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1:1~14 오실 그이가 당신 이오니까?
- seattleomc
- Jul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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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왜 나 같은 사람을 피값 주고 사셨을까요? 그 사랑 앞에 나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요? 오늘 말씀을 통해 알아 보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아, 옆에 분들과 한 번 인사하시죠."주님을 뵙는 것 같습니다."그래서, 주님을 뵙는 것 같습니다.제가 이런 거는 잘 안 하는데요.안 그런 것 같아요. 여러분들, 좀 거룩한 척 합시다.교회 왔는데, 예, 거룩하지 않아도... 아, 우리 아버지 품에 왔는데...우리는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또 주님은 다르게 우리를 보시지 않습니까?
우리를 기뻐하는 아들로, 기뻐하는 딸로 이렇게 보시지 않습니까?아, 참 거룩하죠. 주님을 뵙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아요.옆에 분들, 다시 한 번 보세요. 안 보네요? 이제는 아예 안 보는 것 같아요.저는 그렇습니다. 여러분들, 괜히 주님을 뵙는 것 같습니다.
아멘. 예, 항상 그 은혜가 넘쳐나기를 소망하고요.아멘. 우리의 부족함이 항상 하나님의 은혜로 가려워집니다.여러분들, 우리의 부족함을 자꾸 내세우면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 간데없이 사라져요.
그러나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고, 완악하고,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지만,"은혜로 덮어 주신다"라는 이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는 더 풍성하게 우리에게 와닿게 됩니다.항상 이 마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선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은, 쉬운 것 같지만 어렵습니다.어려운 것 같지만 또 쉽습니다.
그래서 전체를 다 할 수는 없고요.전반부 하나, 후반부에 나와 있는 내용 하나,이 두 내용만 짝을 맞춰서 집중적으로 함께 말씀 묵상을 하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옥에 갇혀 있는 요한으로부터 질문을 받는 장면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다시 말씀드리면, 요한이 예수님께 사람들을 보내어 물어보죠."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또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 합니까?"이 질문으로부터 오늘 말씀이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요한이 어떤 말을 했는지에 대해, 일부 목사님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옥에 갇혀 있다 보니까 심신이 미약해지고, 또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신앙이 흐려져서,확실하게 믿었던 예수님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 이런 질문을 던졌다.”이렇게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 모르겠습니다. 그랬는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그게 어렵다고 생각합니다.왜냐하면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분명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누구셨고, 어떻게 오셨고,그리고 예수님은 내 뒤에 오셔서 어떤 일을 행하실 분이신지를누구보다도 요한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이 옥에 갇힌 그 환경으로 말미암아심신이 약해져서 그가 가지고 있던 믿음이 흐려졌다—이렇게만 볼 수는 없는 겁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그런 생각으로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의심했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성경 여러 군데에서,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가지고 있던 믿음,그 이해,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확신했던 요한의 고백들이어떤 환경으로 인해 바뀌었다고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요한이 던진 질문이 무엇인가?그리고 우리는 요한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관,또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 나타난 메시아의 도래와 임재—이런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메시아에 대한 사상,즉 예수님에 대한 이해, 믿음에 대한 생각들을다시 한번 총괄적으로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이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거나아니면 환경으로 인해 믿음이 약해졌다고 할지라도,예수님의 '예수님 되심'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우리의 신앙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다고 해도,예수님의 존재, 예수님의 하신 일, 예수님이 하실 일은결코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믿음이 변했든지, 내가 바뀐 것일 뿐이지예수님은 그대로 계시고, 예수님의 하신 일도 그대로이며,또 앞으로 하실 일 또한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우리가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요한이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어떻게 가졌느냐?이걸 먼저 생각해 봐야 하고요.
그보다 더 중요한 건,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고,예수님의 그 답변이 세례 요한에게 어떠한 확신을 주었는가—이 부분을 우리가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먼저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요한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했는가?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시각으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바라보아야 하는가?
본문 속에서 이것을 한 번 끄집어내 보자는 겁니다.이게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11절에 나오는 말씀이 또 따로 있습니다.그 말씀은 그 말씀대로 우리가 따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자, 먼저—요한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했고, 어떻게 증거했는가?
오늘 본문에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습니다.마태는 자세하게 소개하지 않지만,요한복음에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대해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요한복음으로 넘어가서 요한복음 1장 19절부터 23절에 나오는 말씀을먼저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절 말씀을 보면,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네가 누구냐?” 하고 물을 때,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였고,
또 묻기를, “그럼 네가 엘리야냐?” 하니 이르되,“나는 아니다.”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대답하되, “아니다.”
또 말하되, “그러면 너는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너는 네 자신에 대해 뭐라 하느냐?”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 하니라.
자, 이 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먼저 하나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구약의 마지막과 신약, 마태복음이 시작되는 그 부분 사이에는 몇 년간의 갭이 있냐면…무려 400년 동안의 침묵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음성을 들려주시지 않았습니다.그래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셨다”라고 말하며,구약의 마지막과 신약의 처음 사이에는 400년이라는 간격이 흐른 것입니다.
그런데, 400년 만에 광야에서 세례 요한이 외칩니다.“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이 메시지가 정말 하나님의 메시지인지 궁금했습니다.그래서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을 세례 요한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에게 묻습니다.“너는 누구냐? 네가 그리스도냐?”라고 말이죠.
우리들이 잘 아시다시피, ‘그리스도’는 메시아에 대한 헬라어 번역입니다.구약에서는 '메시아',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둘 다 ‘기름 부음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세례 요한에게 묻습니다.“네가 그리스도냐? 우리가 400년 동안 기다려온 바로 그 메시아가 너냐?”
그때 세례 요한은 분명하게 말합니다.“나는 아니다.”
그러자 다시 묻습니다.“그럼 네가 엘리야냐?”
여기서 ‘엘리야’라는 말은 말라기에서 예언된 인물을 말합니다.말라기서는 이렇게 예언합니다:“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시리라.”
그래서 사람들은 “엘리야가 다시 살아서 오는 것인가?”라고 오해하기도 했습니다.그러나 그 의미는, 엘리야와 같은 심정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를 보내시겠다는 의미입니다.즉, 상징적 표현인 것이죠.
그래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묻습니다.“당신이 그 엘리야냐?”
세례 요한은 대답합니다.“나는 엘리야가 아니다.”
그러자 다시 묻습니다.“그럼 네가 그 선지자냐?”
여기서 ‘그 선지자’란 누구냐면,모세가 죽기 전에 유언한 인물입니다.모세는 이렇게 유언합니다:“말세에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너희 가운데서 일으키시리라.”그래서 사람들은 그 선지자가 바로 지금 오고 있는 건지 궁금했던 겁니다.
그래서 묻습니다.“네가 그 선지자냐?”
세례 요한은 대답합니다.“나는 아니다. 나는 그 선지자도 아니다.나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선지자도 아니다.”
그러자 다시 묻습니다.“그럼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
세례 요한은 말합니다.“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
다시 말해서,“나는 ‘소리’일 뿐이고, 내 뒤에 진짜 실체가 있다.”라는 의미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자신을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자기에 대한 정확한 인식.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었다는 말은 곧,내가 무엇을 해야 하며, 내가 왜 왔는가를 알고 있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조금 말씀이 어렵나요?
여러분들도 내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아야,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는 것처럼,세례 요한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를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에,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세례 요한이 옥에 갇혔다고 해서 메시아에 대한 믿음이 흐려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이 부분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오심을 보고 이르되,‘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다시 말해서,메시아는 어떤 모습으로 오게 되느냐?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어떤 구약의 선지자도 말하지 않았던 독특한 선언입니다.그 누구도 오실 메시아가 어린 양의 모습으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독특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했던 세례 요한이감옥에 갇혔다고 해서 믿음이 흔들렸을까?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렵다고 느끼는 것이고,그래서 제가 이 부분을 여러분께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정말 이 부분은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도무엇이 맞고 틀리다고 확실히 결론 내리기 어려워,저도 “이게 정답입니다”라고는 말하지 못합니다.이건 저의 한계이고, 여러분들께서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요한이 감옥에서 “당신이 그 메시아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한 이 질문이, 정확히 어떤 의미와 의도로 던져졌는지—그건 사실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꼭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서, 오실 메시아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오셨는가를 아는 것이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내용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1장 30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뭐라고 얘기하냐면,자신보다 늦게 태어났지만, 나보다 앞선 분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예수님은 단순히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하나님이신 분이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며,순서는 뒤에 오셨지만, 본래는 나보다 먼저 계셨던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는 믿음을세례 요한이 이 말씀을 통해 증언한 것입니다.
31절을 보면,“또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라고 말합니다.
요한이 베푼 세례는 ‘물세례’, 즉 회개의 세례입니다.예수님이 베푸실 세례는 ‘성령 세례’이죠.
다시 말하면, 요한의 세례는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인도하기 위한 것이고,그 회개를 통해서 실체 되신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세례였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외쳤습니다.“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그 말은 곧, 실체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려면 회개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요한의 세례를 ‘물세례’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즉, 회개의 세례입니다.
이 당시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관,그리고 세례 요한이 빠져나올 수 없었던 그 틀 안에서는,메시아는 어떤 존재였느냐?
바로,정치적,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였습니다.메시아는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 줄 인물로 기대되었고,그 메시아가 오면 현실적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가?그들의 사상 속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셨다.”
그래서,“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신다.”이런 사고방식이 뿌리 깊이 있었던 것이죠.
정권도 물리쳐 주시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우리를 건져내실 것이다—그런 기대감이 메시아에 대한 인식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푼 것도,그 기대와 연결돼 있던 것입니다.“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이 메시아를 통해 우리를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이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회개를 외친 것이죠.
하지만 세례 요한이 외친 회개는 또 하나의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너희가 회개해야만 앞으로 도래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선포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오실 그 일을 예비하는 자, 오실 그가 하실 일을 외치는 자의 소리.”
다시 말해서,“회개하라, 그래야 메시아가 선포하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이것이 요한의 메시지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인식이요,메시아에 대해 가졌던 인식입니다.
이후 요한복음 3장에서,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과 함께 있었던 저 강 건너편 사람이 지금 세례를 베풉니다.많은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고 있습니다.”
이 말에 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흥할 수 없다.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그가 흥할 것이다.”
즉, 예수님께 사람들이 몰려간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 걱정하지 말라고제자들을 안심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유명한 말을 하죠.“나는 쇠하여야 하겠고,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오셨을 때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나는 당신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그런데 어떻게 내가 당신께 세례를 베풀 수 있습니까?”
이처럼,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아주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도,요한이 가지고 있었던 그 예수님에 대한 인식을함께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구약 시대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관—즉, 정치적·경제적 해방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리기 위해 오셨고,영적인 전쟁을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인식을우리가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건강해지고,내 자녀가 잘되고,내 사업이 잘되고—이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내 영혼이 살아나고,예수님으로 인해 내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되었구나!라는 인식이 우리에게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질문을 통해,우리는 그 사실을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혹시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면,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서예수님이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오셨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이제 마태복음 11장 5절 말씀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못 듣는 자가 들으며,죽은 자가 살아나며,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묻습니다.“우리가 기다려야 합니까? 아니면 당신이 그 분입니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바로 이겁니다.
“맹인이 본다.못 걷던 사람이 걷는다.나병환자가 깨끗해진다.못 듣던 자가 듣는다.죽은 자가 살아난다.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진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오심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살리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즉, 우리의 형편이 나아지고,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복을 받아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오신 게 아니라는 답변을,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5절에서 주고 계신 것이죠.
이 말씀은 실제로 이사야서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예수님께서 풀어서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사야서 35장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그리고 이사야 61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포로된 자에게 자유를,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게 하셨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얻게 되는 것에 대해이사야는 예언했고,예수님은 실제로 본문 5절에서 그것을 확인시켜 주고 계십니다.
즉,마음이 상한 자를 위로하게 하시고,옥에 갇힌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소망 없는 자에게 소망을 주시고,상처 입은 영혼에게 회복을 주시기 위해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백성 삼으신 이유는,나를 축복하시기 위함이 아니라,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도들이 가져야 할 신앙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이유는,나로 하여금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시고,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게 하시고,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며,소망이 없는 자에게 희망을 주게 하시고,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모든 내용이 본문 5절의 뜻을 이사야서가 더 자세히 풀어 설명해 주는 것이죠.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이 말씀을 통해 이렇게 깨닫게 됩니다.아, 예수님은 우리가 기다려온,우리 조상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상과는 전혀 다르신 분이시구나.
예수님은 오셔서,왕국을 세우고 나라를 다스릴 권력자가 아니라,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시고,그 백성들이 이 세상 속에서 회복과 생명을 전하게 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게 되고,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불어 넣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곳이 어두운 곳이라면, 그곳의 어두움은 사라져야 합니다.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이 가는 곳에 죄악이 있다면,죄는 떠나야 합니다.절망이 있다면 소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슬픔만 있는 곳이라면 기쁨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아멘.
바로 그 일을 위해,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봅시다.
성도로서 나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나로 말미암아 내 주변 사람들이 변화되고 있습니까?상처 입은 영혼이 위로를 받고 있습니까?소망이 없던 사람들이 희망을 얻고 있습니까?
내가 가는 곳에 생명의 빛이 비치고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말씀을 통해 반드시 깨달아야 할 내용입니다.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자랑해야 할 자랑이요,우리가 가져야 할 기쁨입니다.
세례 요한도 처음엔 예수님에 대해 막연한 인식을 가졌을 수 있습니다.하지만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진짜 기쁨과 진짜 자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우리도 예수님의 이 답변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이유는상처받은 자에게 용기를 주게 하시기 위함이구나.소망 없는 자에게 희망을 전하게 하시기 위함이구나.그래서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삼으셨구나.
우리가 전도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그 사람들은 죄 가운데, 사망 가운데, 절망 가운데 있던 자들입니다.그들에게 우리가 전한 생명의 복음으로 인해그들의 삶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향력을 미치는 그곳에 생명이 살아납니다.이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이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내 자녀가 명문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 아닙니다.주식이 몇 배로 올라 수익이 생긴 것이 우리의 기쁨이 아닙니다.
내가 가는 곳에 생명이 탄생하고,죽어가던 자가 살아나고,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며,어둠이 빛으로 변하는 것—이것이 진짜 성도의 기쁨이며, 신앙의 본질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 부분까지는 미처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우리가 아주 잘 아는 말씀이지만,사실은 잘 모르는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장 큰 자라고 하셨다가,왜 또 가장 작은 자보다 작다고 말씀하셨을까요?
먼저, 요한의 위대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여러분, 유럽이나 박물관에서 성화를 보면세례 요한은 항상 누추하고 거친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약대 털옷을 입고, 수염이 덥수룩하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산적처럼 생긴 모습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얼굴이 환하고, 후광이 비치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왜 요한은 그렇게 초라하게 그려졌을까?
아마도 성경에서 말하는 그의 위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메시아의 왕국을 소개하는 자였습니다.다시 말해서,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선포하는 자였죠.
구약의 어떤 선지자도 하지 못한,그 특별한 메시지를 요한이 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크신 분이다.그는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세례 요한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그가 전한 메시지가 위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큰 자가,갑자기 작은 자가 되는 걸까요?
그 이유는,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새 언약 안에 들어오지 못한 자입니다.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으로 초대된 신약의 성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나라,그 천국에 속한 사람은,아무리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2절과 13절 말씀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고 있으며,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다.”
즉, 요한까지가 구약 시대입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을 마무리하는 자이고,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더 큰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들입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내신 것으로만 끝내시지 않았습니다.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시고 난 후에 우리를 통해 하실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 하실 일이 무엇이냐면,예수님이 “우리를 사셨다”라는 표현 속에 들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교회는 예수님의 피값으로 사신 곳이라는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세우신 곳—그것이 교회입니다.그리고 그 교회는 바로 우리 성도들입니다.우리는 예수님의 피값으로 사신 성도들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머리는 누구입니까?바로,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마치 몸에서 목을 떼어내면 어떤 일이 생기나요?누구도 살 수 없습니다. 둘 다 죽는 겁니다.
물론 닭은 목이 잘려도 좀 돌아다닌다고 하긴 합니다만,교회와 예수님의 관계는 그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절대 끊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예수님과 성도는 그렇게도 깊고 본질적인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멘.
그래서 성도는 자라나야 합니다.어디까지 자라나야 하냐면?그리스도 예수에게까지,예수님의 충만하신 분량까지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우리 대신 죽으실 예수님과우리를 구원하실 예수님에 대해서는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를 구원하시고,자신의 피값으로 우리를 사시고,우리와 접목되시고,우리의 머리가 되신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는 것이죠.
이 부분을 성경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 에베소서 1장 17절을 보시면,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나요?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셨습니다.왜 주셨나요?하나님을 더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18절을 보시면: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즉, 우리의 영안이 열리게 하시고,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나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의 풍성함이 나타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19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힘의 위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어떠한 것인지를 너희로 알게 하기를 구하노라.”
즉,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이 세 구절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하나님을 더 알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단순히 구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그의 지혜에까지 자라가며,그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혜의 충만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야 하며,예수님의 지혜의 풍성함을 알아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부르셨는가?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절망 가운데 있는 자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성령으로 충만케 하셔서 나를 통해 그 일을 하시기 위해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자꾸 “십자가를 자랑하라”고 말씀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정신을 우리가 품고 있어야,예수님의 뜻과 하나님의 소망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나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나를 부인하고,예수님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나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예수님이 나타나시는 것—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어떤 환경 속에 있다 하더라도,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목적은 변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이 가는 곳마다,하나님이 함께 하시며,동행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함께 하시며,동행하시는 분이십니다.그래서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고백을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 속에서다시 한 번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고,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목적이 무엇인지를다시 한 번 깊이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후로는,내가 가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나고,죽음의 그림자가 떠나가고,빛이 비추는 그 현장에 내가 서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이유라는 것을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이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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