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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4:22~33 풍랑 속에서만 기적을 경험 할 수 있습니다



아, 마태복음 8장은 이미 지나갔지만, 마태복음 8장에서는 주님께서 바다와 바람을 잔잔케 하셨다라는 기록이 있었습니다.그때는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셨고, 배에서 곧이 주무셨었죠.

그런데 예수님이 타셨지만 바다에 풍랑이 일어나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고, 예수님께서 명하사 바다와 바람이 잠잠하게 되었더라는 기록이 이미 마태복음 8장에서 우리가 묵상을 했습니다.

오늘 14장에서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여기에서 기록이 되죠.이 기적이 왜 중요하냐?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린 것처럼 지금까지의 기적들은 예수님 홀로 행하신 기적이셨는데 반해, 오병이어의 기적은 제자들을 동원해서 제자들을 통해 함께 기적을 만들어가시는 장면이기 때문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제자들이 이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다라면 그들이 평생 잊어버릴 것 같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을 겁니다.훗날 이들이 복음을 들고 세상 끝날까지 흩어져 나아갈 때, 이 감동은 아마 그때까지도 남아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아, 기적에 동원된 제자들은 이 기적을 통해서 점점점점 주님을 더 경험해 가게 되는 거죠. 아멘.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결국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만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멘.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바다로 빠져야 됩니다.

여러분들, 목사가 살인을 유도했다 이런 얘기가 아닙니다. 다 사마디 오스카에 빠져 죽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그것을 경험하려면…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물에 빠져야 된다는 거죠.

여기 베드로 같은 경우를 보면, 베드로 개인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 = 우리 성도들입니다.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라는 것은 우리 성도들 또한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것을 지금 성경은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초점이 어디에 있냐면, 풍랑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께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믿음이 없어서 의심하여서 물에 빠졌지만, 물 위를 잠시나마 걸어볼 수 있었던 베드로에게 초점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비유, 이 기적은 우리 성도들에게 초점이 있다는 겁니다.이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지만, 물 위를 걸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베드로를 통하여 훗날 제자들이, 훗날 성도들이 어떠한 위치에 있으며 어떠한 기적과 같은 삶을 누리며 살아갈 것인가를 미리 예를 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배 안에 있는 제자들은 배라는 보트가 있기 때문에 잠시나마 안전할 수가 있었습니다.그러나 그들의 불안은 풍랑이는 바닷가에서, 폭풍이 일어나는 그 파도 위에서, 배 안이라고 해서 그들의 두려움을 다 제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이심을 알아보고,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만큼은 놀라운 경험을 홀로 행하게 된 사도였던 것을 알게 됩니다.

배 안에 있었지만, 이들은 주님이신 줄 알았지만 물에 빠지지 않았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잠시나마 안전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기적을 경험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죠.

여러분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이 풍랑이는 바닷가에서 바다에 뛰어내린다는 것은 죽음을 자처하는 일이 아닙니까?그런데 바다를 뛰어내렸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생각했던 생각과, 베드로가 가지고 있었던 지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우리가 알게 된다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가 하나 생각을 해 봐야 될 것은 무엇이냐면,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가 “주님, 저도 걸어가게 해 주십시오. 오라 명령해 주십시오”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오라” 하시니까 베드로가 주님께 나아갔다라는 겁니다.

그러나 곧 풍랑이는 바다를 바라보는 순간, 두려움에 예수님을 의심하는 그 마음에 물에 빠지는 그러한 장면이 담겨져 있습니다.

여러분들, 베드로는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물 위를 걷고 싶었을까요?그냥 배 안에 가만히 있어도 주님께서 오시는데, 어떤 마음에서 물 위를 걸었을까를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베드로의 믿음을 굉장히 평가절하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베드로 정도의 믿음은 나도 같을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우리는 보통 베드로 하면 경솔하다, 충동적이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그런 사건들 때문에 베드로의 믿음을 우리가 굉장히 평가절하하지만,

그런데 베드로만큼은 주님을 믿는 믿음이 강해서, 주님이신 줄 알고 “걸어오라” 명하시면 “내가 걸을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졌다는 겁니다.

뭐, 나중에 물에 빠졌고 주님께서 그를 구원해 주셨지만, 우리는 이런 신앙들을 보면서 “베드로는 충동적이었다, 즉흥적이다, 성급하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을 가졌고, 그 믿음이 이제 작동을 한 겁니다.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이시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다라는 믿음은 우리들에게 다 있다는 겁니다.베드로도 마찬가지로 주님에 대한 믿음이 항상 있었다는 것이죠.

우리들이 세상에서 성공만 하고 살지는 않지 않습니까?믿음이 있다고 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그런 믿음이 있고, “항상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내 곁에 계시고, 나를 돌보신다”라는 이러한 믿음이 있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이 믿음을 항상 성공적으로 워킹시키고, 작동시키며 살아가는 성도는 한 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베드로도 믿음이 있었지만, 이 믿음이 항상 그의 신앙생활 속에서 성공적인 일만 있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 속에서 하나 찾아야 될 것은 무엇이냐면,믿음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의 책임과 특권은 무엇인가?이것을 이 말씀 속에서 찾아야 됩니다.

결국 “믿음을 가졌다”라는 그 얘기는 뭐냐면,나의 소원을 하나님을 동원해서 이루어내고자 하는 것,그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면 “저 사람은 백발백중, 기도하면 모든 것이 다 응답된다”그런 것을 가지고 믿음이 좋다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다라는 얘기는 어떤 것이 우선이 돼야 되냐면,하나님에 대한 전 인격적인 신뢰가 우선되어야 믿음이 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멘.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믿음의 어떤 결과들보다도,내가 기도하고 내가 믿는 그 하나님이 누구냐?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그 하나님은 어떤 일을 행하실 뿐이시냐?내 삶에 어떤 하나님으로 와닿느냐?

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함, 이것이 우선시 되어야 된다는 것이죠.

이 신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신앙적으로 실패해도, 또 신앙적으로 성공해도 결코 교만하지 않고 또 낙심하지 않습니다.하나님에 대한 신뢰함이 뚜렷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어떤 지적인 이해도 필요합니다.성경을 알지 못하면, 성경을 읽어서 “이 말씀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들이 믿음을 쌓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지적인 이해가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때로는 기도합니다.그리고 기도의 응답이 있을 때도 있고, 응답이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경험할 때, 우리가 느끼는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런 것들이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 있을 때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도 합니다.

그다음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을 우리의 삶에서 실천적인 행함으로 나타낼 때,우리의 믿음이 자라갑니다.

우리 성도들이 가장 안 되는 부분이, 이 신앙을 우리의 삶에 실천하는 이 부분이 가장 안 되는 것 같습니다.그런데 이런 세 가지—지적인 이해도 있어야 되고, 하나님에 대한 경험, 감정적인 그런 경험도 있어야 되고, 우리가 느끼는 하나님,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에 대한 우리의 삶의 실천적인 행함—이런 것들이 세 개가 합쳐져서 우리의 믿음이 이렇게 쌓여져 가는데, 우리가 굉장히 연약한 부분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실천한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이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시면서, 어떤 믿음을 가져야 될 것인가, 또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것을 요구하시는가를 하나하나 살펴보려고 합니다.

원인은 예수님이 제공하십니다.지금 이 사단이 일어난 것이, 제자들이 물에 빠져 죽어가는 이 상황이 일어난 것은, 예수님께서 원인을 제공하셨습니다.

한번 성경 보세요.22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죠.제자들을 빨리 재촉합니다.“즉시 건너편으로 빨리 가라. 내가 이 많은 무리들을 다 보내는 동안에, 너희들은 빨리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라.”

원인 제공을 지금 주님께서 하고 계시는 겁니다.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세요.지금 제자들을 통해서 기적이 일어났지 않습니까?남자 장정만 5,000명이면 최소한 모인 사람이 1만 명 이상, 2만 명 정도가 될 건데 제자들을 통하여 이 기적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제자들 마음에 얼마나 감동이 있었겠습니까?“야, 우리가 모든 것 다 버리고 예수님 따르기를 잘했다. 이제 이 예수님만 붙들면, 우리가 가는 길은 꽃길이다, 황금길이다!”

아마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축제가 일어나고, 파티가 일어나고 그랬을 것 같습니다.만약에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면.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잡아서 임금 삼으려고 하지 않습니까?그럴 때 제자들을 먼저 보내놓고, 예수님은 산 위로 홀로 올라가셔서 기도를 하셨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인을 제공하셨는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 순종의 결과가 꼭 성공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때로는 매우 쓰디쓴 경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으면 100% 성공이고, 100% 은혜 가득하고, 100% 황금문이 열리고, 시온의 대로가 촤악 열려야 할 것 같은데…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우리는 세상에서 실패를 경험하는 때가 참 많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세상에서 꼭 성공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무엇이냐면,

“예수 잘 믿으면 복 많이 받는다.예수 잘 믿으면 모든 것이 잘된다.자녀들도 잘되고, 사업장도 번성하고, 질병에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질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예수님을 잘 믿는데도 불구하고 믿는 자들이 고난을 당할 때가 참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입니다.

한순간에 그는 다 잃어버린 겁니다.재산이 없어지는 것은, 그동안 땀 흘려 모았기 때문에 다시 모으면 되겠지만, 부모들에게 가장 쓰라린 아픔이 뭐냐면 자식이 죽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루아침에 자식들이 다 죽어버리는 그런 고난 속에 있었던 겁니다.

성경은 욥을 “동방의 의인”이라 할 정도로 믿음이 뛰어났던 사람입니다.이처럼 믿음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잘되고, 무병장수하고, 뭐든지 건강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를 잘 믿어도 때로는 고난이 올 때가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게 됩니다.

예를 하나 들어 봅시다.주일 성수하는 문제로 인해서 사업장을 하시는 분들이 “문을 닫을 것이냐 말 것이냐” 많은 고민들을 합니다.

아, 물론 다행히 우리 교회는 그런 분들이 많지는 않지만, 어떤 사람이 자기가 믿음을 가지고 주일날 문을 닫았더니 토요일에 하나님께서 매상을  올려 주셨더라, 뭐 이런 간증들을 우리가 많이 듣습니다.

그거는 일부분의 경우이지, 대부분의 경우는… 아마 영원히 문을 닫게 되는 일이 참 많이 있습니다.그것은 “물질과 주님 사이에서 내가 주님을 택했다”라는 믿음의 선택이지,하나님이 주일을 지켰다고 토요일에 매상을 올려 주시는 분은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아마 마이너스면 마이너스지, 절대 그런 식으로 보상해 주시는 일은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과 주님 사이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 그 대표적인 예가 그런 것이 되겠죠.

그런데 우리가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무엇이냐면,예수님께서는 이 상황을 바라보고 계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지금 원인을 제공하셨지 않습니까?“배를 타고 빨리 가라”라고 하셨는데, 제자들이 풍랑이는 바닷가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그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지금 이 상황을 바라보고 계셨다는 겁니다.

25절 한번 보세요.

25절을 보시면“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자, 여기서 “밤 사경”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옛날에 우리 조선 시대 때도 “1경, 2경” 이렇게 시간을 나누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군사적인 시간 체계가 적용됐던 때입니다.

로마 사람들은 보초를 세 시간씩 세우는데, 이것을 수월하게 하려고 저녁 6시부터 새벽 6시까지를 네 개로 나누어 1경~4경이라고 했습니다.

  • 1경: 저녁 6시 ~ 9시

  • 2경: 밤 9시 ~ 12시

  • 3경: 밤 12시 ~ 새벽 3시

  • 4경: 새벽 3시 ~ 6시

그런데 예수님께서 언제 오셨어요?4경에 예수님이 오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언제 끝났습니까? 저녁에 그 일이 끝났지 않습니까?그리고 제자들을 재촉해서 보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최소한 저녁 6시~9시 사이에 출발했다고 생각해 보면,그 당시에는 해가 더 일찍 떨어졌기 때문에 6시에 출발했을 수도 있고, 늦으면 9시에 출발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경(4경)에 오셨다는 것은,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이 원인은 예수님께서 제공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움 가운데 처했으면, 빨리 찾아오셔서 그 제자들의 어려움을 좀 해결해 주셔야 되는데…예수님께서는 쳐다만 보시고, 오신 시간이 어느 정도냐 하면 무려 아홉 시간 동안이나 기다리셨다가 오셨다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이 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근데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셨다면, 좀 빨리 기도라도 끝마치시고 내려오셔서 최소한 세 시간 정도만 헤매게 하시지…무려 아홉 시간이나 제자들이 물속에서 힘들고 어려움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죠.

이 사실을 마가복음에서는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마가복음 6장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한번 보세요.

6장 47절을 보시면,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48절 바람이 거스름으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그죠?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셨고, 48절에는 밤 사경에 바다 위로 오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성경학자들이 이렇게 이야기해요.아마 갈릴리 해변에서 바닷가 중앙까지 나아갔다면 최소한 3마일 정도 갔을 것이다.왜냐하면 제자들의 직업이 어부였던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그러니까 자신들이 잘 아는 길로 갔겠죠.이 상황이라면 거의 갈릴리 호수의 중간 지점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48절을 다시 보면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바람이 거스름으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여기서 “보았다”, “힘들어하는 것을 보았다”라는 의미가 뭐냐면,

그들이 고난당함을 알고 계셨다,즉 “고난을 이해하고 계셨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힘겹게 그 상황을 지나고 있는 것을 보셨다는 것은,그들이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다.알고서 보고 계셨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아니, 마가가 지금 ‘고난당함을 아셨다’라고 언어적으로 표현했다면,더 빨리 오셨어야지! 왜 그렇게 늦게 오시나?”

아마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가 지금 당하는 건 누구도 알지 못한다.예수님이 가라고 해서 왔지만, 예수님도 이 상황을 모르실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해 보면,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고난을 당할 때,

“아마 주님도 이건 모르실 거야…”“아무도 나의 이 고통은 모를 거야…”

이렇게 혼자 끙끙 앓을 때가 우리의 삶에 참 많이 있다는 겁니다.

제자들도 주님은 모르실 거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그런데 주님은 알고 계셨고, 이해하고 계셨다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48절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밤 사경쯤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 하시매…”

여기서 먼저 풀어야 할 의문이 있습니다.“지나가려 하시매”라는 말이 헬라어 원어를 직역하다 보니 생긴 표현입니다.그래서 오해가 생기는데,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그들에게 찾아오셨다

이 뜻이 더 강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예수님이 바닷가로 굳이 오시겠습니까?그냥 빠져 죽도록 내버려 두셔도 되는데, 왜 굳이 오시겠습니까?

목적이 있으셨기 때문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셔서 “야, 힘들지? 그래, 계속 수고해.” 하고 그냥 지나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우리의 인생 속에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께서 “힘들지? 그래, 계속 힘들어봐.”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의미는, 주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찾아오신다라는 뜻이 더 강하다는 겁니다.우리가 가지고 있는 눈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슬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통,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실—이런 것들을 알고 계시고, 이해하고 계시고,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 오신다라는 의미가 여기에서 더 강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들 또 한 가지 의문을 가져봅시다.“왜 그렇다면 주님은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제자들을 그냥 두셨을까?왜 좀 더 일찍 오셔서 구하시지?안 오실 거면 아예 안 오시고, 오실 거면 빨리 오셔서 건지시면 되지 않나?”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 제자들의 직업을 생각해 봅시다.제자들은 갈릴리 주변에서 자라난 사람들이었습니다.이 호수가(성경에서는 바다라고 표현하지만)와 아주 가까이—어릴 때 놀면 바닷가에서 놀고 수영하고, 좀 더 자라서 돈을 벌려고 하면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정말 프로페셔널한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보내셨을 때, 아마 초경쯤에는 큰 일이 일어나지 않았겠죠.배를 띄우고 노를 저어 나아가는데, 바람이 좀 분다 할지라도 어부들에게는 별것 아니었을 겁니다.그래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방법, 수단을 다 동원해서 갈릴리 호수를 지나가려 했겠죠.

그런데 지나가다 보니 이게 장난이 아니더라는 겁니다.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상황을 이들이 만난 것입니다.

무려 9시간 동안 풍랑과 싸우며 깨어 있었던 제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야, 이쪽으로 가라.”“저쪽으로 가 봐라.”

제자들이 배 안에서 자기들 방법을 다 동원해 이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을 것입니다.하지만 시간이 9시간이나 흘렀고, 체력은 완전히 소진되고, 모든 방법도 소진되고,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그때 제자들은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그때 주님이 오시는 겁니다.바로 밤 사경에.

그래서 우리가 이 장면에서 생각해야 될 것은 무엇이냐면,“주님께서 왜 이렇게 늦으시는가?” 입니다.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이해하시고,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찾아오시는 하나님께서,왜 우리를 방치하듯이 고난 속에 오래 두시는가?

그 이유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이,‘자신들의 힘, 자신들의 지식, 자신들의 방법을 모두 내려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밤 사경입니다.

모든 체력이 소진되고,모든 지식이 소진되고,모든 방법이 소진되었을 때,그때 주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우리의 지식을 다 동원해서 삶의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우리의 방법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풀리는 어려운 일들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그러면 누가 주님을 의지하겠습니까?

주님을 의지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방법을 다 써도 안 될 때, 그때 하나님 앞에 나와서“하나님, 살려주십시오…”이 기도를 하는 겁니다.

제자들이 밤 사경이라 했다는 것은,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도 안 될 때,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내려놓았을 때,그때 주님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괴롭게 하려고, 성도들을 골탕 먹이려고 고난의 길을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이런 고난을 통해서 더 깊이 주님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은 이 고난을 통해서 주님을 더 알게 되는 것이죠.그래서 제자들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것을 우리가 말씀 속에서 보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나의 힘, 나의 방법, 나의 생각—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오직 주님의 힘을 의지하겠습니다.주님의 방법이 내 삶에서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깊은 의미 아닙니까?

내가 할 수 있으면 왜 기도합니까?내가 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내가 이루어낼 수 있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에, 내 방법을 내려놓고 주님의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게 결국 기도거든요.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우리의 모든 방법을 다 내려놓고 주님의 방법을 동원하는 것, 이게 결국 신앙생활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서 두 손, 두 발 다 드는 겁니다.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33절을 한번 보십시오.33절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면,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여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로소이다.”

이 고백을 얻어내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방법, 우리의 생각, 우리의 지식, 우리의 경험—다 동원해도 안 될 때,그때 주님이 우리를 도우시면,“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이 고백을 우리를 통해 얻어 내신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그전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몰랐다는 뜻은 아닙니다.제자들이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몰랐냐? 알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압니다.그런데도 우리는 그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삶에서 때로는 우리의 방법을 동원해서 해결하려는 때가 많지 않습니까?그러다가 실패하기도 하고,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자들도 동일하게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주님께서는 또 하나의 기적을 그들의 삶에 불어넣으심으로 말미암아그들의 믿음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지만,그 믿음대로 우리의 삶에서 믿음이 워킹되지 않을 때,주님께서는 주님의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를 믿음 가운데로 다시 부르시고,그 기적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업그레이드시키시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죠.

만약에 이들이 물 위로 뛰어내리지 않았다면,“주는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이 고백이 생길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고난을 통해서, 그들은“예수님이야말로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무엇이냐면,

순종하다가도 고난을 당할 때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면,

“아,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깨달았나?”“내가 믿음이 없어서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순종하다가도 때로는 어려움을 당할 수 있는 겁니다.순종한다고 해서 신앙의 성공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을 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배 안에 있었다면?육지에 있었다면?전혀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나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 5천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무리들과 함께 기뻐하고, 잔치하고, 축제가 일어났겠죠.

그러나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주님을 더 깊이 경험하는기적 같은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 안 하면 편합니다.말씀에 순종 안 하면 경제적으로 더 나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주일은 문을 닫습니다”라고 내걸었다가 사업이 안 되어 망하기도 합니다.정직하게 장사하다가, 세상 방식으로 부정하게 하는 사람들보다 더 가난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까?

바로 그렇게 망하는 순간에도 주님을 붙잡는 믿음,주님을 의지하는 그 믿음을 하나님은 더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8절을 한번 보십시오.드디어 우리가 좋아하는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일부 성경에서는 제자들이 “유령인가 보다!” 하고 두려워 떨었다고 표현하지요.여기서 “주님이시거든”이라는 말이 마치 주님을 의심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의도는 이겁니다:

“주님 맞으시군요! 과연 주님이시군요!어서 저에게 명하셔서, 저도 주님처럼 물 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의심이 아니라 확신에 찬, 적극적인 표현입니다.주님을 환영하는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명하십니다.

“와라.”

그때 인류 최초로,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겁니다.

여러분들, 물 위를 걷고 싶습니까?

아, 오늘 베드로처럼 한번 시도합시다.문제는 뭐냐면… 시애틀에는 풍랑이 안 일어나는 게 문제인 것 같아요.배 띄울 만한 배도 없고요. 😂

자, 30절을 한번 보세요.30절에 드디어 베드로가 주님을 의지하고 나아갔지만,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이런 경우가 참 많이 있다는 겁니다.

신앙이 좋을 때는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업(up)이 있지만,어떤 때는 바닥을 기는 것 같은 다운(down)이 있다는 겁니다.우리에게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베드로를 통해 우리 자신을 보는 거죠.우리도 베드로와 똑같습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3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원인은 의심이었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주님이시군요!” 하고 믿음으로 걸어갔지만,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갑자기 의심이 생긴 겁니다.의심하는 순간 그는 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칭찬하고 싶은 부분이 무엇이냐면,베드로는 어부입니다.평생을 바닷가에서 보낸 사람입니다.그러면 물에 빠져도 웬만큼 수영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즉시 주님께 손을 내밉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자신이 아홉 시간 동안 경험해 보니,자신의 모든 방법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것을 이미 깨달은 겁입니다.

그래서 물 위를 걸어갔지만 빠졌을 때,그는 즉시 누구를 찾습니까?주님을 찾습니다.

만약 아홉 시간 동안의 탈진의 경험이 없었다면,베드로는 또 자기 방법대로 헤엄쳐서 배로 돌아갔을 겁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라는 놀라운 훈련, 고난의 시간이베드로의 방법을 다 제거해 버린 겁니다.그때 그는 주님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주님의 책망도 있었지만,결국 베드로는 다시 살아났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우리도 신앙생활에서 실패하고 쓰러질 때,우리가 최초에 불렀던 그 하나님—그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내 삶에 환난이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나 봐…”이러고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주님께서 구원하신 것처럼지금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주님께서 나를 건져 주실 것이다.

이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물론 또 빠질 수도 있습니다.물론 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적들이 쌓이고 쌓여우리의 믿음이 성장해 가는 겁니다.그리고 그 믿음이 한 단계 성장하면…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와도,우리는 동일하게 주님의 이름을 붙잡고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살아나는 신앙입니다. 아멘.

예수님 없는 배는요,아무리 튼튼한 배라 해도 풍랑 속에서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배에 올라탄 사람은,풍랑이 일어나는 바다 위라 할지라도베드로가 걸은 것처럼예수 안에 있을 때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은,우리 성도들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그런 신분이요, 그런 자격을 갖춘 사람들입니다.왜?우리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풍랑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데,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데,풍랑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여러분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고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자들인데,우리 삶에 일어나는 환난이 무슨 대수겠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물 위를 걷지 못할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이처럼 놀라운 은혜요, 놀라운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환난을 주실 때, 환난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환난 + 은혜를 주십니다.

그 환난을 잘 통과한 사람들은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누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 물은 우리를 침몰시키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 세상은 우리를 침몰시키지 못합니다.

왜?우리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빠뜨리려고 풍랑처럼 위협해 오지만,예수의 손을 붙잡은 베드로를 넘볼 수 없었던 것처럼,성도들도 결코 세상에 넘겨지지 않는다는 것이이 본문이 주는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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