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2:9~14 율법(안식일)의 적극적인 의미
- seattleo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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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배에 용서가 없고,이 예배에 자비가 없고,이 예배에 하나님의 긍휼함이 없다면,그 예배는 나는 받지 않겠다—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여러분,주일에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드리는가—그것은 정말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주일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이 문제보다도,‘우리가 주일에 무엇을 하느냐’,어떤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 있느냐,그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 몇 년 전으로 제가 기억을 하는데요. 한국의 대형 교회에서 ‘40일 특별 새벽기도회’, 일명 ‘특세’라는 게 유행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들어보셨을 겁니다. 40일을 정해 놓고 특별히 기도하는 건데요, 특별 새벽기도회죠.
한국에는 새벽 예배가 굉장히 이른 시간에 시작되지 않습니까? 여기 미국에서는 보통 5시 반, 6시 이렇게 드리지만, 한국에서는 4시 반, 늦어도 5시에는 예배가 시작됩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새벽예배도 1부, 2부로 나누어서 드려요.
그런데 새벽 4시부터 택시들이 강남 일대를 완전히 줄지어 교회로 들어가더라는 겁니다. 새벽 4시부터 강남 일대가 막 북적북적한 거예요. 이 ‘특세’로 말미암아 생겨난 그런 풍경이죠. 여러분들, 상상이 가십니까? 우리는 전혀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하고 지냈는데 말이죠.
근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요, 어떤 자매가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그 새벽예배를 작정하고 다니는데, 늦지 않으려고 강변도로에서 속도를 높여서 막 달려갔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감사하게도 앞에 타이어가 하나 있었는데—아마 어떤 차에서 빠진 타이어였겠죠—그걸 용케 피해서 사고를 면했던 적이 있습니다.”
라고요.
제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기가 막혔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라면 예배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스톱 사인이고 뭐고 상관없이 그냥 달려오시겠습니까? 아니면 조금 늦더라도 규정을 지키면서, 안전하게, 준수하면서 달려오시겠습니까?
일찍들 오셔야죠. 오는 게 맞죠. 예,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은 이렇습니다.“안식일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만든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 주신 것이다.”
안식일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지, 우리가 열심히 종교 생활을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안식일을 묵상하면서, 안식일에 담겨 있는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나누었습니다.오늘은 안식일의 보다 적극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안식일은 율법을 대표하는 계명 가운데 하나입니다.하나님께서 이 율법, 이 안식일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그리고 그 안에 담긴 적극적인 의미는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 함께 나누어 보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셨는지는 십계명 안에 포함시키셨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뿐만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죽여라 할 정도로엄격하게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다시 말씀드리면 유대인들이이 안식일이라는 규례에 또 다른 굴레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라는 하나님의 명령 외에도,자신들 스스로 39가지의 규례를 더 만들어 놓았다는 겁니다.“안식일에는 이러면 안 된다, 저러면 안 된다.”이 모든 것들을 사람의 손으로 덧붙여서,결국 하나님이 주신 자유와 쉼의 날이, 다시 율법의 틀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죠.
아까 말씀드린 그 자매처럼, 예배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강변도로를 막 생생 달리는 겁니다.예배를 향한 열심은 좋지만, 그것조차 또 다른 규례로 바꿔버리는 모습이우리 안에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지난주 우리가 함께 묵상했던 것처럼안식일의 의미를 세 가지로 풀어주셨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비록 그날이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허락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기뻐하신다.율법적 형식보다 긍휼과 자비, 사람을 향한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라,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을 살아갈 때하나님의 자비하신 마음이 우리를 통해 흘러나가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그날이 비록 안식일일지라도,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그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사랑을 베풀고,자비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 자비를 베풀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비록 예배에 늦을지라도,세상의 규칙을 지키며,법을 준수하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는 것을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신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예배 시간 땡!” 했는데 늦게 오면…뭐, 우리 교회는 자리가 넉넉해서 언제 오시든지 문이 열려 있지만,한국 교회는 그렇지 않잖아요. 예배 시간 땡 하면 문이 다 닫힙니다.그래서 예배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비디오실에 가서 영상 예배를 들어야 해요.
이런 불편함이 있기 때문에,아마 그 자매가 강변도로를 과속해서 달렸던 것도 이해가 됩니다.하지만 더 중요한 건, 예배 자체보다도안식일일지라도 하나님의 자비하신 마음이 흘러가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하신 거예요.주님의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겁니다.
17절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마태복음 12:7)
주님은 자비를 원하시는 분입니다.제사 자체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이 목적이 되고 목표가 되어서,정작 주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흘러가지 않는다면,그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아니라는 겁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그 틀을 지키는 것보다“이 안식일에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낼 것인가?”이게 더 중요한 마음가짐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안식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전달되고 있느냐,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누리고 있느냐, 즐기고 있느냐,이것이 더 중요한 겁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그 창조의 은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신 그 구원의 은혜,
이 모든 은혜를 안식일을 통해 누리며 살아가고 있느냐를우리에게 질문하시는 것이죠.
여러분들, 이런 말 자꾸 들으면 안 좋을 것 같지만…예배를 어떤 사정에 의해서 빠진다고 해서,하나님께서 그 빠진 것에 대해 보복하시지는 않습니다.아멘?
아멘을 해야 할지, 안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한국에서 오랜만에 친척들이 놀러 왔다고 해 봅시다.그런데 그 친척들이 교회를 안 다닌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그 친척들에게"나 예배 드리러 가는데, 잠깐 집에 있을래?" 하든지,"같이 교회 갈래?" 이렇게 얘기할 수는 있겠죠.근데 그걸 거부한다고 해서,"마귀가 틈탔다, 사탄이 역사한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절대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걸 원치 않으십니다.어쩔 수 없이 예배를 빠질 수 있는 상황이라면,하나님은 그것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마음입니다.우리 마음 속에하나님의 창조하심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쁨을우리가 어디에서든지 간직하고 있느냐,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예배에 나왔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정작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데도하나님의 창조하심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는가?하나님의 구원하심에 감격하며그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가?
이 마음이 없이 그저 자리에 앉아 있는 것보다,차라리 그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너희가 아무리 제사를 많이 지낸다 해도,전천의 수양을 드린다 해도,만만의 기름을 골짜기에 흘려 넘친다 해도,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시겠느냐?너희 마음이 지금 다른 데를 향하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은 형식적인 예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그래서 말씀하신 것이죠:“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호세아 6:6)
그러니까 우리가 주일, 이 안식일을 맞이하여예배를 드릴 때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 질문을 항상 마음속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죠.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그 창조는하나님 자신을 위한 창조가 아닙니다.바로 우리를 위한 창조입니다.
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는,우리들에게 이 창조를 주시기 위해서,우리가 이 창조하심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그렇게 명령하시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들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내가 이것을 너를 위해 만들어 주었다."
그 창조의 기쁨을,여러분들이 지금 누리고 계십니까?
길가에 있는 꽃들조차도요,여러분들을 위해,나를 위해,우리를 위해 있는 겁니다.누구를 위해 있겠습니까?
여러분들 텃밭에 있는 그 식물들이여러분들을 위해 있는 것이고,앞에 있는 나무도,하다못해 잡초 하나도,우리 모두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창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겁니다.
거기에 더해서,구원하심은예수 그리스도가 높아지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삼기 위해서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 가운데,이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나를 위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나를 위해 독생자를 주신 그 하나님.
그 하나님께 시선을 맞추고, 초점을 두는 것이 먼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아무리 많은 헌금을 한다 할지라도,아무리 많은 시간 내어서 봉사를 한다 할지라도,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 있지 않다면,하나님의 창조하심과 구원하심에 대해 묵상하지 않는다면,그 모든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어떤 제도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어떤 종교적인 행위가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안식일은,아무것도 안 하고 쉰다고 해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적극적으로 찾으며,그 일을 행하는 것을하나님은 더 기뻐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 하신 그 말씀은“하나님 이거 싫어하시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오늘, 무엇을 기뻐하실까?"적극적으로 찾고,
그 일이 내 이웃에게 사랑을 흘려보내는 일,긍휼을 나누는 일이라면,비록 안식일일지라도, 그 일을 행하라.
이것이 바로안식일에 담겨 있는 적극적인 의미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떤 규정을 지키기 위해서,눈앞에 있는 불쌍한 환자를 외면할 것인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안식일이라 할지라도,눈먼 자가 “나를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고 있는데,지나치지 말라는 겁니다.
안식일이라고 해서,병든 자가 “내 병을 고쳐 달라”고 간절히 구하고 있는데,그들을 외면하지 말라는 겁니다.
주님은 그들을 단 한 사람도 지나치신 적이 없습니다.그 날이 비록 안식일이라 할지라도,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안식일을 범했다는 이유로주님을 잡아 죽이려고 할지라도,주님은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눈먼 자를 고쳐 주셨고,
앉은 자를 일으켜 세워 주셨고,
병든 자에게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안식일에 담겨져 있는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만이 행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도안식일에 적극적으로 행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
바로,하나님의 자비하심과 하나님의 사랑하심이비록 주일이라 할지라도,우리 이웃에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그런 삶을 더 기뻐하시고,더 즐거워하신다는 것을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주님께서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체라는 겁니다.예수님이 중심이고, 예수님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성도라고 불리는 이유는,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윤리적으로 흠이 없고,도덕적으로 완전하고,일주일 동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해서성도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우리가 성도인 것입니다.
이 말씀처럼,안식일의 참된 의미는그저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서 우리가 성도인 것이지,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우리는 성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하신 겁니다.
주님을 제외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그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거죠.
마가복음 2장 27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
안식일 자체가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그들의 왜곡된 관점을 바로잡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후,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손 마른 자를 고치는 사건이 안식일에 일어나게 됩니다.
지난번 우리가 묵상했던 대로,이 사건은 바리새인들이 판 함정이었습니다.하지만 주님은 그것이 함정임을 아시면서도,안식일에 회당에 나와 있던 한 손 마른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안식일에 담겨 있는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자리에서"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라고 물으심으로써,그들의 위선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비록 그것이 나를 핍박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할지라도,주님은 그것을 감당하셨습니다.
실제로,주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이후로,바리새인들은 이제 핍박을 넘어,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를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그것이라면,그 고난과 반대도 감수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오늘 생각해야 할 한 가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셨고,그 안식일은 율법을 대표하는 상징인데,그 율법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우리가 얼마나 죄 가운데 있는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그 율법을 주신 겁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때,그 사실을 통해“나는 하나님 앞에 연약한 자이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안식일에 우리가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다면,그 자리에 앉아만 있을 것이 아니라,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로 달려가는 것—바로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참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뿐만이 아니라 모든 현대 교회들이 안고 있는 큰 문제는,다시금 형식이라는 틀 속에 갇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형식을 우리는 너무나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사실 중요한 건 내용인데도,형식, 제도, 틀 같은 외적인 요소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그런 병에 빠져버렸다는 겁니다.
사실, 형식이라는 것은 예배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죠.우리는 ‘예배’라는 형식을 통해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묵상하고,예배라는 형식을 통해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이 형식을 빌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라는 틀 안에 너무 깊이 박혀 있다 보면,하나님의 은혜보다도,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보다도,그 형식과 틀을 더 중요시하게 여기는잘못된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규칙대로 탁탁 예배가 진행되어야만우리가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는다고 생각하는습관화된 신앙, 형식적인 신앙으로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형식도 중요합니다.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그 형식 안에 담긴 내용—그리스도 예수를 묵상하는 예배가 되었는가?그것이 우리에겐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비록 예배를 통해 감동이 없고,눈물이 없고,평안이나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하더라도,내가 그 예배 가운데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묵상했다면,그 예배는 성공적인 예배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형식이라는 틀 속에 너무 갇히지 마십시오.그 틀을 ‘빌려서’,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 안에서살아 계신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그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사야도 그 점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무한한 재물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자주 열리는 그 집회들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많이 드리는 헌금, 그것이 내게 아무 소용이 없다.내가 그것이 없어서 너희에게 드리라 했느냐?”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예배에 용서가 없고,이 예배에 자비가 없고,이 예배에 하나님의 긍휼함이 없다면,그 예배는 나는 받지 않겠다—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여러분,주일에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드리는가—그것은 정말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주일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이 문제보다도,‘우리가 주일에 무엇을 하느냐’,어떤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 있느냐,그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이나를 통하여 흘러나가고 있는가?하나님의 사랑하심이 나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흘러나가고 있는가?이게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여러분,특별히 교회 안에서 봉사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 주의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면,"내가 기쁨으로 하고 있는가?"이걸 꼭 물으셔야 합니다.
여러분들,봉사하시는 분들은 시간을 내시고,또 때로는 물질도 포함되고,우리의 헌신과 수고,이런 것들이 다 담겨져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의 수고와 봉사로 인해서많은 분들이 기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건,"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봉사에,기쁨이 있는가?"이걸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기쁨이 없다면,잠시 봉사를 쉬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왜냐하면,기쁨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내가 하는 것이고,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으로 내가 감당하는 것이다”라는 마음으로 다시 돌아온다면,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수고하고,내가 헌신하는 이 봉사를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 때,그게 너무 힘들고 마음이 어려워진다면—그때는 잠시 쉬는 것도 괜찮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의 봉사는분명히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하는 수고요, 헌신입니다.이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그 봉사에 기쁨이 있는가 없는가는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우리의 찬송에,우리의 기도에,우리의 예배에이 동일한 마음이 있는가는너무나도 중요한 내용이 된다는 것이죠.
자, 그다음으로9절과 10절 말씀으로 한번 들어가 봅시다.
9절과 10절 말씀을 보시면“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님께 묻습니다."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여러분들, 옳습니까?(아멘)
아멘 소리가 좀 아쉬웠습니다.다시요—옳습니까?(아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지금 예수님께 묻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
그런데 이 질문,**"옳습니까?"**라고 묻고 있지만사실은 이미 옳지 않다는 전제를 깔고 묻고 있는 겁니다.함정을 파고 있는 것이죠.
다음 구절로 넘어가기 전에,누가복음에는 이 사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누가복음에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을 합니다.누가복음 13장 11절을 보시면,“18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8년 동안 이 여인이 허리가 꼬부라졌고,귀신이 들려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아주 장기적으로 고통 가운데 있었던 사람이죠.
18년 동안이라고 하면,아마 분명히 가족들도 이 여인을 버렸으리라 생각이 됩니다.버리지는 않았다 할지라도—우리에게는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한 가정에 이런 핸디캡을 가진 분들이 있다면,그 가정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그런데 이게 18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겁니다.
아마 친구들도 다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주변 사람들도 이제는 있는 둥 마는 둥,거의 투명인간처럼 여기지 않았을까요?
가족들에게도 버림받고,친구들에게도 버림받고,진짜 외롭고 힘든 상황에 놓인 이 여인이지금 어디에 있는가?회당에 있다는 겁니다.
게다가 성경은 뭐라고 기록하느냐면,**“귀신이 들렸다”**고까지 표현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허리가 아픈 게 아니라,정신적인 고통까지 있었다는 말입니다.정신 지체, 정신질환,오늘날 말로 하면 정신병까지 함께 앓고 있었다는 것이죠.
육체적으로는 허리가 굽고,정신적으로는 귀신 들려 제정신이 아닌 상태.정말 가련하고 소망 없는 여인이 지금 등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이 여인이 회당에 있었다는 것입니다.18년 동안, 매번 회당에 있었다는 거예요.
회당에서는 뭘 합니까?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고—하나님을 섬기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곳이죠.
그런데 그 안에서 이 여인에 대해선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누구 하나 다가가 주는 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사람들은 자기 할 일만 했습니다.예배드리고, 말씀 듣고, 기도하고…그 여인은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취급했던 겁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 여인을 찾아오십니다.그리고 이 여인을 고쳐주십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보면서우리 마음속에 묻게 됩니다:“나는 내 옆에 있는 이 연약한 자를 보고 있는가?”예배는 드리고 있지만,주님의 긍휼이 내 눈과 손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참고로, 중세 시대는 우리가 흔히“영적인 암흑기”라고 부르지 않습니까?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중세는 동시에 영성(Spirituality)이 가장 깊었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수도원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며많은 이들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회복했습니다.세상은 어두웠지만,그 안에서 영성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아무리 어두워 보일지라도,누군가를 향한 긍휼,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흘러간다면,그것은 참된 안식일의 의미,참된 예배의 삶이라는 것이죠.
교회가 가장 부요했던 때가 중세 시대입니다.왕들이 교황 앞에 무릎을 꿇었고,교황이 임명하는 사람이 왕이 되었던 시대였습니다.
교회는 겉으로는 가장 부요했지만,영적으로는 가장 침체되어 있던 시대—그것이 바로 중세입니다.우리는 그 시대를 “영적인 암흑기”라고도 부르죠.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상황입니까?만약 중세가 영적으로 가장 활발하고 부흥했던 때였다면,교회 역시 함께 성장하고 부흥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그런데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마치 회당 안에 앉아 있던,18해 동안 허리가 꼬부라지고 정신적인 질환까지 겪으며슬픔과 외로움에 갇혀 있던 그 여인처럼요.
우리는 그 존재를 보지도, 알지도 못합니다.그저 내가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하고기쁘면 “오늘도 좋은 예배였어.”그걸로 끝나는 겁니다.
하지만, 한쪽 구석에 그 여인이 지금도 앉아 있는 겁니다.
이것이 어쩌면 당시 유대인들이 겪었던 문제이자,오늘날 현대 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놓치고형식 속에만 갇혀 있다면,우리 역시 똑같은 모습을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 여인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요?비록 안식일이었지만,주님은 그 여인에게 “이리 오라”고 하십니다.그리고 직접 안수하십니다.
사람들이 보든 말든 상관없습니다.주님은 긍휼히 여기셨고,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안식일의 규례가 그 영혼보다 중요하지 않았다는 겁니다.한 영혼이 귀했고,한 영혼이 불쌍했기에,주님은 행동하셨습니다.
이 장면을 보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깜짝 놀랍니다.그리고 물고 늘어집니다:“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
그들의 주장은 이랬습니다:“이 여인은 안식일에 고쳐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왜냐하면 생명이 위독한 것이 아니고,그저 허리만 굽은 것뿐이라는 겁니다.
“꼭 안식일에 고칠 필요가 있느냐,그다음 날 고치면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 여인은 지금 18년째 그 상태입니다.그다음 날?그다음 날이 오기는 했습니까?
18년 동안 아무도 고치지 않았습니다.18년을 방치해 놓고는,지금 와서 안식일 운운하는 겁니다.
주님은 그 모든 형식과 틀을 깨고,사랑으로,긍휼로,자비로,그 여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묻습니다:예배당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형식을 지키고 있는가,아니면 한 영혼을 향한 긍휼의 눈을 가지고 있는가?
그래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안식일의 율법, 그 정신이 무엇이냐?바로 적극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불쌍한 자들에게하나님의 자비함을 베푸는 것—그것이 안식일의 참된 의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명하신 목적은우리를 심판하고자,안 지키면 돌로 치라고 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적극적으로 자비를 베풀고,하나님의 선하심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을 잠깐 보시죠.
에베소서 5장을 보면,이 적극적인 의미가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엡 5:4)
하나님의 백성, 구원 얻은 자로서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단지 거짓말을 하지 말라, 나쁜 말을 하지 말라는 수준이 아닙니다.그보다 더 적극적으로,감사하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에 담겨 있는 핵심 정신입니다.
“내가 이 일 하면 돌에 맞지 않을까…?”그런 두려움과 경직된 태도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우리가 기쁘게, 담대하게, 적극적으로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11절에서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안식일에 구렁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마 12:11)
‘구렁에 빠졌다’는 건,그 양의 생명이 위급한 상황이라는 뜻입니다.그렇다면 당연히 그 양을 끌어내야 하는 것,생명을 구하는 것,그것이 안식일에 해야 할 마땅한 일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마 12:12)
그렇습니다.안식일에 해야 할 가장 옳은 일은선을 행하는 것,사람을 살리는 것,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양은 이스라엘 바리새인들에게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재산이었습니다.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구덩이에 빠진 양을 끌어올린 이유도그 생명이 귀해서가 아니라 자기 재산이 손해 볼까 봐 그랬던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렇습니다.우리 모두는 양보다, 그 어떤 짐승보다도 훨씬 더 귀중한 존재입니다.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니 양이라도 생명 때문에 구렁텅이에서 끌어내는데,하물며 사람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그 사람이 안식일 날손이 말라 있고,허리가 꼬부라져 있고,귀신 들려 있다면,그에게 긍휼함을 베풀지 않겠느냐?자비를 베풀지 않겠느냐?
주님은 그렇게 묻고 계신 겁니다.
그를 싸매고, 감싸주고,그의 병이 낫기를 위해 함께 근심하고, 함께 걱정하는 것—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형식에 얽매이지 마십시오.‘지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에 형틀처럼 매이지 말라는 겁니다.
주님의 음성을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양들보다 더 귀한 존재다.” “그러므로 내 자녀인 너희를 통해,세상의 미물보다 더 소중한 사람들에게나의 자비와 나의 사랑이 흘러가기를 원한다.”
그리고 마지막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손을 내밀라’ 하시니,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마 12:13)
이것이 바로 안식일의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주저하지 마십시오.사랑을 멈추지 마십시오.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면,그 일이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행하십시오.
왜냐하면,사람이 양보다 훨씬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이유는,바로 그 한 사람을 회복시키고 성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주님은 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많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안식일에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며 논쟁하고 있었지만,주님은 한 영혼이 불쌍하셨고,그 한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그러나 그 율법과 함께 우리에게십자가를 주셨고,성령을 주셨고,인생이라는 여정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인생을 걸어가며환난을 만나고,힘든 일을 겪고,답답한 상황 속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그 인생 속에 직접 개입하셔서,우리가 그 길을 끝까지 걷도록 붙들고 계십니다.
안식일이라 할지라도,우리를 외면치 않으시고,양보다 더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시는 그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환난이 닥친다 할지라도,어떠한 어려움이 우리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나를 붙들고, 나와 함께 걷고 계신다는 사실을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그 놀라운 은혜가,여러분을 통해 적극적으로 흘러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하나님의 자비가,하나님의 선하심이여러분의 삶을 통해 이웃에게 흘러가는 복된 한 주가 되시기를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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