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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6:3~20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우리의 신앙고백



13절을 보시면, 13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여기서 가이사랴 빌립보, 빌립보 가이사랴라는 이 지방이 등장을 합니다.아주 오래전에 제가 이곳을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 좀 기억에 남는 게 뭐냐면,“아, 우리나라 선왕당 같다”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 선왕당 아시죠?그 마을에 돌아가면 그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라고 해서, 나무에도 뭐 상한 것 매달아 놓고 하는,아무튼 기이한 영적인 기운이 흐르는 그런 곳, 이런 것들을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이 꼭 그런 곳이었습니다.왜냐하면 여러분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지 않습니까?그런데 그 강무도한 북쪽에 있는 왕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자기 스스로 또 자신들의 힘으로 우상을 섬겼고,오죽했으면 자신의 자식을 불살라 죽이는 그런 패역한 행위까지도 저지른, 그러한 곳이 북쪽 이스라엘입니다.

남쪽은 다윗의 왕가가 계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왔고, 한 왕가가 끝까지 이어지게 되는데,북쪽은 왕조가 여러 번 바뀌게 되죠.하나님께서 그때마다 심판하셨던 일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신앙 고백을 제자들에게 이끌어 내신 곳이 어떤 곳이냐 하면,온갖 세상의 잡신들을 섬기는 곳, 온갖 세상의 우상들이 있는 곳, 바로 그곳에서 묻는 겁니다.“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세상 사람들은 여기서 신에게 절을 하고 경배하고,또 세상 사람들은 우상 단지를 갖다 놓고 절을 하고,세상 사람들은 여기에다 절을 하면서 도움을 청하지만,너희들은 이것을 볼 때에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형과 지명이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이 신앙 고백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이제 순환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십자가의 길을, 본격적으로 고난의 길을 걷게 되는 거죠.

예수님이 누구신가?또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아마 이 질문은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했듯이,오늘날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하고 계시는 질문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시고,여러분은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 질문하고 계신다고 말합니다.아직까지도 확신 가운데 있지 않다면,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입에서, 여러분의 심령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기를 원합니다.

모든 고백, 모든 신앙은 이 고백이 있을 때 진실한 믿음의 출발이 시작이 됩니다.남녀 간의 교제도 그렇죠.“내가 너를 사랑해.”“나도 사랑해.”라고 할 때, 그러면 “오늘부터 1일이야”라는 게 이제 시작이 되듯이,우리가 예수님께 그렇게 고백을 할 때 우리의 믿음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겁니다.

이미 여러 해 동안 신앙의 길을 걸어오다가, 뒤늦게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고백하시는 분들도 있지만,모든 신앙의 출발점은 “하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해우리가 결심하고, 믿기를 각오하고, 다짐하며 신앙을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로 돌아가 봅시다.많은 사람들이 아마 예수님을 만났을 것입니다.각색 병에 걸린 사람들, 눈먼 사람들, 앉은뱅이, 중풍병에 걸린 사람들, 말 못 하는 사람들,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마 “이분은 세상에 둘도 없는 용한 의술을 가진 의사였구나”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이 지혜와 이 능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는가?”라고 물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예수님을 가리켜 “놀라운 지혜를 가지신 분이시구나”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또 예수님이 행하시는 많은 이적들을 바라보면서“이런 마술사는 없겠구나” 하며예수님을 마술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겠죠.

그리고 예수님이 세례 요한처럼 청빈한 생활, 광야의 삶을 사는 모습을 보면서“정말 이분은 도덕적인 삶, 신앙적인 삶을 사는 성인이구나, 성인 군자구나”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간디라는 인도의 사람을 보면,어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성인이라고까지 칭호를 붙이는데,그분도 “나는 예수님을 믿지는 않지만, 예수님이 전해 준 산상수훈은 나의 교훈으로 삼고 따른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아마 간디 같은 사람이 예수를 만났다면“놀라운 성인이다”라고 말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랍비라는 칭호를 붙이기도 하고,때로는 선생이라는 칭호를 붙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제자들에게 묻습니다.14절을 보시면, 제자들에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견해를 묻게 되는데 이렇게 말합니다.“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세상 사람들의 시각을 놓고 제자들에게 묻는 것입니다.그래서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의 시각을 일반적으로 요약해서,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예수님께 보고를 드리죠.

“첫 번째로 어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라고 어떤 제자가 이야기를 합니다.

세례 요한의 특징이 무엇입니까?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처럼“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외쳤듯이, 예수님도 동일하게 외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례 요한입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당신은 엘리야라고도 이야기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엘리야의 대표성은 무엇이냐 하면,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영적인 대결을 펼치지 않습니까?

바알 선지자들과 엘리야가 누가 참 하나님인지 테스트를 해 보자고 합니다.그래서 바알 선지자들은 함께 모여 밤새도록 이름을 부르고,몸에 상해를 가하면서 그렇게 부르짖었지만,바알은 응답하지 않는 겁니다.

그때 엘리야가 조롱하지 않습니까?“야, 너희가 섬기는 바알이 아마 잠깐 졸고 있는지 모르겠다.”이렇게까지 조롱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엘리야 때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그 제단을 사르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또 이스라엘 땅에 3년 반 동안이나 기근이 닥쳤을 때,엘리야의 기도로 그 기근이 닥쳤던 땅에 비가 내리는 일도 경험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여러 이적들을 바라보면서사람들이 엘리야를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그래서 제자들 중 하나가“엘리야라고 합니다.”이렇게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또 어떤 제자는 나와서“예레미야라고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칭호가 붙지 않습니까?망해 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라보며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했고,하나님을 떠난 영적으로 어두운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간절히 기도했던 그런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눈물로 호소하고,눈물로 기도하셨을 뿐 아니라,그 기도에서 멈추지 않고 실제로 당신께서 희생양이 되시고,속죄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일까지 당하신 분이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예레미야라고도 했던 것입니다.예수님께서 흘리시는 눈물,이스라엘을 향한 그 안타까움과 탄식을 보면서예레미야를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질문하십니다.15절에 이르시되,“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많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라고도 하고,엘리야라고도 하고,예레미야라고도 하는데,그러면 너희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 앞에서 제자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아마 제자들의 당황함은,앞서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처럼어떤 제자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와 같은,하나님의 능력으로 오시는 선지자로 보았을 수도 있고,또 어떤 제자들은 눈물을 통해민족을 사랑하시는 선지자로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질문 앞에서, 제자들은 당황합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오셔서“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지만,너희는 오늘날 나를 가리켜 누구라고 하며,예수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어떤 마음으로 믿고 따르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우리는 과연 어떤 대답을 주님께 내어 놓을 것인가?

이렇게 제자들이 당황하는 사이에,사도 베드로가 16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다 같이 한 번 16절을 같이 해 봅시다. 시작.“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부분은 빼고,“주는 그리스도시요”부터 다시 한 번 해 봅시다. 시작.“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 앞에,우리는 당당하게“주님, 그리스도이십니다.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이러한 고백이 우리에게 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에서 한 가지를 밝혀 놓습니다.마치 “베드로가 제정신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베드로가 이 고백을 하게 된 것은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뜻 가운데 알게 하신 것이라고뒷부분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즉, 베드로의 육신적인 마음으로,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지식으로,베드로가 경험했던 예수님만으로이 고백이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성령께서 베드로의 마음속에 임재하셔서그것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베드로가 이 고백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이 고백은,우리가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예수에 대한 지식이 월등히 뛰어나기 때문에,또는 다른 누구보다 예수님에 대한 영적 경험이 풍성하기 때문에우리 입에서 나오는 고백이 아니라,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그 답변을 해 주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베드로가이렇게 정확한 답변을 내놓으리라고는기대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그래서 이 말씀 앞에서 예수님은 굉장히 기뻐하시죠.자, 한번 봅시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무엇입니까?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그러니까 “그리스도”라는 말 속에는“당신은 왕이십니다.다윗의 왕가에서 오시리라 약속된 메시아이십니다.”라는 고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또 제사장에 대해서도우리는 때로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메시아가 가지고 있는 직분이 세 가지가 있는데,그중 하나가 왕권이고, 또 하나가 제사장이 가지고 있는 제사장 직분이지 않습니까?

당신이야말로 당신의 몸을 통해 희생되시는 그 희생으로,우리 모든 인류를 구원하실 속죄양으로 오신 분이십니다.이 고백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말 가운데 담겨 있는 것입니다.

또 “당신은 선지자이십니다”라는 고백도 담겨 있습니다.이 선지자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구약 이전부터, 구약 전체 성경을 통해오실 것을 예언해 왔던 메시아,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고 기대하던 바로 그분,그분이십니다라는 고백이“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 안에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다시는 왕권으로 오실 왕의 원리를 가지고,하나님의 나라의 통치 원리로 우리를 다스리실 분이십니다.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희생양이 되셔서하나님께 속죄 제물로 드려지실 분이시고,우리는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라는 고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또 당신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분이 아니라,옛날부터 예언하고, 예언하고, 또 예언해 왔던그 선지자, 바로 그분이십니다.이 고백이 “그리스도”라는 말 안에 담겨 있는 것이죠.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미지의 세계에서 막연하게 이름만 불렀던 하나님이 아니라,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시며,당신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으신 분으로서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을 베드로가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시는 것,불쌍하고 가난한 자를 어떻게 치유하시고그들에게 소망을 주시는 것,바다 위를 걸으시며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바다를 잠잠케 하신 일들,이 모든 것을 보면서 베드로는“과연 이분이 누구신가?”를그전부터 계속 생각해 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시각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십시오.병을 고치는 것, 능력을 행하는 것,바람을 멈추고 바다를 잔잔하게 하는 것,여기에 시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행하시는 저분은 누구신가?여기에 베드로의 시각이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장을 보시면 한나의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까?집에 가셔서 한번 보십시오.왜 그 기도가 위대한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합니까?아들이 없는 자신의 처지,그 억울함과 격동하는 마음을 안고분에 가득 차 성전에 올라와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사무엘이라는 아들을 주셨을 때,한나가 하나님께 찬송하는 내용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핵심은기도의 응답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한나의 찬송, 한나의 찬미는자신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이 누구신가,원통해하고 억울해하던 한 여인의 기도 소리를 들으시고귀를 기울이시며 응답하시는 그 하나님이 누구신가,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기적과 이적을 행하시고,불쌍한 자, 가난한 자를 격려하시고 소망을 주셨지만,베드로는 그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여기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지금 베드로가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그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라는 결론이베드로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동일한 고백을 한다고 할지라도,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그 자체에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을지금 베드로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 하면,“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자, 제정신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으로 베드로가 이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바요나 시몬아”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바’라는 말은 ‘아들’이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바나바, 위로의 아들, 이런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베드로는 요한의 아들 시몬인데,왜 여기에서는 요나가 나왔을까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42절을 보십시오.앞의 스크린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를 번역하면 베드로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시몬이 요한의 아들로 나오고,오늘 본문에서는 바요나, 요나의 아들로 등장합니다.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마태복음이 먼저 기록되지 않았습니까?이 시기에는 아람어, 그러니까페르시아 쪽 방언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우리 어른들께서도“밖에서 하나 가지고 와”이런 일본식 표현을 아직 쓰시듯이,아람어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라는 이름은 헬라식 이름이고,요한복음이 더 뒤늦게 기록되었기 때문에헬라 문화권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그래서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표현이 나오고,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요나의 아들 시몬”은아람어적 표현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아주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 의문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이런 배경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마태복음이 기록된 시기와요한복음이 기록된 시기에는시간적 차이가 있다는 것도 함께 보시면 좋겠습니다.

자, 여기에서 예수님께서“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보지 못했습니다.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지만,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들에게는아무리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 주셔도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내가 이렇게 너희와 함께 있는데,어찌하여 또 하나님을 보여 달라 하느냐?”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네가 영적인 눈을 떴구나.그래서 나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구나.네가 영적인 귀가 열렸구나.그래서 내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구나.”

여러분, 세상에서 받는 복은사실 우리가 100년 후에는 다 사라질 복입니다.앞으로 50년 후에 이 자리에 앉아 계실 분도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다 사라지는 복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받는 영적인 축복은영원한 것입니다.

여러분, 백 년과 영혼,어떤 것이 더 귀합니까?어떤 것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영적인 눈을 뜨고,영적인 귀를 열어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이 영적인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바로 그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네가 복된 사람이다.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께서 오늘 너와 함께하시는 것을네가 보는구나.”

그러니 베드로가 복된 사람인 것이죠.

여러분들이 지금 두려움 가운데 있고,막막한 상황 가운데 있을 때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주신다면 어떻겠습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놀라지 말라.강하고 담대하라.내가 너와 함께한다.”

이런 영적인 음성을 듣는다면세상에 그것보다 더 큰 위로와 힘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성령께서 이것을 너에게 가르쳐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안다”라고 말할 때,그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존경받는 사람들 가운데도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반대로 제대로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지만,예수님에 대해 줄줄 외우며진실하게 고백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를 들면 무디 같은 사람을 보십시오.미국 땅에 얼마나 큰 영적 부흥과 각성을 일으킨 분입니까?지금도 무디 신학교가 있고,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합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는 찬송 가운데도무디가 지은 찬송이 얼마나 많습니까?우리가 그 찬송을 부르며눈물을 흘리고 감격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은 하버드 대학 박사 학위를 원하십니까?아니면 무디처럼,비록 많이 배우지 못했을지라도“당신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이 고백은학문으로도, 지식으로도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예수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해서자동으로 나오는 고백도 아닙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듣기 싫은 말이 있습니다.“우리 할머니는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으셨어요.”

그 말을 들으면제가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이렇게 묻습니다.“그래서 당신은 어떻다는 말입니까?”

할아버지, 할머니가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으면그게 우리 신앙이 됩니까?

지금 내가“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집이 5대째 믿는다, 6대째 믿는다,대대손손 예수 믿는 가정이다,이것을 자랑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입에서 그 고백이 나오지 않는다면,이 모든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은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은혜와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임은 분명합니다.예수를 더 가까이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이 신앙 고백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지금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18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름을 바꿔 주십니다.“너는 이제 게바, 베드로다.시몬이라고 부르지 말라.”

시몬이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듣는다’라는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그 의미에서 떠나서,“너는 이제 베드로다”라고 새 이름을 지어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천주교에 대해 부러운 것이 많지는 않은데요,바티칸의 재산은 좀 부럽습니다만,딱 하나 부러운 것이 있습니다.세례명입니다.

천주교에는 세례명이 있지 않습니까?그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과거의 너는 사라지고이제 신부님이 붙여 주신 그 이름대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독실한 분들은천국에서 과거의 이름이 아니라베드로, 헬레나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게 저는 굉장히 부럽습니다.그래서 예전에 제가 가르쳤던 학생들에게철야 기도를 하면서 이름을 다 붙여 준 적이 있습니다.“너는 베드로다.”“너는 요한이다.”성경에 나오는 이름을 하나씩 붙여 줬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 이름을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세례명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주님께서 시몬을 베드로라고 부르신 것처럼,“너는 이제 이렇게 살아라”라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시몬은 결국 무엇입니까?요나의 아들, 요한의 아들,그저 어부의 아들 아닙니까?

그런데 “게바”, “베드로”라는 이름은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겠다는부르심의 이름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도영어 이름을 성경 이름으로 쓰시는 분들이많이 계신 것 같습니다.

“데이비드” 하면 네다섯 명이 동시에 대답하고,여자분들은 “메리”라는 이름도 참 많지 않습니까?그 이름대로, 그 신앙대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영어 이름을 지으실 때,“나는 이렇게 살겠다”라는 각오로그 이름을 붙이셨을 것이라 믿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정체성을 새롭게 세워 주시고새로운 사람으로 부르신 것처럼,또 천주교에서 세례명을 주며“이제 세례받은 사람으로 이렇게 살아라”라고삶의 의미와 사명을 부여하는 것처럼,우리가 가진 이름도 그런 의미가 있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제 영어 이름은여호수아, 조슈아입니다.미국 분들은 저를 “조슈아 목사님”이라고 부르는데,여러분이 부를 기회는 별로 없겠지만아무튼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 위에,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드디어 교회가 탄생합니다.

신앙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지고,오순절에 이 교회가 본격적으로 출발하는 것을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태복음을 보며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지금까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 사상,메시아에 대한 기대는왕권을 가지고 우리의 슬프고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해결해 주실 해방자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메시아관은 무엇입니까?십자가를 지는 메시아,고난받는 종으로 오신 메시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교회”라고 할 때는십자가를 통과한 이유,하나님께서 부르신 그의 백성들이렇게 말하면 맞을 것 같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교회는 이 신앙 고백을 가진 사람,그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켜성경은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주교는 이것과 조금 다르죠.천주교는 교회라는 것을 건물로 가르키는 경향이 있어서성당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이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진 공동체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 신앙 고백을 하는 사람들,다시 말해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들,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속하시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는 이 신앙 고백을 가진 사람들의 무리,그것이 교회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교회관과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의 교회관은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교회관이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민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되었지만,신약 시대에 들어오면서 교회는 달라집니다.십자가를 통과한 사람들의 무리,곧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들의 무리,십자가를 고백하는 사람들의 무리,이것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께서“내가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말씀하실 때,이 ‘교회’라는 단어는 굉장히 귀한 단어입니다.

신약 사복음서에 이 단어가딱 세 번만 등장하는데,여기에서 처음으로 교회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그리고 교회에 대한 의무, 임무를 부어 주십니다.

결국 교회의 임무가 무엇이냐 하면,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에 대한신앙 고백이 있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머리가 되시고,우리는 각 지체로 부르심을 받은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사명이 무엇이냐고사람들이 물을 때,“머리는 그리스도이시고,우리는 지체로서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라고 답한다면,베드로가 16절에서 고백했던 신앙 고백처럼아주 정확한 답변이 될 것입니다.

제가 가끔 AI와 타이핑하면서 대화를 하는데,“정확하게 파악하셨습니다”이렇게 AI가 칭찬할 때가 있습니다.비록 컴퓨터가 하는 말이지만,그 말 들으면 기분이 좋더라고요.

여러분,“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것이 교회를 부르신,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사명이라고 안다면아주 정확한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공동체라고 말합니다.그러므로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고,교회를 다스리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가 크고 작은 것에는주님께서 큰 관심을 두지 않으십니다.중요한 것은 신앙 고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커서 소문이 자자한 교회라 할지라도그 안에 신앙 고백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반대로 아무리 작아도,그 안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고,성령의 간섭하심이 있고,성도들의 신앙 고백이 있으며,사랑이 흘러넘친다면,주님께서 보시기에 그 교회가아름다운 교회일 것입니다.

크고 작음은 중요한 기준이 아닙니다.우리 안에 신앙 고백이 있느냐,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9절을 한번 봅시다.아주 중요한 단어가 여기에서 또 등장합니다.

1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여기에서 여러분이 조금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바로 “천국의 열쇠”입니다.

이 신앙 고백을 하는 사람들에게천국에 들어가는 열쇠를 주셨다,이렇게 단순히 이해하면 안 됩니다.

영어 성경을 보시면‘key’가 아니라 ‘keys’입니다.S가 붙어 있습니다.열쇠 하나가 아니라, 열쇠들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왜 ‘천국의 열쇠들’이라고 표현했을까요?혹시 천국의 여러 문이 있다는 뜻일까요?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맹인이 눈을 뜨고,앉은뱅이가 일어나고,병든 자가 치유되는 것을 보시며“천국이 이미 임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했다는 뜻입니다.

천국이란 무엇입니까?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이 교회는 천국이 임한 교회다”라고 말할 때,그 의미는 물질이 많고,누리는 것이 많아서 천국이라는 뜻이 아닙니다.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여러분에게 천국이 임했다”라고 말할 때,마음이 편안하고 근심 걱정이 없는 상태를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다스리시며,인도하시는 상태,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는 상태,그것을 가리켜 천국이 임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열쇠들”이란 무엇일까요?천국이 임한 사람들에게 주어진권한, 능력, 임무, 사명,이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게 주어진 사명은음부의 권세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또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에게영적인 눈을 뜨게 하라.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말씀을 전하라.이 사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열쇠들’이라는 표현은‘사명’이라는 말로 바꾸어도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증거하는 일,영적으로 어두운 사람들을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눈을 뜨지 못한 사람들에게눈을 뜨게 하는 일,이 모든 일에는 열쇠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부어 주신 사명이요,우리에게 맡기신 소명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서기관이 새것과 옛것을 곳간에서 꺼낸다는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가지고사람들의 마음을 열고,영적인 눈을 뜨게 하는 사명,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하나님을 향한 신앙 고백이 흐르면그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사람의 생각만 흐르면그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의 생각이 흐르고,하나님의 방법이 세워지며,성령의 움직임과 인도하심이 있다면그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여러분,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지금 당장 대답하라는 말이 아닙니다.한 주 동안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이것이 부족하구나”라고 느껴진다면,한 주 동안 기도하면서“주님, 우리 교회가 이렇게 세워지게 하소서”여러분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고,한 사람이 나와서“말씀을 삶에 적용했더니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하셨습니다”라고 간증하면,그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그 사람이 좋은 성도입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알아갈 때,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됩니다.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교회,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성도,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우리의 책임이며, 우리의 사명입니다.

주님께서 이것을“천국의 열쇠들”이라는 표현으로우리에게 맡겨 주셨다는 사실을여러분들이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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