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5: 21~28 간절함에서 오는 믿음이 은혜의 자리로 이끕니다.
- seattleo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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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은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그래서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도대부분의 성도님들께서 이미 내용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짧은 이야기 속에굉장히 깊고 무거운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오늘은 이 말씀을여러분과 함께 천천히 묵상하며그 의미를 나누려고 합니다.
✨ 가나안 여인, 이방 여인의 등장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가나안 여인, 다시 말해 이방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 앞에 나아와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예수님의 반응은 매우 냉담합니다.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십니다.
그러다가 결국이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딸을 고쳐 주시는 장면이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 마가복음과의 비교: 이 여인은 누구인가?
이 이야기는마가복음 7장에도 함께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여인이라.”
헬라인이라는 말은그리스 문화권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수로보니게라는 말은시리아 지방에 속한 페니키아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페니키아는역사적으로 상업이 매우 발달한 민족이었고,오늘날 지도로 보면이스라엘 북쪽, 레바논과 시리아 인근 지역입니다.
당시 알렉산더 대왕이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헬라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을통칭해서 “헬라인”이라고 불렀던 것이죠.
즉, 이 여인은유대인과는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명백한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 그런데 마태는 왜 “가나안 여인”이라고 했을까?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왜 마가는“헬라인,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기록하고마태는 굳이“가나안 여인”이라고 기록했을까요?
이 질문의 답은마태복음을 기록한 목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마태복음의 기록 목적
여러분, 우리가마태복음을 묵상할 때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태가 이 복음을 기록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참된 그리스도이시며참된 메시아이심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읽는 독자들은마태가 기록한 모든 사건을 통해이 결론에 도달해야 합니다.
“아, 예수님은 참으로 그리스도시구나.”“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아이시구나.”
마태는 이 사실을유대인 독자들에게 분명히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 이 사건의 중심 메시지
그래서 오늘 본문은단순히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사건의 중심은 이것입니다.
이방 여인인 가나안 여인은예수가 누구신지를 알고 믿었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은예수를 알아보지 못했고오히려 예수를 배척했다는 것입니다.
즉,
배제되었던 사람이 믿었고
선택받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거부했다는 것
이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 구조입니다.
마태는 이 사건을 통해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다시 한 번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 가운데에는 이런 질문과 혼동이 있었을 것입니다.아니, 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두시고,그들의 땅을 두시고,왜 이방 땅으로 가시는 것인가?
복음이, 천국 복음이정말 이방인들에게도 임하는 것인가?
이러한 혼동 가운데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여러분들이 기억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마태복음에 의하면이방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였지만,막상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여겼던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있었습니다.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였고,설령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다 할지라도자신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요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구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겼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예수님의 시선은유대인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았고,이방인들에게로까지 흘러갔다는 것을여러분들이 기억하시면 됩니다.
✨ 예수님의 한탄 – 두로와 시돈
우리가 지난번에도 함께 묵상하였지만,마태복음 11장에 보면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이 큰 권능을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회개하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전하셨지만,그들에게는 그것이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한탄하신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에서 이런 일들을 행하였다면그들이 이미 회개했을 것이다.”
그만큼 유대인들은복음에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우리들은 알 수 있습니다.
✨ 가나안 여인의 고백 (22절)
22절 말씀을 보면두로와 시돈 지방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곳에서가나안 여자 하나가 예수님께 나아와 소리질러 이르되이렇게 말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표현이 바로**“주 다윗의 자손이여”**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바라본 시선에는이미 분명한 신앙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곧 메시아라는 고백입니다.
✨ ‘다윗의 자손’이라는 고백의 의미
여러분,“다윗의 자손이여”라는 이 고백은결코 가벼운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로 믿고 있는가?
이 여인이 바라본 예수님은단순히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분인가?
연약할 때 힘을 주시는 분인가?
물론 그런 분이시기도 하지만,이 여인은 그 이상으로예수님을 구원주 메시아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고백은예수님을다윗의 계보로 오실 그리스도,곧 메시아로 인정하는 신앙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는굳이 이 표현을 기록합니다.
✨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의 통치
마태가 이 고백을 기록한 이유는단순한 호칭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는어떤 방식으로 통치하시는 분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이 장면 속에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예수님을그리스도로,메시아로 바라보았습니다.
어떻게 이 여인이이러한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는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그녀는 예수님을누구보다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이 여인이 이런 믿음을 갖기까지는여러 사람들로부터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야, 남쪽으로 내려가면 유대 땅에예수라는 분이 계신데,사람이 도저히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고 계신다더라.”
“눈먼 자가 눈을 떴대.”“중풍병자가 일어났대.”“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았대.”
이런 소문들이아마 그 위쪽 두로와 시돈 지역까지전해졌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이런 소문은 금방 퍼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두로와 시돈 지방에도이 소문이 충분히 퍼졌을 것이라고생각할 수 있습니다.
✨ 고통 가운데 있었던 가나안 여인
그런데 우리들이 알다시피이 가나안 여인은그 딸이 귀신 들려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는 소문,귀신 들린 자가 나음을 입었다는 소문을누구보다도 빨리 접하지 않았을까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단순히 소문만 듣고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면,단순히 기적을 행하신다는 소문만 듣고“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다”이렇게 고백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메시아에 대한 분명한 이해
이 여인에게는예수님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분명한 성경적 이해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이 여인은 성경 지식도결코 부족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을까?”“도대체 그 예수라는 분은 누구실까?”
그런 생각을 하며이 여인은 질문했을 것입니다.
✨ 성경으로 돌아간 여인의 믿음
그리고 그 질문은성경을 향하게 하지 않았을까우리는 그렇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일을 행하실 분은도대체 누구일까?”
이 질문을 가지고말씀을 살펴보았을 것이고,
그러다가메시아에 관한 성경 구절을발견하지 않았을까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단순히 기적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성경에서 약속된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곧 예수 그리스도를정확하게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설명을 조금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길지만 이사야서를 한번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서 9장에는메시아가 오셨을 때 무엇을 하실 것인지,어떤 방식으로 통치하실 것인지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9장 1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인데제가 읽어 드릴 테니여러분들은 앞에 있는 스크린을 보시면서 따라오시면 되겠습니다.
✨ 이사야 9장 1절–2절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이곳이 바로 두로와 시돈, 이방 땅을 가리킵니다.
예전에는 멸시받던 땅이었지만메시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그 땅을 영화롭게 하신다고 이사야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시면,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죽음의 골짜기,흑암 가운데 거하던 자들에게구원의 빛이 비추었다는 말씀입니다.
✨ 이사야 9장 3절–5절
3절에서는 추수의 기쁨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여러분,1년 동안 농사를 짓고 추수할 때의 기쁨이 얼마나 큽니까?
또 전쟁에서 이긴 후탈취물을 나눌 때의 기쁨은 어떻습니까?
그 기쁨과 같은 즐거움이메시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백성 가운데 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4절에서는무겁게 멘 멍에, 채찍, 압제자의 막대기가 꺾어질 것을 말하고 있고,
5절에서는전쟁의 도구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압제와 고통, 전쟁의 시대가 끝난다는 것입니다.
✨ 이사야 9장 6절
그리고 유명한 말씀이 나오지요.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낳고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그의 이름은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메시아의 오심,곧 그리스도 예수의 오심을이사야가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 이사야 9장 7절 – 핵심 메시지
그리고 7절에아주 중요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지금 이후로 영원히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여기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메시아의 통치 원리,메시아의 다스림의 방식은‘정의’와 ‘공의’라는 것입니다.
✨ 가나안 여인이 놓치지 않은 핵심
바로 이 부분을가나안 여인이 놓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개처럼, 짐승처럼 취급했지만,
이 여인은말씀을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그 빛이 이방 땅에도 비추는구나.” “다윗의 왕좌에 앉으실 메시아는유대인만이 아니라모든 민족을정의와 공의로 다스리시는 분이구나.”
그래서 이 여인은주저하지 않고 외친 것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이 고백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예수님을 메시아로, 왕으로 인정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그렇다면 우리는 예수의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단순히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눈물을 닦아 주시고 고통을 멈추게 하시는 분으로만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그의 다스리심, 그의 통치하심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그 통치가 무엇입니까?
정의로,공평으로,그리고 인자하심으로 다스리시며,그 다스리심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이 바로 그 신앙 고백을지금 이 가나안 여인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가나안 여인의 믿음 고백
이 여인이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어떻게 성경 지식을 갖게 되었는지우리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이 여인은예수님 앞에 나와서**“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말할 때,그 의미를 알고 고백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그냥 병 고치는 능력자를 부르는 말이 아닙니다.
메시아요, 왕이요,정의와 공의로 다스릴 통치자라는 고백입니다.
✨ 예수님의 의외의 반응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을 보십시오.의외의 반응을 보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은 이것입니다.
“네가 나를 다윗의 자손, 메시아로 안다면다윗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도알지 않느냐.”
다시 말하면,
“메시아는 유대인들을 위한 분이라는 것을네가 알고 있지 않느냐.”
이 말은이 여인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을 것입니다.
✨ 여인의 믿음이 드러나는 지점
그런데 이 여인의 반응을 보십시오.여인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여인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다윗의 왕좌에 앉으실 왕은이스라엘만을 위한 왕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방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며모든 족속을정의와 공의와 인자와 자비로다스리실 분이심을저는 압니다.”
이것이 바로이 예수님과 가나안 여인의 대화 속에서가장 중요한 신앙 고백의 핵심입니다.
✨ 오늘 우리에게 주는 질문
그래서 이 본문은오늘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희가 믿는 예수는 누구냐?”
단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까?당장의 아픔을 달래 주시는 분입니까?
아니면,정의와 공의와 인자함으로영원히 다스리시는메시아이신가?
이 여인은그 예수를 그렇게 보았고,그렇게 고백했고,그렇게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얼마나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우리는 여기에서 분명히 보게 됩니다.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이사야서 16장 5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장막에 인자하심으로 왕이 굳게 설 것이요그 위에 앉을 자는 진실함으로 판결하며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로다.”
이 말씀은이 여인의 고백을 보강해 주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메시아의 통치란 무엇입니까?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구분하지 않고정의와 공의가 흘러가는 것,그것이 진정한 공의이며그것이 하나님의 통치라는 것입니다.
✨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놀라운 이유
여러분, 잠시 이 여인의 입장이 되어 보십시오.
예수님 앞에서멸시를 당하고무시를 당하고아무런 대답조차 듣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이 여인은 말씀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성경을 근거로“메시아는 이런 분이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믿음과 말씀의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다윗의 왕권은혈통의 문제가 아니라정의로 다스리는 통치의 문제라는 것을이 여인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 마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여기서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는 왜 이 복음을 기록했습니까?
👉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누가 예수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까?
👉 이방 여인인 가나안 여인은 정확히 알고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던 유대인들은자기들의 신앙 우월감에 빠져예수님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침묵과 제자들의 반응
23절을 보십시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그 여자가 우리를 따라 소리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님의 침묵은이 여인에게 매우 서운하고 아픈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조차 안타까운 마음에 나섭니다.
“예수님, 저 여인이 저렇게 부르짖고 있지 않습니까?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시니무언가 반응을 좀 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의외로 단호합니다.
✨ 예수님의 거절 선언
24절입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여기까지 들었다면우리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 제자들의 중재도 거절👉 공식적인 사명 선언으로 선을 긋는 예수님
이 정도면대부분은 상처받고 돌아섰을 것입니다.
✨ 그러나, 여인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반응을 보십시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25절입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주여, 저를 도우소서.”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보게 됩니다.
✅ 예수님의 태도보다✅ 여인의 믿음이 더 단단해 보입니다.
침묵에도 물러서지 않고거절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사명의 벽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더 낮아지고,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 이 장면의 핵심
이 여인은기적을 구하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 메시아를 알고 있는 사람👉 그 다스리심을 신뢰하는 사람👉 정의와 공의의 통치를 믿는 사람
그래서거절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곧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적극적으로 다가서시고,이 여인이 뒤로 물러나야 할 것 같은데오히려 이 여인이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다가가고,예수님은 마치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을우리는 여기서 보게 됩니다.
한번 보세요.이 여인이 지금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귀신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기보다,“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귀신 들린 딸과 함께 살아가는 어머니의 마음이얼마나 찢어지고 무너졌겠습니까?
아마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으며,말씀을 묵상하며, 예수님이 누구신지를오랜 시간 생각해 왔을 것입니다.이 믿음이 하루아침에 생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긴 시간 동안 딸과 함께 고통 가운데 살며,그 아픔 속에서 나온 고백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요청을 넘어서,내 삶 전체를 붙들고 계신 주님 앞에서자신을 내어 놓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예수님 앞에 절을 합니다.
절을 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 당신 아니면 안 됩니다.👉 당신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오직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전적인 의탁과 경배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면예수님께서 이제 반응하실 법도 한데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이 더 거칠어집니다.
26절을 보세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러분, 이 말씀은 충격적인 말입니다.
이 여인을 개에 비유하며“나는 너희를 위해 온 것이 아니다”라고선명하게 선을 긋는 말씀입니다.
쉽게 말하면,“너는 대상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이 정도면 대부분의 사람은상처받고 돌아섭니다.분노하거나 절망하거나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여기서도물러서지 않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모욕에도 무너지지 않고,거절에도 흔들리지 않고,자존심보다 주님을 더 붙드는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우리 같았으면 기분이 상해서 그냥 돌아섰을 겁니다.“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왔는데,오히려 무시하고 개에 비유한다면상처받아서라도 돌아가 버렸을 겁니다.
요즘 같았으면“인격 모독이다” 하면서큰 소동이 벌어졌을지도 모릅니다.그런데 이 여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보시면 열왕기에 나아만 장군이 나오지 않습니까?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이스라엘 땅으로 찾아옵니다.엘리사가 큰 예식을 행하며 안수 기도해 줄 줄 알았는데,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말 한마디만 듣고분노하여 돌아가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이 가나안 여인을 한번 보십시오.이 여인은 나아만 장군보다더 큰 모욕을 당했고,더 깊은 거절을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물러서지 않습니다.오히려 더 낮아지고,더 겸손해지고,자신의 처지와 조롱까지도 받아들이며주님 앞에 머뭅니다.
그리고 2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옳소이다.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말을 들으셨을 때예수님께서 얼마나 놀라셨겠습니까?
오히려 이 여인의 믿음 앞에서주님이 더 놀라셨을지도 모릅니다.
유대인들은구원은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이방 여인,유대인들이 멸시하던 이 여인이메시아 앞에 나아와 이렇게 고백합니다.
“맞습니다. 저는 개와 같습니다.그러나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삽니다.모든 것은 주인에게서 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이것입니다.“하나님, 큰 은혜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부스러기라도 좋습니다.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면저는 그것으로 살아갑니다.”
이 겸손,이 절대적인 의탁,이 믿음이 여인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28절에서예수님께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네 소원대로 되리라.”
여러분,이 여인은 단순히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왔는지 모릅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신 것은문제가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그리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너의 믿음이 너무나도 놀랍다.네 소원대로 되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주님께서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래, 맞다.이것이 내가 원하던 기도다.이것이 내가 기뻐하는 믿음이다.”
주님께서는 지금정말 기뻐하시는 한 여인을 만나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여자여.”
그 여인이 무엇을 구하러 왔는지,그 마음의 소원이 무엇인지주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네 믿음이 크다”입니다.
여기서 ‘크다’라는 표현이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우리가 사람을 두고도“저 사람 부자야”라고 할 때가 있고,“저 사람은 갑부야, 거부야”라고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또 태풍 이야기를 할 때도“큰 태풍이다”가 아니라“메가톤급이다”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 단어가여기서 사용되었습니다.
“네 믿음은 크다”라는 말은“네 믿음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다.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믿음이다”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이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너의 믿음은 정말 위대한 믿음이다”라고칭찬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이 문제를 예수님께로 가져오지 않으면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또한 이 여인은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했습니다.이방인인 자신이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주인이 상에서 떨어뜨려 주지 않으면저는 먹을 수 없습니다.”
이 간절함,이 절박함이이 여인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크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라는 것은순수하기만 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는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부모가 공급해 주지 않으면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나는 받을 수 없습니다,하나님께서 채워 주시지 않으면나는 살 수 없습니다―이 믿음을 가리켜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여인이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께 가져가지 않으면이 문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거절하셔도,차갑게 말씀하셔도여인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자기 상태를 알고,자기 자리를 알고,겸손히 머물며끝까지 주님만 붙들었습니다.
이것이 믿음 있는 여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무엇보다도얼마나 간절했습니까?
겸손함이 있습니까?이 겸손함, 이 간절함이결국 이 여인을 은혜의 자리로 이끌었습니다.
여러분,인생을 살다 보면 정말 기막힌 상황을 만나지 않습니까?이민의 삶 속에서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한 번쯤은 다 겪어 보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믿음은 바로 그 기막힌 상황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풍요 속에서가 아니라풍랑 속에서 믿음이 나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혼자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 채 떠났을 때,그때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지금 이 여인이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막다른 상황,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자리입니다.
마태는 지금 이 장면을 통해유대인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너희가 개 취급하던 이방 여인 아니냐?너희가 멸시하던 가나안 여인 아니냐?
그런데 이 여인은예수를 그리스도라 부르고,다윗의 자손이라 고백하고 있지 않느냐?
주님께서 아무리 개 취급을 하셔도,아무리 거절하셔도이 여인은 지금어디로부터, 누구로부터 공급받아야 하는지를정확히 알고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너희는 뭐냐?”
마태는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모든 것이 다 주인에게서 나오고,그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이 여인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가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이미 다 가지고 있다면,우리는 주님을 절대로 의지하지 못하는완악한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모든 것이 사라지고,소망도 사라지고,절망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면그때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이 여인의 간절함이 드러났고,그 간절함이주님께로 향하게 했으며,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하나님,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아야 합니다”라는이 믿음으로,간절한 마음으로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 간절함을 외면하지 않으시고반드시 은혜의 자리로 우리를 이끄실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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