이라는 인물을 잘 보시죠? 야곱이라는 인물이 꼭 같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 주셨음에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지 않을 때 야곱과 같은 그런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을 보게 되죠.
그러나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그를 쫓아다니시죠. 그리고 그가 이 땅에서 많은 것을 수확하고 많은 부요한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남았을 때 하나님은 그를 찾아가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야곱에게 말씀하시고 야곱을 돌이키시고, “너를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이지, 이 땅이, 이 세상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말씀하시고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부르죠. 그래서 야곱을 통하여서 이 땅의 민족들이 전파되어지고, 모든 족속들의 조상이 되는 그러한 축복을 그에게 허락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 가운데 이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 땅에 오시고, 그리고 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데, 우리들도 잘 알다시피 예수라는 이 이름, 예수라는 이름, 저들의 백성들, 그들의 죄에서 건져낼 자라는 이 예수라는 이름. 주님께서는 이 목적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위해서, 또 천국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오셨고, 죄와 사망의 골짜기에서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 죄를 사하시고 소망을 불어넣으시기 위해서, 회복시키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28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자신을 대속물로, 속죄양으로 주기 위해서 왔다. 나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나는 오히려 섬기려 하고 내 목숨을 너희들을 위해서 주기 위해서 왔다는 그 목적을 분명히 하십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면서 네 차례 수난에 대해서 예고를 하십니다. 수난이라는 얘기는 내가 죽고 다시 살아날 것이다. 나의 죽음을 통하여서 너희들이 죄사함을 얻을 것이다. 이 구원에 대한 얘기, 죽음에 대한 얘기를 네 차례나 이렇게 하게 됩니다.
그 첫 번째 사례가 마태복음 16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이후에 예수님께서 죽으심에 대해서 예언을 하십니다. 예고를 하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변화산상에 올라갔을 때,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서 초막 셋을 짓고서 우리가 여기서 삽시다, 주님.” 그렇게 얘기하는 제자들과 함께 내려오시면서 죽음에 대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에 대해서 다시 한번 예고를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포도원의 비유를 하신 이후에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시면서 고난당하실 것을 이야기하고 계시죠.
그리고 뒤에 보시면 마지막으로 베다니에서 유월절 이틀 전에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에 대해서 설명을 하십니다.
이렇게 네 차례 성경에서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예고는 다른 세 군데보다 굉장히 내용이 좀 풍성합니다. 풍성하다는 얘기는 뭐냐면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하십니다. 자세하게 설명을 하시면서 그 안에 뭐까지 포함이 돼 있냐면, 내가 죽었다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이 부활까지도 예고하고 있는 그러한 장면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읽지는 않았지만 17절부터 19절에 있는 말씀을 제가 이렇게 읽어 드리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느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여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19절의 말씀을 아시죠? 인자가 올라갈 건데,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첫 번째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들에 의해서 내가 고난을 당할 것이다. 핍박을 받을 것이라는 그 얘기를 여기서 하십니다. 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한다. 죽이기로 작정하였다고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로는 이방인들에게 내가 고난을 당할 것이고, 이방인들에게 심문을 당할 것이라고 설명하시죠. 여기서 이방인은 로마인들을 이야기하는 것이고요. 로마인들에게 조롱을 받으시고, 또 채찍질에 맞으시고, 그리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제삼일에 이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3일 있다가 내가 다시 부활할 것이다,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시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3일 있다가 살아날 것을 이야기합니다.
계속적으로 이것을 반복하시는데, 그만큼 이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다시 상기시켜 주시는 그런 내용이죠.
이처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우리를 위하여서 대속물로, 속죄양으로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설명합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값으로부터 구원함, 죄로부터 구원함을 얻고, 우리 대신해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셨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우리가 죽어야 되지만 주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죽을 이유가 없고, 주님께서 살아나심으로 우리도 주님과 함께 살아나는 그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참여하게 될 것이다. 주께서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누가복음에 보시면 이 내용이 좀 더 디테일하게 설명되어져 있는데요. 18장 3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선지자들을 통하여서 기록되어진 것, 다시 말씀드리면 구약 때부터 예수님의 죽음은 예고가 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선지자들이 우리를 위하여서 하나님께서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실 텐데, 메시아를 보내실 텐데, 그는 고난당하는 종으로 오셔서 우리를 그 고난 가운데서 건져내시고 해방시키시고, 그가 우리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자유함을 얻으리라. 이것이 구약에서 계속적으로 메시지로 선포되어졌던 그 내용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지금 이야기하시는 것도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고난을 당하고 죽음을 맞이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선생 되신 주님께서 이야기하셨는데도 제자들은 “이게 무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이해를 못 했고, 제자들의 관심은 오직 어디에 있었냐면 자신들의 헌신에 대한 상급, 여기만 관심이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는데 어떤 보상이 있느냐?” 여기에만 관심이 있었지, 우리가 지금까지 따르던 선생님이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리고 사망의 죽음에서 부활한다. 이것은 상상하지 못하는 그런 내용을 지금 선생님께서 이야기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올라가셔서 첫 번째로 당했던 그런 고난의 내용이, 제사장들로부터, 서기관들로부터 넘겨줌을 당하고 그들로부터 고발을 당해서 재판에 넘겨지게 되는데, 이방인의 손에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씌운 것이 가시로 만든 가시관을 씌웠어요. 우리가 그러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겠지만, 그 가시로 우리가 조그마한 가시에만 찔려도 온몸이 소란을 피우지 않습니까? “이거 빼야지.” 이 불편함에서 해방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 가시를 관으로 만들었다 그래요. 관으로. 그리고 나서 그 머리에 씌우는데, 그냥 이렇게 올려놓는 것뿐만이 아니라 꾹 눌러서 씌웠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가시들이 살을 비집고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피를 흘리시는 그러한 장면을 우리들이 보게 되죠.
그리고 나서 로마 군병들에게 넘겨져서 채찍에 맞으시는 그러한 모습을 우리들이 보게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설명드린 것처럼 로마 군병들의 채찍은 그 끝에 납을 달았다고 그래요. 그래서 채찍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아주 형벌 이상의 고난이 채찍질이라는 겁니다. 그 채찍질을 주님께서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사야서가 이 표현을 뭐라고 얘기하냐면, “그가 찔림은”, 예수님이 찔리심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상하심, 예수님이 그 몸을 상하신 것은 우리들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그가 상하셨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평안을 얻었다고 이야기하죠. 그리고 나서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다고 이사야서 53장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고난당하는 그 종의 모습으로 주님께서 지금 고난을 당하시는데, 그것은 우리가 맞아야 할 것, 우리가 당해야 할 고난이죠. 우리가 맞아야 할 채찍이고, 우리가 상해야 되고, 우리가 징계를 받아야 됨에도 주님께서 그것을 다 감당하셨다는 거죠.
우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렇게 행하셨다는 겁니다. 고난으로 들어가시면서 그 십자가의 길을 여셨고, 우리는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나음의 길, 평화의 길, 평강의 길을 걷도록 주님께서 먼저 걸어가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고 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모습을 우리들이 보게 되는데,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뭐냐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다. 오히려 섬기려 하고, 섬기러 왔고, 내 목숨을 내놓고 많은 사람들에게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내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죄에서부터 속하기 위해서, 죄를 속해 주기 위해서, 없애 주기 위해서 내가 죽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영원한 속죄로 들어갔다고 히브리서가 이야기하는데, 양의 피로, 염소의 피로, 송아지의 피로 행하지 아니하고, 그가 그의 육신으로 이 고난의 희생에 참여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12절을 보시면,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송아지 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어린 양이 되어서, 속죄양이 되어서,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시고, 우리의 고난을 대신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대신하시고, 단번에 성소에서 희생양으로 드려짐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평강과 나음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그 길을 열어 놓으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실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나는 부활이고 나는 생명이다. 내 안에 생명이 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을 것이다. 죽어도 다시 살 것이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주께서 우리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 본인, 당신 스스로가 부활이 되시고 생명이 되셔서 죽으심에 넘겨졌지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부활이고 생명 됨을 다시 밝혀 놓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열심히 제자들에게 설명을 하는데, 이때 찬물을 뿌리는 그런 아줌마가 나타났습니다.
여기 20절을 보시겠습니다. 20절과 21절을 보시면,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태가 참 희한하게 표현을 해요.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세베대의 와이프가, 아내가라고 얘기를 하든지, 아니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께 나와서 이렇게 얘기를 하든지 하면 될 텐데,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나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이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 성경에서 찾지는 않겠지만, 여러분들이 대충 성경을 이해하시면서 보시는 것은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와 사촌 지간이다, 아니면 자매 지간이다. 그의 이름은 살로메라고 성경에 나와 있죠.
그래서 이 여인이 예수님과 인척 됨을 지금 나타내려고 마태가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다라고 이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이라는 얘기는 야고보와 요한을 얘기하죠. 야고보와 요한을 얘기하는데, 이 말씀이 배경이 어디서부터 출발하게 되냐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우리에게 돌아오는 상급이 뭡니까?”라고 이렇게 주님께 묻자,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이 땅의 그 어떤 것들도 살 수 없고 값을 매기지 못하는 열두 보좌에 앉아서 나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데리고 가신 것들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올라갔지 않습니까? 이처럼 특별히 이들을 지금 대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우대하고 있었다는 얘기죠.
그런데 이 얘기가 왜 베드로가 수제자임은 우리들이 다 알고, 왜냐하면 사도행전을 보더라도 베드로가 대표로 서서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로 설교 말씀을 하고 뭐든지 앞장서는 것을 보게 되는데, 베드로가 수제자인 것을 일단 제쳐 놓고 어머니에게 이렇게 청탁을 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 좀 예수님께 얘기를 하셔서 그 나라가 임하면 우리를 한 사람은 좌측에, 한 사람은 우측에 좀 놓게 해 주십시오.”라고 얘기했던 것 같습니다. 다 큰 사람들이 어머니를 동원해서 이렇게 얘기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딱 제쳐 놨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뭐냐면, “얘들아,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도 있다.” 이 얘기를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베드로가 수제자고 제일 앞서는 줄 알았더니,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도 있구나. 나중 된 우리들이 먼저 될 수도 있구나.”라고 이제 착각을 한 거죠. 그러고 나서 이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어머니를 통해 청탁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주님께서 죽으실 때 이런 십자가의 방법으로 죽으셔야 되는가를 우리들이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데 있어서 얼마든지 로마의 정부를 뒤집어엎고, 하나님이시라면 이 땅에 얼마든지 그 나라를 이루게 하실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그 방법을 택하지 아니하시고 십자가라는 이 방법을 택하셨어요.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으로 십자가라는 방법을 선택하셨는데,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왜 꼭 굳이 십자가라는 방법을 통해서 하셨을까? 그것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얼마든지 살리실 수 있을 텐데,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면 얼마든지 그 능력으로 용서하실 텐데, 왜 십자가라는 방법으로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죽게 하셨나? 우리들이 먼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방법은, 간단하게 여러분들에게 설명하면,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죄는 제대로 없애시고, 하나님의 공의, 의로움,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대로 나타난 것이 십자가의 방법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죄인들을 살리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는 것이 십자가의 방법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그러한 방법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바라볼 때,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저 십자가에 나를 위한 대속물로, 속죄양으로 우리 주가 돌아가셨구나.”라는 것을 우리들이 보기에 좋은 대로,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그 은혜를 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좋았지만, 우리가 볼 때에도 믿음을 가지고 십자가에 나를 위해 구세주가 돌아가셨다는 그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거죠. 하나님께서도 좋으시고, 우리도 좋게끔 그 십자가라는 방법을 주님께서 지금 행하신 겁니다.
결국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십자가는 정말 이야기하면 아무도 것도 아니고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십자가는 딱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방법. 이렇게 생각하고, 우리를 십자가에 구원하셨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건지신 것, 우리를 구원하신 것, 이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내용 안에는 무엇이 들어가 있냐면 비어져 있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채울 수 있는 것, 여기까지도 포함이 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통하여서 내가 구원을 얻었다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거룩함을 채우기를 원하시고, 그 풍성함을 채우기를 원하시고, 그 사랑을 채우시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마음을 우리를 구원하신 그 마음속에 채우기를 원하시는 것이 십자가의 방법이라는 겁니다. 십자가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십자가는 구원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어머니를 통해서 이 청탁을 하게 되는데, 제자들에게 아무리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24절에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이 어머니의 청탁을 보고서 열 제자들이 화가 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뚜껑이 열렸다는 얘기겠죠. 열 제자들의 반응이죠.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서로 우리의 헌신에 대한 보상, 우리가 주를 따른 것에 대한 보상, 이것을 지금 구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누리려고 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두 제자가 하나는 좌의정에, 하나는 영의정에 앉혀 주십시오. 그 어머니를 통해서 청탁하는 모습을 보고 모든 제자들이 화가 나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은 그런 모습이 아니라 고난당하는 종의 모습으로 왔지만,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예수를 믿는 사람들까지도 우리는 주님의 고난, 이런 것도 생각할 것 없이 그냥 “내가 예수 잘 믿을 테니까 나에게 축복만 해 주십시오.”라는 이런 생각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갈 때가 많다는 거죠. 이 제자들의 모습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그런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22절을 다시 한번 돌아가서 읽으면 뭐라고 얘기를 하시냐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주님의 잔은 어떤 잔입니까? 고난의 잔이고 십자가의 잔이고 죽음의 잔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가 고난당하고 내가 죽을 건데 너희들 할 수 있어?” 제자들이 의기양양하게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뭔지도 모르고 할 수 있다고 지금 제자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너희도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제자들에게는 얘기하셨지만, 실질적으로 베드로도 주님의 잔을 마셨죠. 그도 순교하였고, 그리고 또 야고보도 사도들 중에서 첫 번째 순교자로 순교를 당하였고, 요한도 사도들 중 제일 마지막에 밧모섬에 유배되어서 그도 마지막으로 죽는 고난의 잔을 마신 것을 우리들이 봤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 제자들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 잔을 마실 수 있습니다.”라고 얘기한 것은 주님이 생각하시는 그 고난받는 종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얼마든지 줄 수 있겠죠. 좌의정, 영의정, 그것보다 더 큰 것도 줄 수 있겠죠.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아니라고 설명하십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얘기하시냐면, 26절과 27절에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리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겨야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하나님의 방법은 그런 게 아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낮아져야 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되고,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어야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다르죠. 세상 나라에서는 내가 으뜸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고 노력합니까? 여러분들도 오늘 시간이 바뀌면서 조금만 더 잤으면 좋겠다라는 그런 분들도 많았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에서 앞서 나간다고 할 때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하게 됩니까? 이것이 세상에서의 방법이죠.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의 방법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낮아져야 되고, 오히려 섬겨야 되고, 그 섬기는 모습이 종의 모습으로 섬겨야 되고, 예수님의 삶이 실질적으로 그러한 삶을 사셨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그런 교훈 같은 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믿고 존경하고 이런 것들도 있지만, 예수님은 말씀 그대로 살아내신 그러한 하나님이시지 않습니까?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본인께서 말씀하시는 그 내용대로 살아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부분에서 존경을 하는 거죠.
여러분들이 다른 신앙의 좋은 사람들을 존경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에 대해서 존경하는 것이지, 그분이 세상에서 이뤄낸 것 가지고서 우리들이 존경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세상에서 가난한 자라 할지라도, 초라하고 볼품이 없는 자라도, 말씀대로 살아내는 그것에서 우리들은 존경함을 갖는 거죠.
예수님이 지금 그렇게 이야기하고 계시는 겁니다.
여기서 섬기는 자라는 그 단어가 좀 재미있는 그러한 단어인데, 섬기는 자는 어떤 의미냐면 주인이 명령하는 것, 그것을 이행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따르는 사람, 섬기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헬라어로 집사님들을 이야기할 때 집사라는 단어가 이 단어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그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서 따르는 것, 그 말씀에 따르는 사람들, 집사님들이 그런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다 권사님이니까 이제 그런 일들이 없어서 너무도 좋을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헬라어로 된 것이 집사라는 그러한 얘기죠.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라고 얘기할 때 이 단어를 쓴 겁니다. 섬기는 자, 복음에 섬기는 자가 되었다. 그리고 에바브라, 디도를 설명하면서 그는 정말 하나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온전한 일꾼이다라고 칭찬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에바브라와 디도가 그렇게 섬기는 자로, 헌신하는 자로 나왔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한 가지 더 이야기하십니다. 여기서 섬기는 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27절을 보시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종이 되어서 섬겨야 된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으뜸이 되고자 원하느냐? 좌측에 앉고 싶기를 원하고 우측에 앉고 싶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종의 모습을 가지고서 섬겨라.”라고 주께서 우리들에게 이야기하죠.
종의 모습이라는 것이 뭡니까? 종이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혹시 OM 선교회에 대해서 조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OM 선교회, 거기 배를 타고 선교하는 배가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둘로스라는 그런 선교선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종의 모습으로 섬겨야 된다. 종은 어떤 종도 있냐면 세상에 묶여 있는 이 종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유함이 없었던 거죠. 이 종의 모습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묶여 가지고 개인의 자유함은 일도 없는 그 상태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 이게 종의 모습으로 섬긴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종의 모습입니다. 섬깁니다.”라고 얼마든지 얘기하면서 우리 개인적으로 할 것들 다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생각들 다 내놓고, “왜 그렇게 해요? 이렇게 하면 더 좋을 텐데.”라고 섬기는 사람이 오히려 더 옆에서 훈수 두는 경우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라 종의 모습으로 섬긴다고 얘기할 때는 세상에 묶여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묶여 있어서 우리의 생각은 버리고 우리의 자유함은 다 내려버리고,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라 명령하시는 대로 섬기는 그 모습이 종의 모습으로 섬긴다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으뜸이 되고자 원하느냐? 그렇다면 섬기는 자가 되라. 어떻게 섬기느냐? 종의 모습을 가지고 섬겨라.”라고 제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깜짝 놀랐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그게 하나님 나라의 질서라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가 추구하는 그런 내용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임해서 하나님의 질서가 이루어져야 되는데, 교회 안에서도 우리가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아니면 세상적으로 존경을 받는 사람들, 세상적으로 부유한 사람들, 교회 오면 우리들이 어쩔 줄 몰라 하잖아요. 이것이 세상의 방법이지 하나님 나라의 방법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라고요.
그런데 아마 다음 주에 또 어떤 고위 관직을 가지고 있는 분이 오면 우리들은 또 어쩔 줄 모르는 그러한 모습일 겁니다. 이게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우선인 것이지, 세상 나라의 질서가 우선이지 아니하다는 것을 주께서 우리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거죠.
그리고 나서 마지막 결론으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뭐냐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나는 이 땅에 온 것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너희들을 섬기는 것처럼 섬기려 함이고, 내 목숨을 많은 사람들에게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죄값을 위해서, 내가 속전을 치르기 위해서 왔고, 나의 죽음은 헛된 죽음이 아니라 그들을 죄에서, 사망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내가 왔다. 그런데 그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냐? 종의 모습으로, 섬기는 모습으로, 고난당하는 종의 모습으로 섬기고 희생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모습으로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교회 안에서나 아니면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그 모습들, 하나님 앞에 나의 헌신이나 나의 수고로움이나, 내가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좇고 “내 시간은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 드리는 시간밖에 없습니다.”라고 얘기할지언정,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섬기는 모습으로, 종의 모습을 가지고 섬기는 모습이 있을 때 하나님 나라의 으뜸이 된다는 그 말씀을 우리들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주변에 있는 분들을 섬기시고, 교회에서 또 헌신하고 섬기는 분들, 다시 한번 더 말씀을 드립니다. 이 섬김이 우리의 자랑이 되려고, 또 우리가 칭찬을 얻기 위해서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알고 섬기시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마음으로 우리들이 섬길 때 오해가 없고 또 시험이 없습니다.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서 배추국 끓이고, 무나물 끓이고, 여러 가지 끓이고 해서 교회에 가져왔는데 사람들이 만족해 보이지 못하면 우리가 낙담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여러분들의 헌신이 하나님께 받아졌으면 그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우리 한 주 되기를 원하고, 그 모습을 갖는 성도들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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