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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9:1~12 하나님이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우리가 마태복음 19장에 왔는데, 1절과 2절을 보시면 수많은 무리들이 따랐다라는 이러한 표현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종 병자를 고치셨다라는 이 표현이 있죠.

이 두 절이 왜 여기에 들어갔나?

우리가 묵상을 해 볼 때는, 우리 주님이 가시는 곳에는 문제들이 해결된다라는 그런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 주님이 함께하시는 곳에는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 어려움을 해결하신다. 주님이 그 해결자시다라는 것을 마태가 이 두 짧은 구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3절부터 본격적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시작이 되는데,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이 이혼의 문제를 지금 지적을 하고 있는데, 이 바리새인들이 주님 앞에 나와서 묻는 그런 취지, 그것은 결혼했다가 이혼하는 것이 맞느냐 틀리느냐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어떤 함정, 올무에 빠뜨리게 하기 위한 바리새인들의 어떤 계략, 이런 것들이 담겨 있다라고 여러분들이 묵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결론은 주님께서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무엇이냐라는 것까지 이 질문 가운데 답변으로 응답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3절 말씀 여러분들 한번 보십시오.

3절을 보시면,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여기에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이 질문을 던졌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시험은 어떤 시험이냐면, 이혼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이렇게 가르치게 된다면, 당시에 정치적인 상황이 헤롯 왕이 통치하던 때였지 않습니까?

헤롯 왕이 자기의 아내를 버리고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하자, 그래서 새 장가를 들지 않습니까? 그것을 지적했던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르는 그런 상황에 처해 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혼에 대해서 합당하냐 안 하냐, 여기에 대한 질문이 까딱했다가는 헤롯의 심기를 건드려서 세례 요한처럼 잡히고 마는 그런 경우가 생길 것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해도 하면 절대 안 된다라고 이야기할 때, 모세는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혼 증서를 써서 내보내라고 했느냐? 모세의 율법에 반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이러한 함정에 걸리는 것을 지금 바리새인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 있어서는 그 이혼의 기준이 어디냐 하는 것이나 큰 이슈였지만, 결국은 이 사람들이 모르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은, 히브리 남자들은 자신들의 유리한 쪽으로 이 부분을 해석해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혼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이야기를 하면 헤롯 왕의 노여움을 사는 것이고, 이혼을 해도 된다라고 말씀을 하게 된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메시아라고 온 당신이 이혼을 조장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라는 이러한 의문을 갖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유대 남자들, 히브리 남자들에게 있어서 이 이혼의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왔는데, 이 문제가 사실은 어디에 담겨져 있냐면 신명기 24장에 나오는 문제를 가지고 지금 주님 앞에 나온 겁니다.

한번 보십시오.

신명기 24장 1절과 2절 말씀을 보시면,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리고 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라고 이렇게 쭉 나옵니다.

이 신명기 24장에 있는 이 문제를 가지고 지금 예수님 앞에 나왔다는 겁니다.

모세 율법을 보면 내가 이 여자와 살아가는 동안 수치되는 일이 발견되면 내보내라라고 얘기를 했는데, 당신의 입장은 어떤 것이냐라고 이렇게 묻는 것이죠.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도 마찬가지지만, 정치적으로 얘기를 하면 좌파가 있고 우파가 있고 뭐 이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이 문제에 대해서 개방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사도 바울의 스승 되는 그 가말리엘이라는 분은 이 입장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신 그런 분인데, 이 개방적인 입장을 취한 사람들은 1절에 나오는 수치되는 일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했느냐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여자와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 여인에게 수치되는 일이 어떤 것이냐?

이 개방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었냐면, 그 여자가 만약에 부도덕한 일이 발견되면 수치되는 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에 그 여자가 요리를 잘 못하는 것도 수치되는 일이라고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에 대해서 바가지를 긁어도 수치되는 일이라고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남편에 대해서 잔소리를 해도 수치되는 일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댁에 대해서 욕을 하는 것도 수치되는 일이다라고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남자들 얼마나 신납니까? 이렇게 되면 다 수치되는 일이라고 여인을 내보낼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개방적인 입장을 취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 조금만 말 한마디를 잘못해도, 아니면 반말을 했든지, 아니면 험한 말을 했든지, 이 모든 것들을 다 수치되는 걸로 판단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 그런 사람들은 어떤 입장이었냐면, 이혼의 조건은 그 여인이 간음죄를 범한 경우 외에는 결코 헤어질 수가 없다라는 그런 입장을 취한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어떤 말씀이었냐면, 이 사람들의 이런 논쟁 속에서 예수님은 어떤 입장을 취하냐면, 오늘 본문을 보시면 4절에서 6절까지 주님의 대답이 여기에 등장을 하게 되는데, 4절에서 6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바리새인들이 이혼하는 것이 합당하냐 안 하냐라는 그 물음에, 신명기 24장 1절에 나오는 그 질문에, 수치되는 일에 대한 질문에, 주님의 답변은 어떤 답변이었냐면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 어떻게 창조하셨느냐.

다시 말씀드리면 그 창조의 어떤 존재, 창조의 가치, 창조의 목적, 이런 것들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입장,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것이냐라는 것으로 이 문제를 가지고 갑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람으로 이 땅에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느냐라는 이 질문을 오히려 그들에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로 다시 이 문제를 되돌려 보면, 한 몸을 이룬 그 부분은 나눌 수가 없다라는 그 입장을 예수님께서 고수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제 함정에 걸려들게 된 것이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헤롯 대왕의 심기를 거스르게 된 것이고, 언제든지 헤롯이 예수님을 이 문제로 인해서 잡으러 온다라고 하면 잡혀야 되는 그런 상황이고, 두 번째로는 신명기 24장에 나와 있는, 그러면 모세는 이런 일이 있을 때 이혼 증서를 써서 내보내라라고 얘기를 했는데, 당신은 그러면 율법을 범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이 두 문제에 걸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지으셨느냐? 이 문제가 창세기 1장까지 이제 거슬러 가게 되는 거죠.

창세기 1장을 잠깐 한번 살펴봅시다.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 어떤 모습과 어떤 마음으로 지으셨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라고 얘기를 하신 것에 대해서 지금 주님께서 창세기까지 이 문제를 가지고 올라가시는데, 1장 26절에서 27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우리가 삼위일체라는 그런 말을 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삼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삼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그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우리를 위하여서 그 몸을 일부 떼어내시는 그런 장면을 여기에서 봅니다.

그러고 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하면서 결혼 제도를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지금 설명을 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어져 있지만, 둘이 한 몸을 이루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러한 일들을 행하기를 요구하시는 것으로 이 결혼 제도, 가정이라는 제도를 만드셨다라고 지금 주님께서 이야기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혼이라는, 가정이라는 제도 속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뭐냐면, 그 가정의 어떤 경제적인 상황, 다시 말씀드리면 여자가 남자에 대해서 경제적인 상황이 개선되기를 요구한다든지, 아니면 그 반대로 한다든지, 아니면 어떤 여자가 남자에 대해서 명예를 요구한다든지, 아니면 그 반대되는 입장, 남자가 여자에게 요구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목적이 아니고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들이 어떻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이 땅에 있는 것으로 만족지 않으면서도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살아가는가?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런 내용들이라는 것이죠.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들이 옛말에 이제 결혼할 때 그런 얘기가 많았지 않습니까? 여자가 어떤 사자 붙은 사람에게 시집을 가려면 키를 뭐 세 개 정도 들고 가야 된다라고 얘기를 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서로 간의, 남자와 여자의 서로 간의 어떤 계약에 의해서, 계약 관계 속에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그런 일들이 많았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둘 중에 한 사람이 요구하는 조건을 상대방이 충족시키지 못하게 되면 거기에 실망이 오는 거고, 좌절이 오는 것이고, 거기에서 이혼이라는 헤어짐이 발생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어떤 조건으로 맺어지고 조건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입은 우리들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 땅에 있는 것들로 만족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만족스러운 것을 충족시키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요,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으로 한번 넘어가 보면, 어떻게 여자가 창조되었느냐라는 것이 여기에 등장을 하게 되는데, 21절을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비뼈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 취하신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

자, 하나님께서 여자를 탄생시키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탄생시키냐면,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옆구리에 있는 갈비뼈 하나를 꺼내서 여자를 만드십니다.

여기에서 잠들다라고 이렇게 표현을 했는데, 원래 성경에서 잠잔다라는 이 표현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남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취해진 것이 여자라는 것이죠.

남자가 잠듦으로 말미암아 그 갈비뼈에서 갈비뼈를 취해서 여자를 만들어 내신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언뜻 떠오르는 그러한 성경에 있는 내용이 있을 텐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옆구리를 찔림을 당하지 않습니까?

다리를 꺾임 당하지 아니하시고, 그리고 나서 그 옆구리를 통해서 피와 물을 다 쏟아내시고,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서 우리의 구원함을 이루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남자의 죽음을 통하여서 여자가 탄생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셔서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셨다.

다시 말씀드리면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표현하기를 주님의 몸이다라는 표현을 쓰고, 주님의 피값으로 사신 교회다라는 이러한 표현을 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주님의 죽으심을 통하여서 교회가 탄생되고, 주님의 죽으심을 통하여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가 잉태되어진 겁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지금 남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아담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죽음 가운데 갈비뼈를 취해서 여자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 이 의미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한 몸을 이루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도 있지만, 그렇게 남자의 어떤 희생을 통하여서 여자가 나왔다라는 것을 지금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경에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그러나 이 둘은 따로따로가 아니다. 한 몸이다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렇죠?

아담이라는 원래의 본체라는 겁니다. 거기에서 여자가 나왔기 때문에 둘은 남자 따로, 여자 따로가 아니다. 둘은 원래 하나이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 가운데서는 둘을 따로따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로 만드셨기 때문에, 이 둘을 나누지 못한다라고 주님께서 이야기하고 계시는 거죠.

그래서 주님께서 교회를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한 몸을 이루신 교회다라는 이 표현을 씁니다. 물론 우리를 가리켜서 교회, 즉 신부의 모습을 갖췄다라는 이런 표현을 쓰고 있기도 하지만, 아무튼 여기에서 보시면 한 몸을 이루었다라는 것에 여러분들이 한번 주목하셔야 될 부분입니다.

개념은 남자를 만들죠.

그리고 여자를 만들죠.

이 둘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을 하는 겁니다.

여자의 개념이 아니고 남자의 개념이 아니고, 한 몸이라는 개념이 여기에서 또 등장을 하는 겁니다.

뭐 남자의 성, 여자의 성, 따로 뭐 제3의 성, X라는 그런 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와 남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그 관계, 한 몸을 이룬다라는 이런 표현을 쓴 거죠.

조금 어려울 텐데 여러분들 한번 이렇게 생각을 해 보십시오.

천국에서는 결혼하는 것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간다라고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다시 이 얘기를 풀어 보면, 남자가 따로 필요 없고 여자가 따로 필요 없는, 한 몸을 이룬 하나의 개체다. 천국에서는 그렇다라고 주님이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의 개체가 한 몸을 이루었다. 이것이 우리의 천국을 가는 그런 개체라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시집도 장가도 아니 간다라는 이 설명을 이야기하신 것이죠.

자, 가정으로 한번 다시 돌아와 봅시다.

이처럼 남자가 다르고 여자가 다른 것이 아니라, 창조의 질서 속에서는 본래는 원래가 하나였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만족함을 채워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필요를 상대방이 채워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런 이유로 인해서 둘이 헤어지면 안 된다라는 그 설명을 지금 주님께서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우리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요즘 참 한국은 예전에는 이런 일들이 흔치 않았는데, 한국에서는 금방 만났다가 신혼여행지에 가서도 헤어지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봅니까?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뭐 해당되는 그러한 분들이 없겠지만, 혹시라도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손주 손녀들이 이 문제로 고민을 한다면 여러분들이 성경적인 근거에 의해서 정확하게 그들에게 이야기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한 몸으로 우리를 만드신 것이지 따로따로 만드신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한 몸이기 때문에 헤어지려야 헤어질 수 없다.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다. 이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의 질서고 창조의 원리다라는 것을 반드시 우리의 자녀들에게 설명해 줄 그런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그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답변을 창조의 문제로 설명하시면서 대답하시는 그런 장면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요. 이 당시에 아까 말씀드린 신명기 24장 1절에 있는 수치되는 일에 대한 이 표현을 자기네들 마음대로 해석한 겁니다.

자기들이 이제 편한 대로 해석한 거죠.

“봐라, 성경에 모세 율법에는 내가 수치되는 여인을 만나면 이혼 증서를 써서 내보내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이 사람들은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한 가정에서 가장으로 거룩하게 지내야 되고 거룩하게 살아야 되는데, 아내가 옆에 와서 까불고 나를 화나게 하면 그 거룩함이 깨진다는 겁니다.

히브리 남자들의 주장이 그렇습니다. 제 주장이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라, 히브리 남자들은 아무튼 거룩하게 오늘 예배드리러 가야 되는데, 안에 있는 사람이 “아, 그 복장이 그게 뭐냐. 머리는 그게 뭐냐” 뭐 이런 잔소리를 하면 그 거룩함이 깨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모세의 율법에 근거해서 이런 일들을 하나의 이혼 증서를 써서 내보내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는 것이죠.

그렇지만 원래 이 율법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율법은 더 사람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하게 하기 위해서 어떤 규율 같은 것, 규칙 같은 것을 정해 놨는데, 그들이 스스로 세운 규칙 속에서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욕심을 내비치는 이러한 변질된 율법으로 흘러가는 것을 우리들이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이처럼, 원래는 그렇지 않다.

너희들이 어떤 욕심으로 인해서 여인들을 내보낼 때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여인들을 내보낸 것이지만, 모세도 우리 사람들의 완악함이나 우리 사람들의 패역함이나 우리 사람들의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 창조의 원리대로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못 살아가는 우리들로 말미암아 이혼 증서를 써서 보내라고 한 것이지, 하나님의 마음은 원래는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지금 주님께서 설명하고 계시는 것이죠.

모세 하면 여러분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어떤 정신적인 지주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서 예수님에게 나왔는데, 예수님은 창조의 질서를 가지고 말씀을 하다 보니까 이 사람들이 할 말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8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얘기를 하시냐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기서도 너희들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완악함 때문에, 우리들의 패역함 때문에, 우리들의 연약함, 우리들의 죄악성, 우리들의 부족함, 이런 것들 때문에 모세가 그렇게 이야기를 한 것이지, 원래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라고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는 거죠.

여러분들 우리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정말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이런 도덕적인 면과 윤리적인 측면에서 뛰어난 그런 사람들을 보기는 참 쉽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들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성자다라고 이렇게 표현할 정도로 아주 드문 그런 케이스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심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으로 완벽하게 창조를 하였지만, 우리 사람들이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의 완벽하신 창조의 모습을 우리들은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가정에서 살아갈 때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지만, 그 모습을 잃어버린 채로 패역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의 가정 안에서 이런 자그마한 다툼, 실수, 이런 것들이 등장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본래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라고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냐면,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열심으로, 우리들의 어떤 윤리적인 것으로, 도덕적인 것으로 우리의 가정이 지켜지지 않는다라는 것을 지금 가정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설명을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런 문제들이 우리들에게 발견이 되거든, 우리는 할 수 없는 존재다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 은혜를 구하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지혜를 구하라는 것이죠.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잖아요.

뭐 우리 옛말에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다라고 이야기를 해서, 그렇게 간밤에는 치고받고 그렇게 다투고 하다가도 그다음 날 웃는 모습으로 만나는 게 부부 사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지혜로는 이런 문제를 풀어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냥 그렇게 그렇게 사는 것뿐이지.

그러나 하나님의 그 창조의 질서 속에서 우리들에게 원하는 것은 뭐냐면, 만약에 그런 일들이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가정에 그런 일들이 생기거든 하나님께 나아가 은혜를 구하라는 겁니다.

“하나님, 우리는 너무나도 보니까 패역합니다. 정말 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주님께서는 보내 주셨는데, 이 존재까지도 내가 사랑할 수 없는 그런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가야 됩니까?”라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가정을 통해서 보여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죄가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 한번 봅시다. 창세기 3장 16절을 보시면,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께서 여자를 저주하시는 그러한 장면이 있는데, 3장 16절을 보시면,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자, 인간이 죄를 짓고 사람에게 저주를 하는데, 가만히 살펴보면 도대체 하나님이 무엇을 저주를 했을까?

잉태하는 고통을 주는 걸까?

이게 저주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는 거, 이게 어떤 저주일까? 그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다음을 보면,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고 얘기를 하는데, 여기서 원한다라는 이 표현은 혹시라도 옛날 성경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라는 이 사모한다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원래는 이 사모한다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냐면, 장악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는 남편을 장악할 것이요.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라.

그러니까 아내 된 아내들은 남편을 장악하려고 하고, 남편들은 아내를 다스리려고 하니까 싸움이 안 일어나려야 안 일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그 가정에, 이게 하나님께서 주신 그 가정의 어떤 가정을 향한 저주라는 것이죠. 그 가정은 싸움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서로의 마음, 나는 저 남자에 대해서 순종할 거야.

주님께서 아내들이여, 주님께서 교회에게 하신 것처럼, 남자들에게 사랑하기를 원하고, 아내들은 주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처럼 순종하기를 원하고, 이런 마음으로 그 가정이 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텐데, 지금 여기서 하시는 그런 말씀은 아내들은 남자를 다스리려고, 장악하려고 하다 보니까 문제가 생긴다는 겁니다.

남자들이 가만히 있습니까?

그 여자를 다스리려고 하죠.

이러니까 그 가정에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라고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계시는 거죠.

그래서 나의 욕심을 만약에 버린다면 우리는 서로 그 가정을 이렇게 아름답게 꾸며 갈 수 있고 만들어 갈 수 있지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은 우리의 연약함에 속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욕심을 버리는, 욕심을 내려놓는 그런 사람들이 흔치 않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하나 생각을 하셔야 될 것은 뭐냐면, 그래서 이런 연약함을 알고서 모세가 이혼 증서를 써서 주어라라고 얘기를 하신 것이다.

그러나 원래는 그렇지 않다라고 주님께서 이야기하시는 거죠.

10절 말씀을 한번 보세요. 여기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등장을 하게 되는데,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지금 주님께서는 남자나 여자나 원래 한 몸이었다. 어떤 우등의 차이, 높고 낮음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다 평등하고 한 몸이었다.

그래서 한 가정을 이루는 하나의 개체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을 하면서 그 가정을 이루어 나가야 되는 것이 맞는 것이다.

아까 서두에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것처럼 히브리 남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수치되는 일을 내가 욕심에 의해서, 필요에 의해서 순식간에 때를 찾아서, 그 여인에게, 상대방 여인에게 수치된 일을 발견해서 그 여인을 빨리 내쫓으려는, 이런 자신의 어떤 욕심만 채우는 그런 모습을 히브리 남자들은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지금 주님께서 서로 평등하다, 서로 동일하다, 서로 한 몸이다, 너희들이 그렇게 다투고 가정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원래 죄악성이 나타나는 것뿐이다, 그러나 원래 그 본 마음은 그렇지 않다라는 이 말에 지금 제자들이 10절에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제자들의 반응.

“주님, 그렇다면 차라리 장가들지 않고 혼자 사는 게 더 낫겠습니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게 어떤 의미냐면, “주님, 그렇다면 무슨 재미로 결혼을 합니까?” 이 히브리 사람들의 어떤 유대인들의 문화, 습관, 습성, 나쁜 것들만 가득 차 있죠. 제자들도 다를 바 없는 겁니다. 똑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하는 말은 뭐냐면, “그렇다면 주님, 무슨 재미로 살아갑니까?”

이 사람들은 뭐 여자를 내쫓는 재미로 살아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 식으로 지금 주님께 질문을 한 겁니다.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게 더 낫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그럴 때 주님께서 하신 답변이 뭐냐면, 그것은 너희들이 결정할 바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결혼을 했고 한 가정을 이루는데, 우리의 욕심, 우리의 어떤 욕망으로 인해서 그것을 파괴하는 것은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다라는 그러한 이야기를 하시는 거죠.

그러니까 너희들의 욕심대로, 너희들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님께서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고자 이야기가 이렇게 등장을 하게 되는데, 생식 기능을 상실해서 아기를 낳지 못하는 그러한 사람에 대한 비유를 주님께서 들어 주시는 겁니다.

이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첫 번째는 날 때부터 그렇게 핸디캡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고, 두 번째로는 사람이 만들어진 이후에 자신의 어떤 필요에 의해서 그렇게 된 사람이 있고, 아니면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그렇게 된 사람들이 있고, 우리나라 사극에 보면 내시들, 환관들, 이런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거겠죠.

그다음에 세 번째로는 천국을 위하여 고자도 있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다. 이렇게 세 종류의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사람들이 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11절에 뭐라고 말씀을 하시냐면,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한다.” 타고난 자라야 한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오직 타고난 사람들이라야 그것을 알고서 그 일을 행하는 것이지, 너희들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창조하시고 또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 남자와 여자를 통하여서 한 가정을 이루신 근본적인 뜻이 있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세상에 독신주의자들이 참 많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여러분들의 가정에 자녀들이나 손주가 “나는 혼자 살 거야” 한다면, 성경을 보니까 이렇게 시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은 둘이 만나 결혼하고 한 몸을 이루고 가정을 꾸리라는 것이지, 너 살기 편하다고, 너 귀찮다고 혼자 사는 것은 성경에 맞지 않는 것이다라고 가르쳐 줘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 성경은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남자가 혹은 여자가 혼자 사는 것은 맞지 않다라고 우리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의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는 뭐냐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어떤 창조의 질서, 창조의 어떤 목적, 창조의 의도, 이런 것들을 사람들의 욕심으로 인해서 깨뜨리지 말라. 질서를 흐트리지 말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예수님의 답변 가운데 있는 중요한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주님 앞에 나와서 만약에 그렇다면 혼자 사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했을 때, 혹시라도 여러분들 가정 안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야, 이렇게 살면서도 계속 살아야 되나”라는 이런 고민이 있고, “야, 가정이라는 것이 정말 이런 것인가”라는 어떤 회의들도 나타날 거고, 또 그렇게 결혼하기 전에는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들이 오래 가지 못하고 금방 식어 버리는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가?

그것은 부부 된 당사자의 문제가 아니라, 죄로 인한 부작용이다라고 주님이 우리들에게 말씀을 하는 겁니다.

혹시라도 우리들이 성격 차이가 나고,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서 살아갈 때 그런 것으로 인해서라면, 주님은 이혼 불가, 이렇게 성경에서 분명하게 우리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성격 차이가 난다면, 여러분들이 혹시라도 낮아지고, 혹시라도 이해하고, 혹시라도 여러분들이 섬기고 하면 얼마든지 그것은 극복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이 되고, 경제적인 문제다라고 얘기를 한다면 그것 또한 얼마든지 우리들이 땀을 흘려서 그 문제도 해결할 수가 있는 그런 문제다,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로 만드신 것을, 그 창조의 질서를 너희들의 욕심으로 인해서 끊으려고 하지 말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러나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신앙의 문제가 생겨나고, 이것이 정말 구원의 문제가 생겨나고, 생명을 주고받고 오고 가는 그러한 문제라면 차라리 갈라서는 게 낫다라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결론을 내리면서 여러분들, 성경에는 항상 이런 어떤 여운이 남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해서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것 같은데, “봐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얘기를 했지 않느냐? 이게 만약에 생명의 문제고 신앙적인 문제면 갈라서라고 얘기를 했지 않느냐? 그러면 갈라서도 되는 거 아니냐?”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성경이 항상 여운을 남기는 것은 무엇이냐면, 가만히 한번 생각을 해 봐라.

신앙적인 문제라면, 하나님께서 너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인 너를 안 믿는 가정에 보내신 것은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구원하라고 너를 보내신 것은 아닐까?

이런 여운을 남겨 줍니다.

신앙적인 문제지만 사도 바울은 갈라서도 괜찮다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목적으로 그 가정에 보내셨다면, 아니면 남자를 그렇게 여인의 가정에 보내셨다면, 그 속에서 또 우리는 해야 할 그런 일이 있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할 일이 있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할 그러한 일이 있지 않을까?

이렇게 성경은 여운을 남깁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천국은 시집가는 것도 없고 장가가는 것도 없다고 얘기를 합니다. 부부 관계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만약에 이 땅에서 정말 시집가고 장가가고 가정을 이루고 이런 것들이 정말 즐거운 일이라면, 이렇게 즐거운 것이 왜 천국에는 없을까?

우리들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되는 일이고, 이렇게 좋은 것을 천국에서 없게 하셨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갈 때에 이런 문제들은 어떻게 우리들이 대할까라고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 안 되면 주님께 가져가야 됩니다.

안 되면 우리가 지혜가 없으면 주님께 지혜를 구해야 됩니다.

우리들은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의 자녀들, 앞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젊은이들, 여러분들이 이 말씀 분명하게 들으셔서, 남자는,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중간 지대는 없다. 남자가 여자로 변하든지, 여자가 남자로 변하든지, 이것은 없다. 이것은 창조 질서에 위배되는 것이다.

분명하게 이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얘기를 해 줄 수 있어야 되고, 그리고 혹시라도 우리의 자녀들 가운데서도 가정에서 부부 간의 문제로 힘들고 어려워하면, 하나님은 이렇게 얘기를 하셨다.

너희들이 힘들고 어려운 것은 너희들이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 죄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지혜를 구하고 은혜를 구해서 지혜롭게 그 문제를 해결해 가라. 이렇게 얘기를 해 줄 수 있어야 됩니다.

아멘.

“야, 갈라서. 마음에 안 들면 갈라서.”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은 창조의 질서에 위배되는 겁니다.

여러분들 오늘 말씀 속에서 다시 한번 더 깊이 묵상하는 여러분들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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