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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7:1~13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인 비밀


옆에 분들과 인사 한 번 하시죠.해피 뉴 이어, 한 번 해 봅시다.

새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사실 성경에도 참 많이 나옵니다.복 받으세요, 복 주십니다라는 말이 성경 곳곳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성경이 말하는 복은 이렇게 설명됩니다.

사랑하는 자여,네 영혼이 잘됨 같이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라.

즉, 영혼이 먼저 잘되는 것,예수 안에서 영혼이 풍성해지는 것이 먼저라는 겁니다.그 다음에 이 땅의 삶, 건강의 축복, 삶의 축복을 말하는 것이죠.

예수를 뒤로 하고 누리는 것들은잠시 즐거울 수는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복이 아니라,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메마르게 하고시험들게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2026년 새해를 맞이하며우리 교회의 표어는 이것입니다.

삶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자.

말씀이 끝난 후에,이 말씀이 내 한 주의 삶 속에서어떻게 역사했고,어떻게 힘이 되었고,어떻게 위로가 되었는지서로 나누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식사하시면서“짜다, 싱겁다” 이야기보다,

“말씀 붙들고 한 주를 살아봤더니하나님이 이렇게 역사하셨습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기도 부탁드립니다.”

이런 이야기가 더 많이 오갔으면 좋겠습니다.

밥 한 끼 못 먹는다고우리가 못 사는 거 아닙니다.교회 밥, 참 맛있습니다.권사님들, 성도님들이 얼마나 수고하고 헌신하셨습니까.

얼마나 수고하셨을까?얼마나 사랑하셨을까?

그 마음을 기억하며감사함으로 받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 말씀을 한 번 보겠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귀신을 쫓아내며,많은 권능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내게서 떠나가라.”

이 말씀은 참 무겁습니다.이 사람들은하나님 앞에서 큰 상을 받을 것이라확신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확신의 근거가 무엇이었습니까?

종교적인 열심,종교적인 능력,종교적인 활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고백,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고백,이 모든 것은 형식이 아니라신앙 고백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고,하나님의 뜻이 우선이 되고,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인가?

이것이 기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오직 은혜로,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서서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로 구원받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자신의 행위, 자신의 수고, 자신의 열심을 가지고“이 정도면 하나님이 보상해 주시겠지”라는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죠.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이 말씀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로 부르셨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세상에서의 자랑에서하나님께로 옮기셨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서의 수고,세상에서의 기쁨,세상에서 누리는 만족에서우리를 끄집어내어

영생이 있는 곳으로,의로움이 있는 곳으로,하나님 나라로 옮기셨다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하셨다는 말은단순히 “죄를 용서받았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자리를완전히 옮기셨다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말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드셨다.

이제는세상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고,세상이 우리를 보호하지 않고,세상이 우리의 자랑이 되지 않습니다.

의로운 사람으로,거룩한 사람으로,영광스러운 사람으로,영생을 누리는 사람으로우리를 옮기셨다.

이것이 십자가의 구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교회 안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종교인으로서 행하는 모든 수고는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이 일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이 안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가?”

그것이 먼저입니다.

사실 이 부분이우리 신앙의 가장 연약한 지점입니다.

우리는어떤 일을 했을 때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인정받지 못하면 마음이 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세상에서 건져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셨고,새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세상을 바라보며 묻습니다.

“여기엔 즐거움이 없을까?”“여기엔 만족이 없을까?”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더 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이 사실을 알면서도우리가 그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음에도평생 자신의 노력과 계산으로무언가를 만들어내려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불렸으면서도그 부르심의 목적 안에서 살지 않으면서괴로워하지도, 안타까워하지도 않는 것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의 이 말씀은결국 어디로 이어집니까?

모래 위에 지은 집과반석 위에 지은 집의 비유로 이어집니다.

겉으로 보기엔 비슷해 보여도,기초가 다르면결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주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사람들,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한 사람들은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사람들입니다.

반대로세상 뜻대로,자기 뜻대로 행한 사람들은

모래 위에 집을 세운 사람들이다라고 마태복음 7장은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을 돌아보게 됩니다.

“내 신앙은 지금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자라고 있는가?”
“나는 이것을 위해실제로 기도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에 대해우리는 너무 약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 신앙은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다.

지난주 말씀을 기억하십니까?마태복음 16장,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이후에주님은 베드로를 크게 칭찬하십니다.

그러나 십자가 이야기가 나오자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결코 그런 일은주께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베드로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왜입니까?

하나님의 뜻보다자신의 열심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베드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내가 얼마나 잘하느냐를 먼저 생각할 때우리는 베드로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일을 할 때기준이 분명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열심히 할까?”“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만족시킬까?”“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알아줄까?”

이것이 먼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사람들이 싫어해도,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사람들이 보지 않아도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무엇일까?

이것이 우선순위입니다.

2026년, 새로운 한 해를 맞이했습니다.우리가 반드시 붙들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365일을 살아가며어떻게 하면하나님이 내 발걸음을 기뻐하실까?”
“나는 지금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한 걸음이라도 가고 있는가?”

교회를 얼마나 열심히 섬길까,사람들을 얼마나 만족시킬까,전도를 얼마나 많이 할까보다 먼저,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실까?이것을 먼저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본문은우리가 잘 아는 변화산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기도원 이름으로도가장 많이 들어본 이름, 변화산.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변화산은권능을 과시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예수님이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이 일을 제자들에게 보이신 후이렇게 당부하십니다.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왜 주님은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감추려 하셨을까요?

왜 주님은이토록 영광스러운 모습을 가지셨으면서도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이 땅에 오셨을까요?

왜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을까?왜 구유에 태어나셨으며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을까?

이 모든 것은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비밀’에 속한 내용들입니다.

오늘 본문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비밀을조금 더 이해하도록 돕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변화산 사건 속에서모세와 엘리야를 등장시키십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자요,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등장한 이유는단순히 구약을 대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은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다시 한 번 더 밝히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표현은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신비(mystery)’에 가깝습니다.

비밀은 감추어져서볼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신비, 미스테리는

보여 주었지만깨닫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예수님을 통해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셨고,삶으로 보여 주셨고,기적으로 증명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왜입니까?

보여 주었으나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천국의 비밀”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비밀이란,감추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비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며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자기의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그것을 사고자 합니다.

왜입니까?

그 가치를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비밀,예수 안에 감추어진 비밀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지만,
깨달은 사람에게는자기의 전부를 걸어도 아깝지 않은생명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 안에감추어진 비밀이 있다.

변화산 사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실체를 이렇게 보여 주실 거라면왜 굳이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는가?
왜 가난한 모습으로,왜 십자가의 길로 가셨는가?

이 질문 속에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그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예수님이 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모습으로 변하셨습니까?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다른 복음서들도 이 장면을 이렇게 증언합니다.누가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하실 때에용모가 변화되고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마가복음에서는 더 강하게 표현합니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매우 희어졌더라.

성경은 이 장면을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

“변형되었다.”

예수님이 변하셨다는 말은예수님이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래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던‘본체의 모습’을잠시 보여 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오히려 자기를 비워종의 형체를 가지사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지금 변화산에서는그 가려졌던 본체의 영광이잠시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번데기와 나비는본질은 같지만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의 모습은연약한 인간의 모습이었지만,

그 본래의 모습은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이 영광스러운 본체가왜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까?

왜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습니까?왜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까?

이사야서 53장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는 고난받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 변화산 사건에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함께 있었지요.특히 요한은 이 장면을 평생 잊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은 예수님을 보며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요한은 사도들 중 가장 오래 살았고,마지막에 요한계시록을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그가 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가슴에 금띠를 띠고그의 머리와 털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그의 눈은 불꽃 같고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그의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이것이요한이 본 예수 그리스도의 본체입니다.

아마도 요한에게 있어이 영광의 모습은평생 지울 수 없는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혹시 어떤 꿈을 꾸십니까?

“주님,주님의 영광을나에게도 보여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한 번쯤은 해 보셔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주님, 제가 간절히 원하면주님의 모습을 좀 보여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굳이 감추실까요?성경은 이미 충분히 드러내고 밝히셨습니다.

3절 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그들에게 보이거늘

변화산에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왜 하필 모세와 엘리야입니까?

모세는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이었지만백성들에게 거부당한 인물입니다.
엘리야 역시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였지만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핍박과 거절을 당한 인물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하나님의 본체로 오셨지만종의 모습으로 오셨고많은 사람들에게 거부당하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미리 살아낸 인물들입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보면,

모세는 율법을 대표합니다.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보여 주었고,그 모든 제사는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합니다.오실 메시아,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예언한모든 선지자의 대변인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이유는 아닙니다.

모세와 엘리야를 등장시키신 이유는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어떤 길을 가게 될지를분명히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모세의 삶을 떠올려 보십시오.

모세는 애굽 왕자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동족이 학대받는 모습을 보고애굽 사람을 쳐 죽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모세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우리를 죽이려 하느냐?”

이 말 한마디에모세는 광야로 도망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백성들에게 거절당한 종의 모습입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는북이스라엘 최악의 왕 아합과이세벨 시대에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였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죽임당하는 상황 속에서엘리야는 도망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갈멜산에서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했지만,

그 승리 직후에도엘리야는이세벨을 피해 도망칩니다.
굴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하나님, 저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종이었지만환영받지 못했고거절당했고도망쳐야 했던 삶.
이 모든 모습이예수 그리스도의 길과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은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불구하고종의 형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귀를 기울이지 않았고환영하지 않았고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예수님의 영광만 보여 주는 인물이 아니라,예수님이 가실 ‘고난의 길’을미리 증언하는 증인들입니다.

이제 이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를 대동하셨는가.

모세와 엘리야는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고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역시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고보냄을 받은 분이십니다.

본문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다른 복음서, 특별히 누가복음을 보면이들이 나눈 대화의 내용이 나옵니다.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이 나눈 대화의 주제는‘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모세도, 엘리야도, 예수님도사람들에게 거부당했을까요?

그 해답은이사야서 53장에 있습니다.
“우리가 흠모할 만한 것이 없도다.”
예수님은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사람의 눈으로 볼 때흠모할 만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고운 모양도 없고풍채도 없었습니다.

이것이예수 그리스도가 거부당한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대화 속에서예수님의 사명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은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속죄의 어린 양으로죽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모세는 율법을 통해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보여 주었고,엘리야는 예언을 통해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가리켰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길의 완성은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속죄의 양으로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은혜로, 공로로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제 9절 말씀이 중요해집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이 말씀이 담고 있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본래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신 분이시지만,십자가 이전에는그 영광을 취하지 않으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십자가가 먼저이고,영광은 그 다음입니다.
예수님은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에는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 신앙에아주 중요한 원리가 하나 나옵니다.

십자가를 내세우기 전에는영광을 취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가 자랑이 되기 전에는어떤 신앙의 열심도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봉사,우리의 헌신,우리의 전도,우리의 열심은모두 십자가의 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그것은 우리의 자랑이 아니라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한 일은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십자가를 앞세우십시오.영광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영광을 받지 못해도 괜찮습니다.그러나 십자가 없이 영광을 취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마지막 심판대 앞에서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제가 이 땅에서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말씀하신다면,그것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항상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십자가가 먼저다.은혜가 먼저다.나를 아는 것이 먼저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먼저 십자가를 내세우라는 겁니다.

예수님도그 영광스러우신 예수님도그 거룩하신 예수님도십자가의 죽음 없이는그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이 영광을 취할 것으로여기지 아니하겠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이십자가 외에내세울 자랑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십자가 외에는우리가 자랑할 것이아무것도 없습니다.

2026년도,새로운 한 해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그리고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은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이후,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를주님께서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주님은 끝까지 참으셨고,끝까지 기다리셨고,끝까지 말씀으로 설명하셨습니다.
그들의 눈이 열릴 때까지주님은 그들 곁을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우리가 외로울 때,병들었을 때,한숨 가운데 있을 때,시험 가운데 있을 때에도주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이길 힘을 주시고,지혜를 주시고,때로는 다시 일어설용기를 주십니다.
이 모든 일들이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이루어졌다는 사실을여러분이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026년, 새로운 한 해의 삶 속에서하나님을 마음껏 경험하시고,하나님을 간증하시며걸어가는 한 해가 되시기를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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