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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4:1~12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롯과 요한의 죽음



아, 지난주 말씀이 혹시 기억나십니까?지난주에 우리는 마태복음 13장의 마지막 부분을 함께 묵상했습니다.예수님께서 고향에서, 그리고 친척들과 가족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신 장면이었지요.그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또한 예수님을 적대하고 거부했습니다.

그렇다면,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가운데 오셨는데그의 백성들은 그 음성을 듣지 않았고, 환영하지 않았을까?더군다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오셨음에도,그들은 왜 메시아 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예수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랐던 메시아는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줄 구세주,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줄 구세주였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세상에서 높아지려면 낮아져야 한다고 말씀하시고,자신을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희생하라, 봉사하라, 순종하라, 겸손하라,그리고 죽기까지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곧바로 상급이나 보상을 주시지 않는다면,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 길은 너무나 손해보는 길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 유대인들,그리고 오늘날 많은 성도들까지도이 땅에서 힘이 없는 신앙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은 이렇습니다.“하나님이 내 삶을 축복하셔야 신앙생활이 즐겁다.”“내가 순종했으니 반드시 복을 받아야 한다.”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미 광야에서 보여주셨습니다.

40년 동안 만나를 먹이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지만,그들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불평과 불만이 흘러나왔습니다.하나님께서 그렇게 모든 것을 공급하셨는데도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우리가 바라는 예수님과,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님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예수님은우리가 원해서 찾아간 분이 아니라,우리를 먼저 찾아오신 분이십니다.

마치 값진 진주를 찾는 장사꾼처럼,좋은 진주 하나를 발견하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그 진주 하나를 사는 그 사람처럼,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순종하셨고,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습니다.그 주님이 바로 우리의 보화,밭에 감추어진 보배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감추어진 그 보화, 예수님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그래서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예수님이 더 소중하고 귀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발견했기 때문에세상의 것들을 다 팔아 그분을 사게 되었습니다.이제 세상은 더 이상 우리의 자랑이 아니고,세상은 더 이상 우리의 힘이 되지 않습니다.우리는 이미 그것을 다 팔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예수님만이 우리의 능력이고, 우리의 힘이며, 우리의 생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밭에 감추어진 보화의 비유가 주는 메시지입니다.우리가 세상 속에서 어떤 존재인지,우리가 발견한 예수가 얼마나 귀한 분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이제,그 보화의 이야기가 마무리된 후,성경은 마태복음 14장으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14장에서는 갑자기 요한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13장까지는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그리고 이제 14장으로 넘어오면,예수님의 새로운 사역이 다시 시작됩니다.그런데 1절부터 12절까지, 갑자기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끼어듭니다.

이미 우리는 마태복음 3장과 4장에서 세례 요한이 어떤 사역을 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주의 길을 평탄케 하라” 외치며메시아 되신 예수님의 길을 준비했던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대히 선포하던 중갑자기 이유 없이 옥에 갇히게 됩니다.그 이후의 이야기를 마태는 3장이나 4장에서 바로 설명하지 않고,지금 14장에 와서야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마태는 세례 요한의 죽음을 이 시점에 기록했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세례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새로운 사역의 전환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요한의 죽음은 곧 예수님의 공생애가 후반부로 접어듦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은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시고,우리 죄를 대신하여 순환의 길을 걸으시며,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사역의 길로 들어서십니다.

물론 그 과정 속에서도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능을 나타내십니다.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시고,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이적을 베푸시며,하나님의 긍휼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죽음은이제 예수님의 사역이 “십자가의 길”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이 뒤에 이어지는 오병이어의 기적,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사건 등도모두 예수님의 후반기 사역과 연결된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1절–2절: 요한을 죽인 자의 두려움

1절과 2절을 보시면,“그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신하들에게 이르되,‘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왕궁에까지 퍼졌습니다.그만큼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헤롯은 그 소문을 듣고 두려워했습니다.자신이 불의하게 죽였던 세례 요한이 혹시 다시 살아난 것은 아닐까 하는그 두려움과 죄책감이 그를 짓누른 것이죠.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그는 마음속 깊이 불안하고 떨렸습니다.

3절–4절: 세례 요한의 담대함

3절과 4절에서는 요한이 왜 죽임을 당했는지가 나옵니다.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더니,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요한은 권력 앞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당대의 왕이 잘못된 일을 했을 때그에게 직접 “옳지 않다”고 외쳤습니다.그 말 한마디로 요한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죠.

세례 요한의 신앙은 참으로 분명했습니다.그는 자신이 어떤 사명을 위해 부름받았는지를 정확히 알았습니다.수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몰려왔지만,그는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늘 분명히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내 뒤에 오시는 이가 그리스도시다.나는 그의 신들매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노라.”

세례 요한은 겸손했고, 순종했습니다.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만 감당했습니다.아무리 인기가 높아져도 결코 교만하지 않았고,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에는 단호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삶의 태도

그의 삶 또한 단순하고 거룩했습니다.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낡은 옷을 입으며, 세상의 풍요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부귀와 명예가자신의 사명과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그래서 왕궁에서 살 수도 있었고,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위치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요한은 철저히 하나님이 주신 자리에서만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의 사람입니다.그의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그의 생애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보다도 분명했습니다.그의 죽음은 비극처럼 보이지만,그의 마지막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완전한 순종의 마침표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습니다.지금은 ‘카멜(camel)’이라 하면 고급 울보다도 비싼 옷감이지만,그 당시 낙타 털 옷은 가난한 자들이나 입는 거칠고 불편한 옷이었습니다.제대로 된 옷감으로 짜지 못했기 때문에,거의 낙타의 가죽을 벗겨 그대로 걸치는 수준이었죠.

세례 요한은 그렇게 살았습니다.세상의 부요와 안락을 버리고,광야에서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자로 살았습니다.그의 사명은 단 한 가지 —“주의 길을 평탄케 하라.”그 길을 닦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일에 자신의 모든 생애를 쏟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세례 요한의 또 다른 특징은 불의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담대함입니다.

그는 헤롯 왕의 부도덕함을 보고도 침묵하지 않았습니다.왕의 죄를 보고도 “그건 옳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가 감옥이었습니다.자신에게 닥칠 해코지나 불이익을 알면서도하나님의 말씀을 멈추지 않은 사람,그가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당시 왕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살릴 권세도, 죽일 권세도, 재산을 주거나 빼앗을 권세도모두 그 손에 있었습니다.

누구도 감히 왕 앞에 나아가“왕이여, 그건 잘못되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달랐습니다.그는 정치적 권력 앞에서도 진리를 굽히지 않았습니다.왕이든 백성이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모두가 동일한 피조물임을 그는 알았던 겁니다.

요한복음 7장 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예수님께서 세상의 악을 드러내셨기 때문에 세상은 그분을 미워했습니다.진리를 드러내면 미움을 받습니다.세례 요한 역시 그랬습니다.왕의 잘못을 지적했기에 그는 미움을 샀고,결국 감옥에 갇히고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8절 이하로 가면,헤롯의 생일 잔치에서 그의 딸이 춤을 추자 왕의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고 나옵니다.다른 복음서에서는 그 감정의 움직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그 정도로 감정이 흔들렸던 순간,그 어린 딸은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달려가 묻습니다.“무엇을 구할까요?”헤로디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주소서.”

그 잔인한 청을 들은 헤롯은 얼굴빛이 변했을 것입니다.왜냐하면, 그는 세례 요한이 단순한 반역자가 아니라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6장 20절을 보면,헤롯의 마음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라.”

그는 요한의 말에 찔림을 받았습니다.그러나 동시에 그 말씀을 좋아했습니다.양심이 흔들렸지만,결국 그는 자신의 지위와 체면, 욕망을 더 사랑했습니다.

만약 그날의 잔치가 없었다면,어쩌면 헤롯은 요한을 끝까지 보호했을지도 모릅니다.하지만 결국 그는 군중의 시선과 권력의 체면을 이기지 못했습니다.그날, 그는 진리보다 사람의 눈치를 택했습니다.


2절을 다시 보면,헤롯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그 말은 헤롯의 양심이 아직도 요한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자기가 죽인 사람이 다시 살아온 것 같다는 말,그건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양심의 고백이었습니다.그의 마음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그 두려움은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헤롯’이라는 이름이 여러 명 등장합니다.그러나 그 이름 아래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권력은 있었지만 양심은 없었다는 것입니다.그들은 모두 진리를 두려워했고,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결국 무너졌습니다.

반면,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지만,그의 외침은 세상의 왕궁을 흔드는 힘이 있었습니다.그는 침묵하지 않았습니다.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그는 세상 앞에서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죽음 앞에서도 침묵하지 않았습니다.그의 외침은 육체는 사라졌어도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속에서 계속 울려 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의 악을 드러내셨고,결국 십자가에서 그분의 생명을 내어놓으셨습니다.세례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미리 보여준 예표였습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 속에서진리를 말해야 할 때, 침묵하지 말아야 합니다.그 침묵은 믿음의 부정이요, 양심의 후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나보다 먼저 너희를 미워한 줄 알라.” (요한복음 15:18)

세례 요한처럼,우리의 삶이 작아 보여도하나님 앞에서는 진리를 붙드는 삶,두려움보다 담대함을 택하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길 바랍니다.

헤롯이라는 사람이 네 명이 등장하는데,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헤롯이라는 왕이 등장을 합니다.이 왕은 헤롯 대왕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그러니까 헤롯 왕의 원조, 헤롯 왕가를 세운 사람입니다.이때 예수님의 탄생 때 헤롯 왕이 등장을 하죠.

그리고 지금 오늘 본문 속에 등장하는 헤롯은 그 왕의 아들입니다.헤롯 안티파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인데,이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 속에 등장하는 왕이죠.

그리고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행전에도 헤롯 왕이 또 등장을 합니다.사도행전에 나타나는 헤롯 왕은 헤롯 아그리빠 1세,그리고 그 아들 헤롯 아그리빠 2세,이렇게 네 명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죠.

헤롯 대왕 때는 갈릴리, 예루살렘, 유다를 비롯해이스라엘 전역을 다스리는 권세 있는 왕이었습니다.그런데 그 아들 헤롯 안티파스 때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로마가 직접적으로 가나안 땅을 통치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그래서 로마 본국에서 속주 왕(分封王) 제도를 두어,직접 총독관을 주둔시키며 각 지역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롯은갈릴리 지역과 베레아 지역을 다스렸던 분봉왕이었습니다.그러니까 이제 이스라엘이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고,그중 한 지역을 맡았던 왕으로 등장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세례 요한이 그의 부도덕함을 지적하자헤롯 왕이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헤롯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냐면,자신의 이복동생의 아내를 빼앗은 겁니다.이복동생을 멀리 쫓아내고,자기 아내와 강제로 이혼을 한 뒤그 동생의 아내를 맞이하게 된 것이죠.

세례 요한은 이것을 보면서“왕이여,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왕궁 안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요한의 마음이 얼마나 탄식이 되었겠습니까?결국 그는 왕의 양심을 찌르는 메시지를 던졌던 것이죠.

그 후에 헤롯과,그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가 결혼을 하게 됩니다.그런데 어느 잔칫날,헤로디아의 딸—이름이 살로메라고 하죠—그 딸이 왕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그 춤이 왕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고 나옵니다.그는 감정이 고조되어 이렇게 말하죠.

“내가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무엇이든 구하라.”

그러자 딸은 어머니에게 달려가 묻습니다.“어머니, 무엇을 구할까요?”헤로디아가 말합니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달라.”

결국 요한의 머리가 잘려 나가,그 요구대로 주어지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이것이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마지막 장을 보면,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다 기록한다면,온 세상을 두루 써도 그 책을 다 기록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들이엄청나게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왜 하필 세례 요한의 이 사건이성경 안에 기록되어야 했을까?왜 굳이 여기에 들어 있어야 했을까?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이 말씀이 왜 여기에 있을까?”“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시려는 걸까?”

그 질문 속에서 성경은 풀립니다.그 의문 속에서 말씀이 해석됩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에는 분명한 가치가 있습니다.그것은 바로 진리를 선포한 자의 결말입니다.그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선포한 자로서,그 결과가 어떤 것이 되는지를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아까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세례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새로운 사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역시진리가 아니면, 의로운 말씀이 아니면,사람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해도,거부해도,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고그 말씀이 진리라면,예수님은 끝까지 전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도 세례 요한처럼진리의 편에 서서 말씀하시다가,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마태가 이 사건을 굳이 이 시점에 기록한 이유는 분명합니다.세례 요한이 진리의 편에 서서 죽었듯,예수님 역시 그 길을 걸어가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세례 요한은 진리 편에 서서 죽었고,예수님은 그 진리를 완성하시기 위해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례 요한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 알아야 될 것은 무엇이냐면, 진리 대신 그 어떤 생명, 여기에 대해서 세상은 적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그래서 예수님을 배척했다는 것이죠.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생명이시고 예수님은 진리라고 우리가 이야기합니다.그 말씀이 아무리 진리되고, 그 말씀이 아무리 생명이 된다 할지라도,세상의 습성상 세상이 요구하는 것과 맞지 않자 예수님을 배척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아무리 그 말씀이 생명이고, 아무리 그 말씀이 진리라 할지라도,세상 사람들의 수준 — 악한 사람들의 수준 — 은 그 말씀을 받아들일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메시지가 이 안에 담겨져 있다는 겁니다.

잘 한번 봅시다.세례 요한이 정말 그 말씀이 옳았고 올바른 소리를 했지만,그 말씀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그 말씀에 분을 내고 화를 내서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른 사람도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시고 싶은 그 말씀들은,우리에게는 정말 귀하고, 보배롭고, 때로는 그 말씀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이 말씀이 나의 생명이 되는 말씀이다”라고 고백하지만,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이건 나와 맞지 않다, 나는 거부한다”라며 배척하고,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세상의 일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죠.

이것을 우리는 세례 요한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실질적으로 인기가 굉장히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로 달려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예수님께서도 세례 요한에게 가셔서 그로부터 세례를 받으셨고,세례 요한이 하는 일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존경했고,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오기까지 하나님은 400년 동안어떤 선지자도 보내지 않으셨고, 어떤 하나님의 음성도 들려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그런데 광야에서 400년 만에 이 메시지가 들려온 겁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너희는 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이 메시지가 400년 만에 선포되자,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인 겁니다.“하나님께서 드디어 일하시나? 하나님께서 드디어 역사하시나?” 하고서 귀를 기울인 것이죠.

왕궁에서도 세례 요한에게 사람을 보냈고,제사장 그룹에서도 세례 요한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당신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이 그 그리스도입니까?”그들이 기대했던 그리스도의 모습을 세례 요한 속에서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부인했습니다.자신에 대해서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나는 단지 소리에 불과하다. 내 뒤에 실체가 오실 것이다.”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세례 요한뿐만 아니라, 우리는 성경에서 수많은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듣습니다.그 메시지들 중에는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는 말씀도 있었지만,어떤 메시지는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쪼개는 말씀도 있었습니다.어떤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이 있어서,그 말씀은 사람들 속에서 역사했습니다.그리고 그 가운데 무릎 꿇고 회개하고,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서,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전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례 요한을 통해 다시 한 번 묵상할 것은 이것입니다.어떻게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종이 되었는가?그의 종된 표는 무엇인가?

세례 요한은 진리의 말씀이 선포될 때,죽음도 두렵지 않게, 죽음도 각오하고 그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그때 그는 하나님의 종이었다는 표를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가 있느냐?”라고 사람들이 묻습니다.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고,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그 결과로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셨습니다.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우리의 메시아이심을 증명하는 표인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증거하면서,그것이 죽음의 길이라도, 불합리한 길이라도 머뭇거리지 않고 달려갔습니다.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만약 내가 전하는 말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고,어려움을 만나지 않을까 두려워서 말씀을 전하지 못한다면,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아무리 불리하고 불합리한 일이 앞을 가로막는다 할지라도그 말씀을 전파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메시지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유대인들이 구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그들이 예수님 앞에서, 또 메시아 앞에서 구한 것은 결국자기 자신들을 좀 돌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들의 신앙의 행위를 좀 칭찬해 달라는 겁니다.자기 자신들이 열심히 율법을 준수하고, 열심히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 모습을 좀 알아달라는 겁니다.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어려움에서 좀 해방되기를 원했던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교훈하셨습니다.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요구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과는 차이가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하나 꼭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우리도 어쩌면 유대인들처럼, 바리새인들처럼,우리의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은 일단 접어두시고,제가 필요한 것은 이러이러합니다.”이렇게 유대인들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요구할 때가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는,우리가 요구하는 것과는 별개로,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이 있다는 겁니다.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메시지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 요구한다 할지라도,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먼저 말씀하십니다.그것이 메신저들을 통하여,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셨던 내용입니다.

그 메신저들이나 선지자들은,아무리 불리한 일을 만나더라도,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하는 순간,가감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그 전파된 말씀들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되었고,우리는 성경을 통해서“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진리된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요구 사항은 늘 충돌합니다.우리의 기도의 내용들을 살펴보면,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보다는내 마음의 간구와 소원을 아뢰는 경우가 참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번 기도를 써 보십시오.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을 나중에 읽어 보십시오.

어느 날 “야, 내가 이런 한심한 기도를 했었다니…” 할 때가 있을 겁니다.또는 “참 은혜로운 기도를 했구나” 할 수도 있겠죠.하지만 그런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제목을 써서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했을까” 하고스스로 부끄러워질 때가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합니다.때로는 십자가를 지라고,순종하라고,헌신하라고,겸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우리는 그 길을 따라갈 수 없다고 단정하고아예 그 길 자체를 가지 않기도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민족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예수님을 배척한 이유,그리고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른 이유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셨습니다.우리 교회 성도님들 중에는 연세 드신 분들도 많습니다.

연세가 들면서,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가정으로 돌아가면 “아, 쓸데없는 걸 왜 이렇게 많이 모았을까?”이렇게 하나씩 정리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그때 왜 그런 걸 샀을까, 얼마나 헛되게 썼나” 생각할 때도 있겠죠.

이렇게 하나씩 정리하고 버린다는 것은,세상이 더 이상 즐겁지 않다는 뜻입니다.세상이 나에게 더 이상 유익을 주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모았던 것들을 정리한다는 건,그것이 한때는 즐거움이었고, 기쁨이었는데,이제는 즐겁지 않다는 겁니다.결론적으로는 세상이 더 이상 즐겁지 않다는 것이죠.

그런데 감사하게도,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세상 것들은 하나씩 버려가지만,우리의 삶 속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점점 드러납니다.

신앙적인 것들은 하나씩 하나씩 쌓여갑니다.이제 곧 겨울이 돌아오면,굶주린 사람, 어려운 이웃을 긍휼히 여길 줄 알고,불쌍한 사람들을 돌아볼 줄 아는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 어려움을 만난 사람들을 위로하고,신체적으로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격려하는 일들이 점점 더 늘어나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세상적인 것들은 나이가 들수록,점점 더 멀어지지만,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생명적인 것들,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들은점점 더 늘어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배척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왜냐하면 우리는 밭 속의 귀한 보배 되신 예수님을 발견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이 땅의 불리한 일들에는 등을 돌리되,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들,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음성에는철저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하나님의 뜻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들이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입으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보람되고,귀한 생명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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