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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5:1~14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원래 20절까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내용이 조금 길어서, 중간을 나누어 읽었습니다. 왜냐하면 12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이, 15절에서 20절까지 나오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아주 중요한 세 가지 사역에 집중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복음을 전파하시는 일, 곧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를 가시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 어디를 가시든지, 회당에 가시든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유대인들이 잘못 알고 있던 부분들을 지적하시고, 그 의미를 바로 세워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우리가 특별히 좋아하는 사역이죠. 치유의 사역입니다.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며, 각종 질병에 걸린 자들을 만지셔서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의 질병 또한 주님께서 만져 주시고 고쳐 주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사역 가운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특히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몹시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2장에서도 보았듯이,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잡아 죽일까?” 하고 의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말씀에서 꼬투리를 잡아 흠을 낼 수 있을까?

그들은 이 문제를 예루살렘 공의회에 정식으로 보고했고, 그 공의회로부터 파송을 받아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합니다. 예수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라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꼬투리를 잡아 고발하려는 상황, 이것이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왔다”는 말은, 오늘날로 말하면 국회에서 공식적으로 파견된 조사단이 내려왔다는 뜻입니다. 당시에도 예루살렘에는 공의회, 즉 국회와 같은 최고 의결 기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공의회의 결정은 종교적 결정이자 동시에 사회적 결정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파송된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유심히 관찰하며, “무엇을 고발할 수 있을까?” 살펴보는 가운데, 마침내 고발할 만한 거리를 하나 발견합니다.

그것이 바로 2절의 말씀입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범합니까?”여기서 말하는 장로들의 전통이란,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한다는 관습이었습니다.

이 전통은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그 기원은 레위기와 신명기, 광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약 200만 명이 사막을 이동했습니다. 먼지가 얼마나 많이 일어났겠습니까? 물도 부족한 환경에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다 보면, 전염병이 퍼져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손을 씻고 음식을 먹으라”는 윤례입니다. 이것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지혜로운 규례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장로들의 전통으로 굳어졌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바로 이 점을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합니다.“당신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 곧 결례를 범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로들”이란, 단순히 나이가 많은 분들이 아니라, 율법에 정통하고 율법 해석에 권위를 가진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들의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분명히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전통을 만들고, 법을 만들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장로들의 유전”, 혹은 “장로들의 구전”이라고 말합니다.

‘구전’이라는 말은 무엇입니까?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문서로 기록되어 내려온 것이 아니라, 장로가 말하면 그 말이 곧 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거 하면 안 된다.”그러면 그게 법인 겁니다.

“이건 반드시 지켜야 한다.”그러면 그게 법이 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장로들의 구전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손을 씻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음을 씻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이 처음 주어졌을 때의 본래 목적은 무엇입니까?손을 깨끗하게 하라는 명령을 통해 마음까지 깨끗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형식만 남기고, 그 안에 담긴 본질은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죠.겉모습만 깨끗하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손을 씻고 또 씻는다 해도, 마음속이 더럽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외부보다도 내부가 먼저 깨끗해야 합니다.내 마음이 깨끗해야, 그 안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과 삶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됩니다. 손만 깨끗하고 속이 새까맣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위선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을 담고 있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파송을 받아 예수님의 흠을 잡으려고 하다가,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고발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왜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앞세워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있느냐?”

이 말씀의 뜻은 이것입니다.너희가 아무리 열심히 지켜 온 전통과 율법과 구전, 그리고 오래된 생활 습관들이 있다 하더라도,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그 모든 행위는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하나님과 멀어져 있기 때문에 그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바로 여기서부터 주님은 우리에게 그 질문을 던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형식을 너무나 중요하게 여겼고, 외적인 모습을 지나치게 중요시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주 강한 비유를 드시지 않습니까?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겉은 하얗게 칠해 놓았지만, 그 속에는 썩은 것과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겉모습만 번듯하면 무엇합니까? 속은 그렇게 더러운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마음속이 이렇게 새까만데 어떻게 그 마음속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나올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만을 향한 말씀이 아닙니다.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현대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여러분, 형식이 중요합니까?중요합니다. 질서가 있고 틀이 갖춰진 형식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형식이 사람의 마음을 상처 입히고, 사람을 멀어지게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면—그때는 그 형식의 틀을 깨뜨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여러분께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요즘 왜 이렇게 젊은이들의 자살이 많습니까? 미국이든 한국이든 너무나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저희 집 막내를 봐도, 어느 날 갑자기 울면서 “친구가 죽었어”라고 말해요. 왜 죽었냐고 물으면, “자살했어”라는 말을 너무 자주 합니다.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아이들인데,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 일이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한국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그 청년은 교회를 열심히 다녔지만, 자살했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장례식을 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떤 교회의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자식을 잃은 부모가 통곡하며 슬픔 속에 있는데, 그 앞에서 전통과 규칙을 먼저 내세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러분이 알고 계시는 교리와 전통 속에서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막 피어나는 꽃이 꺾였을 때, 그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억장이 무너지겠습니까? 세상에서도 외면당하고, 교회에서조차 장례를 거부당한다면, 이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 친구가 나섰습니다.“두말할 것도 없이, 내가 하겠습니다.”그 친구가 직접 장례를 치렀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통이라는 틀에 너무 매이게 되면, 사람보다 형식을 더 앞세우는 신앙을 하게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물론 교회에는 일정한 규칙과 질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위에 있어야 할 것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교회든지 규칙은 필요합니다.질서가 없으면 공동체는 금방 무너지고 혼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규칙을 따라 행동하고 절차를 지키는 것은 분명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무리 교회라 할지라도, 우리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형식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규칙 때문에 상처를 받고, 힘든 상황을 만나게 될 때—그 마음을 만져 주는 것, 그 아픔을 함께 안아 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렇게 말하면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그러면 형식 다 깨고 그냥 자유롭게 하면 되느냐?”

그건 아닙니다.정상적인 절차와 기본적인 질서는 분명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우리의 생명입니다.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입니다.그리고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겁니다.

너희가 형식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사람은 보지 않는구나.너희가 전통을 자랑하면서 정작 너희 마음속은 들여다보지 않는구나.겉모습은 그럴듯한데, 속은 얼마나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느냐—그것을 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처음 율법이 주어졌던 그 본래의 의도를 다시 꺼내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앞에 보여 주고 계십니다.이 말씀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사실 유대인들, 장로들, 종교 지도자들도 처음부터 나쁜 의도를 가지고 출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그들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킬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받으면,그럼 어떻게 해야 간음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연구했고,여러 가지 규칙과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받으면,그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를 고민하며 또 제도와 규범을 만들어 냈습니다.

문제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느냐 하면—그 형식이 목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사람을 살리기 위한 율법이,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형식을 붙들고 있기 전에, 마음을 먼저 보라.전통을 자랑하기 전에, 사랑이 있는지 돌아보라.

여러 가지 법들을 만들어 놓았다는 겁니다.그런데 문제는 무엇이었느냐 하면,그 많은 법들을 만들어 놓고 나서 가장 중요한 것,옛날부터 흘러 내려왔던 율법의 본래 의미를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든, 생명이 어떻든, 고통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고“율법이 더 중요하다”,“형식이 더 중요하다”이렇게 내세우는 모습이 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바로 그 모습을 예수님께서 지금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바리새인이라는 말 자체는 굉장히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우리는 흔히 바리새인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출발은 정말 멋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출발한 사람들이었습니다.“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우리가 절제하며 살겠다.겸손하게 살겠다.섬기며 살겠다.율법을 생명처럼 붙들고 하나님을 섬기겠다.”

얼마나 열정적인 신앙인의 모습입니까?얼마나 말씀을 가까이하려는 태도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해서인간의 마음이 자동으로 거룩해지는 존재는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예배가 끝나고 문을 나서면다시 세상의 모습이 나오지 않습니까?

아무리 예배를 잘 드려도,친교실에 들어가면 또 우리의 옛 성품이 고개를 들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잘했습니다”라고 칭찬받을 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바리새인들이 지치기 시작한 겁니다.사람들에게는 존경받고 싶은데,마음으로는 더 이상 감당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사람들 앞에서 보여 주는 신앙으로 바뀌기 시작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앞부분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그들은 골방에서 기도하지 않고 사람들이 보는 시장에서 기도했습니다.기도하다가 벽에 부딪혀 코피가 나도 닦지 않습니다.사람들이 물으면 뭐라고 합니까?

“아, 기도하다가 그랬습니다.”

겉모양은 철저하게 갖췄다는 겁니다.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형식은 완벽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예배할 때 얼마나 그렇습니까?

사실은요,내가 죄인이었는데 구원받았다는 것,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그것 하나만 가슴에 있어도 예배는 이미 성공한 겁니다.

그런데 그 마음 없이 그냥 앉아 있는 예배—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설교는 길고,목사는 성경을 한 절 한 절 설명하면서 땀을 뻘뻘 흘리고,집중도 안 되고,그 자리가 얼마나 버거운 자리입니까?

그런데 여러분,문제는 설교의 길이가 아닙니다.문제는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느냐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다.”

이 마음 하나만 있으면설교가 길든 짧든,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됩니다.

예수님이 책망하시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형식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그래서 3절과 5절 말씀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그리고 5절에서는 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 하기만 하면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율법을 지킨다고 말하지만,정작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말씀하신“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너희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있다”라는 말씀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니다.

그 대표적인 내용이 바로 마가복음 7장에 나오는 ‘고르반 제도’입니다.성경을 읽어보면 ‘고르반’이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 고르반 제도란 무엇인가?

고르반의 의미는 “하나님께 드렸습니다”라는 뜻입니다.즉, 사람이 자기의 재산이나 소유물을“이것은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하고 선언하면

➡️ 그 재산을 부모를 섬기는 데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당시의 사회는 우리 옛날처럼 대가족 제도였습니다.자녀가 늙은 부모를 돌보는 것,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도리이고 의무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의무를 피하고 싶었던 거죠.그래서 장로들이 만들어 놓은 이 전통을 이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재산은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고르반!”

그러면 그 순간부터 그 재산은부모를 섬기는 데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여겨졌다는 겁니다.

🔥 그런데 이 제도의 문제는?

고르반은 언제 하나님께 실제로 드려야 한다는 규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사람들은 평생 자기 재산을 마음껏 쓰고,부모를 전혀 도우지 않다가,죽기 전에 마지막 순간에야 하나님께 드리면 된다고 악용한 겁니다.

부모는 버려지고,자녀는 책임을 회피하고,장로들의 전통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신 겁니다.

“너희들의 전통으로 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하나님의 계명은 분명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런데 너희는 전통이라는 이름으로,형식이라는 이름으로,자기 욕심을 정당화하고 부모를 버리고 있으니그것이 바로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예수님은 이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 예수님은 율법의 본뜻을 다시 세우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 35–40절에서율법의 핵심을 다시 정리해 주십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며 묻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즉,

✅ 모든 율법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라.

  2. 이웃을 사랑하라.

고르반처럼 부모를 버리는 전통,형식을 지키기 위해 사랑을 저버리는 전통,관습을 위해 생명을 외면하는 전통—

이 모든 것은 예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율법의 본뜻은 언제나사랑이기 때문입니다.

✨ 다듬은 설교 원고 (계속)

선지자들도 그렇게 가르쳤습니다.율법도 그렇게 말했습니다.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지요.

“온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두 가지 안에 다 담겨 있다.”

그런데 너희는 어떻게 하였느냐?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부모를 공경하라는 분명한 계명을 두고도전통이라는 이름을 세워 자기 편한 대로 계명을 깨뜨리고 있지 않느냐—

예수님은 지금 이것을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 형식주의에 빠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문제는 매우 분명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장로들의 유전"—전통과 형식 속에 갇혀서

➡️ 형식만 지키면 됐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뒤로 미루고➡️ 율법보다 전통을 더 높여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있는데그 위에 자기들이 전한 구전(oral tradition)을 세우고그것을 계명보다 우위에 두어 버렸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 가톨릭의 사례를 예로 들며 (오해 없도록 부드럽게 표현)

혹시 이 자리에 천주교와 가까운 배경을 가지신 분이 계시다면오해하지 말고 들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개신교는 성경을 하나님의 절대적 말씀으로 믿습니다.성경보다 더 높은 권위는 없습니다.

그런데 천주교는“성경도 중요하지만 교황의 말씀도 동일하게 중요하다.”라고 가르칩니다.교황은 오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그의 말은 ‘흠 없는 말씀’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이 말씀한 것이 있다면성경이 무엇을 말하든그 말을 우선으로 받아들이는 구조가 생겼습니다.

이것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는우리가 종교개혁을 통해 잘 알고 있지요.

✨ 중세 시대의 오염된 교리의 예

중세 암흑기의 대표적인 오류가 바로 면죄부입니다.

“돈을 내면 죽은 사람이 지옥에서 빠져나온다.”“동전을 한 푼 넣는 순간, 그 영혼이 한 걸음씩 천국으로 간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고, 감정적으로 흔들리기 쉬우며,사람의 마음을 겨냥한 말입니다.사랑하는 가족이 지옥에 있다는데어찌 그냥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겁니다.사람의 전통과 권위가하나님의 말씀을 덮어 버린 대표적 사례지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정확히 그와 같은 오류에 빠져 있었습니다.

✨ 예수님의 강력한 책망

그래서 6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으로하나님의 말씀을 패한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잘 해보려고, 바르게 해보려고” 하다가오히려 문제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안 하면 문제는 잘 안 일어납니다.교회 일을 하지 않으면 갈등도 없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섬기고자 일하다 보면마찰도 생기고, 부담도 생기고, 고민도 생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형식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잃지 않도록,전통을 위해 하나님의 마음을 잃지 않도록항상 돌아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부분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잘하려고 하다 보니까 일이 생긴다는 겁니다.

처음 출발은 다 선한 마음입니다.어떻게 하면 교회가 더 좋은 교회가 될까?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내가 정성 들여 키운 상추를 가져가면 얼마나 기뻐할까?

이런 마음으로 시작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상추가 왜 이래?” 한 마디 나오면키운 사람의 마음은 무너지는 겁니다.

정성 들여 끓여 온 음식에“왜 이렇게 짜?” 한 마디 하면끓인 사람의 마음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그러나 섬기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교회 일이 바로 그런 겁니다.

✨ 본질을 보지 않으면 형식이 상처가 된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무엇이 더 중요한가?

힘들고 바쁜 가운데“우리 먹으라고, 우리 기쁘라고” 해 온 그 마음—그게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음식이 좀 짜면요,“그래, 물 좀 더 넣자.”싱거우면요,“소금 좀 더 넣자.”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늘 그렇습니까?입에 안 맞으면마음부터 먼저 반응하지 않습니까?

교회가 그렇습니다.잘하려고 하다 보면 부딪히고,생각과 생각이 충돌합니다.

그럴 때 꼭 붙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질입니다.

우리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우리는 무엇 때문에 여기 모였는가?우리는 무엇을 위해 섬기고 있는가?

본질을 놓치면우리의 열심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너희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패한다”는 말 속에 담긴 의미입니다.

✨ 전통보다 말씀이 먼저입니다

우리의 전통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합니다.

문제가 생길 때전통부터 붙들 것이 아니라성경부터 봐야 합니다.

“성경에서 뭐라고 말씀하시지?”찾아도 잘 안 나옵니다.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함께 기도합시다.한 주 더 기도하고다음 주에 결론을 내립시다.

이게 참 쉬운 것 같지만,실제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급합니다.당장 결론이 나야 하고,당장 해결이 돼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시간이 없고말씀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는 겁니다.

조금만 여유를 가지십시오.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그걸 먼저 보라는 겁니다.

✨ 입술과 마음이 다른 신앙에 대한 책망

그래서 예수님께서 7절과 9절에서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시며아주 강하게 책망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아,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을 교훈 삼아 가르치니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이 당시 사람들은요,성전만 잘 지어 놓으면자기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 보십시오.금으로 온통 덮여 있지 않습니까?겉모습은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금으로 덮인 성전이 아니라하나님께 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하나님을 위해서 드린다”라고 말은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다른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외형만 화려하게 만드는 일만 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성전 안에서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고,예물은 드리고, 의식은 지키면서**“나는 할 일을 다 했다”**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 외식의 예 — 세리와 바리새인

여러분, 성경에 이런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어느 날 바리새인이 성전에 와서 기도합니다.그 옆 구석에서는 세리가 고개도 들지 못하고가슴을 치며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때 바리새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여러분, 도대체 무엇이 감사합니까?저 사람은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있는데,자기는 무엇이 그렇게 잘났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조금도 살피지 않았던 것입니다.

입술로는“하나님을 사랑합니다.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라고 말했지만,

그 마음속은온갖 더러움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말씀이고,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정확하게 짚어 주신 장면입니다.

✨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여러분,한국 교회 현실을 한번 보십시오.

예수를 믿지 않아도 집사고,예수를 믿지 않아도 장로인 경우가 있습니다.

선거철만 되면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옵니까?

그리고는마치 오래 교회 다닌 사람인 것처럼자연스럽게 얼굴을 내밉니다.

저는 이 부분을 학생 때부터 많이 겪어 봐서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정치와 신앙은 절대로 결합하지 맙시다.

정치인들은신앙인을 필요할 때 사용하고,이용할 것 다 이용하고,어느 날 조용히 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젊은 성도들에게도 말합니다.그 안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마라.

아무튼,이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바로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는 겁니다.

✨ 형식이 신앙을 망칠 때

외식의 함정에 빠지면,형식의 틀에 갇히면,내용은 사라지고겉모습만 남은 신앙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사람을 살리는 신앙이 아니라사람을 판단하고 상처 주는 신앙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외식에서 벗어나는 길

첫째,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 안에서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말씀 안에서하나님을 사랑하라는 핵심을 다시 붙들어야 합니다.

둘째,자기를 부정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나는 옳다”가 아니라“주님, 제가 틀릴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 다듬은 설교 원고 (마무리 부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들은 맹인이다.”

맹인이 되어서 사람들을 인도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지만,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그 결과가 무엇이겠느냐?결국 둘 다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그냥 두어라.”

형식주의가 얼마나 무서운지를이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 형식주의가 만드는 신앙의 왜곡

우리가 형식주의에 빠지게 되면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입술로는“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만마음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 안에 자랑만 남습니다.

  • 내가 한 일에 대한 자랑

  • 나의 신앙에 대한 자랑

  • 나의 헌신에 대한 자랑

그리고 이웃을 볼 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저 사람은 나 같지 않지?”

비판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게 됩니다.왜냐하면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형식주의의 가장 위험한 함정입니다.

✨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에베소서 2장 8–9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의 구원은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닙니다.우리의 노력으로 된 것도 아닙니다.형식적으로 잘해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비교할 수도 없습니다.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 형식주의가 낳는 또 하나의 오해

형식이 내용을 앞서게 되면우리는 다른 사람의 신앙을쉽게 판단하게 됩니다.

“왜 교회에 자주 안 나오지?”“저래 가지고 구원이 있나?”

그러나 여러분,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은평생 교회에 나오지 않다가도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주님, 죄송합니다”라고 고백해도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열심히 헌신하고,교회를 섬기고,수고했는데마지막 순간에 돌아온 사람도 구원이라니불공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은혜입니다.열심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식으로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 결론: 형식보다 내용, 자랑보다 은혜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합니다.자랑보다 은혜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 일을 하다가부딪힘이 생기면잠시 멈추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이 일의 본질이 무엇인가?”“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금방 답이 안 나오면기도하십시오.말씀으로 다시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이것만은절대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은혜를 기억하며비교하지 않고,판단하지 않고,자랑하지 않고,사랑으로 서로를 세워 가는복된 한 주가 되시기를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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