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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8:12~20 따에서 매고 풀면 하늘에서도 매고 풀리리라!


엊그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서 인사를 드린 것 같은데, 벌써 달력 한 장을 찢었습니다.

2월 달, 새로운 달이 또 시작됐고, 2월 달은 특이하게 꽉 찼어요. 28일까지 주일로 시작해서 토요일로 이렇게 끝나는 달입니다.

여러분들 연초에 세웠던 어떤 목표들이 있을 거고, 신앙의 어떤 계획들이 있을 텐데, 안 되죠. 잘 안 되죠. 뭐 그런 것들이 내가 올해는 성경을 몇 번을 읽겠다.

올해는 내가 성경을 몇 번을 쓰겠다.

내가 올해는 성경을 몇 번 암송하겠다.

이런 거룩한 계획을 세운 그러한 성도들도 있는가 하면, 또 이 땅에서 내가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겠다라는 세상적인 어떤 소망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관심을 아마 쏟지 않나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특히 이 성경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한 가지 주의할 것이 뭐냐면, 성경에서 인간, 또 종교, 도덕, 윤리 이런 가르침을 찾으려고 하면 대부분이 실패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 속에서 우리의 인간적인 어떠한 교훈, 아니면 종교적인 행위, 도덕과 윤리, 이런 교훈을 얻으려면 우리는 성경을 엉터리로 읽게 됩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이야기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어떻게 사랑하셨고 어떻게 은혜를 베푸셨는가에 대한 이야기지, 우리가 이 속에서 지혜를 얻고, 이 속에서 무슨 방법을 찾고, 이 속에서 윤리적인 교훈을 얻고, 내가 도덕적으로 살아가고, 그런 얘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을 때 항상 무엇을 생각을 해야 되냐면, 구약을 읽으시든지 신약을 읽으시든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찾으셔야 되고,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셔야 됩니다.

나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랑하셨나? 얼마만큼 사랑하시나? 그리고 나를 어떻게 그 하나님의 은혜로 붙잡으사 이 길을 걸어가게 하시나? 이런 것들을 성경 속에서 우리들이 찾아내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면, 사실 이 모든 내용들이 지금 각각의 주제로 돼 있는 것 같죠? 각각의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 같죠?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다 사실 하나로 연결이 돼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들이 묵상했던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라고 얘기를 했을 때, 예수님께서 소자 하나를 내세우면서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말씀을 하시는데, 그 내용에 있는 말씀이 지금 계속 연결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길 잃은 어린 양이 나오고, 범죄한 형제가 나오게 되는데, 이 얘기는 뭐냐면 메시아의 사역의 본질이 무엇인가?

다시 말씀드리면 십자가의 정신이 어떤 것인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지금 이런 양에 대한 비유가 나오고, 그리고 범죄한 형제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서 등장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무엇을 우리들이 생각을 해야 되냐면, 이 각각의 스토리를 떼어 놓고 보면 이 말씀들이 굉장히 엇갈릴 수가 있는데, 주님께서 소자 하나를 세웠을 때에, 잃은 양 자체가 곧 소자라는 겁니다.

작은 자라는 것이죠.

그리고 범죄한 형제가 그 소자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어떤 긍휼함이 필요한 그러한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을 따로 떼어 놓고서 우리들이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로 묶어서 묵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주된 내용으로서는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릴 텐데, 사실 이 소자에게 필요한 것, 잃은 양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엄격한 율법, 이런 것들이 아닐 겁니다.

아마 이 잃은 양에게 꼭 필요한 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가 필요할 테고, 또 아팠을 때 아픔을 치료해 줄 수 있는 의원이 필요할 테고, 우리가 영적으로 가난하고 영적으로 고갈되어 있을 때는 그 은혜를 채워 줄 수 있는, 그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우리 주님이 필요하고, 이런 것들이 아마 필요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소자, 작은 자다라고 이렇게 표현하는 주된 이유는 무엇이냐면, 소자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 소자가 가지고 있는 어떤 질서, 세상 이런 것들과 세상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 질서 이런 것들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라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이 소자가 등장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어른들의 생각과 어린아이의 생각이 다르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어렸을 때 딱지치기 해 보셨죠?

구슬치기 해 보셨죠?

그거 잘 보관하고 있습니까?

그 딱지치기 해 가지고 딱지 따먹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애썼습니까?

구슬치기 하려고 여러분들이 얼마나 애쓰고 그 구슬을 모았습니다. 지금 보관하고 계세요? 굉장히 소중했던 것들인데.

어린아이의 가치에서는, 어린아이의 입장에서는 그게 굉장히 귀한 것들이죠

그게 모든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보니까, 어른의 가치에서 생각할 때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지금 이 얘기를 성경이 하고 있는 겁니다.

천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린아이의 가치에서 생각을 하라는 겁니다. 어른의 가치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어린아이의 입장에서, 어린아이의 가치에서 천국을 바라봐라라는 것을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어른의 가치, 세상이 추구하는 것, 결국은 이게 무엇일까요? 이것을 얘기를 할 때는 다른 사람들을 경쟁에서 이겨야 되고, 어떠한 권세로 그 사람들보다 앞서야 되고, 또 물질로도 그 사람들보다 앞서야 되고, 아무튼 세상에서의 가치는 내가 저 사람보다 나아져야 된다. 저 사람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 된다. 내가 이런 가치를 가지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 사람을 부릴 줄 알아야 된다.

그게 세상의 가치, 어른들의 가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십자가의 정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그런 것이라는 겁니다. 십자가는 섬김을 받으려거든 섬겨라. 높아지려거든 낮아지라라고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십자가가 있는 어떤 가치와 세상이 가지고 있는 어른들의 생각, 어른들의 가치가 너무나도 다르다라는 것을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셨다.

십자가가 꼭 필요하다라고 얘기를 할 때, 그 필요한 사람들이 누구냐? 소자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잃은 양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고, 범죄한 사람들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다 십자가가 꼭 필요한 그러한 사람들이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모든 것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고,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셨다. 길을 잃은 어린 양을 찾는 목자의 심령처럼 목자가 꼭 필요한 그런 사람들을 찾으러 오셨고, 그리고 범죄한 인간으로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런 사람들을 부르러 오셨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정신이 여기에서 지금 등장을 하고 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어서 복되다. 예수를 믿어서 복받았다라고 얘기를 할 때에, 그 복은 어떤 복을 이야기를 합니까?

세상의 가치 속에서 내가 예수를 믿고 우리의 사업이 잘되고, 경제적으로 부유함을 누리고, 우리의 자녀가 잘되고라는 이런 복을 누리는 것을 복받았다라고 이야기를 하지 않죠.

우리가 예수를 믿고 복받았다라고 이야기를 할 때에, 그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라는 그 복을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라보실 때 귀한 한 생명을 가진 그런 존재로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겁니다. 그게 복이라는 얘기죠.

그리고 우리가 복받았다라고 이야기를 할 때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났고, 하나님의 그 거룩한 영광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고, 그리고 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언제든지 아버지 앞에 아뢸 수 있는 그 영생의 복을 누리는 것을 예수를 믿고 복받았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시대나 우리들이 이런 것들이 나타나듯이, 우리 신앙인들이 어떠한 신앙의 그 내면에 있는 삶, 신앙의 어떤 덕목, 이런 것들이 나타나지를 않는다는 것이죠.

어느 시대나 이런 것들은 있어 왔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우리가 그냥 건강하고, 어떤 세상의 가치로서의 복을 추구하는 그러한 것들이 어느 때나 어느 시대에나 다 있어 왔다는 것이죠.

그래서 지난 주간에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것처럼, 제자들의 관심이 “누가 더 큽니까? 천국에서는 누가 으뜸입니까?” 하는 이러한 얘기로 이제 흘러갔다는 얘기죠.

이게 예수님의 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부터 지금까지, 아니면 영원히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이어지는 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누가 더 큽니까?” 여기에 대한 관심이 우리들에게는 더 많다는 겁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하나님의 그 거룩한 영광을 가지고 있는, 그것이 회복되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이 놀라운 축복은 잊어버리면서 살아가는 때가 참 많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제자들이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더 큽니까?”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보면 이 말을 좀 다른 말로 이렇게 바꿔 보면 누가 더 훌륭합니까라는 말이 될 수 있겠고, 누가 더 열심히 주님을 섬겼습니까라는 이런 말이 될 수 있고, 누가 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전한, 완벽한 그러한 사람입니까라는 이런 얘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오늘날 우리 성도들로 비교를 해 보면, 누가 더 기도를 많이 합니까? 누가 더 전도를 많이 합니까? 누가 더 헌금을 많이 합니까? 누가 더 봉사를 많이 합니까?라는 걸로 다투는 우리의 모습처럼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주님이 누구를 등장시키게 되냐면, 어린아이를 등장시키게 되지 않습니까? 이 어린아이를 등장시킴으로 말미암아 지금 천국의 어떤 존재 가치, 천국의 모습, 천국의 질서, 이런 것들이 지금 어린아이를 세우면서 이야기를 하는 그 부분이지 않습니까?

지난번에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어린아이의 어떤 겸손, 어린아이의 연약함, 어린아이의 낮아짐, 이런 것들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등장시킨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냐면, 천국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천국은 어떤 존재의 양식을 가지고 있는가?

그 얘기를 지금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영특합니까? 사악합니까?

영어로 어린아이를 보는 사람을 뭐라 그래요?

어린아이를 돌보는 사람 뭐라 그래요?

영어로.

베이비시터라고 얘기를 하잖아요. 왜 거기 시터가 있는 줄 아세요?

잘 모르겠죠? 음.

이거를, 얘를 그냥 깔고 앉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지만 그것을 못하고 절제하면서 옆에 있는 거, 이게 베이비시터라는 얘기입니다.

이게 그만큼 어린아이들이 엉뚱하다 그래요. 여러분들 어린아이들 보면 얼마나 마음이 막 상합니까? 그냥 한 대 쥐어박고 싶고, 엄마가 안 보는데 살짝 꼬집고, 여러분들 그런 경험 없어요? 엄마가 안 보는데 살짝 꼬집은 경험 없어요?

뭐 없는 것 같이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게 이제 베이비시터인 겁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악당들입니까? 그런데 그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국의 질서, 천국의 개념, 이런 것들은 누가 크고 누가 낮고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죠. 천국의 개념은 한 생명의 귀함, 한 생명의 존귀함, 이런 것들을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 어른들의 세상으로 이 모든 것들이 넘어오게 되면, 우리는 어떤 종교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자랑이 앞서고, 종교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어떤 상급을 기대하는 그런 신앙적인 행위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린아이 입장에서는 이런 것들이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지금 앞세운 것을 여기서 이야기를 하고 있죠.

여러분들 꼭 하나 알아야 될 것은 무엇이냐면, 천국에서는 상급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목사님, 그래도 뭐 어떤 사도 바울도 일천을 얘기했고 이천, 삼천까지 얘기했는데, 그래도 깃털 모자 쓰는 사람과 뭐 다른 모자 쓰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없습니다.

천국에는 상급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져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다스리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통치되는 곳이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상급이라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잖아요.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 얘기는 우리들의 어떤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지금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다시 말씀드리면 이 상급이라는 얘기는 뭐냐면, 내가 이런 행위를 했으니까 이런 행위에 대한 보상, 이것이 상급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없다는 겁니다.

천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져 있기 때문에.

그러면 내가 봉사하는 거 억울하지 않습니까? 억울하죠. 내가 열심히 하는 거, 이거 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억울합니다. 그렇다고 안 할 겁니까?

그러면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은혜를 알게 되면 내가 하는 것보다도 더 크게, 더 많이 우리는 한다는 것이죠. 그게 이제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라는 거죠.

우리가 뭐 천국에 좀 더 좋은 상급을 받고자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이런 것들이 아니라는 거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행위로 이런 모든 것들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어른들의 세상적인 사람들의 기준에서 바라볼 때는 내가 분명히 어떤 행위를 했다라면 이 행위에 대한 결과로 상급이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없다라는 것을 지금 주님께서는 어린아이를 내세워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죠.

그리고 나서 이제 주님께서는 무엇을 하시냐면, 동일시합니다. 예수님과 어린아이를 하나로 생각하십니다.

지난 주간에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는데, 이 어린아이는 어린 생명체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라는 이 부류에 속한 모든 사람들, 다시 말씀드리면 어떤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고아나 과부가 될 수 있고, 낮은 사람들이 될 수 있고, 소외된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고, 이런 모든 부류를 우리는 어린아이, 소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소자와 예수님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게 어디에서 등장하냐면, 여러분들 마태복음 25장 가면 그런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이 다음에 우리가 천국에 가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텐데, 그때 이제 오른편에 있는 어린 양들을 분류하고, 왼편에 있는 염소들을 이렇게 분류하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꼭 이렇게 양은 사랑스러운 존재고, 아름다운 존재고, 돌봐줘야 하는 존재고 이렇게 되는데, 염소는 꼭 왼편에 악한 악당 역할만 합니다.

그런데 어디서 잘못됐는지는 모르겠어요.

염소도 똑같이 하나님께 제사하고 예배하면서도 염소를 이제 그렇게 분류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왼편에 있는 염소 같은 사람들이 주님께 나와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주님,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우리가 먹을 것 많이 갖다 드렸습니다. 주님 세상에 계실 때 감옥 속에 있을 때 우리가 찾아갔습니다. 입을 것도 많이 드렸습니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야, 나는 너희들이 언제 주었는지 잘 모르겠는데, 나에게 준 게 맞냐?”라고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 그 사람들이, “아이고 주님, 왜 그러십니까? 그때 받으셨지 않습니까?”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뭐냐면, “야, 너희들이 바로 옆에 있는 소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

반대로 이 어린 소자를 대접하는 것, 그것이 곧 나를 대접하는 것이다라고 얘기를 하시면서, 예수님과 소자를 하나로 이렇게 묶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관심이 필요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보호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돌보심이 필요한 그러한 사람들을 돕는 것, 그것은 우리들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주께서 우리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야고보 장로님이 쓰신 성경을 보면, 야고보서를 보면, 그 교회에 아주 나쁜, 좋지 못한 그런 풍습이 있었습니다.

어떤 풍습이 있냐면, 금목걸이, 요즘 금이 굉장히 비싸죠.

금목걸이 번쩍번쩍하고, 금귀걸이 번쩍번쩍하고, 귀부인이 아주 화려한 옷을 입고 다 교회에 이렇게 등장을 하게 되면 안내위원이, “아, 갑부가 왔다” 해서 제일 좋은 자리로, 우리 교회는 제일 좋은 자리가 뒷자리인지 앞자리인지 제가 굉장히 헷갈립니다.

어떤 자리가 좋은지를 잘 모르겠어요. 제일 좋은 자리라고 이렇게 표현할게요.

제일 좋은 자리로 이렇게 모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안내를 보다가 옷도 남루하고 꾀죄죄하고, 누가 봐도 별 볼 일 없는 사람 같기도 하고, 타고 다니는 차를 보아도 뭐 별로 신통치 않는 차를 타고 오면 뭐라고 합니까? 뭐 아무 데나 앉든지 말든지, 아예 쳐다보지도 않지 않습니까? 인사도 안 하고.

그리고 또 그 사람이 아는 체하고 반갑게 인사를 하면 모르는 체하고, 뭐라 그래요? 요즘 현재 말로 생깐다고 그래요.

생깐다고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야고보서에 이 얘기가 실려 있다는 겁니다. 성경에 이 얘기가 나와 있다는 겁니다. 이게 은연중에 우리 안에도 다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언젠가 한번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린 것 같은데, 젊은 닥터, 의사 선생님이 평상시에 입는 것처럼 남루하게 청바지를 입고 티셔츠를 입고 교회를 갔더니 쳐다보지도 않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닥터라고 신분을 밝혔더니, 아이고 이거 웬걸, 대접이 달라지더라는 겁니다. 이 모습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초라한 그러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귀한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그 귀한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린 소자 하나, 이것을 귀하게 대접할 것을 주님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얼마만큼 귀하느냐?

10절 말씀을 한번 보세요. 우리들이 안 읽었는데. 10절 말씀. 제가 읽어 드릴게요.

10절에 보시면, 지난 주간에 읽었던 건데, “삼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 어린아이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얘기를 해요. 그들의 천사들이 이 어린아이를 보호한다는 겁니다. 지금 그렇게 얘기를 해요. 그리고 나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얼굴을 뵈옵는다라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좀 많이 헷갈려 하시는 부분이 이 부분인데, 여러분들 뭐 천사의 존재에 대해서 믿으시는지 안 믿으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천사의 존재에 대해서 잘 얘기를 안 했던 것 같은데, 이 얘기는 지금 어떤 의미에서 주님께서 이야기하시냐면 히브리적인 어떤 개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히브리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천사가 있다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도 지금 성경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말씀은 그 히브리적인 개념을 좀 이해하기 쉽게 천사를 동원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사도행전 12장에 가 보면 베드로가 옥에 갇혀 있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옥에서 탈출을 하게 돼요.

그리고 이제 교회로 갔다는 말입니다. 교회 밖에서 이제 막 문을 두드리는데 어린 소녀 하나가 나와서 보더니, “어, 베드로네?” 하고서 그냥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왔습니다”라고 얘기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뭐라고 그러냐면, “야, 베드로 지금 옥에 갇혀 있는데 무슨 베드로냐? 그의 천사겠지” 이렇게 사도행전 12장에 나오지 않습니까?

저만 아는 내용인가요?

여러분들도 다 아시는 내용인 것 같은데, 이 얘기가 이제 있는데, 히브리적인 어떤 사고, 그 개념 속에서는 이 천사가 모든 사람들을 돌본다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 돌봐요?

천사가 아니라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겁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님이 계세요. 성령 하나님이, 천사보다도 더 뛰어나신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고요. 이것은 이제 예수님께서 이해하기 쉽게 얘기를 하신 것이죠.

천사가 어린아이를 돌본다라는 그 개념은 어떤 개념이냐면, 아무리 소자라도,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보호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돌본다는 겁니다.

그래서 꼼짝 말라는 것이죠. 그래서 아무리 약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강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들도 이제 사도 바울의 예를 많이 들어서, 사도 바울이 “약할 때 내가 그때가 이제 강함 된다”라는 그 표현이 뭐냐면, 아무리 자신이 약하지만 내 속에는 강함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강하다라는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어린 소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돌봄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이 어린 소자가 귀하다라는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여러분들이 예수를 처음 믿을 때 많이 쓰던 그러한 성경 내용이죠. 앞에 스크린에 있는 것처럼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 여러분들이 요한복음 3장 16절은 누구나 다 잘 외우는 그러한 내용이죠.

그런데 그다음 구절은 잘 모른다는 겁니다. 다음 구절이 뭔 줄 아세요?

용기를 내서 한번, 용기를 내서 누가 한번 얘기해 보세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구원하려 그 아들을 보내셨다”라는 말씀이 17절에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심판하시려 보내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겁니다.

이 얘기가 지금 11절에 나오는 얘기인데, 11절에 우리 성경에는 없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본문, 다른 사본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세상을 멸망시키러 오신 것이 아니라,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신 그 주님의 마음이 지금 11절에 나타나 있는 겁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그리고 나서 이제 12절에 길 잃어버린 어린 양의 이야기가 등장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길을 잃어버린 어린 양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라고 이렇게 우리들이 설명을 할 수가 있죠.

12절 말씀 우리들이 한번 보세요.

12절 말씀을 보시면,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지금 어린아이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어린아이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져 있죠. 어린아이의 이야기가 길 잃은 양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거를 여러분들 놓치지 말라는 겁니다. 성경을 읽으실 때, 성경을 보실 때 어린아이로 시작했던 주님의 말씀이 길을 잃어버린 어린 양으로, 그래서 어린아이, 소자와 길을 잃어버린 양은 동일한 내용으로 되어져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길을 잃어버린 양이 목자에 의해서 찾아질 때까지, 이 양은 목자를 사모하고 있고, 그리고 또 이 양은 내가 이 죽음 가운데, 짐승들의 어떤 해침, 죽음의 위험한 가운데 있지만, 목자에 의해서 그 양이 찾아질 때까지 이 양은 두려움과 또 어떤 불안함과 이런 것들로 가득 쌓여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목자의 심정은 어떤 것에 있냐면, 이 어린 양을 지금 찾으러 나섰다는 것을 우리들이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소자가 등장을 하고 있고, 어린 양이 이렇게 등장을 하게 되는데, 소자의 어떤 정의, 어린 양의 정의, 이런 것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소자는 어떤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냐면, 길을 잃어버린 사람, 목자가 필요한 사람, 목자가 없으면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 이 사람을 소자로, 어린 양으로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소자 된 우리들은 누가 지금 필요하냐면, 우리를 좀 제발 찾기 원하는 목자가 필요한 겁니다. 우리를 좀 발견하기 원하는 우리 주님이 필요한 것이죠.

우리가 소자라고요.

우리가 어린 양이라, 길을 잃어버린 그런 어린 양으로 지금 나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잃어버렸다라는 이러한 표현을 썼는데, 잃어버렸다는 것은 원래 내 것이다라는 것, 내가 가지고 있었다라는 이 개념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죠. 원래는 내 것이었는데 내가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잃어버린 것들이 찾음을 당했지 않습니까? 목자에 의해서 찾음을 당했지 않습니까?

이게 지금 하나님과 우리와의 그 떨어져 있던 관계. 원래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었는데,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잃어버림을 받은 그런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누구에 의해서?

목자에 의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우리는 잃어버렸지만 이것이 다시 찾음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하나님의 소유로 회복되어져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 믿은 그 복이 무엇이냐라고 얘기를 할 때, 하나님과의 끊어진 관계가 다시 회복된 것이고, 하나님의 그 거룩한 영광이 우리에게 다시 회복된 것이고, 하나님께서 아담을 바라보실 때에 아담을 바라보시고 정말 “아, 내 사랑하는 내 귀한 아들”로 이렇게 보신 것처럼,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회복시켰을 때는 길을 잃어버린 양이었지만, 우리를 다시 찾으셨을 때는 너무나도 기쁜 목자의 마음이, 그래서 천국 잔치를 이렇게 베푸는 것을 우리들이 보지 않습니까?

이 얘기가 마태복음에서는 길을 잃어버린 양으로 이렇게 끝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이 얘기가 탕자의 비유로까지 연결이 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시면, 이 길 잃어버린 양에 대해서 쭉 얘기를 하다가, 길을 잃어버린 탕자에까지도 이렇게 이야기가 연결이 된다고요.

다시 말씀드리면 소자는 잃어버린 양이고, 잃어버린 양은 잃어버린 탕자와 같다는 것을 지금 성경이 우리들에게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 탕자의 비유,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그 비유 잘 알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떼 가지고, 자기는 남 보란 듯이 한번 성공을 해 보고 싶었는데, 어떤 절차에 의해서 모든 재산을 다 말아먹고 이제는 빈털터리가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서 돼지들이나 먹는 쥐엄 열매를 먹고 사는 그러한 처지, 신세가 됐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우리 인류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거죠.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지금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때 탕자가 뉘우치죠. 다시 되돌아오죠.

내 아버지의 집에는 종들도 참 먹는 것 풍성했고, 종들도 참 맛있는 거 먹고 마시는데, 그러다가 뉘우치지 않습니까?

아버지께로 돌아가자라고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서 이제 아버지께 와서, “아버지, 정말 나는 길을 잃어버렸지만 아들로 보지 마시고 일하는 한 일꾼으로 보십시오”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그게 아니었죠.

이 길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내 아들이다. 그 관계가 다시 회복이 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어떤 일을 벌여요? 동네 사람 다 불러 모아 놓고 천국 잔치를 베푸는 겁니다.

이처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목자에 의해서 찾아졌을 때는 하나님께서 너무 기뻐하시는 그 기쁨 가운데 있다는 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다는 거죠.

여러분들 13절 한번 보세요.

13절을 보시면, “그러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그러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는 누구를 뜻하느냐?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다 흘려 두는 것은 너무나도 비정하지 않느냐? 그러면 아흔아홉 마리 다 흩어지면 또 찾아서야 되냐? 이런 생각도 우리들은 많이 해 보셨죠?

그런데 여기서는 그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누구를 가리키냐면 율법주의자를 가리킵니다. 서기관들,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유대 사람들, 이 사람들을 가리키죠.

이 사람들은 목자가 필요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 길을 알기 때문에 잃어버리지 않은 거예요.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율법을 잘 지키면 우리가 이 길로 잘 갈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목자가 필요 없는 양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바라보실 때 하나님이 어떤 것을 더 귀하게 여기시냐?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그 양을 하나님께서 더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우리들이 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아까 말씀을 드린 것처럼, 이 길을 잃어버린 양의 모습이 탕자의 그 모습으로 나타나고, 탕자의 모습이 어린 소자의 모습으로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이야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계속적으로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라는 이 다툼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천국은 이 길을 잃어버린 어린 양과 같은 곳이다라고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이죠.

그래서 세상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굉장히 중시합니다.

한 마리 잃은 양은 없어지든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더 중요시하는 것이 이게 세상적인 가치죠.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이 아흔아홉 마리의 풍성한 그것보다도, 길을 잃어 헤매는, 죽음 앞에 있는 한 어린 양의 가치를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천국의 가치라는 겁니다.

그 우리들에게는 얼마나 그 하나님의 은혜가 큽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큽니까? 우리들은 다 길을 잃어버렸던 그러한 양들인데, 목자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목자에 의해서 찾음을 당했고, 회복되었고, 하나님의 놀라운 형상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결론으로 18절 말씀을 여러분들이 한번 보세요.

18절 말씀을 보시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그러면서 이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그들과 함께하리라”라는 이러한 얘기가 나오는데, 이 얘기는 우리 성도들의 신분을 지금 이야기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신분이, 하나님 앞에 회복되어져 있는 사람들의 신분이 어떤 신분으로 변화가 되었느냐?

우리가 땅에서 무엇인가를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수 있는 그러한 신분으로의 변화, 땅에서 무엇인가를 풀면 하늘에서 풀리는 그러한 신분적인 변화, 이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의 어떤 수고, 우리의 열심,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만들어낸 그런 결과라는 겁니다. 십자가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귀중한, 소중한 그러한 자녀들로 인정을 받는 그런 것이죠.

그래서 십자가의 결과라는 것이죠.

우리는 아까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천국에서 누가 큰가? 천국에서 내가 몇 천층에 들어갈 것인가? 내 열심과 내 수고가 하나님께 어떤 상급을 받을 것인가? 이러한 기대를 가지고 있지만, 천국은 그러한 곳이 아니라 길을 잃어버린 양이 목자를 그렇게 간절하게 사모함처럼, 목자를 그렇게 바라보는 것처럼, “예수님, 정말 내가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내가 정말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서, 목자에 의해서 발견되어졌을 때, 목자는 발견된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잔치를 열 정도로 크게 잔치를 베푸시고, 우리의 영혼으로 말미암아,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러한 귀한 존재로 우리는 변화가 됐다는 겁니다.

아무리 작아도 우리가 합심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답니다.

아멘.

여러분들이 한번 해 보세요.

두 사람이 모여서라도 한번 해 보세요. 우리가 생각할 때는 작은 건데, 하나님은 그 작은 것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작아도 내 이름으로 모였다면, 생명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여러분, 우리는 정말 하나님에 의해서 찾아진, 길 잃어버린 어린 양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껏 세상에 나아가 탕자처럼 무엇인가 해 보려고 했지만,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러한 존재임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또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주 동안 또 세상에 나아가 살 때에, 나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나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들이 또 시험을 당하는가,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시고, 나로 말미암아 누가 덕을 받나를 한번 경험해 보시는 복된 한 주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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