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0:1~16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리라
- seattleomc
- Jul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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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참 좋습니다. 시애틀에 이제는 그 긴 겨울이 지나간 듯합니다. 그러나 날씨라는 것이 항상 예측을 하지 못하죠. 우리의 마음처럼 어떨 때는 성령으로 충만했다가, 어떨 때는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우리 마음이 상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어떤 분이 와서 저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좀 앞에 나서기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서는 것이 좀 두렵습니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건강한 교회의 모습일까요? 아니면 우리들의 마음이 잘못된 걸까요? 여러분들이 오늘 말씀 가운데 음성을 들으셔야 됩니다.
우리가 교회를 늦게 나왔다, 또 교회 나온 지가 오래됐다, 이런 것들은 어떤 우열의 차이가 있다든지 계급이나 이런 것들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백성들이 교회라는 공간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곳이기 때문에, 다시 말씀드리면 너나 나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우열이 없다, 차별이 없다는 겁니다.
이따가도 말씀을 드리겠지만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좀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떤 대가, 보상, 이런 것들을 늘 바라는 우리의 마음인 거죠.
우리가 오늘 생각해 본문의 이 말씀은 사실 지난주에 묵상했던 부자 청년의 말씀과 연결되는 그러한 말씀입니다. 19장에서 베드로가 부자 청년에 관한 그 일이 있고 난 다음에 주님 앞에 묻는 장면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주님의 답변이 여기에서 쭉 등장하게 되는데, 마태복음 19장을 보시면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뭐냐면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이 부자 청년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자 청년이 “나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켜왔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눠 주고 온 다음에 나를 따르라.”라고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찌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는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제 제자들 사이에서 나서서 이야기하죠. 대표되는 베드로가 나와서 “주님, 그렇다면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좇았는데 우리는 무엇을 얻습니까?”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희생하고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신한 그런 대가는 뭡니까?”라고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19장 마지막 절에 하시는 말씀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리라.”라는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포도원의 비유를 말씀하고 계시는 거죠. 포도원의 비유에서도 마지막 16절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리라.”라는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부자 청년의 영생의 문제로 시작한 제자들의 궁금증,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충성하고 봉사하고 한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보상은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라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이 포도원의 비유가 등장했다는 겁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연결해서 보셔야 될 듯합니다.
1절 말씀을 한번 보시죠. 1절 말씀을 보시면,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집주인이 이른 아침에 일꾼을 얻으려고 나가봤습니다. 그래서 하루의 일을 약속하고, 일당을 약속하고, 일꾼을 들여보내는 그런 장면, 그러니까 고용 계약 같은 것을 썼다는 얘기죠.
“너 우리 포도원에 와서 일하면 내가 하루에 얼마를 주리라.” 이런 계약서를 썼다는 겁니다.
2절을 보시면 그 계약이 나오는데,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여기서 집주인과 일꾼 사이에, 그러니까 포도원의 주인과 일꾼 사이에 계약이 일어납니다. 하루에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는 이 약속을 여기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약속이 어떤 약속과도 연결이 되냐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처럼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함을 얻으리라.” 예수를 믿으면 구원함을 얻겠다는 약속과 비슷한 그런 약속인 겁니다. 그러니까 이 품꾼과 포도원 주인 사이에 이것을 하면 이것을 주겠다는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거죠. 예수를 믿으면 구원함을 얻겠다는 말과 비슷한 내용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문제가 어떤 문제냐면, 일꾼들이 포도원에 들어가는 시간들이 각각 다 달랐다는 겁니다.
제일 이른 아침에 나갔다고 그랬어요. 유대인들은 우리와 시간이 거꾸로 되죠. 물론 6시부터 6시까지 12시간을 일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가서 사람을 만나서 계약을 하고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어요.
여기에 제3시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제3시는 이렇게 시간을 쭉 가로질러서 가면 9시를 이야기합니다. 제3시는 9시이고, 6시는 12시를 이야기하고, 또 9시는 오후 3시가 되겠고, 12시면 오후 6시가 되는 이런 패턴으로 유대인들의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3시에 나아가 봤다는 겁니다. 오전 9시에 나아가 봤다는 것이죠. 그랬더니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있어서 저 사람들도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6시, 오전 12시. 한참 일하고 있을 때, 먼저 온 사람은 6시간 동안이나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고 있을 12시에 나가 보니까 그때도 사람이 있었다는 거죠. 그 사람도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9시면 오후 3시를 가리키는데, 오후 3시에 나아가 보니까 여전히 사람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도 들여보냈습니다.
마지막으로 11시에 나가 봤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이 끝나기 한 시간 전, 오후 5시에 나아가 보니까 거기에 사람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이 이야기하기를, “형제여, 어찌하여서 너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고, 어찌하여 시간을 허비하고 있느냐?”라고 얘기하니까, 이 사람이 “나를 불러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를 써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이 모양으로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긍휼히 여겼다는 거죠. 그리고 일이 끝나기 한 시간 전에 이 사람을, “그러면 형제여, 내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삯을 주겠다.”라고 하며 들여보냅니다.
8절을 보세요. 8절을 보시면 이제 오후 6시에 일이 끝나는데 사람들이 줄을 쭉 서서 그 삯을 받으려고 서 있습니다.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랬더니 오후 5시에 온 사람이 제일 먼저 나서서 삯을 받았는데, 그 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랬더니 맨 끝에서 이 모습을 본 아침 6시에 들어온 사람이 생각하겠죠. “야, 한 시간 전에 온 사람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니 나는 최소한 몇 배 정도 받아야 될 것 같아요?” 최소 세 배 이상은 받아야 되겠다고 생각했겠죠. 그렇죠? 다른 이 사람보다도 훨씬 더 일찍 들어와서 일을 했으니까.
그런데 이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니, 나는 한 세 배를 더 받기를 기대했는데 저 사람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준다.” 그러니까 주인에 대한 섭섭함이 여기서 생겨나는 것이죠.
그래서 섭섭함이 이제 좀 번지다 보니까 이게 불공평하다는 마음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에 대해서 원망까지 하게 되는 이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11절과 12절을 보시면 이 얘기가 나오는데,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여기 원망한다고 얘기하죠.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니, 다르지 않습니까? 이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라고 컴플레인을 하는 거죠.
사실 세상의 기준으로 따진다면, 똑같은 한 시간을 일을 해도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이 한 시간 일하는 것과 대학원을 나온 사람이 한 시간 일하는 것이 다르죠. OECD 국가들 가운데서 남자와 여자의 임금 격차가 가장 큰 나라가 한국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여자가 똑같이 등록금을 내고 공부해서 대학을 들어가서 같은 교수님 밑에서 같은 시간을 배워서 졸업을 했는데, 왜 남자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받고 왜 여자인 나는 조금 주는가? 불공평하죠. 세상의 기준을 따르면 당연히 그것은 불공평한 겁니다. 물론 요즘 한국에 그런 격차가 많이 해소가 됐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당연히 불공평한 거죠. 원망하는 것이 맞는 겁니다.
그런데 13절을 보시면, 13절에 뭐라고 얘기하냐면, “주인이 그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
주인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불공평합니다.”라고 얘기한 이 사람에게 주인이 이야기하기를, “처음부터 내가 너와 임금 계약을 할 때 하루 일하면 일당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 약속하지 않았느냐? 불평할 것이 뭐가 있느냐? 주는 것은 내 마음으로 주는 것이지. 너하고 나하고 맺은 계약은 그것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불공평하고 차별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볼 때는, 천국의 기준으로 볼 때는 모든 것들이 공평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공평한 것이 뭐냐면, 똑같이 주인으로부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공평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국의 질서에서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듯이, 나중 된 자나 먼저 된 자나 차별이 없다는 겁니다. 이게 천국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낸 곳이 교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먼저 예수를 믿은 사람이나, 교회를 나온 사람이나, 나중에 예수를 믿고 교회를 나온 사람이나 차별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똑같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 차별이 없다는 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먼저 왔기 때문에 내가 어떤 대접을 받아야 된다, 이런 생각은 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 먼저 왔는데, 내가 헌신하고 수고하고 봉사한 대가가 당연히 나에게 더 많이 주어져야 되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의 기준이라는 얘기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구원함을 얻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차별이 없는 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기준에서는 어떤 갈등이 있겠죠. 그러나 영적인 것에는 갈등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그리고 나서 이 말씀 중에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게 이 비유에 나오는 일차적인 개념입니다. 이게 이제 우리들이 다 알고 있는 그런 내용이죠. 그래서 먼저 되고 나중 된 자, 나중 되고 먼저 된 자의 일차적인 개념은 차별이 없는 것이라는 이 개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그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또 한 가지 다른 개념이 여기에서 나오는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 은혜의 기준에서는 차별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계급이 없고 우열함이 없다고 이렇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먼저 믿고 나중 믿은 이것은 자랑이 없고 차이가 없는데, 두 번째 의미는 어떤 의미가 있냐면, 그러면 먼저 믿은 사람과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의 차이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라는 것이 이 안에 감춰져 있는 그러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끄집어내야 될 또 다른 의미가 여기에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시려면 어떤 것을 먼저 보셔야 되냐면, 누가복음 15장에 보시면 탕자의 비유를 여러분들이 잘 아시죠? 탕자의 비유가 거기에 나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나아가서 “아버지, 재산을 내가 미리 받고 싶습니다. 한번 나아가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습니다. 나에게 미리 물려줄 유산을 주십시오.” 하고서 그 재산을 들고 나아갔다는 겁니다.
아, 부부도 당당하게 이렇게 나아갔지만, 되는 것마다 실패해서 재산을 꼴딱 말아먹고 그리고 거지가 되어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그러한 것을 우리가 아는 내용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그런데 이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인데, 문제는 뭐냐면 아버지에게 남아 있었던 큰아들의 이야기입니다. 큰아들의 문제라는 것이죠.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로 인해서 아버지가 사람들을 다 불러다가 염소를 잡고 잔치를 베풀면서 동네 사람들을 다 초청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내 아들이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내 아들이다. 오늘 이 아들이 돌아왔으니 우리가 함께 잔치하자.”라고 얘기하고 사람들을 초대한 겁니다.
그런데 큰아들의 불만이 이것이죠.
아니, 나는 지금까지 아버지를 섬기고 시키는 대로 일 다 했고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서 잔치를 베푼 적이 없는데,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말아먹은 저 녀석이 돌아왔다고 동네 사람들을 다 부르고 잔치를 한다. 이것은 있을 수도 없는 그러한 내용이다.”라는 거죠.
여러분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큰아들의 입장에서 우리들이 살펴보자면 당연한 거죠. 나는 지금까지 아버지 집에서 헌신하고 봉사하고 충성을 다했는데, 나에게는 돌아온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재산을 축낸 이 작은아들이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는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를 베푸느냐.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가운데 천국 백성, 먼저 되고 나중 된 자와 나중 되고 먼저 된 자의 이 문제를 우리들이 살펴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이 맏아들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그렇죠? 우리가 맏아들의 입장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고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또 반면에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내 아들이 돌아오고, 방탕하다가 돌아온 내 아들이 돌아오고, 그 아들을 사랑으로 맞이해 주는 그 아버지의 심정도 우리들은 또 이해합니다. 그렇죠?
우리들에게 그런 아들이 있다면 여러분들, “너 그때 정을 끊었잖아. 완전히 호적에서 파버렸잖아. 돌아오지 마.” 이렇게 할 부모들이 없다는 거죠. 그래서 이 아버지의 심정을 우리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사건을 같은 잣대를 가지고서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아버지 입장에서 둘째 아들에게 베푼 것은 은혜의 영역이라는 거죠. 은혜를 베푼 거죠. 사랑을 베푼 거죠. 내 재산을 축냈다 할지라도, 다 말아먹고 거지꼴로 돌아왔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사랑으로 그를 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게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입장에서 맏아들을 바라볼 때는, 지금까지 나와 함께 있었고 또 아버지의 말에 헌신하고 충성하고 봉사하고 열심히 아버지의 말에 순종했던 그 맏아들을 보자면, 아버지 입장에서는 이 맏아들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 겁니다.
기대감이라는 얘기는, 이 아들은 나와 지금까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안에서 훌륭하게 자랄 수 있는 그러한 아들로서의 성장,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라고 아버지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너는 나의 후계자 아니냐. 내 재산 다 네 것이 아니냐.”라는 이 아들에 대한 어떤 기대감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서 기대감을 가진 것에 아들이 반응한 것이 뭐냐면, 아버지에 대해서 헌신하고, 아버지께 봉사하고, 아버지에 대해서 충성하고, 양을 치라 그러면 양을 치고, 아버지 말을 잘 듣고 잘 컸다는 얘기죠.
그런데 아버지 입장에서 이 둘째 아들을 바라보면, 이 큰아들이 이렇게 성장할 동안 이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하면서 세월을 그냥 허송세월로 보낸 겁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볼 때는 큰아들에 대한 어떤 기대치가 있는 것이고, 집을 찾아서 돌아온 이 아들에 대해서는 사랑을 베푸는, 은혜를 베푸는 이러한 은혜의 영역으로 봐야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똑같은 잣대를 가지고서 우리들이 이것을 선택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이 아들을 바라봤을 때는 죽었다가 살아난 자요, 잃었다가 다시 찾은 내 아들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것은 포도원의 비유와 비슷한 그런 내용인 겁니다. 은혜를 베푼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이 은혜는 놀고 있는 사람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내는 거죠. 이게 은혜라는 겁니다.
여러분들, 지금은 얼마든지 일자리가 있어서 현대에는 사람들이 넘쳐나지만, 이 당시의 시대에는 일은 조금인데 사람들은 많아서 일을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였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을 찾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인이 와서, “우리 집에서 일하자. 내가 한 데나리온을 줄게.”라고 얘기를 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 한 데나리온을 받은 사람의 보상이 뭡니까? 한 데나리온을 받고 일찍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을 한 사람에 대한 보상은,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저 사람은 안 됐는데 나는 됐어. 저 사람은 안 써줬는데 나는 써줬어.” 그러니까 아침 일찍 들어가서 일하는 것이 너무나도 신나는 겁니까? 신난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면 내가 이 일을 하면 품삯을 받을 것이고, 품삯을 들고서 집으로 자랑스럽게 갈 수 있는 이 마음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반대로 11시까지, 오후 5시까지 주인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부름을 받지 못한 사람의 그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해는 저물고, 조금 있으면 일이 끝나는 시간인데, “내가 또 우리 가족들을 어떤 몸으로 볼까? 우리 가족들은 내가 그래도 조금이라도 돈을 벌어 와서 고기도 사오고 생선도 사오고 양식도 사와서 그것으로 함께 먹어야 되는데, 내가 일을 못 해서 어떡하나.” 이런 마음이 있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5시에 들어간 사람이 한 시간밖에 일을 안 했는데 20불 주는 것도 얼마나 고맙습니까? 한 시간 일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100불을 주니까 얼마나 입이 찢어지겠습니까?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얼마나 그 은혜가, 그 사랑이 큰 것을 느꼈겠습니까?
이게 하나님의 은혜의 기준이라는 것이죠. 먼저 우리를 부르시든지 나중에 우리를 부르시든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먼저 온 사람의 불평 이유가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동등하게 보상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불평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마찬가지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들의 불평도 뭡니까? 동등하게 아버지가 나를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먼저 우리를 들여보낸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 대한 어떤 기대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먼저 우리가 포도원에 들어와서 일을 하는 것은 우리의 어떤 책임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기대치가 있는 거고, 그러나 나중에 오후 5시에 포도원에 들여보낸 사람에 대한 것은 은혜입니다.
그 사람이 일을 해봤자 얼마나 일을 하겠습니까? 일 다 한 것, 널려 있는 것, 청소만 하면 한 시간이 금방 후딱 지나갈 텐데 뭐 한 일이 있겠습니까? 아무 한 일이 없지만 은혜의 보상을 이렇게 받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 베푼 것이 기대치라기보다도 그냥 은혜의 기준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기준에서 그를 대접했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한 시간밖에 일을 안 했는데 20불도 감사한 거죠. 20불만 줘도, “넌 한 시간밖에 일을 안 했으니까 너 20불만 가지고 가.” 악덕 업주를 만났으면 이렇게도 얘기를 했겠죠. 그러나 그것도 감사한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생각했는데 아침 일찍 들어온 사람과 동등하게 대우를 해 주니까 이 사람은 얼마나 거기에 대해서 감사하겠느냐, 이것이죠.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 포도원의 비유에서는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먼저 되고 나중 된 자로 부르신 것과, 그리고 또 은혜의 기준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어떤 기대치가 있다는 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도 똑같은 그런 내용입니다. 사실 이 비유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구원의 내용을 너무나도 잘 설명해 주는 그러한 설명 부분인데,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유대인으로 태어났습니까? 아니면 율법적으로,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잘 지켜서 하나님께서 예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겠습니까? 우리는 전혀 그런 것이 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꼭 하나 기억하셔야 될 것은 뭐냐면, 이 구원에 대해서 감격을 가지자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전의 나를 돌아보라는 얘기죠. 우리는 죄와 사망의 그늘 가운데서 소망이 없고 죽을 날만 바라보며 아무런 희망이 없었던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빛을 밝혀 보여 주셨고,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셨고, 예수님을 보게 하셨고, 예수님을 믿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가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면 얼마든지 자랑할 수 있겠죠. “나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구원을 얻을 수 있어.” 이렇게 얘기하겠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이런 얘기를 듣는다면 얼마든지 우리도 떳떳하겠죠.
“죽어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았는데 설마 나를 버리겠어.” 이런 마음이라도 갖겠죠.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상태가 그렇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대속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의 옛 상태를 알아야만 우리의 지금 구원의 기쁨이 있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당연히 있어야 할 감사함이나, 당연히 있어야 할 기쁨이나, 온유나, 평화나, 겸손이나,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이나, 이런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나간다면 얼마든지 온유하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고,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을지라도 감사하고, 우리의 마음속에 평화가 있는 겁니다.
이처럼 구원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들에게 주시는 그러한 내용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 먼저 들어간 사람의 특권과 먼저 들어간 사람의 보상에 대해서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기 전에 늘 어떤 마음이었냐면, 누가 크냐, 누가 천국에서 보상이 크냐라는 그 얘기를 한 겁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착각하지 마라. 천국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먼저 다닌 사람으로서의 특권이 뭐냐? 먼저 다닌 사람으로서의 위치가 뭐냐? 우리는 이런 것들을 자꾸 생각하지만,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제자들처럼 우리들도, 또 맏아들처럼 얼마든지 그렇게 요구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에서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함을 입었고,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모든 사람이 다 자격을 갖췄고, 모든 사람이 앉는 위치가 다 똑같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포도원에 들어온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그 주인이 은혜를 베풀어서 들어온 이 은혜라는 영역 속에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포도원에 들어왔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되는가? 우리가 책임을 지고 일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이런 것들을 이제 찾아야 되는 거죠. 이게 우리의 책임의 영역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맏아들로 아버지와 함께 한 집에서 살며 생활해 나가는 이 맏아들의 입장에서는 아버지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순종하고 나아가고, 그러니까 아버지가 기대치가 있어서 “내 것은 다 네 것이야. 너는 후계자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먼저 온 그러한 사람들의 책임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가라 명령하시면 가는 거고,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화되는 것,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제자들에게 지금 이야기하고 있죠. “우리는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인가 주어져야 되지 않습니까?”라는 이 컴플레인을 지금 하고 있더라는 것이죠.
여러분들, 우리가 두 데나리온을 받았다고 해서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닌 겁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이 구원함을 입었으면 우리가 그것으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겁니다.
이것이 남의 자식이면 모릅니다. 그런데 내 자식이라고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남의 자식은 뭐 허랑방탕해서 예수를 믿든지 말든지 우리가 크게 깊이 생각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 자식은 안타까운 겁니다. 예수를 안 믿는 게 안타까운 것이고, 허랑방탕하는 게 너무나도 안타까운 겁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예수 믿겠다고 왔어요. 얼마나 할렐루야, 아멘 하고서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부모 된 입장에서는.
그런데 이제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저 망나니가 왔네. 또 교회에서 무슨 일을 벌이려고. 저로 인해서 교회가 얼마나 시끄러워질까.” 이런 한심한 생각을 우리들이 하고 있더라는 거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 돌아온 자식이 나의 자식이라고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한다면, 하나님께 할렐루야 하고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고서 눈물로 우리들이 보상을 해야 되는 그런 상황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다른 마지막에 늦게 들어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면 감사한 겁니다. 할렐루야가 나오는 겁니다. “저 사람 참 힘들고 어렵게 살더니 좋은 주인을 만나서 한 시간 일을 했지만 그래도 한 데나리온을 받아 가는구나. 이제 저 사람 집에서 어깨를 펴고 가족 식구들에게 이야기하겠구나.” 좋아해야죠.
자기가 두 데나리온을 못 받고 불평하는 것보다, 안 된 사람이, 참 힘들고 어렵게 사는 사람이 그 몫을 받아간 것에 대해서 좋아하고 기뻐해야죠. 이게 교회에서 가지고 있는 우리의 은혜의 영역이라는 겁니다. 우리 성도들이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포도원 안과 포도원 밖은 천지 차이입니다. 포도원 안에는 생명이 있고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지만, 포도원 밖은 죽음밖에 없는 겁니다. 돌아갈 그 고통과 그 아픔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 버리고 주를 따랐는데, 그럼 우리들이 받을 보상이 뭡니까?”라고 이야기했을 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미 너희들 보상 다 받았다. 나를 따르는 것, 나를 따라다니는 것, 그게 보상이다. 그것보다 더 큰 영적인 축복이 어디 있느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 이름을 위하여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들마다 여러 배를 받는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니까 여러 배를 받는다는 것이 형제나 논과 밭을 여러 배나 받는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는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의 것으로 너희에게 보상한다는 그러한 의미가 이 안에 담겨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우리들에게는 보상이 뭡니까?”라고 얘기했을 때, “네가 나를 따르는 것, 예수 믿는 것, 그것이 보상이다.” 주님께서 이야기하신 것처럼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가치로, 어떤 것으로 판단할 수 없는, 평가할 수 없는 그 큰 영적인 축복이 너희들에게 이미 주어졌지 않느냐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맏아들로서 우리가 불평과 원망을 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먼저 들어왔다고 해서, 조금 받았다고 해서 불평과 원망을 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먼저 들어온 것으로만 우리들이 감사해야 되는 것이죠. 내가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으로만 감사해야 되는 것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옆에 있는 한 강도가 있습니다. 한 강도는 예수님을 조롱했고, 또 한 강도는 그 조롱하는 강도를 타이르고 나무라고 예수님을 향하여, “주님,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하시옵소서.”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하십니다. 한 시간이 뭡니까? 한 1초, 몇 분 간격이 있었겠죠. 그 즉시로 구원을 얻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는 우리들이 불평하고 원망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실 자를 얼마든지 구원하십니다.
아멘.
십자가에서 죽어 가는 그 사람조차도 주님은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 너무나도 불공평해요. 우리는 평생을 예수 믿는 가정에서 엄격하게 율법 교육받고 성경 교육받고 믿음 생활하면서, 조금만 잘못하면 엄마 아버지로부터 야단을 맞으면서, 거기다가 또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났네. 목사 사모가 얼마나 야단을 치고 그런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꼴깍 숨을 남겨 놓은 이 시점에서 구원하는 것 너무나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수고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자랑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1초 신앙고백했다고 구원하는 사람이나 평생을 예수 믿는 가정에서 산 그런 사람이나 동일하다. 하나님의 구원의 영역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차별을 주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 구원함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이 구원함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영역이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그 마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그렇게 불러 주신 겁니다.
뒤늦게 예수를 믿은 사람들로 인해서 우리들이 기뻐하고, 그 마음을 우리들이 가지고, 우리가 먼저 천국에 들어간 자로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까를 먼저 생각하라는 게 이 비유 가운데 담겨져 있는 두 가지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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