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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7:22~27 생명의 속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 저는 여러분들보다 조금 유리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래도 말씀을 전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말씀을 접하는 빈도가 여러분들보다 조금 더 많지 않을까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은 굉장히 어려운 말씀입니다.그래서 이 말씀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설교를 하는 사람으로서는 참 큰 부담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실 때아무런 고통의 과정 없이 바로 깨닫게 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보통은 그렇지 않습니다.일주일 내내 고민하고, 고생하고, 씨름하다가금요일쯤 가서야 “아, 그렇구나” 하고 탁 깨달아질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이 참 기쁩니다.“아, 이 말씀이 이런 뜻이었구나.이렇게 연결되는 말씀이었구나.”그 깨달음이 올 때 설교자는 큰 기쁨을 느낍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마태복음을 계속 강해 설교로 보고 있습니다.강해 설교라는 것은 단순히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 이 본문이 원래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 이 말씀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이것을 성경 안에서 끝까지 찾아내어여러분에게 전하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참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22절과 23절이 있고,24절부터 27절까지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이 말씀이 서로 다른 이야기인가?아니면 하나의 메시지로 연결된 말씀인가?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성경은장과 절이 나누어져 있어서 보기에는 편리합니다.하지만 원래 성경에는 장도 없었고 절도 없었습니다.마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흐름이었습니다.

묵상하다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었습니다.이 말씀은 떨어진 말씀이 아니라,하나로 연결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22절과 23절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이미 16장에서 베드로의 고백 이후에“내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여기서 또다시 그 죽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 예수님의 사역에 문제가 생겨서 죽으시는 것인가?

  • 메시아 사명이 실패해서 죽으시는 것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사명이 바뀐 적도 없고, 실패한 적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상은 무엇이었습니까?

  • 정치적으로 우리를 해방시키는 메시아

  • 군사적으로 로마를 무너뜨리는 메시아

  • 경제적으로 풍요를 가져오는 메시아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의 모습은그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초라하고, 보잘것없어 보이고,맞으면 맞아야 했고,채찍질을 당하면 감당해야 했고,조롱을 받으면 그 조롱을 들으셔야 했습니다.

마치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말없이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은 메시아로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잘 알다시피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있은 이후에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칭찬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자,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사단아” 라고 책망하시며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베드로가 생각한 ‘사람의 일’과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완전히 달랐다는 점입니다.

베드로의 충성심은 진짜였습니다.그러나 그 충성심은 무엇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습니까?

  • 정치적으로 성공하는 메시아

  • 경제적으로 부흥을 가져오는 메시아

  • 군사적으로 해방을 이루는 메시아

“이 메시아가 세상에서 성공할 것이다”라는 기대 위에 세워진 충성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제자들이“한 사람은 우편에, 한 사람은 좌편에”앉게 해 달라고 자리 다툼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말씀하시는데제자들은 여전히 자리와 권력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철저히 실패하고, 낮아지고, 고난당하고,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베드로를 책망하신 이유는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라,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을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죽으러 오시는 메시아를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 “메시아가 왜 죽어?”

  • “메시아가 왜 고난을 받아?”

그들의 메시아관에는고난의 메시아, 십자가의 메시아는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자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22절과 2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니라

제자들은 근심합니다.왜냐하면 자신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상이완전히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배경을 반드시 가지고24절부터 27절을 읽어야 합니다.

이 말씀이 따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십자가를 예고하신 직후에의도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가 기대한 세상적인 메시아가 아니라,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온 메시아다.”

그 배경 위에서24절부터 성전세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24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니반 세겔을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너희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즉,“너희 선생도 성전세를 내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성전세는 무엇입니까?

  • 성전을 유지하고

  • 성전을 보수하고

  •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보수를 지급하기 위한 세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세는단순한 세금이 아니라“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정체성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성전세를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일반 세금은 로마로 들어가지만,성전세는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을 위해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이 성전세는 도대체 어디서 시작되었는가?왜 하나님은 이 성전세를 요구하셨는가?

단순히 성전 유지비용 때문이었을까?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뜻이 있었을까?

이 질문의 답은출애굽기 30장에서 시작됩니다.

출애굽기 30장 11–12절에서성전세의 출발점이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인구를 계수할 때각 사람은 자기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를 계수할 때에그들 중에 질병이 없게 하려 함이라.”

다시 말해,죽음을 면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등장합니다.바로 “속전”입니다.

성전세를 내는 행위는단순히 성전을 유지하기 위한 세금이 아니라,내 생명을 속하는 대가,내 생명을 살려 주신 것에 대한 고백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세는 처음부터**“생명의 값”**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출발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 이 속전은 죽을 생명을 대신하여 드리는 것

  • 다시 말해 대속의 개념

예전에는 노예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노예를 사고팔 때 값을 지불했습니다.

마찬가지로,죽을 생명을 대신하여 값을 치르는 것,이것이 바로 속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부자라고 더 내지 말고가난하다고 덜 내지 말라.

왜냐하면,

  • 부자든

  • 가난하든

생명은 똑같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해서”드리는 것이다.

출애굽기 30장 13절부터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낼 것

  • 스무 살 이상 된 모든 이스라엘 성인이 드릴 것

  •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은 없다

그리고 16절에서 결론을 이렇게 맺습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너희의 생명을 대속하리라.”

이 흐름을 종합해 보면 분명해집니다.

성전세 = 단순한 헌금이 아니라‘내 생명의 값’

매년 반 세겔을 드리게 하신 이유는,

  • “너희 생명이 당연한 것이 아니다”

  • “너희가 살아 있는 것은 은혜다”

  • “너희 생명은 이미 속량되었다”

이 사실을 매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세의 출발점은 언제나 이것입니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는데,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있다.”

이 고백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을 죽임으로,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해방이 됩니다.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군사적인 반란을 일으키거나,사회적인 폭동을 일으켜서 왕자를 끌어내리고 탈출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어린 양을 잡아 문설주에 바르고 좌우 인방에 바름으로 말미암아죽음의 그림자가 넘어오지 못하게 한,그것 하나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애굽 사람이든지 유대인이든지,그 피를 바른 사람들은 죽음의 그림자가 넘어갔고,애굽 사람이든지 유대인이든지,그것을 믿지 못하고 피를 바르지 아니한 사람들은죽음이 그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니까 오직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어린 양의 피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 사셨다는 것입니다.그 피값을 대신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을 얻었다는 의미가여기 안에 담겨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성전에서 반세계를 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실 때,이 성전세를 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 하면,

“아, 이것은 내 생명을 대신한 값이구나.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구나.”

이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전세는단순히 성전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데 쓰이는 돈이 아니라,그 근원이 우리의 생명값, 대속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반세계를 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우리는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세를 냄으로 말미암아그 구원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왜 이것을 내는지 기억하라.”이것을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자녀들이 물을 것입니다.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묻겠지요.

“왜 이것을 내요?”

그러면 이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이것은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우리가 종살이하던 때에어린 양을 잡아 우리를 대신 대속하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이것은 우리의 생명값을 대신한 것이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도,이것이 왜 필요한지를 알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세를 낸다는 것은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되,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나를 대신하여 어린 양이 죽음으로 이루어진 구원이라는 것을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속전”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이 속전이라는 말은 “덮어 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속전을 낸다는 것은,우리가 가지고 있는 죽음의 죄, 질병과 저주를 덮어 준다는 것입니다.덮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나는 것이죠.

이것이 속전이라는 말이 가진 의미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회막 봉사에 사용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회막, 성막, 장막 — 이것은 다 같은 말입니다.그 회막 안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언약궤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회막 안에 있었기 때문에그곳은 가장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다윗이 통일왕국을 이루고 왕궁에 있을 때,“나는 이렇게 궁에 거하는데하나님의 언약궤는 아직도 장막 안에 있구나.”이것을 마음 아파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솔로몬 때 성전을 건축하지 않습니까?

언약궤가 있는 곳,그곳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언약궤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여러분을 가리켜 ‘성도’라고 부릅니다.

왜 성도라고 얘기를 합니까?“나는 성도가 아니라 집사인데요.”“나는 성도가 아니라 권사인데요.”

왜 성도라고 부르느냐 하면,거룩하신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거룩한 하나님,그 언약궤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에 있는 언약궤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이스라엘 민족에게는 1년에 한 번,대속죄일이라는 날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어린 양의 피를 들고,이스라엘 전체 민족의 죄를 가지고언약궤 앞으로 나아갑니다.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죠.1년에 단 한 차례입니다.

그리고 어린 양의 피를 뿌리는데,어디에 뿌리느냐 하면언약궤를 덮고 있는 시은좌 위에 뿌립니다.

이 시은좌라는 말은“은혜를 베푸는 자리”라는 뜻입니다.언약궤 위에 두 천사가 서로를 바라보며날개로 덮고 있는 그 자리를시은좌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곳에 대제사장이어린 양의 피를 가지고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피를 뿌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또 이렇게 1년이 지났습니다.새로운 1년을 맞이합니다.이스라엘 민족들이 알게 모르게 범한 죄들을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은혜를 베푸십니다.그래서 또 한 해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궤의 역할이고,시은좌의 역할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살아가기 위해서대제사장이 어린 양의 피를 가지고 뿌리고기도함으로 말미암아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고,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았습니다.

여기에서도 동일하게어린 양의 피가 등장합니다.

사실 누가 죽어야 합니까?이스라엘 민족이 죽어야 하지 않습니까?그런데 어린 양이 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아사람의 죄가 사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속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속전을어디에 쓰라고 말씀하십니까?장막을 위하여 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장막을 위하여 쓰라고 하셨을까요?그 안에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언약궤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우리의 죄를 사하시고은혜로 우리를 돕는 곳이라는 의미가그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언약궤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성경을 보면 조금씩 바뀌어 나옵니다.중간에는 빠졌다가, 더해졌다가 하다가히브리서 9장에 가면다시 세 가지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입니다.

두 번째는아론의 싹 난 지팡이입니다.

세 번째는모세의 돌판,곧 십계명이 담긴 돌판입니다.

이 세 가지가언약궤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먼저 만나를 담은 항아리는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이 만나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죽게 되었을 때하나님께서 생명을 유지하게 하시기 위해내려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일부터 만나가 내릴 것이다.매일같이 거두어라.”

일주일치를 거두어라,한 달치를 거두어라 하지 않으셨습니다.매일같이 거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것을 먹고 살아가라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해서어떤 사람들은다음 날 것까지 이틀치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보니까그 만나가 썩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면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을 것이니그 전날 두 배를 거두어라.”

그런데 또 믿지 못합니다.“두 배를 거두면 또 썩는 것 아니야?”그래서 하루치만 거두었습니다.

그러자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아쫄쫄 굶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앙이만나 항아리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이 항아리를 보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내 말을 얼마나 듣지 않았는지 기억하라.”

그리고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이스라엘의 장로들이모세와 아론에게 집중된 지도권,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놓고다투던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그때 아론에게 말씀하십니다.“너희들의 지팡이를 다 가져와라.”

그래서 누가 정말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지도자인지를 알기 위해아론의 지팡이를 갖다 두었더니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났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마찬가지로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던 이스라엘의 불신앙,그런 모습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아론의 싹 난 지팡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돌판이 있습니다.이것은 십계명을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모세가 처음에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갔습니다.하나님께서 직접 기록하셨고, 직접 새기셨습니다.

그런데 그 돌판을 가지고 내려오니이스라엘 민족들이 밑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이것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구원한 여호와다”라고 하며뛰고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두 돌판을 그들을 향해 던져 깨뜨렸고,그 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서 다시 올라가다시 받은 돌판이언약궤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율법이 의미하는 바도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패역했던사람들의 모습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정리해 보면,만나의 항아리도 그렇고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그렇고모세의 두 돌판도 그렇고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완악함과 연약함을담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어디에 담겨 있습니까?언약궤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 위를 무엇으로 덮습니까?시은좌로 덮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꾹꾹 눌러 덮고 있는 것이죠.

우리의 모든 죄악들을 말입니다.

언젠가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여러분, 아무리 회개해 보십시오.회개한다고 해서 우리가 용서받는 게 아닙니다.우리가 용서함을 얻는 것은주님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우리가 백날 회개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가 매일같이 회개한다 할지라도뒤돌아서면 우리는 여전히완악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장담하는데요,아마 여러분들이 예배 끝나고 친교실로 가시면연약함을 다 쏟아버리고또 세상적인 음식 먹으면서또 그렇게 살아갈 겁니다.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하나님의 은혜가 덮어주지 않으면,하나님의 은혜로 감싸주지 않으면우리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언약궤를 통해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그러니까 마음껏 죄 지으십시오”이런 이야기를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속죄소는 시은좌로 덮여 있고하나님의 은혜가 죄악을 덮어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속전도 덮어줍니다.그들의 생명을 덮어준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속죄소에서어린 양의 피를 뿌림으로 말미암아생명의 구원을 얻는 것처럼,

성전에 반세겔을 냄으로 말미암아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지를 생각하면서“아, 어린 양의 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구나”이렇게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언약궤의 상징과반세겔 성전세는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여러분들이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내가 죽어야 된다.내가 피 흘려야 된다.내가 바로 그 반세겔이고내가 바로 그 어린 양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믿지 않았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이 뭐라고 했습니까?“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그러면 최소한 알아들어야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그렇게 직접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아마 그 뉘앙스는 그런 것이었을 겁니다.

유대인들이 못 알아듣는 것은어쩌면 당연하다 치더라도,제자들마저도선생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25절을 보시면베드로가 대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25절을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이르되 내신다 하고집에 들어가니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시몬아, 내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자기 아들에게냐,타인에게냐?”

예수님 시대는 왕정 시대였기 때문에왕은 세금을 내지 않습니다.

백성들이 세금을 내서 왕을 유지하는 것이죠.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야,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그러니까 26절에 베드로가 당연히 이렇게 말합니다.“타인에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왕의 자식들은 세금을 내지 않듯이,내가 생명의 주인이고, 성전의 주인이고, 하나님의 아들인데내가 성전세를 내야 되느냐?이렇게 베드로에게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는“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베드로에게 지시하십니다.

“베드로야, 바닷가에 가서 낚시를 던져라.첫 번째 잡히는 물고기가 있을 텐데그 입을 열어 보아라.그러면 한 세겔이 있을 것이다.그것을 가져다가 너와 나를 위하여 성전세를 내라.”

27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네가 바닷가에 가서 낚시를 던져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참 이상한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이시지만세상 사람들과 논쟁하지 않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아무리 논쟁해도 알아들을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래서 오해를 풀기 위해 성전세를 내시되,그 방법으로 물고기를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돈을 얻으려면어디서 얻는 게 더 빠르겠습니까?길 가다가 떨어진 돈을 줍는다든지,사람들 뒤를 따라간다든지,세금 걷는 사람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게훨씬 빠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세겔이 바다에 빠져서마침 물고기가 그것을 삼켰고,베드로가 예수님 말씀을 듣고물고기를 잡았는데그 입을 열어 보니말씀 그대로 한 세겔이 나왔다는 말입니까?

이 장면이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요?

제가 아까 말씀드렸습니다.이 본문은 22절과 23절,예수님께서 죽음을 예고하신 말씀을 배경으로접근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누구를 이야기해 왔습니까?생명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이 물고기 입에 들어 있는이 한 세겔 또한우리에게 동일한 교훈을 주는 의미가여기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바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세상을 의미합니다.

바닷가에서 열심히 물고기를 잡는 제자들의 모습은세상에서 수고하고,세상에서 땀 흘리며,생업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우리의 삶의 현장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물고기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한 세겔이 있습니다.

이 반세겔, 이 세겔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우리 생명의 속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 물고기를 건져 올립니까?베드로가 건져 올립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이제부터는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그러니까 베드로를 부르신 것은단순히 물고기를 잡는 업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죽어 가는 영혼을 살리는 일로 부르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건져 올린 물고기는결국 누구를 상징합니까?바로 우리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물고 있습니까?이 세겔을 물고 있습니다.

이 세겔이 없으면 우리는 죽는 것입니다.다시 말해, 예수님이 없으면 우리는 죽는 존재라는 것이죠.

그것을 베드로가 건져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없이는우리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다시 한번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어야우리의 속전이 되고,우리는 생명을 얻고,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예수님이 계셔야만우리는 죽지 않고 구원을 얻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에 가면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이 말은 무엇입니까?우리가 애쓰고, 고생하고,힘들게 살아가는이 세상이 더 이상 없다는 뜻입니다.

제가 AI로 확인까지 해 봤습니다.“이 말씀이 이런 의미입니까?”그랬더니“네, 맞습니다”라고 하더군요.그래서 여러분들에게과감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다는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물고기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굳이 바다를 동원하고,굳이 물고기를 동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 속에서 아둥바둥 살아가는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그 입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넣어 주셨다는 것을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예수가 없으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우리와 똑같이세상에서 힘들게 살아가는불쌍한 인생들을 향해우리가 그물을 던져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물질로도,세상의 어떤 방법으로도생명을 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고,

구원은 오직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얻는 것임을우리를 통해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원래 물고기 같은 존재였는데,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셔서우리의 모든 죄를 덮어 주시고,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시고,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대신 죽으셨다는놀라운 의미가이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전에 반세겔을 낸다고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담긴 의미,우리의 생명을 대신하여어린 양이 죽었다는 그 사실을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구원은성전의 반세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화려해 보이지만생명이 없습니다.

우리는 초라해 보여도뿌리가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을예수 그리스도께서우리의 속전이 되어대신 치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여러분들이 기억하시고,

우리가 한 주 또 세상을 살아갈 때우리의 삶 속에주님께서 두신 의미를 묵상하며 살아가는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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