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4:13~21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찬 은혜
- seattleomc
- Oct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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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빌립의 대답이 뭐라고 얘기하냐면,“이 사람들에게 모두 조금씩이라도 먹게 하려면,빵을 사려고 해도 한 200데나리온 정도 가지고는 충분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이런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이 당시에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의 품삯이지 않습니까?그렇다면 오늘날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어느 정도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요즘은 기초임금이 올라서 하루 100불이라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그럼 200데나리온이면 만 불 이상 되는 돈이죠.하루 20불이라 계산해도 200데나리온이면 2만 불 이상 되는 큰돈입니다.
그러니까 빌립이 예수님께 나와,“예수님,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려면 만 불 이상의 돈이 필요합니다.”라고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 내용을 요한복음에서 보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이때 누가 등장하냐면, 안드레가 나서기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6장 9절을 보면,안드레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어린아이가 먹을 것을 내놓았다는 기록이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그러니까 안드레도 마음속으로는,‘이 조그마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떤 능력을 발휘하겠는가?’하는 마음으로 그 사실을 예수님께 전달한 것이죠.
오늘 본문 17절과 18절을 보면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제자들이 이르되,“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이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십니다.
사람은 많고 돈은 없고,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 생각했을 때,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예수님, 최선의 방법은 각자 마을로 가서 먹고 다시 모이는 겁니다.”우리라도 똑같이 말했을 겁니다.“예수님, 그게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제자들에게 무슨 돈이 많았겠습니까?그들이 가진 돈을 다 털어도 이 사람들을 먹이기엔 턱없이 부족했을 겁니다.우리도 제자들과 똑같이 그렇게 이야기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달랐습니다.“이 사람들을 앉게 하라.”즉, “밥 먹을 준비를 시켜라.”
유대인들은 식사할 때 앉거나 비스듬히 기대어 먹는 습관이 있었죠.예수님이 “앉게 하라” 하시니,사람들이 “이제 밥을 먹는 모양이구나!” 하고 기대한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아니, 무슨 소리냐?” 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죠.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외하고도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습니다.그렇다면 여자와 아이까지 합하면 만 명 이상이 되었겠죠.빌립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도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도대체 예수님은 지금 무엇을 하시려는 거지?무엇을 준비하고 계신 거지?”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기적을 펼치십니다.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그곳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우리의 방법과 생각과 지식을 다 동원한다 해도이해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습니다.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얼마나 자주 이렇게 말합니까?“주님, 과학적으로만 좀 설명해 주시면 믿겠습니다.”“제가 이해만 하면 믿을 수 있을 텐데요.”
하지만 여러분,여러분이 저보다 훨씬 더 많은 인생을 살아오셨잖아요.특히 험난한 이민 사회에서 인생을 살아오시면서,정말 모든 일이 납득되고 이해되면서만 흘러갔습니까?
아니지요.지나고 보니까 도저히 내 머리로, 내 지식으로, 내 말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우리 인생길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그래서 우리는 한마디로 이렇게 말하죠.“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우리를 설득시키거나 이해시키면서 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의 과학, 지식, 생각을 초월합니다.이해를 뛰어넘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 기적 속에는 두 가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1차적인 기적과 2차적인 기적입니다.
이때 빌립의 대답이 뭐라고 얘기하냐면,“이 사람들에게 모두 조금씩이라도 먹게 하려면,빵을 사려고 해도 한 200데나리온 정도 가지고는 충분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라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이 당시에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의 품삯이지 않습니까?그렇다면 오늘날 노동자 하루의 품삯이 어느 정도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요즘은 기초임금이 많이 올라서 하루 100불이라고 가정해 봅시다.그러면 200데나리온이면 만 불 이상 되는 돈이죠.하루 20불이라 계산해도 200데나리온이면 2만 불 이상 되는 돈입니다.
그러니까 빌립이 예수님께 나와서,“예수님,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려면 만 불 이상의 돈이 필요합니다.”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요한복음에서 보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이 나옵니다.이때 누가 등장하냐면 안드레가 나서기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6장 9절을 보면,안드레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어린아이가 먹을 것을 내놓았다는 기록이 아주 상세하게 나옵니다.그러니까 안드레도 마음속으로는,‘이 조그마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어떤 능력을 발휘하겠는가’ 하는 생각으로그 사실을 예수님께 전한 것이죠.
오늘 본문 17절과 18절을 보면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제자들이 이르되,“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이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십니다.
사람은 많고 돈은 없고,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 생각했을 때,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보고했을 겁니다.
“예수님, 최선의 방법은 각자 마을로 가서 먹고 다시 모이는 겁니다.”아마 우리라도 똑같이 그렇게 말했을 겁니다.
제자들에게 돈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그들이 가진 돈을 다 털어도 이 사람들을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을 텐데,우리도 제자들과 똑같이 이야기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달랐습니다.“이 사람들을 앉게 하라.”즉, “밥 먹을 준비를 시켜라.”
유대인들은 식사할 때 앉거나 비스듬히 기대어 먹는 습관이 있었죠.예수님이 “앉게 하라” 하시니,사람들이 “이제 밥을 먹는 모양이구나!” 하고 기대한 사람들도 있었고,“무슨 소리냐?” 하고 의아해한 사람들도 있었겠죠.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외하고 오천 명이 되었다고 기록합니다.그렇다면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하면 만 명 이상이 되었겠죠.빌립뿐 아니라 많은 제자들도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도대체 예수님은 무엇을 하시려는 거지?무엇을 준비하고 계신 걸까?”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기적을 펼치십니다.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그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우리의 방법과 생각,우리가 가진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한다 해도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두 배불리 먹고 난 뒤,남은 조각을 거두었더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고오늘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주님, 과학적으로만 이해시켜 주시면 믿겠습니다.”“제가 조금만 이해하면 믿을 수 있을 텐데요.”
그런데 여러분,여러분이 저보다 더 많은 인생을 살아오셨잖아요.특히 험난한 이민 사회에서 인생을 살아오시면서,모든 일이 납득되고 이해되면서만 흘러갔습니까?
아니죠.지나고 보니까 도저히 내 머리와 내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우리 인생길에서 일어났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우리를 설득시키거나 이해시키면서 행하시는 게 아닙니다.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이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그 일하심은 우리의 과학, 지식,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이 기적 속에는 두 가지 기적이 있습니다.첫 번째 기적과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납니다.
1차적인 기적은 어떤 기적이냐면,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제자들이 가지고 온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좀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어린아이가 이것을 싸 가지고 왔는데,아마 두 시락 정도의 분량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이걸 다 합쳐 봐야 일곱 개밖에 안 되는데제자들은 열두 명이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조그마한 것을 들고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그 떡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열두 명이니까모두에게 나누어 주려면 최소한 열두 개가 필요합니다.하지만 실제로는 일곱 개뿐이었죠.
그런데 놀랍게도, 제자들이 각각 바구니를 들고 나아갈 때그 바구니 안에는 주님께서 축사하신 떡과 물고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자,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여자와 어린아이를 제외하고 오천 명,다 포함하면 만 명 이상이 모인 자리였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려면제자들이 들고 있는 빵이 얼마나 커야 했을까요?아마 언덕 하나만큼 커야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바구니에 담길 만큼 조그마한 떡이었습니다.그런데도 끊임없이 나오는 겁니다.
첫 번째 기적은 바로 이겁니다.예수님께서 축사하신 후,일곱 개밖에 없던 떡과 물고기가열두 제자의 바구니에 각각 채워졌다는 것.
두 번째 기적은,그 바구니를 가지고 사람들이 나누어 줄 때떡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나눠 주고 또 나눠 줘도줄어들지 않았고,먹어도 먹어도 여전히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다 먹고 배불리 먹은 후,남은 것을 거두었더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바로 이런 일입니다.조그만 것으로도 풍성하게 하시는 하나님,그분의 능력이 여기에서 나타난 것이죠.
빌립보서 4장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땅에서 쓸 모든 것을 풍족히 채워 주신다는 겁니다.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제 중요한 건 이겁니다.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사람들을 먹이신 후에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26절–27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니라.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너희가 나를 찾는 이유가 배부름 때문이구나.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영생하는 양식을 주기 위해 왔다.”
영생하는 양식,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자신입니다.
요한복음 6장 47–48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즉, 예수님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떡이 아니라영생을 주는 생명의 떡이시라는 겁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지 기적 그 자체가 아니라,그 안에 담긴 메시지—“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복음의 상징이었던 것이죠.
51절도 굉장히 중요한 내용인데요.“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런데 단순히 생명의 떡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라고 하셨습니다.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곧 예수님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죠.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아버지와 내가 하나이듯이, 저들도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하소서.”또 포도나무의 비유에서도 말씀하셨죠.“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시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셨으며,이 떡을 먹는 자마다 영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이렇게 이해합니다.“아,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구나.”맞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예수님은 단지 ‘영생을 주시는 분’으로 끝나지 않고,그보다 더 풍성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고백하듯이,“예수님을 믿으면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습니다.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천국에 들어갑니다.”이것이 분명히 사실이지만,주님은 그 이상, 더 풍성한 것을 우리에게 준비하셨습니다.
그 풍성함은 바로 예수님과의 연합,곧 그분의 성품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아버지와 내가 하나이듯이,저들도 나와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풍성함은단지 생명이나 구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그분의 거룩함, 존귀함, 의로움,그리고 불쌍히 여기심, 인자하심, 자비하심—바로 그 모든 성품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오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 5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서 “산다”는 말은 단순히 숨 쉬는 생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여러분, 우리가 흔히 말하지 않습니까?“내가 너 때문에 산다.”“너 때문에 웃는다.”이 말은 생명 유지의 의미가 아니라,그 사람으로 인한 기쁨과 만족을 말하는 표현이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은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기에,하나님이 주시는 사랑과 기쁨, 성품으로 인해내가 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를 먹는 자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예수님을 먹는 자—곧 그분을 믿고, 그분 안에 거하는 자도그 예수님의 성품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그분의 마음과 성품이 우리 안에 들어와우리의 생각과 말과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긍휼, 사랑, 평강, 겸손,그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자리 잡는 것이죠.
여러분 어떻습니까?길을 가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십니까,아니면 마음에 긍휼이 일어납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기 전의 나와믿은 후의 나의 차이입니다.그 변화가 바로 예수님의 성품이우리 안에 들어와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셨던 삶의 목표, 가치, 풍성함—그 모든 것을 우리도 살아내게 하시겠다는 것이이 말씀의 핵심입니다.
즉,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지 물질의 기적이 아니라성품의 기적, 영적 변화의 기적입니다.
예수님과 닮아가며 살아가는 그 삶,그것이 바로 이 기적에 담긴 풍성한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값진 것이죠.이렇게 귀한 구원을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셨으면서,그 구원해 놓고만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 당시에 노예 제도가 있었으니까,부자가 돈이 많은 사람이 노예를 긍휼히 여겨 값을 주고 노예를 샀어요.노예를 사서, 이제 자식이 없자 이 사람을 양자로 삼으려고 하는 겁니다.그러니까 하루아침에 노예에서 해방된 것뿐만 아니라그 부잣집의 양자가 되는 것이죠.
그러면 이제 그 부잣집 사람은 이 노예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교육을 시켜야 하죠.식사 예절은 어떻게 하고, 말은 어떻게 하고,사람은 어떻게 대하고, 어른은 어떻게 공경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가장 값진 그리스도 예수라는 보배로운 피를우리들을 위하여 쏟으셨는데,구원만 해 놓고 끝나는 삶이 아니라는 겁니다.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갔을 때 하나님과 어떤 이야기를 할지,어떤 성품으로 하나님의 식탁에서 식사를 하게 될지,지금 이 땅에서 그 교육을 받는 겁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배웁니다.그리스도인은 어떤 성품을 가져야 하는지,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는지를 성경을 통해 배우는 것이죠.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이 땅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도록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오병이어의 사건은 너무나도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오늘날 우리가 가장 비슷하게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바로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최후의 만찬,즉 성찬 예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을 봅시다.11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밤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떼어 이르시되,‘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이 표현과오늘 우리가 묵상한 마태복음 14장에 나오는 표현이거의 동일합니다.마태복음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무리를 향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제자들이 우리에게 주니.”
보세요.마태복음의 오병이어 사건에서 주님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셨습니다.고린도전서의 성찬 예식에서도 주님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셨습니다.단어 하나하나가 거의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 예식을 할 때주님께서 떼어 주신 그 떡을 받으며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감사하며 감격하지 않습니까?“이것이 나를 위해 찢기신 주님의 몸이구나.”그 상징성을 묵상하며 얼마나 깊은 감동으로 참여합니까?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닙니다.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 떡에는영생뿐만 아니라 더 풍성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12광주리가 가득 찼듯이,성찬에서도 주님께서 찢으신 그 몸,흘리신 그 피를 통해 우리에게 영생뿐만 아니라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찬을 할 때 우리는 이렇게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주님께서 나를 위해 찢으신 그 몸으로 말미암아내가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이제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이 땅에서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성찬 예식 안에는 단순히“나를 위해 찢기신 주님의 몸과 흘리신 피”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그것을 먹고 마심으로써주님의 성품과 마음을 품는 삶,주님과 하나 되는 삶,그 풍성함을 이 땅에서도 살아내는 삶—이것이 성찬 속에 담긴 깊은 영적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것이 바로 성찬 예식을 통해 우리들에게 나타나듯이,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도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핵심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 우리의 인생은얼마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치 있는 인생인가,얼마나 복된 삶인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또 땅의 풍성한 것으로 우리를 채우시고도 남음이 있게 하시며,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이 사건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자리를 돌아보면,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우리를 ‘이해시키시거나 설득하시면서’ 일하시지 않으셨습니다.우리의 인생길을 “함께 걸어가시되,”“달래가며” 일하신 적은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따르라, 내 음성을 듣고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우리는 그저 무작정 따라갔습니다.그런데 나중에 뒤돌아보니우리가 들어가 있던 모든 상황 속에하나님께서 이미 일하고 계셨던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게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그래서 뒤돌아보면,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었음을우리는 고백하게 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이렇게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우리가 예전에 들었던 “오병이어를 통해 헌신하자,”“안드레가 가져온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이를 드리면주님께서 그것을 뻥튀기하신다”는 정도의 이야기로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병이어의 풍성함 속에는단지 헌신의 교훈이 아니라,영생과 생명뿐만 아니라,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갈 때 필요한 것까지도풍성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우리의 구원은 단순한 “한 사건”이 아니라,지금도 계속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하나님의 생명 사건입니다.그 은혜와 풍성함 속에 거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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