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3:24~35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 seattleo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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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더 잘되는 것처럼 보일까요?
작고 보잘것없는 우리의 믿음도 정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 쓰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여러분들의 얼굴을 한 주 안 뵀는데, 굉장히 보고 싶었다라는 거짓말 같은 진실이 있습니다.아, 왜 그렇게 좋은지요? 여러분들 얼굴만 봐도 좋고 기쁘고, 또 여러분들도 조금 보기 싫었던(?) 얼굴을 오랜만에 보셔서 그런지 기쁘고 즐겁습니다. 아, 한 교회를 섬기고 한 가족으로 섬긴다는 게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있을 때는 몰랐지만, 헤어지면 허전한 것이 우리의 가족 된 모습이라 생각이 듭니다.
아, 갑자기 마이크 소리가 커졌어요. 제가 뒤에서 살펴보니까 누가 만졌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뭘 만졌는지, 어떤 조절을 했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저 뒤에 앉아 계신 분들은 조금 시끄럽겠다 생각이 드는데, 혹시라도 들으시기에 불편하시면 저 뒷문을 열어 두셔도 됩니다.
소리라는 게 부딪혀서 앞으로 다시 오기 때문에, 아마 뒷문을 열어 두시면 소리 부딪힘이 줄어서 뒤에서 듣기 조금 편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저도 이렇게 클 줄은 몰랐습니다. 원래 제 목소리가 커서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아도 뒤까지 들리는데, 아무튼 불편하시리라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불편하시더라도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유로 모든 것들을 말씀하셨고, 구약 성경에서도 선지자들이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이 비유에 관한, 또 천국에 관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13장에 여러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그러나 몇 가지 비유가 나오느냐에 관심을 두지 마시고, 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 여기에 초점을 맞추시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왜 비유로 말씀하셨는가? 성경은, 그 의미를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 성도들에게만 알게 하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그렇기 때문에 이해를 하셔야 됩니다. 혹시 이해를 못 하면 “나는 천국 백성이 아닌가?” 하는 자격지심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알아듣고 더 풍성하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있는 자, 다시 말해 성도가 아닌 사람, 세상 사람들에게는 가진 것까지 빼앗기게 하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성경의 모든 내용이 이런 것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고, 또 풍성하게 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서에 보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의로 교육하기에 풍성한 말씀이라고 표현합니다.
성경 말씀은 성도를 교훈하고, 때로는 성도를 책망하고, 또 성도들을 의롭게, 올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 신자에게 주어진 것이지, 세상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생명이 있다는 겁니다. 살아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은 활자로 기록되어 우리 가운데 책으로 주어졌지만, 우리가 그 말씀을 읽을 때 어느 순간 그 활자가 살아서 우리의 마음을 찌르기도 하고,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도 하고, 또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는 믿음과 결단을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도 이야기를 하고 있죠.“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 운동력이 있다,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죠.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고도 남음 있는 말씀이다라고 히브리서는 설명합니다.
여러분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죠? 아멘!
여러분들이 힘들고 외로울 때 위로받고 싶을 때, 어느 곳에서도 위로받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위로받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힘을 얻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유, 우리를 교훈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래서 오늘 비유 말씀을 살펴보면,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가 설명되고, 그 뒷부분에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가 등장을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지지난주에 묵상했던 것처럼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해석해 주신 것처럼, 오늘 ‘가라지의 비유’ 또한 주님께서 36절부터 43절까지 쭉 이어지면서 설명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13장에서 ‘씨 뿌리는 비유’와 ‘가라지의 비유’가 중요하다는 것을 볼 수 있고, 특별히 이 두 비유에 대해서 주님께서 제자들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셨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36절부터 43절까지 해석의 부분도 함께 묵상하며 살펴보려 합니다.
이 가라지의 비유는, 먼저 씨를 뿌렸는데 좋은 씨만 뿌린 줄 알았더니 가라지도 함께 자랐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가라지는 씨앗으로서는 분별할 수 없고, 어릴 때는 판단하기 어려워서 추수 때가 되어서야 이것이 가라지인지 알곡인지 구분할 수 있습니다.
즉,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비유를 가지고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를 설명하기도 하고, 또 어떤 성도들은 “혹시 내가 가라지가 아닌가”라는 두려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그런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 비유를 하실 때는 아직 교회가 세워지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의 가라지를 향한 경고의 말씀이 아니라, 여기 37절부터 38절에 설명된 것처럼 세상 전체를 대상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37–38절을 보시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 곧 예수님이다. 좋은 씨는 예수님께서 뿌리셨다. 그런데 그 밭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다.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 성도들이고,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다.
그러니까 밭에 씨를 뿌리신 분은 예수님이시고, 그 밭은 세상입니다. 좋은 씨는 성도들,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나쁜 씨는 악한 자들의 아들,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수도원처럼 세상과 단절해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함께 바람도 맞고, 비도 맞으며, 동일한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겉모습으로는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날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주님께서 갈라놓으신다는 것이죠. 그게 하나 다를 뿐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설명해 주시는 장면입니다.
24절 말씀 한번 보세요. 24절 말씀을 보시면,“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 같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여러분 혹시 기억나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때 “씨는 말씀이다”라고 설명을 드렸었는데, 여기에서 나오는 씨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씨는 좋은 씨, 천국의 아들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앞에 나온 씨 뿌리는 비유와 지금 24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비유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떨어지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좋은 씨로 이 땅에 심으신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 심으셨다라고 하십니다. 좋은 씨를 이 땅에 심으셨다라는 표현을 여기서 쓰시는 거죠.
그리고 주님께서 해석하실 때, 3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다.”
25절 말씀을 보시면,“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주님께서는 좋은 씨를 뿌리셨습니다. 분명히 이 땅에 좋은 씨를, 우리를 심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때, 아무도 보지 못할 때, 원수가 와서 씨를 뿌렸습니다. 원수는 마귀라고 설명합니다. 마귀가 와서 가라지를 뿌렸다라는 것이죠.
가라지가 자라났다는 얘기는, 악한 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자라났다는 표현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했던 부분은, “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까?”였습니다. 그들은 귀가 있으나 열리지 않았고, 눈이 있으나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뿌려진 좋은 씨, 곧 크리스천들,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어떤 모습과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바로 이 가라지의 비유라는 것이죠.
우리가 자라기 위해서는 영양분이 필요합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죠. 밭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통풍을 시켜주기도 하는 것은, 씨가 뿌리를 튼튼히 내려 결실을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영양분들은 농부의 수고와 노력으로 주어지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심으셨다고 말씀하실 때,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영양분은 어디서 옵니까?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이나 교육을 받음으로, 세상에서 부유하게 살아감으로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힘을 얻어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좋은 씨로, 좋은 백성으로 심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으려고 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세상 사람들, 가라지들은 세상의 힘과 지혜로 살아가지만, 우리는 비록 지혜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으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 말씀에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조금 힘든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도 아시죠—잡초는 뽑아도 뽑아도 생명력이 있어서 또 자랍니다. 비료도 주지 않았는데 그렇게 잘 자라납니다.
아, 이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쟤네들은 하나님도 모르는데 어쩜 저렇게 잘 사냐?”라는, 말라기 선지자의 호소와 한탄이 우리의 삶에도 종종 있지 않습니까?
“나는 예수님을 잘 믿는데, 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잘되고… 어디서 저 사람들은 영양분을 공급받을까?” 이런 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때로는 신앙의 시험을 당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비록 모양도 좋고 풍채도 좋게 튼튼하게 자라는 것 같지만, 마지막 날, 심판 날에 차이가 난다고 주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가라지의 비유가 마가복음 4장에도 등장을 합니다. 마가복음 4장에 등장하는 말씀은 무엇이냐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26절에서 29절 말씀을 잠깐 보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린 것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니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여기서도 지금 말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자라게 하지 않고, 또 어떻게 자라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마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 곧 예수님이십니다. 씨 뿌리시는 일을 주님께서 시작하셨다는 거죠.
이 말씀을 조금 바꾸어 얘기하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었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 성경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이런 것들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마치 씨를 뿌릴 때 농부가 한 웅큼 집어 뿌리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으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이죠. 아멘.
그렇다면 비를 내리고 햇빛을 주시는 것도 주님께서 하신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구원이 때로는 세상의 환난이나 어려움으로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흔들리면 구원 자체도 흔들리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정확하십니다. 때로는 우리를 시험의 자리, 연단의 자리에 내어주시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자라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장하는 것도, 자라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주님께서 씨를 뿌리셨기 때문에, 우리를 성장하게 하시는 것도 주님이십니다.
여러분들, 밭에 씨를 그냥 뿌려 두고 끝내십니까? 아닙니다. 씨앗이 잘 자라도록 골라 주기도 하고, 솎아 주기도 하고, 비료도 주고, 물도 주지 않습니까? 혹시 열매가 무거워서 줄기가 꺾일까 봐 지주대를 세워주기도 하지 않습니까? 씨를 뿌린 사람이 돌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심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돌보시고 성장시키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영적인 공급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겁니다. 아멘.
여러분들, 다른 곳에 귀를 기울이거나 다른 데에 관심을 두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다는 확신이 우리 안에 있으면, 영양분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공급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만들어 내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아, 그래서 아까 두 번째로 말씀드린 것이 바로 겨자씨에 대한 비유입니다. 31절 말씀을 봅시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가져다 심은 겨자씨 하나와 같으니…”
천국은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꼭 겨자씨만이 아니라, 여러분 씨앗이 얼마나 작은지 아시죠? 우리처럼 눈이 좀 어둡고 침침한 분들은 씨가 다른 곳에 떨어지면 찾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깨알 같다”라는 표현을 쓰지요. 그런데 깨알보다 더 작은 것이 겨자씨입니다.
아무리 작아도 씨앗은 생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오래된 씨앗도 생명이 있으면 자라더라고요. 생명이 없으면 자라지 않지만, 씨앗에는 생명이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겨자씨의 비유를 드신 이유는, 천국은 이렇게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작고 보잘것없이 시작하지만, 나중에 결실할 때는 크게 열매를 맺는다—이것이 천국의 이치요 순리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우리를 이 땅에 심으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이 땅에 심겨서 당장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크리스천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이 있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자라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여러분, 교회가 살아 있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곧 교회에 생명이 있다라는 말이지요. 교회가 죽었다라는 표현은, 교회에 생명이 없다라는 표현과 같습니다.
그런데 생명이 있는 것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자란다는 겁니다. 아멘!생명이 있는 것의 특징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생명이 있다면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습니까?
옛날에는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두렵고 떨리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면, 이제는 어떻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쳐와도 담대해지지 않습니까?
기도하는 사람들이 옆에 있고, 또 기도해 주는 성도들이 함께하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과 믿음이 보이지 않게 자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가리켜 “교회”라고 하십니다. 건물로서 유형적인 교회가 아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나는 무형의 교회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생명이 있다면 어떤 어려운 현실이 닥쳐와도, 두려운 상황이 우리 가운데 몰려와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믿음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겨자씨는 아무리 작아도,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여도,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를 한번 보십시오. 제자들이 얼마나 초라했습니까? 예루살렘 사람들이 “저 갈릴리 촌사람들”이라며 놀렸던 제자들 아니었습니까? 주님은 많은 사람으로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열두 제자로 시작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중심부에서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갈릴리 변방에서 생업에 종사하던 어부들을 불러 시작하셨습니다. 그 겨자씨 같았던 제자들이 자라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초대교회의 메시지를 보십시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주노니…” 이 메시지로 초대교회는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그 메시지를 줄 수 있었던 겁니다. 그 메시지로 말미암아 눈먼 자가 눈을 떴고, 죽어가던 자들이 일어났으며, 삶에 지친 자들이 용기와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예수를 만나 믿음으로 부유해지고, 삶이 풍성해지는 것을 우리는 초대교회를 통해 보게 됩니다.
제가 한국에 갔을 때, 아내와 함께 오랜만에 달콤한 데이트를 했습니다. 어디서 했냐면—무덤가에서 했습니다. 선교사들의 묘지에서요.
세상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조선이라는 나라, 우연히 듣게 되었던 그 조선을 위해 자기의 삶과 배경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와서 그 땅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왔던 선교사들. 그 선교사들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한편에 보면, 비석이 아주 조그마한 것들이 있습니다. 안내해 주시던 집사님 말씀에 의하면, 그 작은 비석들은 어린아이들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어린아이들까지 그 땅에서 죽어간 겁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기 위해서요.
어떤 분들은 엄마, 아빠가 조선 땅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죽었지만, 미국에 남아 있던 아들이 다시 어머니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 땅으로 달려간 경우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명 된 복음을 받았습니다. 한국 교회가 1984년 부활절을 기점으로 150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150년 전, 아무도 모르던, ‘흰둥이’라며 놀림 받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와서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것입니다.
그 복음의 씨앗이 얼마나 작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복음을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시간과 가정들을 거쳤겠지만, 분명히 그 작은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여러분, 한국에 가시면 한 번 꼭 들러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라고 하면 됩니다. 택시를 타면 15,000원 정도 나옵니다. 가시면 안내 집사님이나 권사님들이 차근차근 설명해 주시는데, 아마 다른 관광지보다 훨씬 은혜로운 시간을 가지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이처럼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란다는 겁니다.
제가 예전에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수화(手話, sign language)에서 ‘소망’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아십니까? 무거운 바위를 이렇게 얹어 놓은 모양인데, 거기서 싹이 트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이 있기 때문에입니다.
아무리 무거운 바위가 씨앗을 누르고 있다 하더라도, 씨앗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바위를 뚫고 올라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환난이 오고, 핍박이 오고, 어려움이 와도 우리는 그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자라납니다. 이것이 바로 겨자씨의 은혜입니다.
작으냐 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씨앗과 누룩은 조금 다릅니다. 씨앗은 자체가 자라나는 것이고, 누룩은 다른 것을 변화시키는 겁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넣은 누룩과 같다.”
옛날 어르신들이 ‘바람빵’이라고 부르던 게 있었습니다. 막걸리를 조금 넣어 두면, 새벽에 보면 반죽이 부풀어 있지 않습니까? 누룩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양이 아니어도, 조금만 넣어도 반죽 전체가 부풀어 오릅니다.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좋은 씨로 심으셨습니다. 또 동시에 우리를 누룩과 같이 사용하십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이웃이 변화되고, 가정이 변화되고, 사회가 변화됩니다. 기독교로 인해 사회가 바뀌고, 세상이 바뀌어 온 것처럼, 주님께서는 작은 것으로 시작하시지만 거기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몇 년 전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기억하시지요? 전 세계를 뒤흔들었습니다. 아주 작은 바이러스 하나가 전 세계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작게 시작했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복음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회가 변화되고, 세상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일에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에게서 떠나라.”
교인 수가 아무리 많으면 뭐합니까? 거기에 생명이 없다면, 변화가 없다면, 능력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교인이 많으면서도 다이나마이트 같은 폭발력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십니다.
그러나 교회가 아무리 작다 할지라도, 우리가 경건의 모양뿐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인정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아멘!
그러나 경건의 모양만 갖추고 그 능력을 부인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통해 역사하실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펴고 “이것이 주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제가 오늘 이 말씀대로 한번 살아보겠습니다”라고 무릎 꿇는다면, 그 말씀이 생명 되어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아멘!
이처럼 누룩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우리의 주변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임을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씨를 뿌려 놓고 금방 새싹이 돋기도 전에 뜯어먹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상추를 빨리 먹고 싶다고 아직 자라지도 않았는데 뜯어버리면 결실을 못 보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입니다.
누룩도 마찬가지입니다. 밀가루 속에 들어가서 전체를 부풀릴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 말씀을 붙잡았다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인도하심을 끝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지 못하면 우리의 생각과 방법, 옛 습관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나를 통해 역사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흐려지게 되는 것이죠.
아무리 작은 씨라도, 아무리 생명이 있어도 기다리지 않으면 결실하지 못합니다. 누룩도 퍼지기 전까지 기다려야 맛있는 빵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기억할 것은 이것입니다.
성도의 승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승리는 어디서 옵니까?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그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말씀, 빌립보서 4장 13절입니다.“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아멘!
능력은 나의 열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옵니다.
여러분, 오늘도 그리고 한 주간도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 가운데, 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가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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