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8:1~10 천국의 가치와 천국의 질서
- seattleomc
- Apr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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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오신 분들은 창밖을 보고서 “야, 아름답다”라고 느끼셨을 겁니다. 늦게 오신 분들은 모르시겠고요. 일찍 오셨으나 또 입신 중에 계셨던 분들은 몰랐을 겁니다.
사슴 두 마리가 예배에 참석하겠다고 뒤에서 아장아장 이렇게 걸어가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아, 참 하나님께서 공중에 나는 새들도 먹이시고, 저렇게 들에 있는 사슴들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우리가 뭐 때문에 그렇게 아등바등하면서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죠?
아,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랑하라 얘기를 하셨는데, 사랑해도 부족한 이 세상을 우리가 사는데 뭐 때문에 그렇게 아등바등하면서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18장의 말씀을 보면 무섭죠. “막 찍어 버리라, 빼어 버리라, 잘라 버리라” 막 이러니까 아마 다음 주쯤에 여러분들이 절뚝이로, 막 이렇게 한 눈이 안 보이는 상태로 오지 않을까? 멀쩡하게 오시면 반칙이죠. 오히려 이 말씀에 비춰 보면.
굉장히 당황스러운 그런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사람들, 가르치는 그 직분을 받은 분들에게 있어서 이 말씀은 굉장히 힘든 그런 말씀입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교회에서 졸업하자마자 이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목사님께서 저에게 일부 예배를 맡기셨어요.
일부 예배를 맡긴, 뭘 알아야지 뭐를 하죠.
그래서 뭐 신학도 안 하고 전도사도 아닌데, 제가 그만 마지막 예배를 어떻게 끝내야 될지 몰라 가지고 가만히 보니까 목사님이 축도하면서 끝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때 축도를 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신학도 하지 아니하고 안수도 받지 아니하고 축도한 아마 최초의 사람이지 않았나? 당연히 교회에서 발칵 뒤집혔죠. “어, 사람이 축도한다고? 권한도 없는 사람이?”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오용될 때, 이 사람에게 힘을 주는 그런 것도 있지만, 그 말씀으로 인하여서 똑같은 말씀임에도 상처가 되고, 그 말씀으로 인해서 찔림을 받는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늘 조심스럽게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때로는 듣는 사람이 불편해도 전해야 될 그런 의미가 있고, 또 들으시는 분들의 입장에서도 “아, 이 말씀은 누가 들었으면 좋을 텐데,” 아니면 “아, 이 말씀은 누구를 향한 말씀이다” 이렇게 넘겨짚지 마시고, 이 말씀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늘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도 잘 알다시피 우리는 성경에 있는 본문을, 정해진 본문을 계속 이렇게 살펴보는 중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누구를 타깃해서 말씀을 전할 의도는 추호도 없지만, 이것이 누구를 향한 말이다라고 생각지 마시고, “나를 향한 말씀이구나”라고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면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우리들이 잘 알다시피 마태복음 18장에 있는 내용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천국의 가치가 뭡니까? 또 천국은 어떤 질서가 있는 곳입니까?” 천국의 가치와 천국의 질서에 관해서 이렇게 묻는 그런 장면입니다. 여기가 이제 본질적인 내용이죠. 여기서부터 이제 출발을 합니다.
그때 이제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다라고 이렇게 답변을 하시죠. 우리들도 알다시피 지난 말씀이지만,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있었지 않습니까?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있은 이후로 주님께서는 고난과 또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설명을 하시는 그러한 부분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이 고백은, 주님만이 그리스도다. 구약에서 그렇게 예언했던 그 하나님이시다라는 그런 고백이죠. 그러니까 이 고백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민족들이 지금까지 소망하고 꿈꾸어 왔던 그 메시아, 그 메시아가 오셨다. 그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다라는 이 고백이고, 구약에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성취로 우리들이 이렇게 보면 됩니다.
그래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모든 구약에서 지금까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그런 말씀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시각을 달리했죠.
베드로는 메시아가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관은 고난 중에 우리의 고난을 해방시켜 줄 해방자로서의 메시아, 정복자로서의 메시아, 우리의 삶을 편하게 해 줄 그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다라는 이 말에 베드로가 “절대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을 겁니다”라고 예수님의 그 사역을 막자, 예수님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그런 책망도 베드로가 이렇게 듣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고난의 길과 십자가의 길, 이 길과 베드로가 생각하고 있었던 메시아관이 굉장히 충돌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그런 문제들인 거죠.
그리고 나서 17장에서 변화산 사건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신성으로서의 그 영광된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는 그런 장면을 볼 수 있겠고, 그리고 17장에서도 변화산에서 내려와서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짐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죽을 것이다라는 그 말씀을 하는 것을 우리들이 보게 됩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듣고 두려워했다라고 성경은 이야기를 하고 있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 또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그 나라의 영광도 함께 이렇게 말씀했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 수 있죠.
그리고 나서 지난번에 우리들이 살펴보았던 성전세를 내는, 다시 말씀드리면 속전을 내는 문제에 있어서, 내가 바로 생명의 주인이요, 내가 바로 성전의 주인인데 누구에게 이것을 내겠느냐? 아, 그러나 사람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그러면 갖다 내자. 이렇게 됐다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모든 것들을 배경으로 해서 이제 제자들이 하는 질문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라는 이 질문이 여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이 질문을 하게 됐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사건들을 진행을 하시고, 그리고 설명을 하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는 이 죽음까지 쭉 얘기를 하시면서, 도대체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시냐?
그리고 도대체 그러면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이냐?라고 묻는 이 질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 가운데 이게 다 이런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어떤 장소나 환경적인 그런 질문을 지금 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질문을 제자들은 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질문이냐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라는 그런 본질적인 질문이죠.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통치 방법, 하나님은 어떻게 통치를 해 나가십니까?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왜 이런 방법으로 일을 하십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낮아지심,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일을 하시나라는 이러한 질문을 여기서 하는 거죠.
이게 이제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나?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 방법, 다스리는 방법은 어떠한 방법이냐? 그리고 하나님은 왜 메시아를,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으며, 또 어린아이의 모습, 다른 사람들이 존경치 않는 그런 연약한 모습으로, 낮아진 모습으로, 겸손한 모습으로, 고난을 당하는 모습으로, 죽는 모습으로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셔야 됩니까?라는 이 질문이 지금 이 안에 담겨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18장을 읽어 보실 때는 항상 이것을 염두에 놓으시고 여러분들이 살펴보시고, 사실 이 질문은 우리가 예수 믿을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항상 손해를 봐야 됩니까?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항상 양보를 해야 됩니까?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원수조차도 왜 사랑해야 됩니까? 이런 질문이 지금 이 제자들의 질문과 닿아 있는 질문이라고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갑자기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
여기서 돌이켜라라는 말씀은 회개하라라는 말씀과 똑같은 그러한 말씀인데,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라는 이 말씀을 지금 예수님께서 하셨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너희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 메시아에 대한 생각,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 방법, 너희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통치 방법, 그리고 메시아가 오시면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너희들의 생각을 돌이켜라.
그러니까 뒤집어라라는 그런 얘기죠. 몇 번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린 것처럼, 기독교는 참,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되나요? 이 단어가 갑자기 기억이 안 나는데, 기독교는 어떤 종교냐? 죽으면 사는 그런 종교라는 겁니다. 섬기면 섬김을 받는 그런 종교라는 겁니다. 낮아지면 높이는 그러한 것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생각을 못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고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누구나 다 높아지려고 하고, 누구나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데, 물론 뭐 섬김을 받으려는 게 목적이 아니지만, 우리가 낮아지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다는 것이죠. 아멘.
우리가 섬기면 하나님께서 섬김을 받게 하겠다는 겁니다. 우리가 죽으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생명이 태어나게끔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겁니다. 이게 굉장히 기독교가 이런 역설적인 종교이죠.
그래서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 메시아관을 바꿀 것을 지금 주님께서 요구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제 어린아이가 등장을 하게 되는데,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순전함, 순진함, 또 때가 묻지 않는 모습, 이런 것들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지위를 지금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들은 20살 밑으로는 인간 취급을 안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여자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20살 이상, 쓸모 있는 사람들만 인간 취급을 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어린아이 같이 되라라는 그런 말씀은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순전함이나 뭐 착함이나, 또 세상에 때 묻지 않음이나 이런 것을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어떤 위치, 그러니까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것을 의지해야 되는 그 마음으로 바뀔 것을 지금 요구를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돼야 된다라고 이야기를 하셨는데, 제자들이 지금까지 예수님께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 같이 돼야 된다”라는 이 대답으로 다 포함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1절 말씀 한번 보세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묻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라는 이 질문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에”라는 이 얘기가 여러 가지 배경이 있는데, 이 “그때”라는 얘기는 뭐냐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을 그때, 그러니까 선생님은 “야, 내가 고난당하고 죽어야 된다”라고 얘기를 하실 바로 그때, 제자들은 지금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이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 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마가복음에도 동일하게 이 말씀을 하시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굉장히 두려워했다라는 이러한 표현을 씁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는다는 그 말씀을.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다면, 지금은 이게 비밀이 밝혀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데, 그동안 따랐던 선생님께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다. 그러면 “선생님, 왜 그러셔야 됩니까?”라는 최소한 이런 질문이 필요하죠.
그리고 왜 그런 희생을 치러야 됩니까? 십자가의 의미가 뭡니까?
도대체 왜 메시아로서 이 땅에 오셔서 그렇게 능력을 행하셨던 분이 죽음의 길을 왜 가시려고 합니까? 최소한 이 정도의 질문, 뭐 머릿속에 우리들이 떠오르는 질문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좋은 질문들을 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죽어야 된다라고 하는데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제자들은 지금 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가 그렇게 주님께 칭찬을 받고, “절대 그런 일이 없다”라는 이러한 열심을 내는 것들이 세상에서의 어떤 보상, 이런 것들을 요구하고 원했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 길을 막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때에”라는 이 표현이 등장을 하고, 마가복음에 보면 이때가 어느 때인지 또 이야기를 하는데, 마가복음은 좀 더 디테일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9장을 보시면,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라고 쟁론을 하였음이라.”
길에서 지금 막 다투는 겁니다. 쟁론을 하고 있는 겁니다.
“야, 변화산에 예수님께서 세 명을 데리고 올라갔는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올라갔는데, 그러면 1, 2, 3등은 뭐 그 세 사람한테 내주고 우리는 뭐 누가 4등이냐, 누가 5등이냐” 막 이런 토론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토론하는 거 아시죠? 한 사람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막 주고받는, 의견을 주고받는 것, 이걸 토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제자들이 길에서 서로 그렇게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가버나움에 이르러서 예수님이 한 집에 들어가서 묻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제자들로서는 민망했겠습니까?
그런데 마가복음 10장에 여러분들 아세요? 세베대의 아들 두 아들 아시죠?
마가복음에는 그렇게 이제 표현을 합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면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은 왼쪽에, 또 둘 중에 한 사람은 오른쪽에 이렇게 두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이 이야기를 하죠.
뭐 다른 쪽에 보면 또 그 어머니가 와서 예수님께 청탁을 놓는 이런 장면도 우리들이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일반적으로 정리를 해 보면,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관은 예수님이 실제적으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사역과는 전혀 반대의 생각과 반대의 길을 걸어갔다라는 것을 우리들이 알 수가 있겠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이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해가 제자들에게는 전혀 없었다는 겁니다.
오직 1절을 다시 보시면 제자들의 관심은 “누가 큽니까?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누가 서열 1위입니까?” 이 얘기만 지금 하고 있더라는 것이죠.
천국에도 서열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 안에 서열이 있어요?
목사가 1등입니까?
아멘.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여러분들이 뭐 “우리 교회 서열은 목사님이야. 뭐 두 번째 서열은 권사님이야” 여러분들이 스스로 서열을 정해 놓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는 교회에서 제일 힘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실은.
여러분들이 뭐 저를 때린다고 해서 맞아줘야지, 같이 싸우겠습니까? 저를 뭐 욕한다고 해서 같이 욕을 하겠습니까? 저를 비방한다고 해서 제가 같이 비방하겠습니까?
뭐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없는 일을 만들어서 비방을 해도 어떻게 가서 뭐라고 얘기를 하겠습니까? 오해가 생겨도.
아무튼 천국은 서열이 없는 곳이다라고 주님께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 예가 요한복음에 보면 그런 얘기가 있죠. 세례 요한을 가리켜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다라는 이 말씀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다음 말씀에는 천국에서는 어린아이가 요한보다 더 크다라고 얘기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국에서는 서열이 없다는 것이죠.
죄송합니다. 장로교를 다니신 분들한테는 굉장히 잘못된 말씀, 오해가 되는, 그런 상처가 되는 말씀일 수가 있겠는데, 장로교는 장로 제도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교회를 다스리는 분들이지 않습니까?
장로교는 세상의 질서처럼 서열을 정해 놓습니다. 장로석도 따로 있습니다.
장로님들이 입는 가운도 따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장로로서 대접을 받는 거죠.
모르겠습니다. 천국에 오면 어떤 대접을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천국은 서열이 없음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말씀을 하고 계시고요.
제자들이 무엇인가 오해해도 많이 오해했다는 것이죠.
이러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2절부터 4절까지 이렇게 나오는데,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이게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특별히 4절 말씀을 보시면,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큰 자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낮추는 어떤 겸손한 마음, 이런 것들을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여러분들 어린아이가 자기를 낮출 줄 알면 그게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죠. 애늙은이죠, 애늙은이.
어린아이는 자기를 낮출 줄 모릅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 자체적인 어린아이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를 여기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의지하는 사람,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사람, 이런 것을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다. 내 힘으로서는 만들어 갈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라고 얘기를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다라고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뭐 철야에도 열심히 나오고 수요 예배 열심히 나오고 새벽도 열심히 나오고, 참 믿음이 순수하고 순진한 사람을 어린아이라고 얘기를 안 하죠.
그러니까 우리의 노력, 우리의 의지, 이런 것들을 다 내려놓고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는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그러한 믿음, 이런 것들을 이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다.
자기를 낮추는 믿음이다라고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이제 요한계시록에 보면 초대교회의 모습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 우리들이 하나 눈여겨봐야 될 교회가 뭐냐면 라오디게아 교회였었죠.
예수님이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유명한 말씀 있죠. 계시록 3장 20절 말씀인데,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마시리라”라고 얘기를 하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문 밖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안에서는 예수님이 없어도 잘 굴러가는 겁니다.
교회가 잘되고, 뭐 부흥이 되고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밖에서 문만 두드리는 겁니다.
이게 우리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당연히 그리스도 예수께서 좌정하시고 계셔야 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밖에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 없이도 너무나도 잘되는 겁니다. 사업도 잘되죠. 자식도 뭐 하버드도 가죠.
참 부러운 게, “우리 애가 육사도 됐고 스탠퍼드도 됐습니다.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고요? 자기들이 알아서 결정할 문제인데.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돈 안 드는 데로 보내요.
그랬는데 결국은 “아, 스탠퍼드를 못 보내겠습니다. 그래서 육사를 보내야 되겠습니다” 해서 육사를 갔습니다.
저 알래스카 쪽에 있는 목사님인데 거기까지만 얘기하겠고, 아무튼 뭐든지 잘되는 겁니다. 예수님한테 의지하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따라 행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사업장도 잘되고, 건강하고, 자녀들도 잘되고, 하는 일마다 잘되는 겁니다.
그럴 때 이제 예수님이 문에서 두드리는 것이죠.
“야, 내가 좀 들어가고 싶다. 내가 문 밖에서 좀 두드린다. 문을 좀 열어 줘라”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지금 제자들의 상태가 이런 상태라는 것이죠. 그게 낮추는 상태, 겸손한 상태.
내가 아무리 잘돼도 예수님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리 크리스천에게 있어서는. 뭐 세상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있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이 우리가 전부다라고 고백을 한다면, 예수님을 모신 것이 우리들에게는 중요한 거죠.
사업이 잘돼도, 자녀가 잘돼도, 그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것이죠. 이런 고백을 우리들은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고백이 없는 사람들을 겸손하지 못하다라는 이런 표현을 쓰는 거죠.
그래서 5절 말씀을 여러분들이 한번 보시면, 5절에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
지금 제자들이 막 다투는 겁니다.
누가 크냐고 이렇게 다툴 때,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함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제 어린아이를 영접한다라는 이 시각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어떤 표현이냐면, 가난한 자를 영접하는 것, 병든 자를 돌보는 것, 연약한 자를 돌보는 것,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 이 사람들은 다 어떤 사람들이냐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가난한 자, 병든 자, 연약한 자, 고아, 과부, 이 사람들은 다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을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이다라고 지금 주님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섬김이 어디까지 섬겨야 되느냐? 섬김의 어떤 범위도 주님께서 말씀을 하시는데, 가장 약한 자를 섬기는 것, 그것이 나를 섬기는 것이다라고 주께서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십자가의 어떤 열매를 생각을 많이 하는데, 십자가의 열매가 어디서 이렇게 나타나냐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대로 보상할 것 없는 사람들에게 그 은혜를 베푸는 것, 이럴 때 우리들은 십자가의 열매가 그렇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5절에 하시는 말씀이,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라는 이 말씀이시죠.
그리고 나서 이제 6절 말씀을 보시면, 6절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라.”
자, 지금부터 이제 빠지고 자르고 뭐 째고 하는 이 장면들이 막 등장합니다. 여기서 연자 맷돌 하면 이제 우리 어머니들이 부엌에서 돌리는 이런 맷돌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죠.
연자 맷돌은 어떤 맷돌이냐면, 커다랗게 이제 당나귀나 어떤 말, 짐승의 힘을 빌려서 이렇게 굴리는 것, 그러니까 이 돌은 거의 한 20명 정도가 들어야지 들리는 그런 돌이라고 그래요.
이 돌을 어떻게 끌고 가서 자기 목에 매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게 걱정이 있는데, 아무튼 20명이나 드는 그런 돌이라면 죽는 것도 20명의 도움이 필요한가, 뭐 이렇게도 생각을 해 보는데, 아무튼 그렇게 무거운, 도대체 물에 한번 빠지면 다시 올라오지 못할 정도로 무거운 것, 그런 죄를 지금 이야기를 하죠.
그러니까 실족하게 한다. 이 어린아이를 실족하게 하는 그러한 사람들은 그렇게 엄중한 형벌을 지금 주님께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여기서 이제 실족하게 한다라는 의미는 버린다라는 이런 의미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를 못 믿게 막는 사람들, 또 그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것을 못하게 막는 사람들이 사람들을 이제 실족하게 하는 사람들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죠.
그런데 이제 제자들이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의 이 얘기를 들으면서, 제자들은 어디에 지금 도취되어 있냐면 고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안 하는 겁니다. 그냥 자신들이 누릴 영광만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다라고 얘기를 할 때는 십자가의 어떤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도 있지 않습니까? 그 고난의 길을 통과해야만 우리가 십자가의 부활의 영광을 누리는 것인데, 제자들처럼 그냥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 하늘나라에서 쓰는 감투, 이런 것들만 생각을 하고 있더라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낮아지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원하고, 또 누구든지 조그마한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을 대접하기를 원하고 하는 그 말씀을 여기에서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희생을 당하셨다라고 얘기를 하실 때, 희생을 당한다라는 것은 희생을 통해서 누군가는 이제 이득을 보지 않습니까? 주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득을 받지 않습니까? 주님이 희생하심으로 우리가 살아나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선생님께서 희생당한다라고 얘기를 할 때 거기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한 겁니다. 제자들이.
그래서 받을 영광만 생각을 하다 보니까, 이 제자들이 너무나도 자신들의 세상에서의 누릴 영광에 치중을 하다 보니까 선생님의 의도를 잊어버렸다는 것이죠.
제자들뿐만이 아닙니다. 사실은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성도들도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 정말 하나님 주시는 은혜에 감사해서 하면 본인도 마음이 뿌듯하고, 보는 사람들도 즐겁고, 보는 사람들도 덕이 되고 은혜가 되죠. 우리가 그렇게 못 한다는 겁니다. 제자들처럼.
그래서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꾸짖은 가장 큰 이유가 뭐냐면, 자기 자신을 나타내려고 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뜻은 생각지 않았고, 지금 제자들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들만 나타나려고 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지금 이야기를 하신 거죠.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라고 얘기를 하시고, 8절로부터 10절에 있는 말씀에는 실족하게 하는 그런 문제가 여기에 등장합니다. 8절을 보시면,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어 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자, 여기에서 보시면 소자를 실족하게 하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십니다.
손과 발을 찍어 버리고, 눈을 빼어 버리라라는 이러한 표현하는 말들은 어떠한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지적이라기보다도 본질적인 그 속에 있는 질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우리들이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윤리적인 범죄나 어떤 도덕적인 범죄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근본적으로 그러한 마음이 나왔는지를 지금 주님께서 묻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들 감기약이 없다는 거 아십니까? 감기에는 약이 없죠. 증상에 대한 치료제만 있을 뿐이죠. 콧물이 오르면 콧물을 멈추는 것. 재채기를 하면 재채기를 멈추게 하는 것. 열이 나면 열을 낮추는 것.
우리 인류가 그렇습니다.
화성을 간다고, 달을 간다고 그래도 조그마한 감기 근본적으로 없애지는 못하죠. 이런 증상만 나타날 뿐입니다. 그래서 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감기가 나았다. 증상이 없어짐으로 감기가 나았다라는 이런 표현을 쓰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지금 주께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되는가? 우리의 속에 도대체 뭐가 자리 잡고 있길래, 무엇이 다스리길래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그 얘기를 지금 주님께서 하고 계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근본적인 문제를 주님께서 이야기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것과 비슷한 성경 말씀이 있어요. 우리가 이미 지나갔는데, 5장을 보시면 이 문제가 어떤 문제인지 5장에서 자세하게 설명을 하는데, 5장 27절을 보시면,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라고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 문제는 사람 속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속에서부터 나오는 마음의 문제다라는 것을 지금 지적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아까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것처럼, “천국의 가치는 어떤 가치가 있습니까?”라고 묻는 그 물음 앞에 지금 주님께서 대답을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가장 아끼는 부분, 이것을 잘라내고도 들어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아끼는, 뭐 그렇다고 해서 다음 주에 여러분들 안대를 하고 오시는 분이 없을 줄 생각합니다.
눈을 빼었다고 안대를 하지 마시고, 그렇게 우리들은 눈을 아끼지 않습니까? 조금만 뭐 자그마한 것 하나가 들어가도 얼마나 우리들이 보호합니까? 저희 집도 뭐 눈에 대한 영양제가 몇 개나 있는지 모릅니다.
그걸 먹고 있는데, 그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 곳이 천국이다라는 것을 지금 가르쳐 주는 거죠.
혹시라도 우리의 손이, 우리의 발이, 우리의 눈이, 우리의 입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걸림돌이 되거든, 아예 그것을 잘라 버리고도 갈 수 있는, 가야 되는 그런 가치 있는 곳이다. 충분한 가치가 있다라는 그 말씀을 지금 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치료할 것을 먼저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죠.
우리들이 지나갔지만 마태복음 7장에서 그런 말씀을 들었지 않습니까? 하나님, 우리가 그날에 주님 앞에 나가서 “주님,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또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습니다”라고 얘기를 했을 때, 그때에 내가 저들에게 말하노니 “내가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이렇게 주님이 이야기를 합니다.
선지자 노릇하고,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이런 일들을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아니라는 겁니다.
왜 아니냐?
왜 그러냐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 사랑의 마음,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이런 마음이 기본이 돼서, 베이직이 돼서, 그것이 너로 말미암아 이런 일들이 나타나게끔 유도를 했어야 되는데 너는 그렇지 않다.
지금 바리새인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닙니까?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다.
너희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이런 일들을 행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선지자 노릇하고, 병자를 고치고, 그리고 나서 귀신 들린 자를 쫓아내고, 권능을 행했다는 겁니다.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종교의 명분으로 자기를 치장하는 것을 가리켜서 주님은 불법을 행한다라는 이러한 표현을 쓴 겁니다.
자, 그렇다면 결론으로 여러분들, 우리 마음의 문제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면 마음의 문제를 어떻게 우리들은 치료를 해야 되나?라고 질문을 가질 것 아닙니까?
성경에는 그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라고 우리들에게 답변을 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의 문제를 다스리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마음에 모셨을 때, 그리스도 예수가 지배하는 그러한 상태가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손을 자를 일이 없고, 눈을 뺄 일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온전한 그 정신과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마음에 모시지 않고 행하는 모든 일들, 이런 것들을 가리켜서 불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잘라 버리라는 겁니다.
이것을 끊어 버리라는 것이죠. 이것을 빼라는 것이죠.
여러분들,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마음에 모시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처럼 우리는 낮아질 수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자르지 마세요. 그 얘기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희생이고, 특히 그 희생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겁니다.
여러분들이 한 주 동안 살아가시면서, “나로 인해서 누가 기뻐할까?”
우리 어머니들을 통해서 가정이 기뻐하잖아요. 가정이 즐거움을 누리잖아요. 그 가정뿐만이 아니라 이것을 조금만 확대해서 여러분들이 다니는 직장에서나 사업장에서, 나로 인해서 누가 득을 보나를 한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몇 분의 권사님들은 그렇게 행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나로 인해서 누가 즐겁지? 나로 인해서 누가 평안하지? 나로 인해서 누가 득을 보지?”
물론 여러분들의 자녀도 다 포함되고, 남편과 아내도 다 포함되리라고 이렇게 생각이 되고, 주변에 있는 분들도 다 포함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지만 한번 웃어 주면, 옆에 있는 힘든 동료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그게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는 일입니다.
먼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직장에 다니시는 분들 그렇게 한번 해 보시고, 가정 천국 이런 얘기 많이 쓰잖아요.
가정에서도 가급적이면 좀 칭찬들 하시고, 저도 지금까지 안 했습니다.
오늘부터 해 보려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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