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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8장 21~35 하나님의 은혜의 온전



제가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게 딱 하나 있어요. 무엇을 바라냐면, 예수 믿고 기뻤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아멘. 아멘.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다는 게 얼마나 축복된 자리로 우리들이 왔는지 몰라요. 이왕 예수 믿기로 여러분들이 작정하셨으니, 내가 예수 믿겠다고 다짐하셨으니, 그 예수 믿는 길이 하루하루의 길이 힘들고 어렵고 고난, 이런 것이 아니라 기쁘고 즐겁고 감사함이 넘치고 찬송하고, 이런 것들로 충만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제가 예전에는 율법적으로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고, 율법적으로 교회 일을 하고, 행사가 있으면 그거 감당하고, 그리고 거의 주일날 저녁이면 코피를 많이 쏟았습니다. 제일 뒤에 앉아서.

음.

얼마나 피곤하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왜냐하면 토요일부터 와서 교회 딱 세우고, 그리고 주일날 한국에는 오후 예배까지도 있었잖아요. 오후 예배까지 다 하면 탈진해 가지고 코피까지 쏟은 날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기쁨이 되지 않더라고요.

그냥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니까, 그렇지 않아도 기쁨이 많이 일어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제가 항상 여러분들을 향해서 기도하는 게 그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구원의 감격과 구원의 확신 속에서 신앙생활이 날마다 기쁨이 가득한 우리 성도들 되게 해 달라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어떤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환경이나 상황, 이런 것들은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지는 것들이고 지나가는 것들이지 않습니까? 그걸로 인해서 너무 힘들어하고 어려워할 것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 닮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 이것들을 우리들이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18장에 있는 내용은 여러분들이 하나로, 통으로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통으로 이렇게 보셔야 돼요. 다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첫 번째에 베드로의 질문이 뭐였습니까?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입니까?”로 이렇게 시작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비유 말씀에서도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 대한 비유로, 그러고 나서 이제 형제를 용서하기를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주님의 말씀으로 이렇게 끝이 나게 되죠.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다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다 하나입니다.

하나인데, 베드로를 보면, 우리들이 베드로의 신앙을 보면, “야, 이 정도의 신앙은 나도 가질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신앙은 조금 힘들지만, 베드로 정도는 내가 가질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천만의 말씀.

베드로 사도는 수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고요.

오늘 질문에서 베드로 사도가 용서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습니까? 이 질문에서 제가 이제 깨달은 바는 뭐냐면, 18장 1절부터 이어왔던 질문, 다시 말씀드리면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라는 질문 아래 예수님께서 소자 하나를 비춰 주시고, 누구든지 이 소자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서는 큰 자라 일컫지 못한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구원받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면 천국을 들어갈 수 없다라는 그 소자를 이렇게 내세우게 되죠.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그러한 말씀이 뭐냐면, 길을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우리가 길을 잃었던 사람들이었고, 또 우리가 소자였고, 우리가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였지만,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다른 모든 것들을 제쳐 놓고 우리를 찾으셨고, 그렇게 우리를 하나님께로 부르셨다는 것이죠.

그렇게 우리를 하나님께로 부른 사람들의 신분을 지금 이야기하는 겁니다. 베드로가.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으로, 우리들이 이해하기 쉽게 이렇게 설명을 한번 할게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제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됐는데, 주님께서 그런 길을 잃어버린 양과 같은 우리를 찾아 주셨고,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버지의 품을 떠난 탕자를 그 품으로 다시 받아 주셨고, 이제 신분이 회복됐을 것 아닙니까?

다시 제자리를 찾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신분이 회복된 사람의 삶, 생활, 그것을 베드로 사도께서는 용서로 이렇게 대표적으로 꺼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네가 내게 범죄한 일이 있다면, 몇 번을 용서해야 됩니까라는 그 얘기로 이렇게 꺼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몇 번을 용서해야 됩니까? 알기 쉽게 이런 뉘앙스가 이 안에 담겨져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21절 말씀을 여러분들 한번 보세요. 이 배경을 여러분들이 삼으시고 21절을 보시면,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자, 베드로 사도는 이제 자신의 하나님의 그 백성 된 신분, 백성 된 자신, 이것을 알고서 주님 앞에 이제 묻는 겁니다.

“주님, 내가 예수를 믿는데 내 형제들에게 죄를 범한 사람이 있다. 내 주변에 죄를 범한 사람이 있다면 몇 번까지 용서를 해 줘야 됩니까? 그게 어떤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까?”라고 이렇게 묻는다라고 여러분들이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사람이 회개를 하면 세 번까지는 용서를 해라라고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일을 세 번 반복해서 하는 것은 더 이상 그가 용서할 마음이 없다. 아니, 다른 죄를 저지를 수 있다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그가 회개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서 세 번까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도 법도 그렇지 않습니까?

삼세판 원칙 해 가지고, 아주 가벼운 그러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범죄를 세 번 저지르면 아주 중형에 처하는 그런 것이 있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이 아마 이렇게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관습상 세 번까지만 용서를 하고, 네 번째 범죄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용서의 가치가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한 거겠죠.

그때 이제 베드로 사도께서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서 “일곱 번이면 족합니까?”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과 예수를 믿는 사람과의 차이를 이야기를 하죠. 안 믿는 사람이, 유대인들이 세 번 용서한 걸로 그걸로 끝이라면,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최소한 한 일곱 번 정도는 용서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이제 주님 앞에 나와서 질문을 하게 되죠.

여러분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들 주변에 굉장히 범죄한 그런 사람들이 있을 때 일곱 번 용서를 해 준다는 것이 그게 많은 건가요? 적은 건가요?

뭐 내 주변에 나에 대해서 죄를 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내가 몇 번 용서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일곱 번이면 많은 거죠.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렇게까지 사람들하고 등을 돌리고 척을 진 적이 없어 가지고, 뭐 용서 이런 것들은 전혀 모르겠지만 일곱 번 정도면 아마 많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지금 베드로가 얘기를 하는 것은 뭐냐면, 일곱 번까지라는 것은 우리 사람들의 어떤 한계를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용서에 대한 한계.

우리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치,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일곱 번 이상 물론 할 수도 있고, 그거보다 더 많이 용서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최소한 일곱 번 정도를 하며 우리 사람들의 한계치를 베드로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정도 얘기를 했다면, 유대인들이 세 번으로 끝났는데 베드로 사도가 일곱 번을 이야기했다면, 아마 예수님께서도 베드로 사도에게 정말 칭찬하셨을 일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생각이 되는데, 주님의 말씀은 의외입니다.

지금 뭐라고 말씀을 하시냐면, 2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자, 일곱 번씩 일흔 번을 하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합치면 490번이 되나요? 그러면 491번째는 용서하지 말라, 이런 것들이 아니죠.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의 한계가 일곱인데,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한계는 490번 이상이 될 정도로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용서를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꼭 그렇게 하라라는 것들보다, 베드로 사도가 제시한 인간의 용서의 한계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용서의 한계는 무한하다라는 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인간적인 어떠한 용서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예수님의 용서는 하나님적인, 신적인 용서함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한계 속에 부닥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한계가 없다라는 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 여기에서 보시면, 히브리 사람들은 7이라는 숫자를 완전수라고 생각을 하고 굉장히 중요하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7이라는 숫자가 나왔어요. 그런데 7이라는 숫자 다음에 일흔 번이라는 또 7이라는 숫자가 또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10번이라는 것이 또 등장을 하게 되죠. 70번이 등장을 하게 되죠. 이 10번째라는 숫자의 개념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떤 서술적으로 완성되어진 숫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도 완전하고, 서술적으로도 완전한 숫자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고 제시를 한 거죠.

여러분들 7 곱하기 7 하면 성경에서 뭐가 떠오릅니까?

뭐가 떠올라요? 49가 떠올라요. 7, 7, 49가 떠올라요. 7 곱하기 7 하면 성경에서 뭐가 떠오릅니까?

안식년이 7년이죠. 7년을 안식년이라고 해요.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나면 그다음 해는 어떤 해예요?

희년이죠. 주빌리라는 해입니다.

이때는 무엇을 하느냐? 모든 종들을 다 내보내 줍니다. 자유를 주는 거죠. 그리고 자신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다 탕감하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돈이 없어서 그 안에 밭을 팔고 무엇을 팔고 했던 것까지도 다 되돌려받을 수 있는 해가 희년이라는 제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내가 희년을 완성하러 왔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희년의 제도를 주신 것은 무엇이냐면, 우리 사람들이 살아갈 때에 저지를 수 있는 실수, 잘못, 이런 것들을 다시 한번 되돌릴 수 있는 제도라는 것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희년을 맞이하면 종들이 해방을 받고, 또 모든 것들을 탕감받고, 빼앗긴 땅들이 다시 되찾는 이런 기쁨을 하나님께서 이 제도를 통해서 주셨다는 것이죠.

그런데 실질적으로 이 제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가 희년을 완성하러 왔다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서 우리는 무엇을 취하게 되는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졌던 관계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회복시킨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교제를 다시 할 수 있는 그 신분으로 되돌린다.

죄에서, 사망에서, 절망과 좌절 속에서 살아가던 우리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원래의 기쁨을 되찾는다라는 이 의미가 희년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완성되어지는 희년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금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를 하라라는 것은, 그 용서가 희년을 당했을 때의 기쁨처럼, 그 용서가 사람의 한계치, 사람의 용서가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용서다라는 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계시는 거죠.

사람은 일곱 번씩 일흔 번, 절대 용서할 수 있는 그러한 존재가 되지를 못합니다. 이 용서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용서라는 것이죠.

용서 자체가 원래 하나님의 성품이지 않습니까?

그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용서는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하다라는 것을 지금 설명하는 거죠.

그리고 나서 23절 이하로 쭉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 대한 비유가 등장을 하게 되는데, 35절까지 기니까 그냥 23절 한 절만 보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자, 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그런 비유이기 때문에 비유의 내용은 잘 설명하지 않겠지만, 어떤 사람이 일만 달란트를 임금께 빚을 졌습니다.

일만 달란트가 어느 정도가 되냐면, 당시 노동자가 하루에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거든요.

그런데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 됩니다. 그러니까 한 3년치인가요?

3년치 정도의 월급에 해당되는 돈이 한 달란트인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금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다라고 하니까 상상이 안 가죠.

어마어마한, 도저히 갚으려야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었다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임금이 그 사람을 불러다가 “갚아라”라고 얘기를 하니까, “못 갚겠습니다. 제 아내를 팔고, 자식을 팔고, 땅과 몸을 다 팔아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꼭 갚겠습니다. 어느 세월에 갚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사람이 너무나도 측은하고 불쌍해서 임금이, “그러면 네 모든 빚을 탕감해 주겠다”라고 이야기를 한 거죠.

그러다가 탕감을 받고 이제 돌아오는 길에, 옛날 성경에는 “길을 가다가 동관을 만나니”라는 그러한 말씀이 있는데, 동관, 직장 동료라는 그러한 이야기죠.

아마 이 사람이 관청에서 일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동료, 직장에 있는 동료를 만나서 이야기합니다.

“야, 너 나한테 백 데나리온 빚졌지 않느냐?”

한 3개월치 월급이죠.

“백 데나리온 빚졌지 않느냐? 그거 왜 안 갚느냐?”

“조금만 더 기다려라. 갚을 테니까.”

했는데, 이 사람은 용서를 못 하는 겁니다. 그래서 목을 잡고서 목 비틀면서 갚으라고 얘기를 하고, 감옥에 넣었다는 것이죠.

이것을 바라본 많은 사람들이 임금님께 가서 이야기합니다.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얘기를 하니까, 그 임금님이 다시 그 사람을 불러서 노하는 그러한 장면이 오늘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제 이 내용을 보면서, 용서라는 내용, 우리들이 어떻게 용서를 할까를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제시를 하고,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지금 내놓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까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용서의 한계가 있고,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한계가 없다라고 얘기를 하면서 등장한 것이 이 비유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용서하실 때는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임금님께 그 빚을 탕감받는 것처럼, 도대체 갚으려야 갚을 능력이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우리를 구원시키셨다라는 의미가 여기에 담겨져 있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들 자세하게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그리고 나서 이제 그 뒤에 이렇게 쭉 나오다가 35절 마지막 절에 우리들에게 너희들도 이와 같이 내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얘기를 해서, 우리가 그러면 우리의 형제들을 용서해야 되는구나. 용서를 못 하는 죄책감 같은 것들이 우리들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지금 우리들에게 죄책감을 주기 위해서 “내 이웃을 용서하라. 내 형제를 용서하라”라는 용서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는 얘기죠.

자, 여기에서 보면 세 종류의 사람이 나오죠. 세 종류의 사람이 여기에 등장합니다.

세 가지 어떤 계급이 있는데, 첫째는 임금님이 나오고, 또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나옵니다.

그리고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이 여기에서 등장을 하죠.

그런데 이 세 부류는 서로서로의 관계가 있다는 겁니다. 임금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과 관계가 형성이 돼 있고, 재물이라는 그 관계가 형성이 돼 있고,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은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과 채무 관계가 이렇게 형성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임금님과 일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과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은 모두 하나의 어떤 관계 속에서 이 스토리가 지금 진행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임금님이 이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에 대해서 용서를 해 줬습니다. 용서를 했다는 것은 일만 달란트 안 갚아도 된다. 탕감을 해 줬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제는 빚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일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탕감을 받고 가는 길에, 백 데나리온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이 사람을 만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백 데나리온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과의 그 관계를 임금님이 탕감을 해 준 것으로 그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임금님이 계속적으로 관찰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죠?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붙잡아서 목을 비틀고 감옥에 넣은 것까지도 왜 그렇게 했느냐라고 책망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개념인데요.

여러분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이거를 이제 예수를 믿는 걸로 한번 생각을 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갚을 수 없는 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졌다고 지금 가정을 해 봅시다.

물론 그렇지만 우리가 그것을 사망이라고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죽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죽음이라는 이 빚을 진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사 그 죽음의 자리에서 우리를 건져내셨죠.

살리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마치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처럼 갚을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베푸시고 그 사랑을 베푸사 우리를 그 자리에서 건져내셨다는 것이죠.

건져내셨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신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마치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감옥에 넣은 것을 관찰하신 것처럼,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지금 관찰하고 계신다는 것이죠.

이게 여러분들 어떤 빚진 자의 비유, 또 용서의 비유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상황, 이런 것들과도 연결이 되고 연관이 되는 그런 부분들입니다.

그런데 이 임금님이 백 데나리온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 사람, 그냥 탕감해 준 것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여기까지도 일거수일투족을 보면서 그를 관찰하셨다는 것이죠.

이게 굉장히 중요한 그러한 개념인데, 그래서 여러분들이 한번 이렇게 생각을 해 보시면, 그냥 단지 용서하는 것으로만 끝나는 그러한 비유가 아니라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죠.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은 거의 뭐 한 20만 년 정도를 돈을 벌어서 월급 받아서 한 푼도 쓰지 않고, 몇십만 년 정도를 이렇게 갚아야 될 그런 것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혀 갚을 수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주인으로부터 탕감받지 않으면 해결 방법이 없는 그런 사람이라는 겁니다.

가서 주인 앞에, 임금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가족들 다 동원해서 임금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해서 갚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냥 임금님이 불쌍해서 그 사람을 긍휼히 여겨 이렇게 탕감을 해 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만 달란트를 우리가 탕감받았다 그러면, 우리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은 그거는 아무것도 아닌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는 은혜를 이렇게 크게 받아 놓고서, 우리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잘못한 그 부분들에 대해서는 용서를 하지 못하는 그러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왜 주인이 이렇게 화가 났을까요?

주인이 화가 난 이유는 뭐냐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뭐냐면, 결국 우리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거든요.

빚이 없는 상태로서의 회복입니다.

다시 알기 쉽게 말씀을 드리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어떤 의를 내놓고, 우리의 윤리를 내놓고, 우리의 도덕을 내놓고 만들어진 그런 회복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신분이 아니라는 얘기죠.

그냥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 놓으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생명의 자리로 옮겨 놓은 것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용서라는 특이한 하나님께서만이 가지고 계시는 그 성품을 우리에게 전가, 우리에게 부어 주셨다는 것이죠.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구원함을 얻는데, 우리가 죄와 사망의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에서 회복되고 건져진 것으로만 구원 얻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 얻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성품,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용서의 마음, 이것을 우리들에게 부어 주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용서의 마음이 다른 사람을 볼 때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여기서 주인의 화가 나오는 거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시는 이유라는 것이죠.

“아니, 너에게 이 용서의 마음을 주었는데, 내가 신의 성품을, 하나님만 가지고 계시는 그 성품을 너에게 주었는데, 너는 그거 하나 못 하니?”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 믿는 사람 같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저 사람은 예수를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식당에 가면 열심히 기도해 놓고, 얼마나 그 서빙하는 사람들을 부리는지, 어떨 때는 반말로 “야, 김치 가져와. 깍두기 가져와” 이러는 이런 성품들이 우리들에게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의 모습이 마치 백 데나리온,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한 달란트에 비해도 백 데나리온은 아무것도 아닌데, 그거 하나 해결을 하지 못하느냐라는 책망이 이 가운데서 지금 담겨져 있다는 겁니다.

아까 서두에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좀 기뻤으면 좋겠다. 행복했으면 좋겠다라고 말씀을 드린 것은 무엇이냐면, 예수를 믿으면 시각이 달라집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마음, 하나님께서 주신 성품이 있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다는 것이죠.

우리 주변에 불쌍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갈급해하는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바라볼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 감정 속에서 바라보는 그 마음일 거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은 이유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 주변에 불쌍한 사람들을 바라볼 때는 우리가 긍휼한 마음을 가질 수가 있고, 어떻게 하면 내가 저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예수를 믿고 난 이후로 우리들이 바뀌어진 그런 성품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죠.

이처럼 일만 달란트 빚진, 도저히 갚으려야 갚을 수 없는 그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받고도, 우리 주변에 있는 그런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한 그 모습을 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 비유가 지금 우리들에게 하고 있는 그런 말씀은 뭐냐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는 그런 율법적인 행위, 그러니까 “너 용서해야 돼. 용서하지 못하면 천국 못 가고 지옥 가. 그래서 형제로서 꼭 용서해야 돼. 용서 못 하면...” 다시 또 다른 율법에 얽매여 가지고, “아, 나는 용서를 못 했는데 어떻게 하지?” 뭐 이런 또 다른 율법 속에 들어가기를 원치 아니한다는 것이죠.

거기서 자유하라고 지금 이 비유를 우리들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거기서 자유하라라는 그런 의미는 뭐냐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양을 결국은 목자가 찾아서 해결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해결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언젠가 한번 말씀을 드린 것 같은데, 마태복음 5장에 보시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뛰어넘는 의에 대해서 언제 한번 설명했던 그런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예수를 믿는 그런 사람들이 이런 용서가 가능한 것은 무엇이냐면,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성품을 선물로 주셨고, 우리는 그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용서를 바라보는 시각이 크리스천의 시각에서 바라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백 데나리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율법이라는 이 틀에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일곱 번이라는 한계를 정하고, 세 번이라는 한계를 정해서, 그것까지만 이렇게 한계를 정해서 행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율법의 자녀가 아니라 우리는 생명, 하나님의 생명의 자녀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들을 일곱 번, 일흔 번이 아니라 그 이상도 할 수 있는 그런 존재로서의 변화,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죠.

그게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담겨져 있다는 것이죠. 이게 희년의 개념이라는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주빌리, 그 해의 모든 것들이 다 해방되듯이 우리가 모든 것들이 다 해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원래 자리로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온 사람이라는 그런 개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감격이 많이 없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기쁨이 없는 가장 큰 이유가 뭐냐면, 우리의 신앙의 모든 행위들을 보상을 이 땅에서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기쁨이 사라지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내가 예수를 이렇게 잘 믿었으니 내가 건강해야 되고, 예수를 이렇게 잘 믿었으니 내가 하는 것마다 다 잘돼야 되고, 우리가 신앙의 어떤 행위를 이 땅에서 보상을 받으려고 하다 보니까 그 보상이 없으면 낙심하고 좌절하고 해서 그 기쁨이 사라지는 겁니다.

그 기쁨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느냐?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느냐? 여기에서부터 다시 돌아오라는 얘기죠.

우리는 갚으려야 갚을 수 없는 빚인 일만 달란트를 지금 빚진 그러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갚을 능력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다면,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생활 속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어려움, 환경, 이런 것들을 얼마든지 우리들이 뛰어넘을 수 있는 그러한 수준으로 우리가 변화됐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 가스펠송 중에서 그런 것들이 있죠.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 몇 번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우리는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내게 강 같은 평화,” 뭐 박수치면서 그냥 즐겁게 노래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중국의 문화혁명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지식인들을 다 붙잡아서 감옥 속에 갇혀 가뒀는데, 그 가운데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이 목사님이 여자 목사님이신데, 이 여자 목사님이 감옥 속에 10년간 갇혀 있었다는 것이죠.

10년 동안 감옥 속에 갇혀 있었다는 겁니다.

이분이, 언젠가 설명을 드렸죠. 나와서 첫 번째 불렀던 찬송이 “내게 강 같은 평화”입니다.

제가 중국에 가서 그 목사님을 한번 만나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뭐 성함 같은 거 밝히고 그러면 또 인터넷으로 나가니까 공안에 검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함은 밝히지 않고, 아무튼 여러분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가 평상시에 오락을 하듯이 즐겁게 부르는 “내게 강 같은 평화”와, 감옥 속에서 10년 동안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잡혀 있다가 나와서 부르는 이 “내게 강 같은 평화”가 같을 수는 없는 거죠.

그것이 다 다른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탕감받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가는 삶과, 일만 달란트 갚으려야 갚을 수 없는 그 빚을 탕감받은 이후에 살아가는 삶에서 나타나는 향기, 삶에서 나타나는 어떤 모양들, 찬송들, 이게 같을 수가 없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찬송을 불러도 구원의 감격 있는, 구원의 확신을 가진 그런 분들이 드리는 찬양과, 그렇지 않고 그냥 명목적으로 종교 생활을 하는 그 사람이 부르는 찬양과, 아무리 가수가 부른다 할지라도 차이가 있는 겁니다.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너 일만 달란트 빚졌다.

삶에서 일어나는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닌 거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지금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 은혜를 안다면 우리가 다시 한번 구원의 감격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은 그런 사람이고요.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을 믿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도 보면 여러분들이 그런 말씀이 있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우리를 죄악에 빠지지 말게 하옵시고,” 모든 것들을 지금 누구에게 구하냐 하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주기도문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께서 우리에게 내리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라는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라는 그 고백이 주기도문이라는 그 고백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 일만 달란트 빚진 그러한 사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갚으려야 갚을 수 없는 용서를 받은 그 신분의 변화가 있는, 이런 사람들이 행하는 용서다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라고 이야기를 할 때에 그 가치는, 아니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자랑이 무엇이냐라고 얘기를 할 때에, 그 가치는 물질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어떤 건강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녀가 잘되고, 그런 것들에 있지 않습니다.여러분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물질이 우리를 사람 같게 하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건강해도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요. 아무리 비즈니스를 몇 개 한다 할지라도 사람의 가치를 모르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이 가치를 다시 회복시킨 겁니다. 인간의 어떤 존엄성이라고 얘기를 해야 되나요?

아니면 인간의 가치라고 얘기를 해야 되나요?

우리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줄 수 있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를 믿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을 볼 때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지금 주님께서 그 얘기를 우리들에게 하시고자, 우리가 그런 신분인데 왜 못할 것이 뭐가 있느냐라고 우리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지 아니한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지 아니한 그 성품 가운데 용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됐을 때는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마지막 결론으로 사도 바울의 그 말씀을 우리들이 한번 주목해 봅시다.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라는 그런 고백을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내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라는 그런 고백을 하고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른 이웃을 심판할 자격이 없다라는 이 고백이 뒤따라오게 됩니다. 여러분들, 우리의 구원 또한 마찬가지인 겁니다.

우리의 구원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판단하고 뭐 어떻게 하고 할 만한 그 권한이 우리들에게는 없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얘기죠.

아멘.

그래서 결국은 성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도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성품, 아니면 의로움, 이런 것들은 심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용서하는 데 있지.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은 심판하라고, 우리의 이웃을 심판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서 용서하라고 부르신 것이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임금께서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 게 이런 맥락에 있는 거죠.

우리는 용서하라고 불렀는데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 책망을 하는 겁니다. 임금이 일만 달란트 빚진 그러한 사람에게.

결국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뛰어넘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뭐냐면,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의가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이죠.

십자가의 복음은 원수까지도 용서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가서 그 원수를 사랑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들 원수 된 사람들이 있습니까? 없죠.

용서하라고 얘기를 하는데 거기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고까지 나아가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의 복음이죠.

우리는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십자가는 그것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죠.

주님께서 실질적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 또 군병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 “저들이 하는 것을 저들이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원수도 품고 사랑하는 그 자리로 나아갔다는 것이죠.

스데반이 죽으면서 어떻게 죽었습니까? 천국문이 열리고, “하나님, 저들 하는 거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들 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서 이렇게 죽어 갔다는 것이죠.

이게 진정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그러한 마음들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이 풀지 못하는 것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지도 우리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거 풀어 버리지 않으면요, 여러분들만 영적으로 손해입니다.

풀어 버릴 거 다 풀어 버리셔야지 거기서 영적인 자유함을 얻고 해방함을 얻는 겁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이 한번 찬송을 한번 드려 보십시오. 그 가사에 있는 내용들이 어떠한 내용으로 와닿는지, 여러분들 한 주 동안 한번 테스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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