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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2:1~8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

여러분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지를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죠. 우리는 정말 소중하고 귀한 존재들입니다. 내 안에 주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과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여러분들, AI에 대해서 많이 들어보셨죠?대표적인 게 이제 ChatGPT라는 겁니다.

저는 저번에도 한 번, 우스갯소리로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제 차가 음성 인식이 됩니다.그래서 버튼을 누르고,“야, 와이퍼 켜줘” 그러면앞에 있는 와이퍼가 이렇게 작동을 해요.

말로 하면… 신기하죠?“창문 내려줘” 하면 창문이 내려져요.근데—저는 그 기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분명히,“프론트 와이퍼 켜줘” 그랬거든요?그런데!“트럼프 와이프한테 전화” 이러는 거예요.아마 발음이 비슷했나 보죠… 😅

나는 분명히 “프론트 와이퍼”라고 했는데—차가 갑자기 “트럼프 와이프에게 전화 거는 중”하면서 막 작동을 하는 겁니다.

차 안에서 놀래가지고!“그거 끊어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그 이후로는요—집에 있는 TV 리모컨조차도음성으로 “어디를 틀어라” 이런 말 안 합니다.

근데 여러분들,전화기 다 가지고 계시잖아요?요즘은 버튼 한 번만 누르면,내가 생각하고 있는 거, 내가 필요한 거—예를 들어서“이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점이 어디냐”그러면 다 알려줍니다.지도까지 나와요.이게 이제 AI가 하는 일이고,대표적인 선두주자가 바로 ChatGPT라는 곳이죠.

여러분들 기억하시겠지만—지지난주에 어떤 자매가 우리 교회를 방문하셨어요.베드로에서 살고 있는데,ChatGPT로 교회를 찾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가장 영적이고,가장 복음적인 교회가 어디냐”라고 물었대요.

그랬더니—우리 교회를 가르쳐 줬대요!아멘!!! 🙌진짜로, 지지난주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이런 영적인 것은 막 자랑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목사님들 모임에서,“야, 우리 교회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니까난리가 났습니다! 😄

자기네들도 나름대로영적으로, 복음적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핸드폰 꺼내고 검색을 한 겁니다.

그랬더니,자기 교회는 검색이 안 되더라...그 얘기를 하더라고요. 😅

아무튼, 그렇고요.지금 중동에서 굉장히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감이 잘 안 옵니다.하지만 확실한 건,당장 우리 지갑에 영향을 줄 물가 상승이눈앞에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전쟁을 원치 않고, 평화를 원하지만세상은 거꾸로 가고, 반대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참 안타깝죠.

여러분,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였던 3차 중동전쟁,우리는 그걸 ‘6일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1967년 6월 5일부터 10일까지,딱 6일 만에 전쟁이 끝났습니다.

이집트가 선두에 서서“시오니즘, 유대인들을 전멸시키겠다!” 하고 올라왔지만,기록을 보면—병사 한 명이 몇만 명을 포로로 잡은 일화도 있습니다.정말 놀라운 일이죠.

왜 하나님께서6일 만에 전쟁을 끝나게 하셨나?그 다음 날이 뭐였습니까?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전쟁을 마치고 안식을 누린 겁니다.하나님의 뜻이 있었던 전쟁이었죠.그래서 우리는 이 6일 전쟁을 불가사의한 전쟁으로 기록합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아주 철저하게 지킵니다.이스라엘 땅을 가면,안식일에는 대중교통이 운행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걸어서 가까운 회당으로 가서 예배를 드립니다.반면에, 이스라엘은 관광 산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죠.그래서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관광을 목적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합니다.

그런데—유대인들이 운영하는 호텔이나 숙소 같은 곳에서는안식일 날에도 엘리베이터를 운행하지 않습니다.

엘리베이터를 누르는 것도 노동으로 보기 때문에엘리베이터가 각 층마다 자동으로 섭니다.이걸 ‘샤밧 엘리베이터’라고 해요.

그래서 엘리베이터 안에서버튼 누르려고 손을 들면,옆에 있는 유대인 분이 놀라는 겁니다.“노! 노 버튼!”왜냐하면, 버튼 하나 누르는 것도 일이라고 여기는 그들의 철저한 안식 개념이 있기 때문이죠.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우리는 정말 ‘쉼’이라는 걸 얼마나 대충 생각하고 있나,예수님이 주시는 쉼은 과연 무엇인가?한번 다시 돌아보자는 겁니다.

아, 그것도 참 창조적인 생각이죠.그러다가 관광객들이 너무나도 불만을 표하니까,어떤 아이디어를 떠올렸냐면 ‘샤밧 엘리베이터’라고 해서각 층마다 이게 자동적으로 서게끔 만들어 놓았습니다.문도 자동으로 열리고, 문도 자동으로 닫히게끔아예 장치를 해 놔 버린 겁니다.

1층에서 20층까지면,1층부터 전 층이 다 서는 겁니다.문이 열리고, 문이 닫히고—그러니까 수고할 일이 없는 거죠.

이런 아이디어를 낼 정도로,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철저하게 지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뭐냐면,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바벨론으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갔다는 깨달음이 왔기 때문입니다.그래서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부터는안식일을 굉장히 철저하게 지키기 시작한 겁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성경에서는 왜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죠?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그 다음 날 쉬셨다고 말씀하시니까“너희도 쉬어라”—그 의미로하나님께서 창조의 완성을 이루시고 난 후, 쉼을 명령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고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실 때에도,“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부분을 근거로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어느 정도로까지 강조하셨냐면,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죽이라!라고 말씀하셨을 정도로이 안식일은 굉장히 중요한 명령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이 안식일은,그들의 신앙 정체성과도 같은,아주 중요한 말씀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아, 여러분들 중에 오래 전에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셨거나,주일학교를 경험한 성도들은이 안식일—지금 우리가 말하는 ‘주일’—에 대해서,**“주일을 잘못 지키면 하나님께서 벌을 주신다”**는 두려움 속에서신앙생활을 해오셨던 기억이 있을 겁니다.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그냥 일반적인 생활을 하게 되면,‘내가 주일을 안 지켜서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지 않을까?’하는 그 죄책감과 두려움이우리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이후에 예수를 믿으신 분들—예를 들면 연세 드셔서 예수님을 영접하신 분들은—이 안식일, 곧 주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그런 두려움이 별로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들이 주일날엔 시장에서 장도 제대로 못 봤고,멀리 차를 운전해서도 못 가고,혹시라도 차가 고장 나면‘아, 내가 주일을 지키지 않아서 그런가?’하는 생각까지 했던 시대를 살아왔던 겁니다.

어떤 목사님은 그러셨다고 그러죠.주일날 축구를 하다가 다리를 다쳤는데,“거 봐라, 주일 안 지키고 축구하다가 다리 부러졌지!”이렇게까지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그런 두려움 가운데 계십니까?아니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평안함 속에 계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여러분이 여전히 두려움 가운데 있다면,그건 아마 안식일을 ‘외형적으로만’ 알고 계신 상태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안식일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알고 계시다면,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가 없다는 말은,안식일의 의미를 더욱더 깊이 알면 알수록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주일 안 지켜도 돼. 황 목사님이 주일날 그렇게 설교했잖아.우리 그냥 놀러 가자.”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주일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면 할수록하나님께 더 가까이,하나님을 더 귀하게,하나님의 예배를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는 것이죠.

아, 그래서 성경은 안식일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첫 번째로 출애굽기를 보시면,출애굽기 20장 8절에 안식일을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8–11)

자, 여기에서 11절을 보시면첫 번째 이유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데 대한 요구로서,그 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창조하심은 완전하다는 겁니다.완벽하다는 겁니다.우리가 어떤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그 하나님의 창조하심에 더 보탤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그 완전하고 완벽하신 창조하심에서빠질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너희들 쉬어라”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 가운데 하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심은 완벽하시기 때문에,우리가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서그 완전함을 개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그분의 창조에 대해 겸손히 쉬며,경외함으로 기억하라는 명령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첫 번째, 창조에 대한 안식의 명령이 있었다면,신명기에서는 또 다른 이유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에 창조에 한 가지를 더 보태는데,신명기 5장을 보면,1절부터 쭉 그 앞에 부분은 다 동일하고,15절을 보시면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은:

“너는 기억하라,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안식일을 지키라 하였느니라.” (신 5:15)

출애굽기에서 나오는 안식일신명기에서 나오는 안식일은조금 다릅니다.

  • 출애굽기에서 나오는 안식일은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것으로서,우리 인간들이 더 보탤 것이 없다라는 의미로을 이야기하였다라면,

  • 신명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들을출애굽시키셨고,광야로 들어와서 이제 시내산 앞에서 율법을 받고,가나안 땅을 들어가는 목전에서안식일을 지키기를 명령하셨는데,

거기에서는 어떤 의미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시냐면은:

하나님의 강한 팔과 하나님의 능력의 손으로너희들을 애굽 땅, 곧 종된 곳에서부터 건져내었기 때문에,너희는 안식일을 지키라.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뒷부분에는하나님의 구원,즉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던 것에서부터자유인으로서의 구원이 강조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이 구원을 이루시는 데 있어서이스라엘 민족들이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능력이요,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다는 것이죠.

그 당시 애굽은 세계 강대국입니다.지금 식으로 얘기하면 미국과 같은 나라요,군사력 세계 1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민족들을 종된 곳에서자유함으로 옮기실 때,사람들이 어떤 지혜를 썼거나노력을 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고,처음부터 끝까지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행하셨기 때문에,안식일을 생각하고 거룩하게 지킬 것을 명령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신약 시대로 이야기한다면,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은,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로우리가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 자녀가 된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백성으로 구원 얻는 데 있어서지혜나 수고나 노력이나 공로가 조금도 들어간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에서쉴 것을 명령하고 계신 겁니다.

이 두 가지가 안식일의 개념에 흐르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창조하심,

  • 하나님의 구원하심.

이 두 가지 개념이 안식일에 함께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우리가 이제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고,안식일 다음 날, 곧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여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기념한 것으로 인해서우리는 주일을 안식일의 개념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여기에서 꼭 기억하셔야 될 것은 무엇이냐면,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창조하심과,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해서누구를 위해 창조하셨고, 누구를 위해 구원하셨는가?를 먼저 생각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심은 우리를 위해 창조하신 겁니다.하나님의 구원하심 또한 우리를 위해 구원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우리가 생각할 때는,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의 엄격한 벌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안식일을 지킬 때 하나님의 창조하심, 하나님의 구원하심,그리고 우리에게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주시기 위한 그 개념으로서우리가 안식일을 지키고, 주일을 지킬 것을성경은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하나님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 하나님의 분노하심?

  • 진노하심?

  •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징계하시는 그 하나님?

이런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십니까?

아니면,

  • 우리가 죄악 가운데 거할지라도,

  • 우리가 부족해서 쓰러지고 넘어질지라도,

  • 우리의 못된 옛날 성품들이 튀어나온다 할지라도,

감싸 주시고, 덮어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그 하나님이여러분 마음에 먼저 떠오르십니까?

어떤 것이 여러분들에게 먼저 떠오르세요?

(아, 이거 잘못 얘기했다가는 다음 주일날 다 안 오실 것 같은데… ^^)그래서 저도 이제 엄포를 좀 놓아야겠습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무서우신 하나님,진노하시는 하나님,거룩하시고 엄숙하신 하나님 —이러한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입니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그런 하나님을 섬겼습니다.왜냐면 실체가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다시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하나님을 그런 개념으로 보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고,수많은 메신저들을 보내시면서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 인자하시고,

  • 긍휼이 풍성하시고,

  • 진노하시지만 그 진노하심이 영원토록 이어지지 아니하시고,

  • 금방 풀어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많은 선지자들이 외쳤습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하나님을 성전에만 계시는 하나님의 개념으로 살아갔다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찾아가야만 만나 주시는 하나님으로,그래서 제사를 지낼 때도 재물을 들고 찾아가고,제사장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만나 주시는 하나님,그런 개념으로만 하나님을 생각했던 것이죠.

그런데 다윗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선지자들이“아니다,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다.우리 가운데 함께하시고,우리가 숨쉴 때 같이 숨을 쉬시고,우리가 말할 때 들으시는,우리와 아주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이시다”라고 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전 중심의 하나님을 우리의 삶으로 이끌게 한 선지자들이많이 있었다는 것이죠.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어볼 때도,어떤 선지자들은 성전 안에 갇혀 있는 하나님을,우리의 삶 속으로 끌어내려 전한 이들도 많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킬 때두 가지를 기억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1. 창조하심

  2. 구원하심

특히 구원하심에 대해서는,사람의 어떤 노력이나 수고가 필요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율법을 주셨지만,율법을 통해 우리가 노력하고 율법을 잘 지킴으로 말미암아우리가 구원을 얻고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성경은 일관되게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을 우리가 생각할 때무섭고 징계하시는 하나님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이 안식일과 구원을 통해서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우리에게 모든 것을 베푸시는 아버지 같은 하나님,가장 가까운 친구 같은 하나님으로섬기고 가까이해야 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시면,예수님께서요, 아주 중요한 사실들을 요약해서 말씀하시고,또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은안식일의 외형적인 것만 보지 말고,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와 내용을 먼저 묵상하라고 말씀하시며이 장면을 우리에게 전하고 계신 겁니다.

첫 번째로는 이제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가다가 안식일에 행하지 못할 일들을 행하지 않습니까?유대인들이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1절을 보면 그 미리삭을 '훑다'라는 표현을 쓰는데,이 ‘훑다’라는 표현이 뭐냐면, 잘라서 먹는 거잖아요.

제자들이 시장해서 요기를 좀 채우려고 미리삭을 잘라서 그냥 먹습니까?안 먹죠.여기다가 손으로 막 비빕니다. 손으로 비벼서 껍데기를 까는 행위,즉 곡식을 방아 찧을 때처럼 비비는 그 행위를 한 겁니다.

그다음에 비빈 걸 그대로 먹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후—하고 불어서 껍데기를 날려 버리죠.옛날 어머니들 키질하셨던 것 기억하시죠?키질하면서 쭉정이는 밖으로 나가고, 알곡은 안으로 들어오는 거.

제자들의 이 후—하고 불던 행위를, 키질하는 행위로 본 겁니다.그러니까 제자들이 시장하여서 밀밭에서 곡식을 따서, 비벼서, 바람을 불고, 먹은 그 행위음식 준비 과정으로 본 거예요.

그래서 2절에서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하냐면:“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라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아주 중요한 답변을 주십니다.주님은 그것이 맞다, 안 맞다, 옳다, 그르다라고 단순하게 판결하지 않으시고,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꺼내시는 겁니다.

왜 안식일이 있는가?안식일이 왜 중요하며,너희들이 왜 안식일을 지켜야 하며,그 행위를 어떤 시선으로 봐야 하는가에 대한 핵심을 짚으시는 거죠.

그 답변 가운데 하나가 뭐냐면,다윗도 제사장들만 먹는 그 떡을 먹었다.제사장들도 안식일에 성전 안에서 일을 한다.이런 예들을 드시면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한 본질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같은 내용을 전하는 다른 복음서, 마가복음 2장 27절을 보면 이렇게 덧붙여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 말씀은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을 위한 날이 아니라,하나님의 은혜와 쉼을 누리도록 사람을 위해 주어진 날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신 겁니다.

자, 보세요. 맞는 말씀이죠.안식일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위하여 있어야 되는 것이지,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제도인 것이지,아까 말씀드린 것처럼,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고, 구원하신 것도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주신 것이지,우리가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면,하나님의 존재는 우리 인간들을 위해 있는 겁니다.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마술사처럼—우리가 기도하면 언제든지 오시고,우리가 마음에 있는 소원을 아뢰면 언제든지 들어주시고,우리가 원하는 대로 부릴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들—하나님의 인자하심, 자비하심, 긍휼을 베푸시는 것,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되그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나님,이 모든 것들은 우리들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열심히 안식일을 지켜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아니에요.우리가 열심히 지켜야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복을 받았고, 이미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복을 누리고,그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예배드리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지금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도 동일한 겁니다.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계시는 분이시다.우리에게 인자를 베푸시고,우리를 사랑하시고,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주시기 위해 창조하셨고,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건지시기 위해 구원하신 그 하나님이시다.

주님께서 이것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시는 것이죠.여기에 율법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셨는데,결국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의 울타리입니다.울타리를 쳐 주시면서 “너희들 그 안에서 살아라.” 하신 겁니다.이 울타리 밖으로 나가면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거예요.

울타리 밖에는 맹수가 있고, 유혹이 있고, 생명의 위협이 있다는 것.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쳐 주신 겁니다.

울타리를 친다고 할 때,평평한 땅이나 프로초장 한가운데에 아무 의미 없이 치는 것이 아니라,위험이 있을 법한 곳에, 맹수가 침입할 수 있는 곳에 울타리를 치는 것처럼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지키기 위해 율법이라는 울타리를 쳐 주신 것입니다.

밖으로 나가면 맹수가 도사리고 있다.밖으로 나가면 절벽이라는 위험한 곳이 있다.그래서 율법이라는 이 울타리를 쳐 주시면서, 그 안에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율법을 쳐 주신 그 의미가 무엇이냐?결국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것을 쳐 주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울타리라는 것은 결국 ‘보호의 개념’이 있습니다.율법이라는 것도 보호의 개념이 있는 것이지요.그런데 우리가 너무 율법적으로 나가면, 우리는 정죄하게 되고, 심판하게 됩니다.또 내 기준에 맞춰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쪽으로 흘러가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회의를 하다 보면 그런 분들 계시죠?“법대로 합시다!”법대로 하면 편하죠.법에 맞춰서 딱딱 진행하고, “자, 끝!” 하면 얼마나 간단합니까?

그런데 그 법이 다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회의할 때도 그렇고, 우리가 살아갈 때도 그렇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율법주의로 나가고, 우리의 신앙이 율법적으로 흘러가게 된다면,내 기준에 맞춰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쪽으로 우리들이 흘러갈 수 있다는 염려가 있다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기준 속에서 사람들을 심판했습니다.그런 기준 속에서 지금 제자들을 책망하고 있는 겁니다.“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제자들이 한다!” 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3절부터 5절까지에서 다윗의 예를 들며,안식일이 왜 있는지를 우리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자, 여기서 예수님은 두 가지 사례를 드시죠.첫째는 다윗의 예, 둘째는 제사장들의 예입니다.

다윗의 예를 드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윗이 얼마나 험한 인생을 살았습니까.이스라엘의 적국,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죽임으로 말미암아,이스라엘의 스타로 등장하지 않았습니까?

얼굴도 준수하고, 지혜롭고, 용맹하기도 하고.그래서 이스라엘의 기대주, 스타로 부상을 하게 되죠.

그런데 문제는 사울왕이었습니다.사울왕은 다윗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고,**시기와 질투함으로 “어떻게 하면 그를 죽일까?”**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피난을 가기 시작합니다.오도 가도 못하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그와 함께 한 무리들도 생겨납니다.

그러다 다윗은 놉 땅, 당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갑니다.너무 시장하여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것이죠.며칠을 굶었는지, 우리가 정확히는 모르지만,그 성소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하나님께 드리는 ‘진설병’**이었습니다.원래는 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먹을 수 없는 떡이죠.

그런데도 다윗과 그 무리들이 그것을 먹습니다.왜? 그들의 생명이 위태로웠기 때문입니다.

이 예를 드시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율법보다 생명이 더 중요하다.율법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있는 것이지,생명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죠.

이것은 이제 금요일 날 만들었다가, 토요일 안식일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이후에 제사장들만 먹게 되는 율법입니다.규례가 있는 겁니다. 제사장만 먹어야 되는 것을, 배고픈 사람에게 아히멜렉 제사장이 그것을 먹으라고 했다는 것이죠.

여기에 안식일의 의미가 담긴 원인은 무엇이냐면,하나님께 나아올 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규례, 법칙—예를 들면 율법—이런 것들을 지키는 것 이상으로,주위에 굶주리고 헐벗고, 불쌍함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더 원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주일날 예배를 드리지만,혹시라도 우리 주변에 더 큰 어려움을 만났다면,우리는 당장 예배를 잠시 멈추고, 그 어려움을 도와야 되는 것처럼,여기에서도 안식일이라는 규례가 있었지만,그보다도 더 굶주림에 처한 불쌍한 사람들에게—안식일의 윤례, 법칙, 제도 이런 것들을 깨뜨리면서라도 그들을 돕는 것하나님은 더 기뻐하시고, 더 원하신다는 의미인 것이죠.

그래서 여기 보면,제사장만 먹어야 되는 그 음식을다윗과 그의 사람들에게 주었다는 것이죠.긍휼을 베푼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아히멜렉 제사장은 알았던 것이죠.

어떤 율법이라는 규례보다도,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사람의 불쌍함을 돌아보는 것—이것을 하나님이 더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6절 말씀을 보시면,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무엇을 뜻합니까?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죠.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재하시지 않으면,그곳은 성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이곳은 하나님의 성전이고,또 우리를 가리켜 “너는 참으로 귀한 존재다”라고 말하시는 것도,주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재해 계시기 때문에우리가 귀한 존재인 겁니다.그래서 우리는 성도라고 일컬음을 받는 거죠.

우리 안에 성령이 안 계시면,우리는 귀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성전도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재해 계시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지,그저 건물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우리는 성도라 일컬음을 받고, 귀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는 겁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건물만 거룩하다고 생각하면서,성전을 귀하게 여기는데—그 안에 누가 계신지를 보라!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느냐?

성전이라는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그 안에 계시는 분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성전보다 더 큰 이가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여러분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내놓을 게 뭐가 있습니까?한 주 동안 얼마나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서 우리가 당당하고 떳떳하게 하나님께 나아옵니까?전혀 그럴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언제든지 나아가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내 안에 계시는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시고,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받아 주시는 것이죠.

만약에 우리 안에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우리는 아무런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보다도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더 중요한 것처럼,성전보다도 성전 안에 계시는 그 주님, 그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습니까?쓸고 닦고, 광내고… 지금도 마찬가지죠.

예전에 제가 깜짝 놀란 일이 하나 있었어요.어떤 일반인으로 보이는 분이 성전 안에서 컵 하나를 만졌는데—가톨릭 교회 같은 곳에서는 성전 안에 있는 모든 기구는 ‘성물’이라고 여깁니다.즉, ‘거룩한 것’이라는 겁니다.

사제가 만지면 괜찮은데, 사제가 아닌 일반 성도가 손을 대면“그 거룩한 것에 왜 손을 대냐”고 엄청나게 야단을 치는 거예요.제가 바로 옆에서 들었는데 정말 무안을 느낄 정도로 야단을 치더라고요.

그런데 여러분, 마음껏 만지십시오.하나님이 계셔야 거룩한 것이지,하나님이 안 계시면 거룩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7절을 보세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우리는 어떤 안식일이라는 윤례를 정해 놓고그것만 지켜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살다 보니까,주변에 굶주리고 헐벗고 정말 불쌍한 사람들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성전 미문에 앉은 그 안진뱅이를 보십시오.그는 성전 미문에 앉아서, 예배 드리러 가는 사람이 혹시라도 한 푼 줄까 해서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은 할 짓이 아니라는 겁니다.돈을 주는 것 자체도 안식일을 어기는 일이라고 여겼고,예배하러 가기 바쁜데 "왜 내가 이걸 해야 하나"라는 강박감 속에 살아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올라가다가,“내게는 은과 금이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하지 않습니까?그러니까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겁니다.

성경이라는 형식보다, 그 안에 담긴 본질과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제도 속에서 드리는 예배제도 속에서 행하는 종교적 행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걸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주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은 호세아 6장 6절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런데 설교에서는 호세아서 6장 1절부터 인용하셨죠: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자,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외칩니다.하지만 문제는, 이들이 돌아온 것이 행위로만 돌아온 것이라는 겁니다.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너의 마음은 어디 있느냐?”라는 것이죠.

우리도 주일날 예배드리지 않습니까?그런데 주님께서는 “너의 마음은 어디 두었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정말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있는가?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아, 주일날 예배 안 드리면 몸이 쑤셔... 일이 안 풀려... 자식이 잘못될까 봐...”이런 억지와 두려움으로 나오는 예배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먼저 달라고 하십니다. 아멘?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찢으셨지만, 싸매어 주시고우리를 치셨지만, 다시 고치시길 원하십니다.단지 돌아오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제사보다도, 나는 자비함이 흘러가는 것을 더 원한다.”

형식적인 것은요, 종교적인 행위밖에 될 수 없습니다.그런 종교적 행위에만 머물면, 성도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약해지고 판단과 정죄만 남습니다.왜냐면 율법이라는 기준에 맞지 않으면 정죄하고 심판하려는 마음이 올라오기 때문이죠.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기준으로 제자들을 책망했습니다.“안식일에 하지 못할 짓을 제자들이 했다”고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3절부터 5절까지 다윗과 제사장들의 예를 들며,안식일의 본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으면,그 건물은 성전이 아닙니다.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고,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도라 일컬음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전보다 더 큰 이가 바로 나다,성전 자체보다도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7절에서 결론을 내리십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결국, 율법이나 제도에 갇혀 형식적인 신앙만 하다 보면,사람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약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배고플 때 먹이시는 분,우리가 헐벗을 때 입히시는 분,그리고 형식적인 예배보다, 우리 속마음을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8절,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안식일의 주인,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까 구원하신 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주님께서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누구시냐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로서는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종교적인 행위나 습관, 종교적인 열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주님을 어떤 마음으로 섬기느냐—정말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섬기느냐—그 마음을 주께서 먼저 살피신다는 것이죠.

그리고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시는 그러한 일이 이제 다음 주에 말씀을 나누게 될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손 마른 자를 고치시는 이 행위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시면, 뭐라고 기록되어 있냐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기 위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을 엿보더니…” (누가복음 6:7)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예수님이 해야 할 일을 하나,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나 엿보았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그들을 엿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까? 아니면 정말 손이 말라 근심 속에 있고, 탄식 속에 있고, 염려와 어려움 속에 있는 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까?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오셨기 때문에, 당연히 어떤 제도보다도 손 마른 자를 고치는 일이 우선이었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제가 마지막 결론을 내리면서, 안타까운 상황 하나를 보게 되었는데요. 어떤 형제가 자살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교회 안에서는 자살한 사람은 교회장으로 예식을 치르지 못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교회 안에 흐르는 오래된 규례인데, 그러다 보니 유가족이 너무나도 안타까워하는 겁니다. 자살한 것도 안타까운데 장례식을 교회에서 치를 수가 없는 겁니다. 교회는 다녔지만, 목사님이 가지 않으시는 겁니다.

여러분들, 이런 경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황 목사님, 빨리 가십시오"라고 얘기하셔야죠. 황 목사는 달려갈 겁니다. 아멘? 아멘. 아멘 좀 그런데, 안 갈 수도 없네요.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안타까움에 처해 있을 때, 과연 주님이시라면 어떤 행동을 취하셨을까? 어떤 제도보다도, 그런 것보다도, 한 젊은 아이를 잃고 슬퍼하는 그 가정을 주님은 분명 위로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지를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죠. 우리는 정말 소중하고 귀한 존재들입니다. 내 안에 주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과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안다면, 안식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고, 율법이 왜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제도보다도 의미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한 주간도 잘 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쁨으로, 아멘? 평화로, 즐거움으로, 하나님이 늘 우리 삶의 능동자처럼 함께하신다는 그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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