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3:10~17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깨달음의 은혜)
- seattleo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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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 여러분은 어떤 말, 어떤 소리를 붙잡으십니까?”
“혹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위로가 되는 말씀만 붙잡고, 불편하고 도전되는 말씀은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그 사실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는 어떤 의미일까요?”
요한복음 1장 10절로 11절을 보시면, 아 이렇게 되어져 있습니다.우리 다 함께 한번 읽어 볼까요? 다 함께 한번 읽어보죠. 시작.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더라.”
아,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지만, 아, 또 세상의 창조주가 오셨지만 그를 알지 못하였고 백성이 영접하지 못하였다.
그 뒤에 이어지는 12절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아시나요? 제가 오늘 아이스크림 차 드립니다. 12절 말씀! 이럴 때는 빨리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지혜고 방법이 있는데,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들이니라.” 아멘.
그다음에 또 무슨 말씀인지 아셔요?말씀, 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렇게 요한복음이 시작을 합니다.
여러분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가 이 땅에 오셨는데, 피조물이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우리 가운데 계셨는데, 아, 우리와 함께 계심을 깨닫지 못하였다.
아, 우리 입장에서는 “뭐 우리가 완악하고 죄악되어 있으니 당연히 그랬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창조되시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어떠셨을까를 우리들이 먼저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적인 눈이 뜨인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적인 귀가 열린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예수를 바라보지 못하나 우리는 영적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고, 세상은 그 음성을 듣지 못하나 우리는 영적인 귀가 열려 주님의 음성을 듣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 지난주에 우리가 씨 뿌리는 비유를 했어요. 잘못 오해하시면, 여러분들이 씨 뿌리는 비유가—혹시 모르겠습니다—이 자리에 열심히 우리 마음 밭에 있는 돌을 캐내느라고 한 주간 지내신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생각되지만, 열심히 가시 뽑느라고 수고하고 노력한 분도 계시리라 생각이 됩니다. 아, 내가 길가에 떨어진 씨앗을 싹을 틔워야 되는데 길가를 갈아엎느라고 열심히 고생하신 분도 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사실 “우리의 마음 밭을 갈아 옥토가 되게 하자. 우리의 돌로 가득 차 있는 마음을 갈아서 옥토가 되게 하자. 가시 덤불을 다 뽑아내고, 씨앗이 떨어졌을 때 열매 맺는 성도가 되자”라는 비유로 설명하신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혹시라도 그런 비유를 들으셨다면, 다시 한번 수정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 해답이 이렇게 등장을 하게 되는데, 아, 12장에서 여러분들이 혹시라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심판 날에 이루어질 두 가지의 일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셨죠.
하나는, 니느웨 성 사람들이 회개하였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하나님의 말씀도 요나가 건성으로 하는 그 말씀을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였다라는 것.
또 하나는, 멀리 남방에서 여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솔로몬에게로 와서 그 말씀을 청취하였다라는 것이, 말세에 이루어지는 현상이라고 주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오늘날 우리들이 이 예언이 성취됨을 보게 됩니다. 어떤 의미냐면, 하나님의 선민으로 택한받았다 여겼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제외가 되었고, 오히려 니느웨 성에 있는 죄악된 사람들인 우리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는 선민으로 택하셨다는 겁니다.
그들이 남방에 있는 여왕이 솔로몬에게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당연하고,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 자리에서 벗어남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 있게 되었다.
이게 말씀이 일어나는 현상이었다라고 주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고 나서 13장을 우리가 지난주에 묵상했는데, 13장에서 근본적으로 우리들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예수님께서 천국에 관한 설명이나 비유 그 자체보다도, 이 천국에 관한 비유를 듣고 설명을 듣는 사람들—그 사람들의 반응이 어떤가에 대해서 지금 13장은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13장은 ‘천국장’이라고도 말씀을 드렸죠. 이야기가 풍성하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천국을 주님께서 우리들이 알아듣기 쉽게 잘 설명하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천국에 관한 비유를 듣고 들은 사람들이 어떠한 반응을 나타냈는가, 여기에 대해서 지금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생명의 씨앗이 떨어졌을 때, 반응이 각각 달랐다는 것이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에게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싹 틔우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냐면, 돌과 같은 딱딱하고 굳어진 길과 같은 밭이었고, 그다음에는 돌뿌리에 떨어져서 결실을 맺지 못하고, 혹은 가시덤불에 떨어져 가시가 그들을 막아버린 장면을 우리들이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씨앗이 문제가 아니라 밭의 상태가 문제였었다. 예수님께서 지금 유대인들에게 설명을 하고 계신 겁니다. 너희들에게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다 할지라도, 영적인 귀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들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 다시 말씀드리면 너희들의 마음은 가시밭이요, 너희들의 마음은 돌밭이요, 너희들의 마음은 길가였다. 그러기 때문에 메시아가 왔으나, 창조주가 왔으나, 이 땅에 왔지만 너희들이 알아보지 못한 이유다라고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설명해 주시는 겁니다.
아,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면서 많은 비유를 드셨습니다. 많은 비유를 드시면서, 모든 예수님의 말씀이 비유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비유를 많이 드셨는데, 사실 우리가 이 비유에 대해서 성경을 읽으면 어떤 것은 이해가 되는 것이 있고, 또 어떤 것은 설명해 주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비유라고 했는데,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님께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셨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죠. 이 당시에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주께서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라고 제자들이 나와서 이야기를 합니다.
10절 말씀 한번 봅시다. 10절 말씀을 보시면,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서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아, 비유로 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까? 이렇게 얘기했는데, 이 ‘비유’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냐면, 곁에 놓고 비교한다는 겁니다. 원래 의미는 ‘비슷한 것을 알아듣기 쉽게 곁에 놓고 이것을 설명한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말에도 이런 것들이 참 많이 있는데, 격언, 속담, 어쩌면 수수께끼 같은 것들도 다 이런 종류에 해당이 되는 거죠.
아,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비유가 낯선 것이 아니라 굉장히 익숙했던 것들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을 읽을 때, 구약 성경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비유로 등장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들—특히 우리는 구약 성경에 통달하지 않았지만—유대인들은 아예 구약 성경에 통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났다는 자부심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안에 우리에게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기 때문에 성경을 통달할 정도로 달달달 외우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아니면 더 어릴 적부터 집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접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을 들여다보면, 그 구약 성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비유로 하신 말씀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것이죠.
하나만 찾아볼게요. 시편 78편 2절을 보시면, 이렇게 시편에서 이야기합니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한다.”
예로부터 비유로 말했다. 비유로 말하는 목적은,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고 비유로 말했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자신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있는 익숙한 방식이었던 것이죠.
우리나라 분들도 옛날 속담들을 많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속담—예를 들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아주 먼 옛날이라는 뜻이지요. 이런 우리들의 말 속에 속담들이 굉장히 많이 담겨 있는 이유는, 그 속에 담겨 있는 비밀, 감춰져 있는 것들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한다는 겁니다.
그들이 남방에 있는 여왕이 솔로몬에게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당연하고,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 자리에서 벗어남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 있게 되었다.
이게 말씀이 일어나는 현상이었다라고 주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고 나서 13장을 우리가 지난주에 묵상했는데, 13장에서 근본적으로 우리들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예수님께서 천국에 관한 설명이나 비유 그 자체보다도, 이 천국에 관한 비유를 듣고 설명을 듣는 사람들—그 사람들의 반응이 어떤가에 대해서 지금 13장은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13장은 ‘천국장’이라고도 말씀을 드렸죠. 이야기가 풍성하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천국을 주님께서 우리들이 알아듣기 쉽게 잘 설명하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천국에 관한 비유를 듣고 들은 사람들이 어떠한 반응을 나타냈는가, 여기에 대해서 지금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생명의 씨앗이 떨어졌을 때, 반응이 각각 달랐다는 것이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에게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싹 틔우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냐면, 돌과 같은 딱딱하고 굳어진 길과 같은 밭이었고, 그다음에는 돌뿌리에 떨어져서 결실을 맺지 못하고, 혹은 가시덤불에 떨어져 가시가 그들을 막아버린 장면을 우리들이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씨앗이 문제가 아니라 밭의 상태가 문제였었다. 예수님께서 지금 유대인들에게 설명을 하고 계신 겁니다. 너희들에게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다 할지라도, 영적인 귀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들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 다시 말씀드리면 너희들의 마음은 가시밭이요, 너희들의 마음은 돌밭이요, 너희들의 마음은 길가였다. 그러기 때문에 메시아가 왔으나, 창조주가 왔으나, 이 땅에 왔지만 너희들이 알아보지 못한 이유다라고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설명해 주시는 겁니다.
아,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면서 많은 비유를 드셨습니다. 많은 비유를 드시면서, 모든 예수님의 말씀이 비유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비유를 많이 드셨는데, 사실 우리가 이 비유에 대해서 성경을 읽으면 어떤 것은 이해가 되는 것이 있고, 또 어떤 것은 설명해 주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비유라고 했는데,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님께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셨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죠. 이 당시에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주께서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라고 제자들이 나와서 이야기를 합니다.
10절 말씀 한번 봅시다. 10절 말씀을 보시면,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서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아, 비유로 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까? 이렇게 얘기했는데, 이 ‘비유’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냐면, 곁에 놓고 비교한다는 겁니다. 원래 의미는 ‘비슷한 것을 알아듣기 쉽게 곁에 놓고 이것을 설명한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말에도 이런 것들이 참 많이 있는데, 격언, 속담, 어쩌면 수수께끼 같은 것들도 다 이런 종류에 해당이 되는 거죠.
아,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비유가 낯선 것이 아니라 굉장히 익숙했던 것들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을 읽을 때, 구약 성경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비유로 등장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들—특히 우리는 구약 성경에 통달하지 않았지만—유대인들은 아예 구약 성경에 통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났다는 자부심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안에 우리에게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기 때문에 성경을 통달할 정도로 달달달 외우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아니면 더 어릴 적부터 집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접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을 들여다보면, 그 구약 성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비유로 하신 말씀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것이죠.
하나만 찾아볼게요. 시편 78편 2절을 보시면, 이렇게 시편에서 이야기합니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한다.”
예로부터 비유로 말했다. 비유로 말하는 목적은,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고 비유로 말했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자신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있는 익숙한 방식이었던 것이죠.
우리나라 분들도 옛날 속담들을 많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속담—예를 들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아주 먼 옛날이라는 뜻이지요. 이런 우리들의 말 속에 속담들이 굉장히 많이 담겨 있는 이유는, 그 속에 담겨 있는 비밀, 감춰져 있는 것들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삼고 나의 힘으로 삼는다, 내가 어렵고 힘들 때 이 말씀이 나를 위로하였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우리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축복인 겁니다. 우리들에게 이것을 주께서 주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천국의 비밀을 듣는 것을 너희들에게는 허락이 되었지만 저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거꾸로 이렇게 생각했겠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택한 것이지, 저 천민인 갈릴리 어부들, 저 촌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더욱더 풍성하게 되리라라고 설명하고 계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왜 이렇게 말씀하시냐면, 그들의 마음밭이 문제였다는 겁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유대인들로 대표되는 이 사람들의 마음밭은, 생명인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마음밭이 옥토밭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에.
여러분들, 우리의 마음밭이 옥토밭이라고 주께서 우리들에게 설명하십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신 은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열심을 다해서 돌밭을 가꾸고, 밭을 더 깊게 파고 해서 옥토밭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듣고, 우리가 보는 것이죠.
13절 말씀을 보시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라.”
아,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다시 말씀드리면 아무리 생명의 씨앗이 그들에게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결실을 하지 못한다라는 의미가 되겠죠.
그래서 23절 이후로 주님께서 이사야 6장에 있는 말씀을 비유로 인용하시면서, 예를 들어 설명하시며 제자들에게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만이 깨달을 수 있는 축복과 은혜가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하시기 위해서 이사야서 6장을, 13절 이후 말씀을 지금 쭉 설명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 외에,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어떤 말을 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셨는가를 생각해 보면 오늘 말씀이 좀 더 깊이 이해가 될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한번 보십시오. 이사야서 6장 8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에는 사람이 없고,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 황폐한 것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배임을 당하여도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니라.”
여러분들, 13절 말씀에 조금만 주목해 보십시오.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 이사야서 6장에 있는 말씀을 자세히 한번 살펴봅시다.
우시아 왕이 죽던 때에, 아, 그와 사촌이 되었던 이사야는 슬픔 가운데 빠집니다. 성전에서 기도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환상을 바라보게 되죠. 그러니까 이 당시에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 죽게 되었다”라고 고백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가 너를 죽일 것 같으면 어찌 너에게 나타났겠느냐?” 하시며 그를 안심시키십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에게 소명을 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장면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유는 감춰져 있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예를 들어 하시는 말씀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지금 말씀 가운데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음을 둔하게 하라. 그들의 귀가 막히게 하라. 그들의 눈을 감기게 하라. 혹시라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깨달을까 염려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감추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비유를 통해 감춰진 것을 드러내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나와 있는 현상들을 오히려 감추라고 하실까요? 왜 “혹시라도 알아들을까 봐 두렵다”라고까지 말씀하실까요? 우리는 이것을 먼저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 부분을 잘 묵상해 보시고 마음에 담아 두시길 바랍니다. “못 알아들을 것이다. 알아들을까 봐 두렵다.” 이 역설적인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구루터기를 남길 것이다.” 즉, 씨를 남길 것이다. 남아 있는 씨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사야서에 통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이사야서 같은 경우는 달달달 외울 정도로 잘 알고 있던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유대인들은 즉시 “아, 그 씨는 이사야서 6장에 남겨 놓은 씨를 말하는 거구나”라고 이해했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왜 씨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을까요? 북쪽 이스라엘은 아수르에 망하고, 남쪽 유다도 바벨론에 망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다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포로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70년이 차면 반드시 너희들을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리라. 너희들로 말미암아 새로 시작하겠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백성으로 삼겠다. 남아 있는 너희들을 이 땅으로 데리고 와서 나라를 다시 부흥시키겠다. 회복시키겠다. 다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두겠다.”
주께서 이사야서를 통해, 또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남아 있는 씨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죠. 유대인들은 이 남은 씨를 메시아와 연결시켰습니다. 즉, “메시아가 오셔서 이 씨의 역할을 할 것이다. 지금은 로마 정부가 우리를 다스리고 있지만, 메시아가 오셔서 우리를 회복시킬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축복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데 대한 보상을 주실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말하는 남아 있는 씨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그들이 간과했던 겁니다. 메시아가 단순히 씨의 역할, 구루터기의 역할을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이사야가 예언한 그 남은 씨는 곧 그리스도 예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왜 “알아들을까 봐 주님께서 염려하셨을까?” 구원받지 못한 백성들, 다시 말씀드리면 택함받지 못한 백성들이 혹시라도 알아들을까 염려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말씀을 열어주시고, 알아듣게 하시며, 풍성하게 결실 맺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너희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허락되었으나 저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라는 말씀을 여기서 하고 계신 겁니다.
유대인들이 씨 뿌리는 비유를 들었을 때는 “아, 이제 추수만 남았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너희들의 마음이 지금 이런 마음이다. 옥토밭이 아니라 길가와 같은 마음, 돌밭과 같은 마음, 가시밭과 같은 마음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씨가 떨어져도 너희들은 결실을 맺지 못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않았다”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며 선포하는 것은, “너희가 다 장님이다. 보아도 보지 못한다. 너희가 다 귀머거리다.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너희들이 길가요, 너희들이 돌밭이요, 너희들이 가시밭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이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완악하다”라는 표현이 아주 중요한 표현입니다. 원어적으로는 “두껍다, 살지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처음에는 “완악하다”와 “두껍다, 살찌다”가 잘 연결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시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완악하면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시편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진심으로 주의 법들을 지키리이다. 그들의 마음은 살쪄서 기름과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그들의 마음이 살쪄서 알아듣지 못한다—이것이 곧 “완악하다”라는 표현입니다. 마음이 살쪄 기름기로 덮여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뚫고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 이사야서 6장에 있는 말씀을 자세히 한번 살펴봅시다.
그래서 그들이 마음이 살쪄서 둔해져, 마음이 완악한 그러한 상태가 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거죠. 아, 왜 이렇게 되었느냐?
여러분들, 자녀들이 편식을 하면 영양분이 골고루 퍼지지 않지 않습니까? 내가 편식을 하게 되면 어떤 사람은 살찔 염려가 있고, 어떤 사람은 마를 염려가 있고 그렇지 않습니까? 기름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편식을 하게 되면 그 뭐 살이 쳐 가지고 뚱뚱해지지 않습니까? 이런 형국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데, 이 말씀을 골고루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말씀만, 내가 좋아하는 말씀만, 내가 힘이 되는 말씀만 편식하듯이 그 말을 붙들다 보니 이게 ‘나의 의’가 돼 버린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명령하시는 ‘명령자’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필요할 때 뽑아 쓰는—“나는 이때 이 말씀이 필요하다”—이런 식으로 편식하는, 마음이 완악해져 있는 그러한 상태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완악하다, 교만하다’라고 이야기할 때는, 하나님의 언약·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자신의 뜻대로 풀이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교만하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교만하다’와는 조금 결이 다른 말인 거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지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유대인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은 “너희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너희들이 원하는 것만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들의 마음을 뚫고 들어올 수가 없다”라는 것을 지적하신 겁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것—그 조그마한 것일지라도—그것까지도 다 빼앗기리라”라고 주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죠. 이거 우리들이 아주 중요한 내용인데요.
그래서 주님께서 거룩한 씨를 남겨 놓으셨다—이 씨가 그리스도이다—라고 이야기하죠. 이 거룩한 씨, 그루터기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하고 싶어 하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다가 다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으로 생각을 했지만, 이사야—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메시지를 해석하실 때는 그것이 곧 ‘그리스도 예수’다라는 표현을 하게 된 것이죠. 이 씨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회복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루터기를 남겨 놓으신 이유는, 그 나라를 다시 부흥시키려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일하심이 그 가운데 담겨 있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느냐”라는 것은, 우리의 완악함·연약함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이죠.
아무리 돌을 캐내고, 아무리 딱딱해져 있는 굳은 밭을 간다 할지라도 여전히 옛날 상태로 돌아가는 우리의 연약하고 완악한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씨’가 되셔서 우리 안에 뿌리고 계신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옥토밭으로 변한 겁니다. 아멘. 다른 이유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스스로 노력해서 옥토밭으로 변한 것이 아니고, 열심히 돌멩이 뽑고, 열심히 밭 갈고, 열심히 가시들을 뽑아내서 우리 마음이 옥토밭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남아 있는 씨, 그루터기’가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돌 같은 우리의 마음, 가시밭 같은 우리의 마음, 단단해져 있는 그 마음을 갈아엎으신 것이죠. 이것이 ‘거룩한 씨’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 수 있는 귀가 뜨인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16절 말씀 한번 봅시다. 16절 말씀을 보시면,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라고 말씀했는데,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성도의 복이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우리의 마음에 평화를 얻는 것—성도들의 복입니다.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우리가 말씀 속에서 얻는 것, 이게 성도들의 복인 겁니다.
물질 말고, 건강 말고—아무리 건강해도 때가 되면 하나님이 부르시면 다 가야 됩니다. 물질이 아무리 많아도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부르시면 “여기 있습니다” 하고 가야 되는 게 우리 인생이지 않습니까? 그게 복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깨닫고, 그 말씀으로 힘을 삼고, 그 말씀으로 위로를 삼고, 그 말씀이 나에게 힘이 되는 것—이게 우리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라고 주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니까—요한복음 16장인가요?—거기서 “세상이 알 수 없는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라는 표현이 있죠. 16장 31절에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것—물질로도, 우리의 노력과 수고와 지혜로도 구할 수 없는 것—을,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죠. 우리가 옥토밭이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듣고 보게 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17절 말씀 봅시다. 17절 말씀을 보시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얼마나 우리가 복된 겁니까? 신약을 살아가는 성도들은—구약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다고 합니다—이제는 완전히 뭐 ‘하이 디피니션’으로 보는 겁니다. 현미경으로 보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바라보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러 번 말씀을 드리지만, 누워서도 핸드폰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원하면 요한복음 성경공부를 찾아 들을 수 있는 이런 세대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신약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그리고 그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우리의 영적인 양식으로 삼고, 그 말씀으로 우리의 힘을 삼기 때문에 우리는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말라기서를 한번 봅시다. 신약의 백성들에 대해서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결론적으로 말라기서 4장 5–6절을 보시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지금 말라기서에서 이렇게 예언하는 장면입니다. 보세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겠다.” 보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엘리야를 보내시겠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말씀이 마태복음 11장에서 세례 요한을 설명할 때 이렇게 이어집니다. 10절을 보시면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이라”—세례 요한을 가리키죠.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엘리야’라고 하지 않습니까? 왜 세례 요한을 보내셨다고 했습니까? 주의 길을 평탄케 하고,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오셨다라고 하죠.
그리고 14절을 보시면,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라.”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가리켜 “말라기서에서 약속한 그 엘리야가 세례 요한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세례 요한이 왜 왔습니까? 주의 길을 평탄케 하고 예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말라기서에서 하신 말씀은, 엘리야를 보내는 이유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엘리야—다시 말해 세례 요한—이 오고, 그다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 그 땅에 오심으로 ‘완성’케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만드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을 아버지께—하나님께—향하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로 향하게 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설명하시는 것이죠.
여러분들, 우리가 ‘더러운 귀신이 나간다’는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우리에게서 나간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그 자리에 무엇을 채우느냐입니다. 그 자리에 그리스도 예수로 채우지 않으면, 또 어느 순간 세상의 온갖 것들이 물밀듯 우리 가운데 침범하게 됩니다.
결국, 예수를 믿는다는 것—예수를 믿어 ‘결실’하는 것—여러분들이 다시 한번 이 말씀으로 확인하시고,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귀한 자녀가 되게 하시고 우리를 옥토밭으로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기만 하면 이제는 결실하는 사람들로—30배, 60배, 100배—결실하는 자로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고, 풍성한 성령의 열매로 결실하는 여러분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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