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Search

마태 15:29~39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 없는 은혜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심오한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할지라도,그곳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도 큰 하나님의 은혜요,하나님의 사랑임을 우리가 고백합니다.

이제 다음 주면 추수감사주일입니다.하나님께서 연말에 이런 추수감사주일이나 성탄절을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은 굉장히 큰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낙엽도 다 떨어지고,쓸쓸한 겨울이 찾아오고,시애틀은 또 왜 이렇게 비가 많은지비가 부슬부슬 내리다 보면자칫하면 우울해지기 쉬운 이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연말에 이렇게댄스기빙을 주시고, 성탄절을 주셔서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묵상하게 하시고,“나의 이 모든 것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시기 때문에우리에게는 놀라운 축복의 절기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편 84편을 보시면“고라 자손의 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제가 길지는 않게 한 부분만 읽어 드리겠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고라 자손은출애굽 당시 여러 사람들과 함께모세가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 위에 대한 권위와 지위를 시기하여모세의 지도권에 반항하였다가하나님 앞에서 크게 혼났던 가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겉으로 보기에 밝히기 어려운 가문의 수치가 있음에도하나님께서는 이 고라 자손의 가문을멸문지화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가문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고,그 직분과 사명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고라 자손은 레위 지파입니다.레위 지파가 맡았던 일이 무엇입니까?

아, 그런데 이것까지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그런데 여기서 오늘 말씀을 보시면서 한 가지 생각해야 될 것은10절의 표현을 보면, 이 고라 자손이 그래도 조금 힘든 일을 겪지 않았나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아마 성전에서 봉사하는 가장 중심된 자리에서는 다소 밀려난 상태,그런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하나님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이 표현은정말 놀라운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의 문지기라는 말은 단순히 문만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하나님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레위지파는 성전에 봉사하는 일을 맡았지 않습니까?그런데 문지기라도 좋습니다라는 고백은,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공급만으로 충분합니다라는 깊은 고백이 담겨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백이 무엇입니까?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세상 사람들로부터 얻는 즐거움, 유익, 부요함,세상이 주는 첫날 같은 기쁨들이 아무리 좋다 해도그것은 헛된 것이고,하나님 성전에서 문지기로 보내는 한 날이 더 낫다.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지혜, 내 노력, 내 방법으로 살아가는 천날보다,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공급받으며 사는 단 하루가 훨씬 귀하다는 고백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지난주에 묵상했던 가나안 여인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주인이 먹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인생이지만주인이 주시는 부스러기면 충분합니다.하나님 성전에서의 한 날이 좋은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가나안 여인이 그리스도를 이해했던 것도 이와 같습니다.“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시면 아무 의미 없습니다.”그 믿음을 내던진 것이죠.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는 모든 치유와 먹이심은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을 고치시고, 이방인들을 먹이시고,그 시발점이 어디였습니까?

바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었습니다.

이방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주님께서 주시면 부스러기라도 좋습니다.”라는 믿음과 간절함이그의 딸을 살렸을 뿐 아니라그 지역 전체, 이방 지역 전체에까지하나님의 은혜가 흐르게 하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마태가 굳이 이방 땅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이유는기적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닙니다.7병이어가 5병이어와 비슷하다, 이런 표적의 반복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초점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유대인에게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이방인들에게까지도 풍성하게 흘러간다.

마태는 이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이방 땅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혹자는“아, 오병이어 사건을 잘못 기록한 것 아니냐”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본문의 의도가 아닙니다.

기적이 일어났느냐, 안 일어났느냐가 핵심이 아니라하나님의 사랑이 어디까지 흘러갔는가,그것이 지금 마태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가나안 여인을 시작으로 해서이방 땅에, 이방의 모든 사람들에게,

눈먼 자에게, 병든 자에게,그리고 당시에는 물론 오늘날의 현대 의학으로도치료할 수 없는 아픔을 가진 사람들에게까지멈추지 않고 흘러갔다는 것을마태는 지금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시면이방인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되고,하나님의 나라의 문이이방인들에게 활짝 열리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우리는 선민이다.”“우리는 율법을 가지고 있다.”“우리는 성전을 가지고 있다.”“우리는 제사 제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고,우리만의 하나님이시며,이방은 거절하시고, 보지도 아니하시고,우리만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이것이 유대 사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유대 사상이그 당시로만 끝난 것이 아닙니다.이 사상은 지금까지도우리 가운데 흐르고 있습니다.

우월감입니다.

“우리는 먼저 믿었다.”“우리는 오래 있었다.”“우리는 더 많이 알고 있다.”이런 우월감 말입니다.

여러분, 십자군 전쟁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먼저 예수를 믿었던 백인들 가운데서도이러한 우월감이 얼마나 강하게 나타났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다.”“하나님은 우리만 사랑하신다.”이러한 생각 말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우리만, 우리들만”이라는 생각이우리 사회 깊숙이 퍼져 있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나는 이 교회에 오래 있었다.”“나는 여기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그러므로 나는 마땅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

이런 마음들이사실 우리 모두의 안에 존재합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이런 우월감을 가지고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오래된 사람이나 처음 온 사람이나,남자든 여자든,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배운 사람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하나님은 구별하지 않으시고,가리지 않으시고,동일하게, 공평하게, 풍성하게사랑을 흘려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속에감춰져 있는 중요한 배경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맞습니다.그러나 우리만이 아닙니다.

소외된 사람들,배제된 사람들,외면당하던 사람들까지도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마태는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성경 공부 시간에여러 번 나눴던 간증이 하나 있습니다.제가 그 간증을 한번 들은 적이 있는데요…

아, 친구가 춘천에서 학교를 다녀서 제가 가끔씩 놀러 갔었는데거기에서 CCC—대학생 선교회죠—그곳에서 사역하는 어떤 자매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자매가 성경 공부를 마치고 전도를 나가기로 했습니다.전도를 어디로 나갔냐면, 바로 서울역으로 나갔습니다.춘천에서 서울역까지 가는 것, 얼마나 힘이 듭니까?그런데 이 자매는 마음속에 다짐을 했습니다.

“오늘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겠다.”

그렇게 기차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습니다.그리고 계단을 올라가는데—그 계단 중간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누구냐면,술에 잔뜩 취해 비틀거리고 있는 거지 한 사람이었습니다.

자매가 순간 멈칫했겠죠.

“아… 설마 이 사람은 아니겠지.”그리고 그냥 지나쳐 계단 아래쪽으로 도망가듯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내려가다가 마음에 이런 생각이 강하게 들어온 겁니다.

“내가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마음에 작정하고, 춘천에서 여기까지 왔는데…이렇게 도망가면 안 된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그 술 취해 있는 거지에게 다시 올라가 가서 말을 건넸습니다.

그 자매가 전한 복음은 딱 한 문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 한 마디에그 거지가 갑자기 눈물을 쏟기 시작한 것입니다.말 그대로 눈물바다가 된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이 말을 얼마나 쉽게 듣습니까?

매주 예배 때마다 문 앞에 들어오며“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표지판을 보기도 하고,집에서도, 어디서든 익숙하게 듣는 말입니다.

우리에겐 흔한 말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그 거지에게 그 한 마디를 전하는 순간,그 사람의 마음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어찌 보면 위로의 말도 아니고어찌 보면 특별한 문장도 아닌데,왜 그토록 눈물을 흘렸을까요?

그 자매가 사영리를 전하고,영접기도까지 마치고 나서기쁨 속에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눈물을 흘리셨어요?”

그러자 그 사람이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서울역 계단에서오랫동안 거지 생활을 하며 살았는데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오르락내리락 지나가면서‘단 한 사람도’ 나에게 말을 걸어준 적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그를 스쳐 지나갔겠습니까?얼마나 많은 사람들이그의 앞을 왕복하며 다녔겠습니까?

그 누구도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그런데 어느 날, 문득 예쁘장한 여학생 하나가 자기에게 와서“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이 말을 하는 순간,

자기에게 대한 관심,자기에게 대한 위로,자기에게 대한 존재의 인정이한꺼번에 밀려오면서눈물이 터져 나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정말 이렇게 소외된 사람도 사랑하십니다.어떤 방법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사랑하시는지는우리가 다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사람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고소외된 그 사람에게도하나님은 직접 찾아가셔서 위로하시고,하나님은 직접 찾아가셔서그 크신 사랑을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하나님의 사랑을 입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사람이아무리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아프리카 땅에서 살아가는 피부가 검은 흑인이라 할지라도,유럽에 있는 백인이라 할지라도,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배운 사람이든 배우지 못한 사람이든,

하나님의 사랑은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동일하게 흘러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에서 “누구든지”라는 말은“나는 아닐 거야”,“저 사람은 아닐 거야”라는 말이 아니라

정말 ‘누구든지’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오는 자는구원을 얻는다는 선언입니다.

그 사람이 유대인이든,그 사람이 이방인이든,오랫동안 예수를 믿었던 사람이든,오늘 처음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이든,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이시며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이 고백 앞에하나님의 사랑은 동일하게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이 십자가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선민이었고,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십자가가 없어도,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아도하나님께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갑자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하나님께로 가는 길은다른 어떤 방법도 아니고오직 십자가뿐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 입장에서는이 말이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이미수많은 제도들이 있었고,수많은 제사들이 있었고,그 모든 과정을 통해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달랐습니다.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누구든지,이방인까지도,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다는 것이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유대인들은예수를 거부했고,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선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29절을 한번 보겠습니다.29절 말씀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수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 거기에 앉으시니라.”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예수님께서는 수로보니게 지방,곧 두로와 시돈 지방,이방 땅에서 가나안 여인을 만나셨습니다.성경은 분명히 그 지역을 이방 땅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주님께서 그곳을 떠나 다시 갈릴리로 오셨다고 기록합니다.마태복음에는 그 이동 경로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을 보면예수님께서 오시는 길에 데가볼리 지방을 지나셨다고 되어 있는데,그곳 역시 이방 지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갈릴리에 도착해서 산에 올라가셨는지,아니면 이방 땅에 계실 때 산에 올라가셨는지는성경이 정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우리는 그것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그 장소가 이방 땅이든,유대 땅이든,산 위이든, 갈릴리 호숫가이든그 장소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지금 예수님 앞에 모인 사람들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은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유대인들이 아니라,수로보니게 지방에서 가나안 여인이 치유받는 사건을 보고,그 소문을 듣고,예수님을 따라 나온 이방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대상으로주님께서 말씀을 전파하시고,주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장면이지금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3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라.”

여기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다리 저는 사람,장애인,맹인,말 못하는 사람,그리고 기타 여러 병자들입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고,당시 기준으로는 종교적으로도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어렵다고 여겨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예수님의 발 앞에 앉혀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이 말은 단순히 치료를 받았다는 의미를 넘어서,그들이 예수님 앞에 의탁되었다,전적으로 맡겨졌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짧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합니다.“고쳐 주시니라.

이 장면을 통해 마태가 말하고 싶은 것은단순한 치유의 기적이 아닙니다.하나님의 긍휼이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하나님의 사랑이차별 없이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아마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다리 저는 사람, 장애인, 맹인…그 가운데 누구 하나자기 스스로 그 길을 걸어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반드시 도와주어야만,누군가의 손에 이끌려야만그 자리에 올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님께 나오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그 출발점에는우리가 지난번에 묵상했던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저 가나안 여인,귀신 들려 그렇게 고통하던 딸을 둔 여인이예수님을 만나자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더라.”“혹시 나도 예수님을 만나면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기대감과 간절함을 가지고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요한복음에 나오는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이예수님을 만난 후“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온 동네에 전했던 것처럼,가나안 여인으로 인해그 지역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그 소문이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이 사람들 가운데는자기 힘으로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는 사람이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마 이 병자들을 데려온 사람들은친구였을 수도 있고,가족이었을 수도 있고,친척이나 이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서로 부축하며, 업고, 이끌며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병의 목록을 가만히 보면,당시의 의술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병들이고,오늘날의 현대 의학으로도쉽게 치료할 수 없는 질병들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이 그 병을 낫게 하기 위해그동안 얼마나 애써 왔겠습니까?얼마나 많은 방법을 시도해 보았겠습니까?

당시에는 주술적인 방법도 있었고,무당을 찾아가는 일도 흔했을 것입니다.“저 사람이 용하다더라”는 말이 들리면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 끝에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병 앞에서,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지치고 절망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상황 속에서한 줄기 빛과 같은 소식이 들려온 것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있는데,그를 만나자 병이 낫고 귀신이 떠나갔다더라.”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지금 예수님께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의 모습은,자신들의 연약함 때문에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했기에,자신들의 무능함을 알았기에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환경이 좋았다면 믿음이 더 좋았을 텐데.”“이런 상황만 아니었어도내 신앙은 더 나았을 텐데.”

그러나 이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환경이 문제였던 것이 아니라,오히려 그 환경이그들을 예수님께 이끌어간 통로였습니다.

길이 멀고, 몸이 불편하고,사람의 손에 의지하지 않으면 한 걸음도 옮길 수 없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이 사람들은 예수님만 만나겠다는 마음으로그 길을 나선 것입니다.

환경이 장애가 된 것이 아니라,오히려 은혜로 나아가게 하는 통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무리들을 향해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그렇다면 사람들은 그 산을 오르기 위해얼마나 더 큰 노력을 해야 했겠습니까?

그러나 이들에게는그 모든 환경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오직 하나—“내가 예수를 만나겠다”는 의지, 열망, 간절함그것 하나만이 그들을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예수님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그곳이 빈들이든, 산이든 상관이 없었습니다.왜냐하면 예수님이 거기에 계셨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 하나가그들을 그 자리로 이끌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간절함이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한 것을 보게 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맹인이 보는 것을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이스라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게 되는 일—현대 의학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는 것—우리 시대에도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이건 의학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이들은 간절했습니다.살고 싶었고, 낫고 싶었고,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그 간절함이 그들을 예수께 데려왔고,예수님은 그들의 형편을 아시고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무리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성경은 말하기를,어린아이와 여자를 제외하고도 4천 명이었다고 기록합니다.전체로 보면 훨씬 더 많은 숫자였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수많은 사람들이왜 그렇게 먼 길을 따라왔습니까?

그곳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내가 해결받고 싶은 것,내 마음 속 깊은 간절함—이 모든 것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바로 예수님뿐이다.”

이 믿음을 가지고 이방인들이 예수께 나온 것입니다.

반면 유대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유대 땅에서얼마나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까?얼마나 많은 놀라운 이적을 보이셨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그 모든 것을 보고도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예수님을 배척했을 뿐 아니라“저 사람은 사탄의 힘을 빌려 귀신을 내쫓는다”이렇게 모함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성전을 가지고 있다.”“우리는 매일 예배를 드린다.”“우리는 제사 제도를 가지고 있다.”“우리는 찬양이 있고 성가대가 있고, 전통이 있다.”

이 모든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그 성전에 예수님이 계시느냐,그 예배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느냐,그들의 신앙의 중심이 예수님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똑같습니다.

“어느 교회 다니세요?” 물으면교회 이름을 자랑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분이 하루는 너무 분해서 저에게 와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제가 동양선교회 다닌다고 하니까저 사람들 나를 쳐다보지도 않아요!”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그렇게 말했겠습니까?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교회 이름이 아니라, 그곳에 예수님이 계시는가입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성전은아무 의미가 없습니다.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전통, 형식, 구조는우리의 갈급함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찾았고,유대인들은 전통을 붙잡았습니다.결국 누가 은혜를 받았습니까?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좀 큰 교회 사모님이 오시면자리를 마련해 주고,“사모님 여기 앉으세요, 이쪽으로 오십시오”이런 대접을 해 주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작은 교회 사모님이 오면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경우도 있는 거예요.

어느 날 어떤 분이 너무 분해서 저에게 와서이렇게 이야기한 적도 있습니다.

“제가 동양선교회 다닌다고 하니까저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더라고요.자기 교회 집사만큼도 안 되는 취급을 하더라고요.”

유대인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자랑했습니까?그러나 그 자랑이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는 못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우리가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솔직히 우리는 작은 교회이기 때문에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우리는 예수님을 자랑합니다.”

큰 교회에는 자랑할 것이 참 많습니다.“우리는 선교사를 몇 명이나 파송했습니다.”“우리는 매년 선교사들을 초청해 후원합니다.”이런 자랑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작은 교회 다닌다는 것, 축복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아멘.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밖에 없습니다.큰 교회라도 예수님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작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예수님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예수님,우리가 자랑할 분도 오직 예수님입니다.우리가 힘들 때,우리가 어려울 때,우리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비판했고,냉소했고,“사탄의 힘을 빌려 사탄의 일을 한다”라고까지 말했지만이방인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감격했습니다.자신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자신들의 연약함을 만져 주신 그 하나님,그 예수님을 통해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주께 나아오는 사람은어린아이든, 여자든,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구별하지 않으시고그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우리도 이방인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자라 칭함을 받는 자들,곧 유대인들로부터할례를 받지 못한 자라 불리던 자들이라.”

유대인들은 말했습니다.“할례 받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

그리고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요,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아멘.

너희는 이방인이었다.너희는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앉아서소망 없이,죽을 날만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고,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졌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구원을 얻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우리도지금 예수님 앞에 나온 이방인들과 똑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고,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그들의 병을 고쳐 주셨고,그들이 가지고 있던 간절한 기대에응답해 주신 분이셨습니다.

그것처럼 지금 우리에게도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화목하게 하셨다”는 말 안에는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는단지 하나님과의 화목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그동안 서로 원수처럼 대하고서로 조롱하고 싸워 왔던유대인과 이방인이그리스도 예수 안에서한 형제요, 한 자매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의미가함께 담겨 있습니다.

32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임에먹을 것이 없도다.길에서 기진할까 하여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이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고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문제를 예수님 앞에 내어놓았을 때예수님께서는그들의 문제를 하나도 남김없이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는이 시간이 사흘이었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여러분,우리는 설교가 30분만 넘어가도집중력이 확 떨어집니다.

그런데 이들은사흘 동안이나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지냈는지,밤에 잠은 제대로 잤는지 모르겠지만분명한 것은그 사흘 동안그 산에서 영적인 부흥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전해졌고,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았고,상처 입은 자들이 회복되었고,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생겼습니다.먹을 것이 다 떨어진 것입니다.

처음에는 먹을 것을 가지고 왔을지도 모르고,어떻게든 버텼을지도 모르지만이제는 정말 먹을 것이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그들을 보시며불쌍히 여기셨다,곧 긍휼한 마음을 가지셨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이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예수님은말씀만 전하시고,병만 고치시고,기적만 베푸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들의 배고픔까지 보시는 분이시고,길에서 기진할까 염려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영혼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삶 전체를 바라보시는 분이십니다.

내 마음이 애가 끓는다.저 사람들을 보니까 너무 가엾다.너무 안됐다.

우리가 누군가를 보며 불쌍히 여기고,궁휼한 마음이 일어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잘 먹고 잘 사는 우리가며칠 동안 굶은 사람을 보면저 사람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배고플까 하는궁휼의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바로 그 마음을 가지신 겁니다.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사흘 동안 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도저히 이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3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드디어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일부 학자들은“이건 5병 이어와 동일한 사건인데두 번 기록된 것 아니냐”라고 말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칠병 이어의 기적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일어난 기적입니다.반면 오병 이어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차이가 있지요.

오병 이어 → 5천 명 먹임 + 12 바구니 남음칠병 이어 → 4천 명 먹임 + 일곱 ‘광주리’ 남음

여기서 ‘광주리’라는 단어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바구니보다 훨씬 큽니다.사도행전 9장을 보면,사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피해제자들이 사울을 큰 광주리에 넣어 성벽 아래로 내려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사용된 단어와이 칠병 이어에서 사용된 단어가 동일합니다.

즉,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큰 광주리였습니다.

그렇다면,일곱 광주리에 남은 양은오병 이어 때의 열두 바구니보다훨씬 많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들은병 고침을 받은 것만 해도 감사한데,이제는 먹을 것까지 가득 채워 가져갑니다.

광주리가 가득 찬 것을 보며,얼마나 즐겁게 발걸음을 옮겼을까?얼마나 감사했을까?

주님을 만나고,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의 걸음은늘 이렇게 가볍고 기쁨이 넘칩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마태가 이 기록을 남긴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적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얼마나 많이 먹였는지,얼마나 큰 기적이 일어났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태가 말하고 싶은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유대인만이 아니라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흘러간다.

유대인들이 “우리만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던 그 사고방식을주님께서 완전히 깨뜨리신 것입니다.

주님은가나안 여인으로 시작된 이 믿음의 역사를이방 땅 전체로 넓히셨고,그 사랑을 풍성히 흘려보내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오셨으나,그들은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오신 목적은유대인들만의 하나님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포함한열방의 하나님, 온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으로 오셨다는 것을마태는 이 장면을 통해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차별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교회가 가장 멀리해야 할 것이 바로 차별입니다.

  • “저 사람은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됐어.”

  • “입는 게 왜 저래?”

  • “저 사람은 처음 왔잖아.”

이런 마음과 말,교회 안에서는 사라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차별 없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차별하셨다면우리 중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초기 한국 교회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양반이 예수를 믿어도,천한 신분의 사람이 예수를 믿어도그들은 차별 없는 형제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현대로 올수록차별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 작은 차를 타고 오면 본 체도 안 하고

  • 좋은 차를 타고 오면 대접이 달라지는 현실

참 버려야 할 모습들입니다.우리의 연약함이지만, 반드시 내려놓아야 할 죄의 습관입니다.

열방의 구세주로 오신 주님은전혀 차별이 없으셨습니다.

유대인의 병자를 고쳐 주셨듯,이방인의 병자도 고쳐 주셨고,

유대인의 굶주림을 채워 주셨듯,이방인의 굶주림도 채워 주셨습니다.

줄인 자에게 음식을 주시는 하나님,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시는 하나님,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있지 않습니까?

차별 없는 신앙,차별 없는 공동체,차별 없는 사랑으로 살아가며

열방의 하나님께영광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cent Posts

See All
마태 :1~12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어떻게 땡스기빙 잘 보내셨습니까?아멘. 뭐 보통 땡스기빙 지나면한 6파운드 정도 살이 찐다고들 이야기하는데,각자 어떠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어 참 반갑고요.또 여러 연약함 가운데서도예배의 자리를 지키신 모든 분들 다시 한 번 환영합니다. 여러분, 성명이라는 시인 을 알고 계십니까?1982년, 83년쯤에 이분이 쓴 시들이복음성

 
 
 
추수 감사주일: 불완전한 제사를 완전케 하신 그리스도

우리 옆에 계신 분들과 인사 한번 하겠습니다.영으로 한번 하죠. 무슨 말 할지 아시죠? 해피 땡스기빙. 영어로도 한번 하겠습니다.해피 땡스기빙. 여러분, 추수감사절이면 항상 마음이 즐겁습니다.왜 즐겁습니까?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아멘. 풍성함뿐만 아니라,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그리스도 예수를 이 땅에 보내 주셨고, 그 예수로 말미암아감히 나아갈 수 없던

 
 
 
마태 15: 21~28 간절함에서 오는 믿음이 은혜의 자리로 이끕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그래서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도대부분의 성도님들께서 이미 내용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짧은 이야기 속에굉장히 깊고 무거운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오늘은 이 말씀을여러분과 함께 천천히 묵상하며그 의미를 나누려고 합니다. ✨ 가나안 여인, 이방 여

 
 
 

Comments


시애틀 동양선교교회 Oriental Mission Church Seattle

  • alt.text.label.YouTube

©2022 by 시애틀 동양선교교회 Oriental Mission Church Seattle. Proudly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