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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1:25~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


세상의 짐이 아무리 무겁다 할지라도,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보는 순간,우리의 마음에 쉼이 임한다는 것.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말씀하십니다:“내 짐은 가볍다. 내 짐은 무겁지 않다.너희들이 내게로 오면 쉼을 얻으리라.”

시편 127편을 보면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라는 그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어떻습니까? 푹 주무셨어요? 아멘. 좀 설치지는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잠을 주신다라는 의미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잠자는 동안에도 지키신다, 아멘.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평안해서 잠을 누릴 수 있다라는 그러한 의미가 있죠. 아멘.

잠을 주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변의 환경적인 요소들, 또 주변에 있는 모든 걱정거리들을 하나님께서 제거해 주셨기 때문에—하나님의 그 은혜의 날개 아래 내가 평안히 거하기 때문에—평안히 잘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 혹시 이런 말씀들 보셨어요?

미국에 ‘수면 환경 연구소’라는 데가 있습니다. 수면 환경 연구소. 이 기관은 어떤 곳이냐면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잘 잘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깨지 않고 수면을 충분히 누릴 수 있을까? 이걸 연구하는 곳입니다.

요즘 우리 교회도 그렇고, 많은 분들이 수면 중에 호흡이 곤란한 무호흡증—수면 무호흡증—이걸로 인해서 굉장히 고생들을 참 많이 하시죠. 이것도 수면 환경 연구소에서 연구하고 컨트롤하는 영역 중 하나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분이 잘까?", "어떤 기계를 만들어야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을까?"—이런 것들을 연구하죠. 하다 못해, 여러분들 혹시 들고 계신 분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수면제까지도 여기서 다 컨트롤을 합니다.

그런데, 한 해 동안 미국에서, 2024년도 한 해 동안 사람들을 잘 재우게 하기 위해 들어간 돈이 얼마 정도 될까요?

여러분들, 굉장히 궁금하시죠?

우리나라 돈으로 약 800조 원 정도가 들어간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만 800조 원! 어마어마한 돈이죠.

우리 한국은 2024년도 통계는 아직 안 나왔는데, 2022년도 통계로는 약 3조 원 정도의 돈이 수면 관련 산업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미국과는 뭐 큰 차이가 있죠. 미국에서는 거의 뭐 800조의 돈이면은 어마어마한 돈이지 않습니까? 한 나라가 아마 살아가는데 넉넉할 정도의 돈인데, 미국에서는 그 돈이 “사람들을 잘 재우게 하기 위해”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가운데는, 이제 수면제를 복용하는 것과 수면 무호흡증에 의한 기계를 사용하는 것과, 이런 모든 것들이 다 들어가겠죠.

요즘에는 연세 드신 분들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많은 분들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자다가 한 번 깨면 잠을 못 이루는, 이런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들, 안심하십시오. 이게 영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육체적인 겁니다. 우리가 연세가 들어가면서 여러 가지 신체적인 연약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지, "영적으로 내가 귀신 들려서 편안하지 못하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으셔서 내가 잠을 못 잔다"—이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의 연약함도 있고요. 그러나 모든 것들이 다 환경적이고 육신적인 것은 아니고, 그 가운데 또 영적인 문제도 담겨져 있겠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불안함과 초조함, 또 세상에서의 염려와 근심들로 인해서 잠을 못 이루는 그런 분들도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오늘 말씀 속에서 굉장히 큰 위로함을 얻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굉장히 유명한 성경이고, 익숙한 성경 구절이죠. 왜냐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라는 그 말씀 때문에, 이 말씀이 굉장히 유명한 그런 말씀이라는 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 번 여러분들에게도 말씀드렸지만, 종종 우리가 성경을 오해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 또한, 우리들이 종종 오해하는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즉, 예수 안으로 들어오라. 그러면 예수께서 쉬게 하시겠다.라고 말씀을 하셨지,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시겠다, 들어주시겠다라는 약속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마치 어떻게 오해가 되고 있냐면,“예수님께 가면 내 모든 무거운 짐을 다 들어주시겠다고 하나님 약속하신 거 아닙니까?”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대표적인 그 구절로 아브라함의 예를 들 수가 있는데,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내 아비 집, 본토, 친척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아버지가 섬기던 우상들을 다 때려부수고 나왔다고우리들이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그 아버지와 함께 나왔습니다.성경을 우리들이 오해하는 그러한 부분이죠.

특별히 더 오해하는 부분이 뭐냐면, 야곱의 경우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길에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 주시고,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는 장면, 여러분 기억하시죠?

그 장면 가운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무엇이냐면,야곱이 밤새도록 하나님과 대결했다는 부분입니다.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환도뼈를 꺾었는데도 불구하고야곱이 놓지를 않자, 날이 새려고 하니까천사가 빨리 하늘로 올라가야 되는데,그때도 야곱이 붙잡고 놓지 않으니까,어쩔 수 없이 야곱이 요구하는 축복을 들어주고,축복을 하니까 야곱이 그의 손을 놓았다라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야곱 하나 꺾지 못하셔서끝까지 버티다 못해 날이 밝자야곱을 축복하고 말았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대표적으로 우리가 성경을 오해하는 부분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하나 공고를 드리겠는데요,여러분들이 이제 성경을 읽으시다가, 아니면 말씀을 듣는 중에 우리에게 의문들이 생길 거 아닙니까?

아, 무조건 이제 덮어놓고 믿는 것이 아니라,우리가 최소한 베레아 성도들처럼“이 말씀이 그러한가”라도 성경을 읽고,또 성경을 읽어도 이해가 안 가면 목사에게 와서 묻고,그래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목사가 여기서 엉뚱한 말을 해도 “아멘!”으로 화답을 해버리면,우리 성도들의 수준이 떨어집니다.

여러분들이 자꾸만 질문하고 질문을 하면,우리들의 수준이 올라갑니다.그것은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 제안을 드리는데,혹시라도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으시다가,또 말씀을 듣는 중에 막히거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반드시 메모를 하셨다가 저에게 물으시면,제가 아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여러분들에게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의 수준이 조금씩 올라가는 거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도,사실은 오해되는 부분인데,우리 성도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문제를지금 성경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아마 이 말씀이 조금 오해가 된 가장 큰 이유가 뭐냐면,찬송가의 영향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찬송가에 이런 가사 있지 않습니까?“내 모든 짐을 대신 지시는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그것 때문에,"내 모든 짐을 주님께 맡기면, 주님께서 대신 들어 주시겠지"라고 오해되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디를 봐도**“짐을 대신 져주시겠다”**라는 약속의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이 말씀을 보면,주님께 맡기는 것이 무엇이며,또 주님은 우리에게 쉼을 주시는데,그 쉼이 무엇인가를우리가 오해해서,

“짐을 맡겼을 때,내게 근심이나 걱정되는 짐이 없어지니까 쉴 수 있겠지”라는 그런 오해가 아니라,짐을 어떻게 주님께 맡기며,또 주님께서 어떤 짐을 맡길 때 우리에게 쉼과 평강을 주시는가라는 것을 먼저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28절에 있는“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하신 그 말씀이,만약에 우리의 짐을 대신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이었다면,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야죠:“너희들의 모든 짐을 내게 맡기라. 그러면 내가 가져가마. 내가 짊어지마.”

그런데 29절에는 그렇게 말하지 않으시고,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니까는,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모든 짐을 내려놓으려고 했다가,오히려 생각지도 않은 멍에를 메고예수님께 나아가 배워야 되는 결과가이 말씀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을우리가 알게 된다는 겁니다.

아,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천천히 하나 풀어가야 될 것은 무엇이냐면,우리의 멍에를 지는 것은 무엇이고,‘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예수님께 간다는 것은 무엇이고,예수님께서 쉼을 주시겠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25절 말씀으로 다시 한번 돌아가면요,25절에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이라고 얘기할 때에,이 ‘이것’은 어떤 것을 이야기하냐면,우리가 산상수훈에서부터 계속 묵상해 왔던 하나님의 나라,천국, 하나님의 다스리심.

이것을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감추셨다.그런데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다.그것을 감사한다고 주께서 지금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것이죠.

여기에서 보시면,“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왜 감추셨을까?”이 슬기로운 자들은 누구를 이야기하는 걸까를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면,

슬기로운 사람들은,이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는바리새인들, 서기관들, 다시 말씀드리면자기의 노력, 자기의 의지, 자기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취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슬기로운 사람들’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되는 것으로는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슬기로운 자들 — 자신의 의지와 수고와 노력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들.그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셨다는 겁니다.그런데 반대로,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다는 겁니다.

왜 어린아이들에게 이것을 나타내셨을까?

우리가 ‘어린아이’를 비유할 때는 항상 대표적인 의미로 무엇을 생각해야 되냐면,자기의 노력과 수고로는 어떠한 결과를 취득할 수 없는 사람들,이 부류를 어린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마음이 순진하다, 세상의 때를 묻지 않았다”라는 의미의 어린아이가 아니라,나의 노력과 수고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고,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그 도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어린아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국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냐면,우리 옛날에 어린아이들 찬송가 있지 않습니까?

“돈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맘 착해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지식으로 못 가요, 하나님 나라.

이게 이제 슬기로운 자들을 대표하는 것이겠죠.

믿음으로 간다는 얘기는나의 믿음이 아닌,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가는 나라 — 그게 천국입니다.

나의 의지, 나의 수고, 나의 노력이 아니라,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로 가는 나라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다는 겁니다.

아, 왜 어린아이들에게 이것을 나타냈을까?어린아이를 비유할 때는 항상 대표적으로 무엇을 생각해야 되냐면,자기의 노력과 자기의 수고로는 어떠한 결과도 취득할 수 없는 사람들,이 부류를 어린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마음이 순진하다”, “마음이 아직까지 세상의 때를 묻지 않았다”라는 의미로 어린아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나의 노력과 나의 수고로는 어떠한 결과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람들,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그 도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어린아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때를 묻지 않은 순수한 사람을 뜻하는 게 아니라,내 힘으로는 안 되니까 남의 도움으로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이들을 어린아이라고 부르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국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면,우리가 예전에 부르던 어린이 찬양 중에 이런 유명한 곡이 있지 않습니까?

돈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맘 착해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또 “지식으로 못 가요, 하나님 나라” —이게 이제 슬기로운 자들을 대표하는 거죠.

믿음으로 간다는 말은,내 믿음으로 간다는 것이 아니라,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가는 나라 — 그것이 천국입니다.

나의 의지와 수고, 나의 노력이 아닌,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로 가는 나라 —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태복음 5장에서 산상수훈을 볼 때,“마음이 청결한 자”,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며”라고 하셨을 때,“마음이 가난한 상태”,다시 말씀드리면,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내 마음이 풍요롭지 않은 상태,내 마음이 공허하고 허전하고 가난하고,그래서 예수님의 도움이 꼭 필요한 상태 —이 상태를 가리켜서 마음이 가난한 상태,또한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5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지혜롭고 슬기로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같은 사람들에게는 천국은 감춰 주시고,오히려 그리스도 예수가 필요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에게는그 천국을 나타내 주심을 감사합니다라는 내용입니다.이렇게 25절을 해석할 수 있겠죠.

그리고 아까도 말씀드렸듯이,구원이라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우리가 늘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구원은 단 1%라도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온전히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그것을 구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슬기로운 자들,이들은 자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그 구원에 퍼센트를 더했다는 거예요.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순수한 구원에서 멀어졌다는 것이죠.

반면에,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은 어떻습니까?

어린아이는 대표적으로 부모님의 도움을 통해 살아갑니다.부모님이 없으면 어린아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먹고 싶어도 엄마, 아빠에게 묻고 요구해야 하고,무엇을 가지고 놀고 싶어도 엄마, 아빠에게 도와달라고 해야 하며,엄마, 아빠가 주는 것으로만 놀 수 있고,어디를 가더라도 꼭 부모의 동행보살핌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하나님의 나라도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결코 들어갈 수 없습니다.결코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어린아이와 같이 예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이죠.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천국이 저의 것이다"라는 그 말씀도,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 예수를 의지할 때,그리스도 예수만 바라볼 때,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볼 때,그 바라보는 사람이 복이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과 동일한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고아와 과부를 특별히 보살피고 돌보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그들은 그들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너희들이 받은 은혜로 그들을 돌보라는 그런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그래서 특별히 그들을 챙겨 달라라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자, 여기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느냐?아까 말씀드린 것처럼,지혜로운 자들,서기관들과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예수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하고,내가 지고 가려고 하는 사람들,예수님께서 해 주시는 것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나의 노력과 나의 수고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들 어떻습니까?예수님께 맡기면 맡길수록 우리의 마음이 어때요?평안함을 얻게 됩니다.그러나 예수님께 맡기지 못하면 맡기지 못할수록,우리 마음에 불편함이 넘치는 겁니다.불안함이 몰려오는 거예요.

하지만 예수님께 온전히 맡겼을 때,우리 마음속에는 편안함이 있습니다.왜요? 예수님께 맡겼기 때문에.그런데 맡기지 못하면,그만큼 우리는 이 땅에서 평화를 누릴 수 없이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너희들이 그 짐을 지고 가려고 하지 마라.너희들의 노력과 너희들의 수고로 어떤 일을 이루려 하지 말라.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게로 오라"라는 건,예수님 안에 들어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우리가 지고 있던 수고와 무거운 짐이 내려지는 겁니다.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예수라는 그 이름 앞에서,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평안을 맛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예수를 제외하고,나의 노력과 나의 수고로는,이 세상의 근심과 걱정을 떨쳐 버리려고 해도,전혀 떨쳐 버려지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라고 하셨는데,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고,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우리가 잠을 자는 그 순간에도,하나님의 보호와 은혜의 날개 아래 있기 때문에,참된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죠.

여기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그 방법예수께로 가는 것입니다.예수 안에 있다, 내가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믿음과 그 확신이 오는 순간,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다 벗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 의미로 지금 예수님께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고,원래는 우리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전에,즉 아담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는 게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공급하시고,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조하시면서,"모든 것이 다 너의 것이다, 네가 이름을 짓는 것마다 다 그대로 될 것이다.네가 저주하면 이 땅이 저주를 받고, 네가 축복하면 이 땅이 축복을 받을 것이다."— 이 존재로 우리들은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그 아담이 지은 죄의 유전을 우리가 받았기 때문에,아담의 죄된 성품이 우리 안에 있는 겁니다.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공급하시고,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우리는 아담의 범죄 이후로 죄된 성품으로 말미암아나의 노력과 나의 습관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죠.

그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대표적인 것이 바벨탑 사건입니다.

"우리의 이름을 내자!"하나님께 대항해서 우리가 이름을 내며 탑을 세워,그곳을 나의 보호처, 나의 피난처로 삼으려 했던 인간의 교만함이 그 안에 있던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얼마나 기가 막히시겠습니까?진짜 피난처요, 진짜 안식처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사람들은 그 수고와 노력을 다하여 바벨탑을 쌓고 있었습니다.어느 날 한순간에 무너질 그것들을 쌓고 있었던 것이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아담에게서 유전된 죄를 버린 사람들이라면,이제는 "예수 안에 있다"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 믿음을 가질 때,우리의 모든 필요와 공급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라는 겁니다.모든 피난처가 되시고, 모든 안식처가 되시게끔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불렀음에도 불구하고,우리는 여전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연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그러니 하나님께서 보실 때,우리의 이 모습을 보고 어떤 마음을 가지시겠습니까?

분명히 시편에는새 사냥꾼의 올무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셨다”는 표현이 있습니다.그 새를 잡으려는 그 올무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셨다면,우리 마음속에 평안함이 몰려와야 됨에도 불구하고,우리는 그렇지 않더라는 겁니다.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날까?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바라봐야 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우리가 바라봐야 할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는 것보다세상을 바라보다 보니까,이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며 살아갈 때가 많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가 바라봐야 할 십자가, 그리스도 예수를 놓치고 살 때는 우리가 염려와 근심 속에 빠져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그런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나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내가 잠자는 그 시간에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보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된다는 것이죠.

그럴 때 우리의 마음에 쉼이 있고, 우리의 마음에 평화가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성경 말씀, 28절 말씀을 보시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자신의 노력과 자신의 수고로 어떤 결과를 만들려고 하면,그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고,일차적으로는 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이차적으로는, 예수를 믿지만 아직까지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부분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느냐면,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하셨을 때,그 '쉬게 하리라'는 의미가 무엇이냐면,마음에 쉼을 얻게 하겠다라는 의미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들에게 하시는 그 답변은:"너희가 마음의 쉼을 얻을 수 있다."그런데 그 마음의 쉼을 얻는 방법은 무엇이냐면,**"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할 단어가 있습니다.바로 “온유하고 겸손하다”라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하다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그렇다면 ‘온유하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구약성경에서 온유한 사람의 대표적인 예모세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가리켜 “모세는 온 지면에 그 온유함이 충만하였다”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속은 어땠겠습니까?한 200만 명 정도 되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데리고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동안,이스라엘 민족들은 사사건건 불평과 불만 속에 있었고,어떨 때는 모세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까지 했던 사람들입니다.

항상 불평과 불만 속에 있으니,하나님께서 어느 날 모세에게 "모세야, 도저히 안 되겠다. 내가 이 백성들을 다 진멸하고 너를 통해 새로운 민족을 만들어내겠다"고까지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때 모세가 하나님 앞을 가로막았다라는 표현이 성경에 나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가로막으면서,

“하나님, 제발 참으십시오. 만약 하나님께서 이 광야에서 이 백성들을 다 진멸하신다면,하나님께서 구원하시겠다 하신 그 백성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셨으니다른 나라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짧아서 결국 여기서 다 죽게 되었구나’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나님을 붙들고 간청한 것이 바로 모세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모세가 당한 수모, 모세가 당한 고난, 모세가 당한 멸시—이 모든 것들을 그 마음을 꺾고 꺾고 해서, 모세가 온유해지게 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온유"라는 단어는요,원래 마음이 착하고 평안한 그러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속에서는 불이 일어나고, 옛날 성격이 막 올라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그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게 온유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옛날 성품은 여러분들도 가끔씩 올라오죠?‘아!’ 하고서 확 올라올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그런데 그 옛날 성품을 누르고 누르고,착한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게 바로 온유한 상태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원래 이 단어는, 말을 길들일 때 쓰던 표현이었습니다.말이 얼마나 세상에서 자기 생각,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을 길들일 때 어떤 식으로 하냐면,세상적으로는 아라비아 말이 굉장히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호메트가 그 아라비아 말을 기를 때에,물과 가까운 데서 길들였다고 합니다.

목이 굉장히 말라 있는 상태에서,피리를 불면 그 말이 물가로 달려가다가도 딱 멈추는 겁니다.물이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요.

또 며칠 동안 물을 주지 않고,말을 목마르게 한 상태에서 물가로 데려가면,물 냄새 때문에 말이 얼마나 갈증이 나겠습니까.그런데 그때도 피리를 딱 불면 멈추는 말—이런 말들을 골라서 아라비아 종마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격, 성품들—이런 것들은 그대로 있으면서도,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이 꺾이는 상태—이것을 온유하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마음이 온유하다”라고 말씀하셨던 것도,어떤 때는 분노하시고, 어떤 때는 화를 내신 그 예수님께서도,온유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겸손하다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충분히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하나님께서 시키신 것만,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만 행하셨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충분히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하나님께 묻고,하나님께 기도하고,하나님께서 '오케이' 사인을 주셨을 때에만 일을 행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을 가리켜 겸손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온유하고 겸손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은,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을 살아가시며,충분히 모든 것을 벗어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그것을 누르신 상태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온유하고 겸손한데,**“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와서 배우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 예수님의 멍에가 뭘까요?예수님이 짊어지셨던 멍에는 무엇이었을까요?예수님이 짊어지셨던 멍에는 십자가입니다.

여러분들, 십자가가 쉽습니까?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가리켜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상태를 다스리지 못한 상태에서는 이 십자가가 무거운 짐이겠죠.그러나 마음의 상태를 다스린 상태에서는 이 십자가가 무거울지라도,쉽다라고 예수님은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겸손하고 온유하고,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다스릴 때는,우리의 상황,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어려운 문제들조차도 쉽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작은 문제조차도 크게 다가올 때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야만 우리의 마음에 을 얻을 수 있고,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조절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와서 배우라”라고 하십니다.

나는 지금 십자가라는 이 무거운 멍에를 짊어졌지만,아버지의 뜻이라면 내가 감당하겠다.아버지의 뜻이라면 내가 그 길을 가겠다.아버지의 뜻이라면 내가 죽음의 자리까지도 나아가겠다.

그런데 이 멍에—이 십자가는 무거운 것이 아니다.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 멍에는 쉽다,라고 주님께서 지금 이야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들, 예전에 시골에서 소를 키워보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아니면 옆집에서 그 모습을 보셨을 수도 있겠죠.

소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서는 나무로 만든 멍에를 씌우지 않습니까?그것으로 밭을 갈고 일을 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소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우리말에도 “멍에를 벗어버리는 날이 있겠지”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니까요.그 멍에를 짊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예수님께는 그게 십자가였고,여러분들 또한 여러분만의 멍에를 지고 살아가고 계실 겁니다.그 멍에는 정말 무겁고, 버겁고, 감당하기 힘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라”고 말씀하십니다.우리에게 초청하십니다.

너희 마음에 쉼을 얻게 하겠다.너희 마음의 생각을 바꾸어 주겠다.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확신으로,세상의 무거운 짐조차도 가볍게 감당할 수 있게 하겠다.은혜로 힘을 주겠다.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만이 이시고,예수님만이 진리이시며,예수님만이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이라는 길을 걷지 않으면,생명이 없고,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을 놔두고 다른 방법으로 수고와 노력을 한 사람들이 지고 있는 그 짐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그걸 우리들이 생각할 수가 있겠죠.

그래서 예수님이 이제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라고 하신 것처럼,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가는 사람들—그들의 마음에는 이 있고, 평화가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한 구절 더 보시면, 요한복음 6장 3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줄이지 아니할 것이요,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께로 가라는 겁니다.예수께로 가면,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고,그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께서 풍성하게 우리에게 주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들, 혹시라도 목이 마르십니까?예수님께서는 마르지 아니하는 샘물과 같은 그 은혜를 우리들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영적인 목마름이 있을 때, 그냥 목말라 애타지 말고,예수님께 오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 속에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을 우리에게 솟아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29절에 “내게 와서 배우라”라고 설명하시는 거죠.예수님께 와서 배우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 이민자의 삶을 살고 계신데—얼마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입니까?사실, 어느 누가 이 땅에 오셨고 또 그 상황 속에서 자녀를 키우시느라얼마나 눈물을 흘리셨고, 얼마나 땀을 흘리셨고,얼마나 염려와 근심과 걱정 속에서 살았는지,

전혀 다른 그 문화 속에서 살아갈 때,또 때로는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가 참으로 많은 힘겨움과 어려움을 겪었음을,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들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은 거의 다 비슷합니다.살아가는 상황도 거의 비슷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무엇을 먼저 체크해야 하느냐?

“내가 어떤 말을 내뱉는가?”를 먼저 생각하셔야 됩니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들이불평이냐, 원망이냐, 불만이냐—이런 것들로 계속 가득 차 있다면,

그 삶은 계속 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 속에서도,내 불평이 사라지고, 내 원망이 사라지고,나의 이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그 안에 기쁨이 있고, 그 안에 감사가 있다면,그 상황 속에서 그 상황을 이길 수 있는 힘이우리들에게 생긴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들, 마지막으로 30절 말씀을 보시면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

몇 주 전에, 이제 터키 땅을 돌면서갑빠도기아라는 곳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 갑빠도기아는, 그… 뭐라고 하나요?이 암석이 지질학적으로, 돌멩이를 쉽게 팔 수 있는 그러한 곳입니다.

그러니까 화강암처럼 단단한 지형이 아니라,굴을 파기 쉬운 돌멩이들인데,무너지지는 않는 그러한 지형을 갖춘 것입니다.

이 지역의 길이가 자그마치 300km라고 합니다.300km면 우리나라 식으로 얘기하면,서울에서 대전을 지나 거의 대구까지—부산이 450km쯤 되니까—그 정도 되는 거리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길이들이 직선이 아니라 꼬불꼬불하고,양옆으로도 있고, 아래로도 있고,그런 식으로 미로처럼 얽혀 있는 지형이라는 겁니다.

그 속에서 어떤 아이들은 그냥 태어난 겁니다.그 깜깜한 속에서 태어나면서,그리려니 하며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로마 군인들이이곳을 점령하고 들어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로마 군인들이 볼 때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그 땅속에서 최소한 250년 이상을 살았던 사람들,그 사람들의 얼굴 모습이 광채가 나더라는 겁니다.

그 얼굴에 평화로움이 있었다는 이런 표현을 써요.

오히려 반대 아닌가요?로마의 군인들이 평화롭고,땅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불만이고, 절망이고—이런 모습이 맞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로마 군인들이 볼 때,그 사람들은 평화로운 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를 믿은 로마 군인들이 생겼습니다.그리고 잡으려고 그 굴속에 들어갔는데, 길을 잃어버린 겁니다.너무 꼬불꼬불한 그런 구조니까요.

어떤 것까지 있었냐면, 출입 장치까지 있었습니다.입구를 아예 돌멩이로 굴려서못 들어오게 막는 그러한 장치까지 다 갖춰 놨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로마 군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려고 들어왔는데—잡긴 잡았는데 나아갈 길을 못 찾은 겁니다.어디로 나가야 할지를 모르는 거죠.

미로처럼 꼬불꼬불돼 있어서, 왔던 길 또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그 모습을 보다 못해서,그 안에 있던 사람이 “나가는 길은 여깁니다” 하고그 로마 군인을 데리고 밖으로 내주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거운 짐과이 갑바도기아 사람들이 지고 있었던 무거운 짐,비교할 수 있을까요?비교할 수가 없겠죠.

그런데도 불구하고,그들은 그 안에서 평화를 누렸고,그 안에서 마음의 쉼을 얻었다는 겁니다.

왜냐면—“우리는 예수 안에 있다.”라는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죽음조차도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그들보다 분명히 우리가 지고 있는 멍에는 가볍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는 순간,세상의 짐은 너무나도 무겁게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세상의 짐이 아무리 무겁다 할지라도,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보는 순간,우리의 마음에 쉼이 임한다는 것.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말씀하십니다:“내 짐은 가볍다. 내 짐은 무겁지 않다.너희들이 내게로 오면 쉼을 얻으리라.”

여러분들,한 주 동안 잘 주무십시오.오늘—자, 오늘은 여러분들 수면제 끊는 날입니다.

주일만큼은 편안하게 주무십시오.내일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

이 은혜가 여러분들 삶 가운데 충분히,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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