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7:14~20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이 있어도
- seattleomc
- Jan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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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테스트를 한번 해 보겠습니다.예배가 끝난 후에 밖에 나가서 산을 바라보면서,과연 산이 무너지는 일이 일어나는지,아니면 나뭇가지라도 조금 흔들리는 일이 있는지,한번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본문 가운데서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무엇인지,말씀을 통해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난주에 나누었던 말씀처럼,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 가운데서 세 명의 제자만 따로 부르셔서산에 올라가 기도하셨고,다른 제자들에게는 보여 주지 않으셨던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예수님의 본래의 형상,곧 하나님 보좌에 앉아 계신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산 아래에는 예수님과 함께 올라가지 못한 아홉 명의 제자들이 남아 있었습니다.바로 그때, 어릴 때부터 간질병을 앓던 아들을 데리고 한 아버지가 찾아옵니다.
예수님을 찾았지만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고,그 아버지는 남아 있던 제자들에게자신의 문제와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될 줄 알았는데, 되지 않았습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면 된다고 했는데,나무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제자들 마음속에는“왜 우리는 안 되는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려오셔서 그 아버지를 만나십니다.아버지는 예수님께 달려와 간절히 호소합니다.
“우리 아이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다른 복음서에 보면, 이 아이는 외아들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외아들이라는 것은그 집안의 생명과 미래가 걸린 존재라는 뜻입니다.얼마나 귀하게 여겼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말씀으로 그 아이를 고쳐 주십니다.
그 후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왜 우리는 안 됩니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너희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늘 말씀의 초점은하나님의 긍휼과 기적 그 자체가 아닙니다.“왜 우리는 안 되는가?”바로 이 질문에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제자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될 줄 알았는데 되지 않았을 때의 실망감,그리고 그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서기관들까지 지켜보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습니다.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우리는 쉽게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없어서 그래.”
그런데 믿음에 대해 우리는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소원이 이루어지면 믿음이 좋은 것이고,이루어지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믿음이 있는 것 같고,어떤 때는 없는 것 같고,어떤 때는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믿음을 다시 정의해 본다면,믿음이란 이것입니다.
믿음이란,내 처지와 상황 속으로예수님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나의 상황에 예수님을 불러오는 겁니다.그러니까 이것은 기도와도 매우 비슷한 개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여러분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그 상황과 현실을 내 힘으로 벗어나려는 것이 아니라,그 상황 속으로 예수님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그 상황을 이겨내는 것,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상황을 이기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이길 수 있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이 고백이 믿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믿음이란, 내 상황 속에 예수님을 초청하는 것이다.
아멘.
때로는 우리의 필요 속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또 우리의 소원 속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우리는 믿음이 좋아서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쁨을 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또 다른 문제가 찾아오면,방금 전까지 경험했던 믿음이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의 자세는 이것입니다.어떤 결과가 나오느냐가 아니라,내 처지와 형편 속으로그리스도 예수를 불러들이는가,이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기 전에,나는 예수님을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인가,이 신분을 먼저 붙들라는 것이죠.
내가 부르면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백성,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이 믿음이 있어야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그리스도 예수를 초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어떤 결과를 만드시는가와 상관없이,그 과정 속에서주님을 신뢰하며 따라가는 것,이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14절과 15절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그 아이는 간질로 심히 고생하며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졌다고 말합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는이 아이를 벙어리 귀신 들린 상태라고 설명합니다.그 결과, 거품을 물고 쓰러지며물과 불을 가리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됩니다.
이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외아들이었습니다.그 집안의 생명과 미래가 걸린 아이였습니다.24시간 아이 곁을 떠날 수 없는 부모의 마음,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는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많은 의원을 찾았고,가진 것을 다 써 보았지만상태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낫겠다”는 믿음으로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그 여인이 얼마나 노력했느냐가 아니라,세상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예수님께 가지고 나아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아이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고침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 답은 분명합니다.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마가복음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고 말씀드렸죠.마가복음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이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내가 문제를 가지고 당신의 제자들에게 갔습니다.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그런데 제자들이 이 일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그래서 지금 예수님, 당신 앞에 이 문제를 가지고 왔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마태복음 10장을 다시 떠올려야 합니다.마태복음 10장에서 주님은 이미 제자들에게사단을 제어하는 권세,복음을 전하는 권세,그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그 권세를 받은 제자들이그 권세를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너무 닮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성도들에게, 그리고 교회에게하늘의 권세, 이 땅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그 능력은 부인하는 신앙,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는 드립니다.헌금도 합니다.봉사도 합니다.
그런데 삶 속에서 영적인 능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모습이었고,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요즘 교회들 보십시오.돈이 많습니다.건물이 큽니다.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교회의 힘이 하나님이 아니라다른 것들에서 나온다고 착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결과, 영적인 능력은 점점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고,예배의 모습은 잘 갖추고 있는데삶 속에서 영적인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것이 문제라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는 세상을 이긴 주님의 자녀입니다.그러므로 세상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문제를 두려워할 이유도 없습니다.
왜냐하면하늘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내가 너와 함께하겠다.”앞서 일하시고,뒤에서 지키시고,끝까지 보호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세상을 왜 두려워합니까?문제를 왜 그렇게 두려워합니까?
사도행전 3장을 보십시오.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일어나 걸으라.”
교회에 금과 은이 없어도 됩니다.우리에게 있는 것은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계시기 때문에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환난이 우리를 기다리고, 핍박이 우리를 기다린다 할지라도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세상이 두려울 것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으로,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여기 19절 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와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왜 우리는 안 됩니까?우리는 믿음이 있는 것 같았는데,그전에는 잘됐지 않습니까?
이전에는 같은 일을 했을 때 귀신이 떠나갔고,많은 사람들이 복음 앞으로 나아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그런데 왜 지금은 안 되느냐는 것이죠.
제자들의 마음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렇습니다.“저번에는 잘했는데, 왜 이번에는 안 됩니까?”“주님은 하시는데,권세를 주셨다면서 왜 우리는 안 됩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마가복음 9장 29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오늘 본문 마태복음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믿음이 없는 까닭이니라.”
조금 헷갈릴 수 있습니다.어디서는 믿음이 없어서라 하고,어디서는 기도를 안 해서라 하고,어떤 사본에는 기도와 금식까지 나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기도의 본질을 놓치면 안 됩니다.기도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는 할 수 없습니다.주님께서 해 주십시오.”
이 고백이 바로 기도의 핵심입니다.기도는 내가 하는 행위가 아니라하나님이 하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리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못한다.그러나 기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하신다.”
이 의미에서**“기도 외에는 이런 일이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금식은 무엇입니까?금식 기도하면 하나님이 더 잘 들어주실까요?
아닙니다.백날 금식해도 응답이 없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금식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나의 즐거움보다 하나님의 즐거움이 더 크다는 고백입니다.음식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즐거움입니다.그 즐거움을 내려놓는다는 것은*“하나님, 이것보다 주님이 더 중요합니다”*라는 선언입니다.
둘째,내 생명의 근원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음식을 먹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그럼에도 금식하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 생명은 음식이 아니라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것입니다.
믿음이란,내 상황 속에 예수님을 초청하는 것이고기도란,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내 자리를 비우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실패한 이유는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자기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힘으로, 나의 노력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이 음식을 끊음으로, 금식을 함으로 말미암아
나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금식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무엇입니까?“주님,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해 주십시오.”이 고백입니다.
그리고 금식은 무엇입니까?나의 즐거움을 내려놓습니다.나의 생명을 내려놓습니다.
나의 즐거움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있고,나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옵니다.
이 믿음의 고백이 기도와 금식 속에 함께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종합해 보면,기도만 언급된 곳도 있고기도와 금식이 함께 언급된 곳도 있지만결국 같은 의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이 사실을기도로, 금식으로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아멘.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기도 외에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너희 믿음이 적은 까닭이니라.”
제자들은 묻습니다.“왜 우리는 안 됩니까?”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속에는자신들의 수고,자신들의 의지,자신들의 경험으로이 상황을 해결하려는 생각이 숨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너희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책망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정답이라기보다는 묵상입니다.
이미 주님은 제자들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그런데 예수님이 안 계신 상황에서아이를 데리고 아버지가 찾아옵니다.
제자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저번에도 됐으니까 이번에도 되겠지.”“사람들도 보고 있으니 한번 해 보자.”
혹시라도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이고 싶은 마음,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조금이라도 섞여 있지는 않았을까요?
그래서 주님은 그 생각을 보신 것입니다.
“이 일은 너희가 하는 것이 아니다.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있다, 없다라는 말은결국 이것을 말합니다.
내가 주님 안에서 이 일을 행하느냐,아니면 나 자신으로 행하느냐.
일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가장 먼저 중요한 것은내가 주님 안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경건의 모양은 있지만능력은 부인하는 이유가 어디서 옵니까?
기도는 하지만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너무 용감하게 일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하나님의 백성인데도하나님께 묻지 않고 앞서갈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모양은 있지만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20절 말씀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어도이 산을 명하여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너희가 못할 것이 없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크기가 아닙니다.
겨자씨가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여러분, 씨앗이 아무리 작다 할지라도그 씨앗 안에 생명이 있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싹이 트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커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그 안에 생명이 없다면 결국 썩어 없어질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말씀하실 때그 크기를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 안에 생명의 믿음이 있느냐,믿음의 생명이 있느냐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생명은 어디서 옵니까?이 생명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시편에서*“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나무가 시냇물로부터영양분을 공급받고 생명을 공급받듯이,
우리의 생명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보시면주님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우리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붙어 있느냐, 없느냐.
하나님께 붙어 있다면열매가 맺히고, 잎이 나고, 싹이 트는 것은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겨자씨만한 믿음이라 할지라도그 안에 생명이 있다면 그 믿음은 반드시 역사합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라는 말도우리가 산을 옮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하나님께서 하시면 산을 옮기는 것보다 더 큰 일도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일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주*“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순진한 믿음, 단순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어떤 존재입니까?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누군가가 돌보지 않으면누군가가 공급해 주지 않으면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란,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살아갈 수 있음을 아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죠.그래서 예수님께서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빌립보서 4장 13절 잘 아시죠?“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이 어디에 제한이 됩니까?**“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데 제한이 있습니다.
그 능력 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의 고백은 이렇게 정리됩니다.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그리스도 예수 없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군핍한 상황에서도,궁핍과 고난 가운데서도,심지어 감옥에 갇힌 상황 속에서도자기에게 능력을 공급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그 모든 상황을 이겨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기를 원한다는 말씀도이 순서가 바뀌면 잘못된 신앙이 됩니다.
영혼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바로 설 때범사가 바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빌립보서 4장 13절로 돌아가 보면,세상이 아무리 환난으로 몰아가고힘들고 어려운 상황으로 끌고 가더라도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만한 믿음은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이 있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어디에서 옵니까?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지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 있는가.
생명이 공급된다는 것은이미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포도나무 비유처럼관계가 끊어지면 생명도 공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끊어진 관계를 회복하셨기 때문에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겨자씨만한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우리는 믿음이 없음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정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오늘 말씀에는 분명한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고끊어진 관계를 회복하셨으며우리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구조 안에우리를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믿음을 이미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여러분, 믿음으로 선포하셔야 합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앉은뱅이를 일으킨 후 베드로가 뭐라고 말합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왜 주목하느냐,이 일을 우리가 한 것처럼 보지 말라,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베드로의 이 고백이 참 멋있습니다.신앙 안에서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찬가지입니다.세상을 이기는 힘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2026년,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예수 안에서 이 믿음을 가지고,“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어떤 일을 하실까”기대하며 걸어가는 복된 한 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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