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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12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어떻게 땡스기빙 잘 보내셨습니까?아멘.

뭐 보통 땡스기빙 지나면한 6파운드 정도 살이 찐다고들 이야기하는데,각자 어떠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어 참 반갑고요.또 여러 연약함 가운데서도예배의 자리를 지키신 모든 분들 다시 한 번 환영합니다.

여러분, 성명이라는 시인을 알고 계십니까?1982년, 83년쯤에 이분이 쓴 시들이복음성가로 불려지면서한때 큰 사랑을 받았던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뇌성마비 장애인입니다.혼자서 자기 몸 하나 가누지 못하고,말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의사 표현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분이죠.

이분은 태어날 때의사의 실수로 뇌가 손상되었고,그로 인해 평생을 장애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삶을 비관하여수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인생 가운데주님께서 이분을 찾아오셨습니다.예수님을 만나게 하셨고,그 결과 이 가정 전체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장로님이 되셨고,어머니는 권사님이 되셨습니다.한때 딸을 저주하고,딸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 가정이이제는 귀한 믿음의 가정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깊이 연결되는성명 시인의 시가 하나 있습니다.제목은 〈참소경〉입니다.

이 시는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을아주 잘 대변해 주는 시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이 시를 먼저 함께 읽고 가려고 합니다.

“참소경”이라는 제목인데,여러분, 참소경은 누구입니까?세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참소경일까요?

아니라—주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참소경이 누구인가?세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인가?아니다, 주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닌가.당신은, 당신은 소경이 아닌가?”

“안전뱅이가 누구인가?이 땅을 걷지 못하는 사람인가?아니다,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아닌가.당신은, 당신은 안준뱅이가 아닌가?”

“참 병신이 누구인가?세상을 모르는 사람인가?아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닌가.당신은 병신이 아닌가?”

“벙어리가 누구인가?말을 유창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인가?아니다, 기도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닌가.당신은, 당신은 벙어리가 아닌가?”

“참 죄인이 누구인가?자기 죄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인가?아니다, 자기 죄를 모르는 사람이 아닌가.당신은, 당신은 죄인이 아닌가?”

여러분,이 시의 내용이 오늘 설교와 너무나 정확하게 맞아떨어집니다.그래서 이 시를 여러분께 읽어 드렸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정말 눈이 있지만 보지 못하고,다리가 있지만 걷지 못하고,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음에도그 길로 나아가지 못하는참으로 불쌍한 존재들이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언제든지“오라”고 말씀하시고,“내가 너를 받아주겠다”고 말씀하셨는데,우리는 그 발로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어리석은 존재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람이 누구일까요?물론 더 비극적인 상황들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생각할 때,가장 비극적인 사람은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여러분,어둠 가운데 갇혀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예전에는 호롱불을 켜고 살던 시절이 있었고,촛불 하나에 의존해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그렇게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불과 40년, 50년도 안 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OECD 국가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나라에서살고 있습니다.얼마나 하나님께서 이 땅에큰 축복을 부어 주셨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세상에는 비극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이런 사람을 말하고 싶습니다.“있으나 쓰지 못하는 사람.”

이미 가지고 있는데,이미 주어졌는데,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고그대로 인생을 마치는 사람.

여러분,그보다 더 안타까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예배에 나올 수 있고,기도할 수 있고,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데도그 길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

요한복음 1장 5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은 이미 비치고 있습니다.문제는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그 빛을 깨닫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이 비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문제는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을 가리켜영적인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영적으로 어둡다는 것은 단순히 무식하다거나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하나님을 떠난 상태,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의 삶은절망 가운데 있고,사망이 그를 주장하고,죄 가운데 있으며,사탄의 권세 아래 놓여 있는 삶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놀라운 말을 합니다.“빛이 어둠에 비쳤다”고 말합니다.빛이 직접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 빛이 누구입니까?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인 소경,영적인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직접 찾아오셔서 빛을 비추셨습니다.그런데도 그들은그 빛이 빛인 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그들이 계속해서영적인 어둠 가운데 머물렀다고 말입니다.

참으로 가련하고,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이 영적인 어둠 가운데 있는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부류는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곧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놀랍게도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먹고,함께 자고,함께 걸으며,직접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눈으로 본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손으로병자를 고치고,귀신을 쫓아내며,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본문에서예수님은 이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부활하신 이후에도제자들은 여전히영적인 눈이 온전히 열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이 완전히 열리는 때가 언제입니까?사도행전에 와서,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셨을 때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영적인 눈을 비추사그제야 비로소그들은 영적인 무지함에서 벗어나깨달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예수를 시험하여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여기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당시 누구보다도 성경을 가까이하던 사람들입니다.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읽고,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외우고,누구보다도 형식적인 제사와 종교 생활에 철저했던 사람들입니다.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종교적 권위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평생을 성경 연구에 바친 사람들입니다.그렇다면메시아가 오셨을 때가장 먼저 기뻐하고,가장 먼저 환영하고,가장 먼저 엎드려야 할 사람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이들이 예수님께 나온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시험하려고 나왔다고 말합니다.

빛 앞에 서서빛을 영접하러 온 것이 아니라,빛을 시험하러 나온 것입니다.

이미 수많은 기적을 보았고,이미 수많은 표적이 일어났는데도그들은 여전히 말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

이것이 바로영적인 어둠의 증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들은 예수님 당시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대표적으로 세 부류의 종파가 존재했습니다.

① 바리새파

첫 번째는 바리새파입니다.“바리새”라는 말의 뜻은구별되었다, 분리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들의 자부심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사람들이다.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사람들이다.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알고,하나님의 뜻을 가장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다.”

바리새인들은율법을 철저히 지켰고,성경을 연구했고,외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어 보이는아주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성령의 역사도 믿었고,천사의 존재도 인정했고,부활도 믿었습니다.

종교적으로 보면굉장히 “신앙적인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② 사두개파

두 번째 종파는 사두개파입니다.

“사두개”라는 말은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제사장이었던사독이라는 인물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사독이라는 이름의 뜻은“의롭다”입니다.

그래서 사두개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의로운 자들이다.우리는 현실을 지배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 사두개인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 천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 성령의 역사를 믿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종파였습니다.성전 권력과 제사 제도를 중심으로 한,기득권 세력이었습니다.

③ 에센네파

예수님 당시에는성경에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또 하나의 종파가 있었습니다.바로 에센네파입니다.

이 사람들은자신들을 이 시대에 남아 있는 의인들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 광야에서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 함께 농사짓고

  • 함께 식사하고

  • 소유를 공동으로 나누며 살았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땅에 가면쿰란 지역이 있는데,바로 이 에센네파 공동체가 살던 자리입니다.

어떤 면에서는공동체적 삶,재산 공유,공동 노동을 보면후대의 공산주의가 연상될 정도입니다.

놀라운 사실 하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신학적으로 완전히 정반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 한쪽은 부활을 믿고

  • 한쪽은 부활을 믿지 않고

  • 한쪽은 천사를 믿고

  • 한쪽은 천사를 믿지 않습니다

정말 물과 기름처럼섞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이 둘이 언제 하나가 되었습니까?

👉 예수님을 배척하는 일 앞에서👉 예수님을 시험하고 죽이려는 일 앞에서

놀랍게도서로 반목하던 두 종파가의기투합하여 예수님 앞에 나옵니다.

진리는 나눴지만,미움 앞에서는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영적인 어둠의 실체입니다.

진리를 위한 연합은 없고,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연합은 있습니다.

이 사두개인들은성경에 보면이스라엘 최고의 종교·정치 기구인산헤드린 공의회의 핵심 세력이었습니다.

성전 권력, 정치 권력, 종교 권력을모두 쥐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예수님의 등장은 그들에게 위협이었습니다.

빛이 비추면어둠은 불편해집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종교적 위선을 드러내셨고,그들의 거짓 경건을 폭로하셨고,그들의 권위를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빛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빛을 꺼뜨리려 했던 것입니다.

사두개파가 성전 제사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이스라엘 남자들이 1년에 세 번 반드시 하나님께 나아가 예물을 드릴 때들어오는 모든 성전 수입은 곧 사두개파의 손에 들어가는 구조였습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성전은하나님을 섬기는 장소가 아니라이권(利權)이 걸린 자리였던 것입니다.

이권 앞에서 그들의 눈은 이미 어두워졌습니다.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예수님께 와서 요구한 것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그렇게 서로 다르고 서로 미워하던 두 종파가예수님을 대적하는 일 앞에서만은 하나가 되어예수님께 나옵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주소서.”

그 요구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씨가 굳겠다’ 하니너희가 날씨는 분별하면서어찌 ‘시대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한마디로 말하면 영적 소경이라는 책망입니다.

2. 육의 눈은 밝지만 영적 눈은 감긴 사람들

예수님이 지적하신 핵심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세상 일에는 그렇게 눈이 밝으면서,왜 영적인 것은 보지 못하느냐?”

돈 버는 데는 빠릅니다.날씨를 보고 농사도 짓습니다.바람의 방향을 보고 항해도 합니다.고기 잡는 요령도 알고,세상 돌아가는 흐름도 압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이 눈앞에 계신데도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노골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눈을 떴으나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육신의 지혜는 많지만영적인 분별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은 같은 말씀을 누가복음에서도 반복하셨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주님은 같은 말씀으로 그들을 꾸짖습니다.

“서쪽 하늘에 구름이 오면 비가 온다 하고,남풍이 불면 날이 더울 것을 알면서어찌 이 시대는 분별하지 못하느냐?외식하는 자들아!”

똑같은 맥락입니다.

자연의 이치는 빠르게 읽어내지만,정작 하나님의 이치, 영적 흐름, 메시아의 도래는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영적 소경입니다.영적인 귀머거리입니다.빛 앞에서도 어둠을 택하는 사람들입니다.

4.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왜 이렇게 무지했는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백성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 성경을 가장 잘 알고

  • 율법을 가장 철저히 지키고

  • 종교적 권위도 있었고

  • 신앙적으로 가장 앞선 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너희는 표적을 볼 눈이 없다.너희는 시대를 분별할 영적 감각이 없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진리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진리의 빛이신 예수님을 보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이미 마음이 굳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아는 것이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님을이들은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이 사람들은가장 불쌍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한번 살펴봅시다.이 세상에는 존경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요,그 사람이 예수를 알지 못한다면그 모든 존경과 성공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 사람들은 당대에 가장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가장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빛이 눈앞에 있는데도 그 빛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 지식은 넘치는데 영적 무지는 깊은 시대

여러분, 요즘 시대를 한번 보십시오.우리 모두 스마트폰 가지고 계시죠?

이 작은 기계 안에우리의 모든 정보가 다 들어 있습니다.

  • 경제적인 문제가 궁금하면 버튼 하나 누르면 되고

  • 의학적인 지식을 알고 싶으면 바로 검색하면 됩니다

  • 건강 정보도, 약 정보도요즘 사람들은 거의 전문가 수준입니다

조금만 배가 아파도이미 약을 몇 개나 알고 있습니다.“이건 위장약이다, 이건 소화제다”다들 약사입니다.

세상의 지식은 이렇게 넘쳐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세상의 이치는 너무 잘 아는데영적인 일에는 너무나도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그리스도의 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그 구원의 깊이가 무엇인지에는우리가 너무 둔감해졌습니다.

2. 지식을 어디에 쓰고 있는가

사실 이 시대의 문제는지식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문제는그 지식을 어디에 쓰느냐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말씀을 분별하기 위해,십자가 앞에 서기 위해 써야 할 지식을

우리는 세상의 이치를 따라세상에서 잘되기 위해,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사두개인들.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그 모습이 오늘날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3. 오늘날 교회의 안타까운 현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 어떻습니까?

목사의 설교가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교회가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자”라는 말이어느새 공허한 구호처럼 들린 지 오래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스스로가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빛이 비추어지고 있는데도그 빛을 보지 못하고,진리가 선포되고 있는데도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책망은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만 향한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어찌 이 시대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이제는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시대가 아니라,세상이 오히려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를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예전에 미국에서 성령의 역사가 아주 강하게 일어났을 때를 보십시오.그때는 세상이 교회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교회의 메시지 앞에 두려움이 생겼습니다.술집 문들이 닫히고,불량배들, 흉악범들이“내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이러면서 교회로 달려왔습니다.

주일이 되면법으로 막아서가 아니라자발적으로가게 문을 닫았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술을 팔 수 없다.”이건 법이 아니라양심이 움직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이교회의 메시지를 들었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그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그런 모습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직분은 장로님인데거짓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합니다.

금방 들킬 것 같은 거짓말인데도얼굴에 부끄러움조차 없습니다.

자기 주장만 옳다고 말하고다른 사람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그런 세대 속에서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이것이 세상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교회 안의 성도들도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 앞에서 가져야 할 자세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 나는 세상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 세상을 바라보는 내 태도는 무엇인가?

그런데 어느 순간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러는데 뭐.”

그러면서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을잊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거짓말을 합니다.

오히려세상 사람들보다 더 독한 말을 하고,더 악한 언어를 쓰는그런 모습을 우리가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교회의 메시지에귀를 기울이겠습니까?

“너희나 우리나 똑같은데왜 우리가 너희 말을 들어야 하느냐?”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천지는 분간할 줄 알면서어찌 영적인 일에는 그렇게 무지하냐?”

세상 일에는 그렇게 밝고,돈 버는 일에는 그렇게 민감하면서왜 영적인 일에는 눈이 닫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그리고 주님은그들을 떠나가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이 세대를 가리켜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다.”

이 말씀은세상 사람들 전체를 향한 말이라기보다는,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이미 너무나도 악해졌다.그리고 너희가 이렇게 살다 보니그 영향이 백성들에게까지 흘러가이 세대 전체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되어 버렸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음란하다”는 말의 의미

여기서 말하는 음란함은육체적인 음란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음란함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하나님의 자녀들인데,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할 사람들이면서왜 세상을 섬기고 있느냐?

이것이 바로영적인 음란함이라고주님은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가장 하나님께 가까이 있던 사람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이 사람들은 누구보다도하나님께 가까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조금만 귀를 열면누구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제사를 집례하면서그 제사의 의미가 무엇인지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들의 교만,그들의 자존심,그들의 강팍한 심령 때문에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오히려 하나님에게서더 멀어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을 보여 주겠다

이렇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향하여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지만,내가 보여 줄 표적은그런 종류의 표적이 아니다.”

눈먼 자가 눈을 뜨고,앉은뱅이가 일어나는 표적,그것들도 귀한 일이지만그것들은 이 땅에서 잠시 누리고끝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보여 주시겠다고 하신 표적은영원한 나라,영생을 주는 표적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을 보여 주겠다.”

요나의 표적이 의미하는 것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듯이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다른 곳으로 도망하다가큰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가사흘 동안 있다가다시 살아 나오는 경험을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사건을 들어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여기서 요나의 이야기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요나의 표적을이 시대의 표적으로까지끌고 가십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요나의 표적 → 이 시대의 표적

요나의 표적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 죽은 것처럼 여겨졌던 요나가다시 살아 나왔듯이

  •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

이것이 바로이 시대에 주어질유일한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마태복음 12장에서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즉,이 시대가 반드시 보아야 할 표적,믿어야 할 표적은부활의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속에 있으리라.”

이 말씀이 바로요나의 사건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께서요나의 표적을 언급하셨고,오늘 본문인 16장에서도다시 한 번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16장에서는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단순히“요나처럼 사흘 있다가 나온다”는 수준이 아니라,요나의 표적을이 시대의 표적로까지 끌어올리신다는 것입니다.

요나와 예수님의 공통점

요나의 표적과예수님의 표적 사이에는분명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요나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요나는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아큰 성 니느웨로 가서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나는그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니느웨가 아니라 다시스로 도망치다가풍랑을 만나고,결국 바다에 던져져큰 물고기—하나님께서 준비하신—그 뱃속에 들어가사흘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그를 다시 토해 내시고요나는 결국 니느웨로 가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도 동일하신 분

예수님께서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신 이유가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사명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아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역시우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십자가에 달렸다”“잘못되다 보니 죽었다”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도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에순종하는 것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사명을 감당했듯이,예수님 역시하나님의 뜻에 완전한 순종으로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선택이 아니라 순종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좋아서십자가에 달려 죽겠습니까?

누가 기꺼이조롱과 고통과 죽음을 택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그 길을 가셨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나의 표적은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순종의 표적이며,십자가의 예고이며,부활로 이어지는 구원의 표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나도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던 사람이고,예수님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요나는 불순종했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주님은 바로 그 차이를 요나의 표적을 통해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 요나의 표적이어떻게 “이 시대의 표적”으로 이어지는 것일까요?

16장 4절 다시 보기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메시아의 표,즉 예수님이 메시아 되심을 드러내는 표적을 주고 계십니다.

주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사명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따라십자가에서 죽으시고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표적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메시아만이이 세대를 구원할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 왜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하셨을까?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세대를**“악하고 음란하고 폐역한 세대”**라고 규정하십니다.

이 말은 단순히 도덕적인 타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영적인 음란함,즉 하나님 외의 것을 더 사랑하고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 세대에게는아무리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도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눈먼 자가 눈을 떠도

  • 앉은뱅이가 걸어도

  • 병든 자가 고침을 받아도

그들의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그 표적은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에 필요한 표적은 오직 하나,요나의 표적뿐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만이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변화시킬 유일한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을 들어인자이신 예수님이 메시아 되심을 드러내신 장면이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예수님이 오시기 약 8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800년 전에 있었던 요나를 끌어내어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사명을 감당했던 것처럼,나 또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할 것이다.”

그 순종이 무엇입니까?십자가에 달려 죽는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은우연도 아니고, 실패도 아니고,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철저한 순종이다.”

내가 재물이 되어,내가 어린 양이 되어,너희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왜냐하면너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기적을 많이 보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표적과 기사와 이적을 보여주어도이 세대는 악하고 음란하고 폐역한 세대이기 때문에잠시 놀라고 감탄할 뿐,금방 잊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십자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눈으로 잠깐 보는 표적이 아니라,영혼을 살리는 영원한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이 세대가 원하는 표적이 아니라,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표적이다.”

그리고 그것은요나의 표적,곧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 십자가의 의미

여러분,우리는 십자가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습니까?

십자가는 죽음을 상징합니다.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죽으셨습니까?

우리 때문입니다.내 죄 때문에,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예수님이 대신 달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우리의 죄에 대한 속죄의 재물이 되셨고,그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언하셨습니다.

“너는 죄 없다.”

그래서 우리는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부활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죽음은죄에 대한 죽음이었고,예수님의 부활은의에 대한 살아남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이기 때문에예수님의 죽음으로죄에 대하여 죽고,예수님의 부활로의에 대하여 살아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십자가의 참된 의미입니다.

✨ 십자가에 무지했던 사람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뿐만 아니라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이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요나의 사건을 예로 들어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십자가의 예표는구약 곳곳에 나타납니다.

시간 관계상오늘은 한 사건만 보겠습니다.

✨ 아브라함과 이삭 – 십자가의 예표

창세기 22장을 보면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네 독자 이삭을나에게 바쳐라.”

여러분,이 말은 인간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아브라함의 반응입니다.

아브라함은 따지지 않습니다.변명하지 않습니다.지체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그러겠습니다.”

독생자를 바치라는 명령 앞에서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왜입니까?

아브라함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을.

(→ 이 다음에 이어서“여호와 이레”와대속의 숫양,그리고 십자가로 자연스럽게 연결하시면아주 강한 설교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알겠습니다.죽이겠습니다.”

이 일이 어디서 일어났습니까?브엘세바, 곧 아브라함의 집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아들을 바쳐라” 말씀하셨을 때아브라함이 “그러겠습니다”라고 대답한 그 순간,사실 이삭은 이미 죽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서는이미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그 자리에서 바로 죽이지 않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사흘 길을 걸어갑니다.

며칠입니까?삼 일입니다.

죽이라고 했으면집에서 죽여도 되었을 텐데,왜 굳이 사흘을 걸어가게 하셨을까요?

왜 아들에게장작을 지워서사흘 길을 가게 하셨을까요?

그들이 향한 곳이 어디입니까?모리아 산입니다.

이 모리아 산은훗날 시온 산이 되고,더 나아가 갈보리 산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십자가를 지고갈보리 산에 올라가셨던 것처럼,지금 이삭도나무짐을 지고자기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흘 길을 걸어갑니다.

예수님께서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무덤에 며칠을 계셨습니까?

사흘입니다.

아브라함이“알겠습니다. 죽이겠습니다”라고 말한 순간,이삭은 이미 브엘세바에서 죽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사흘 동안의 시간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흘 끝에모리아 산,곧 훗날 갈보리 산에서죽음이 완성될 뻔하지만,

하나님께서는양을 예비하셔서이삭을 살려 주십니다.

여러분,이 장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백 살에 얻은 금쪽같은 아들입니다.그 아들에게 장작을 지우고,그 아들을 앞세우고,아버지는 뒤에서사흘 길을 따라갑니다.

그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우리는 흔히아브라함을“아들도 아끼지 않은 믿음의 조상”으로만 봅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 뒤에 있는아버지의 찢어지는 마음,침묵 속의 순종,말하지 못하는 고통을우리는 너무 쉽게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은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 바친 것이 아닙니다.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훗날 하나님께서어떤 일을 하실지를미리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아브라함은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양으로아들을 살려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당신의 아들을 위해서는다른 양을 준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갈보리 산에서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고,그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우리 죄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는이미 십자가의 그림자가 담겨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골고다 산에 오르실 때마치 홀로 가신 것처럼 보이지만,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삭을 앞세워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던아브라함의 그 심정처럼,하나님 아버지께서도주님의 십자가의 발걸음마다함께 동행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아브라함과 이삭의 사건 속에미리 등장했던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무지하면십자가가 우리에게무슨 소용이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종교적 상징이 아닙니다.십자가는 근본적인 해결책이었고,이 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지혜이며,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지만,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더 지혜로운 존재가 아닙니다.더 많이 배웠다고 말할 수도 없고,더 존경받는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고,그것이 우리의 능력입니다.

세상은 능력을물질로 증명합니다.권력으로 드러냅니다.건강과 성공으로 과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갈 때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왜 우리는 여전히 소경처럼 행동합니까?

영적인 다리를 주셨는데왜 우리는 여전히 걷지 못하는 사람처럼 머뭇거립니까?

영적인 입을 열어 주셨는데왜 우리는 여전히 말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침묵합니까?

십자가가 능력으로 주어졌다면이제는 그 능력을 가지고세상 가운데로 걸어가야 합니다.

영적인 눈을 떴다면영적으로 보아야 하고,영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영적인 발을 가졌다면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하고,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영적인 입을 열어 주셨다면기도해야 하고,복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아까 읽어드렸던손명 시인의 시가바로 이것을 말해 줍니다.

참 벙어리는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참 소경은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며,

참 안진뱅이는걷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십자가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문제는그 십자가를 붙들고 사느냐,아니면십자가를 가진 채로도여전히 세상 방식으로 사느냐입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나는 정말 십자가의 능력으로살고 있는 사람인가?

4절 말씀을 보시면이렇게 끝납니다.

“저희를 떠나가시다.”

이 한 문장으로오늘 본문은 마무리됩니다.

주님께서는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당시 종교 지도자들과대화를 단절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예수님은그들과 더 이상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으십니다.

대신십자가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제자들의 믿음을 세우는 일에집중하십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는더 이상의 만남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장면을 가만히 묵상해 보십시오.

“저희를 떠나가시다.”

누구보다도예수님 가까이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고,누구보다도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여겨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주님께서 그들을 떠나십니다.

얼마나 서글픈 장면입니까?

생각만 해도 두렵지 않습니까?

“혹시 예수님이나를 떠나가시면 어떡하지?”

신학적으로 말하면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예수님께서는이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께서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을떠나가셨다고 말입니다.

누구보다도주님을 가까이해야 할 사람들이오히려 주님으로부터 멀어졌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음란하다는 말은도덕적 타락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음란함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마음은 세상을 향하고 있었고,형식은 있었지만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외심은사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정말 신령과 진정으로예배하고 있는가?

몸은 예배당에 와 있지만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있지는 않은가?

예배 중에도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그분 앞에 서 있다는 두려움과 감사 없이형식만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단순히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심을 믿고,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지금도 나와 함께 계심을 의식하며드리는 예배입니다.

그 예배만이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는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그들은 누구보다도열심히 예배했습니다.

문제는형식만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식적인 예배 앞에서주님은 결국그들을 떠나가셨습니다.

여러분,이것은 단지 옛 이야기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에도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바로형식적인 신앙생활입니다.

겉모습은 경건해 보이지만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신앙.

그것이야말로주님께서 가장 슬퍼하시는 모습임을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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