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1:15~24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들
- seattleomc
- Jul 14
- 14 min read
“영적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고 말씀하시며, 그 말씀 앞에 반응하기를 원하십니다. 짧은 인생 속에 주어진 은혜와 말씀의 기회를 붙잡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진정한 기쁨과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 벌써 마태복음 11장 중반까지 온 것 같습니다.지난주 말씀을 여러분들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시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무엇이었냐면—구약 시대 성도들, 구약 시대 백성들이 광야의 길을 걸으며 맛보았던 하나님의 은혜,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그리고 반석을 깨뜨려 샘물을 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그들은 살아가며 날마다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그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것이 예수 안에 있는 즐거움이라는 것이지난주 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아주 간단합니다.“예수 안에 있는 즐거움은, 구약 시대에 성도들이 누렸던 모든 은혜보다 더 크다.”
이 말을 제가 40분 동안 풀어내서 설교로 전한 것이죠.
여러분들,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수많은 기회와 찬스들을 겪으셨을 겁니다.그리고 마음속에 "내가 그때 만약에..."라는 말이 떠오른 적도 많으셨을 겁니다.
“내가 그때 그 사람과 결혼을 했더라면?”
“내가 그 땅을 샀더라면?”
“그 주식을 팔지만 않았더라면?”
이런저런 ‘껄’ 하는 후회들이 인생에는 늘 따라다니죠.
웃기는 얘기 하나 해볼까요?
제가 고등학교 때 공군사관학교를 지원한 적이 있습니다.어머님께 “공사 가야겠습니다” 했더니,군대에 못을 박는 줄 아시고는 펄쩍펄쩍 뛰셨어요.말뚝 박는다고 하죠? 평생 군대에 있는 줄 알고 걱정하신 거예요.
그때가 군인 정치가 통치하던 시절이니까,마을 사람들까지 난리가 났습니다.“여기가 얼마나 좋은 동네인데!” 하며 펄쩍 뛰셨다더라고요.
결론이요?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거죠.
가끔 생각합니다.그때 그렇게 되었더라면,혹은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내 인생은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었을까?
하지만 여러분,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지금 내 삶이 불행한가요?아니죠. 조금 아쉬울 수는 있어도, 불행하진 않습니다. 아멘?
그런데 우리가 진짜 불행하게 여겨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그건 바로,“내가 그때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내가 그때 주님을 놓쳤다면 지금 나는 어디에 있을까?”
이런 영적인 후회는 육신의 후회보다 훨씬 더 깊고 오래갑니다.
세상의 일은 다시 기회가 오기도 하고,때로는 돌이킬 수도 있습니다.하지만 영적인 기회는 한 번 놓치면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기회가 왔을 때, 미루지 말고 붙잡아야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공군사관학교를 지원한 적이 있습니다.어머님께 “저, 공군사관학교에 가겠습니다” 말씀드렸더니,군대에 못을 박는 줄 아시고는 펄쩍펄쩍 뛰시는 거예요.
왜 그러셨을까요?그 시절은 군인 정치가 통치하던 때였습니다.군대에서 ‘말뚝 박는다’는 표현을 많이 썼지 않습니까?
어머님이 그 이야기를 마을 분들에게 하셨나 봐요.그랬더니 마을 사람들도 펄쩍 뛰셨다는 겁니다.“여기가 얼마나 좋은데, 말이 되느냐!”며 걱정하셨죠.
그래서 제가 속으로 참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결론이요? 떨어졌습니다.그래서 이렇게 웃으면서 여러분께 말씀드릴 수 있는 겁니다.
그때 그렇게 되었더라면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이런 생각을 참 많이 해 봅니다.
또,“그때 누구를 만나지 않았다면,나는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이런 생각도 해 보곤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후회는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하지 않았던 것 때문에,지금 여러분의 삶이 불행합니까?그걸로 인해 불행하세요?
아니죠.좀 아쉬움은 있을지 몰라도,그걸로 인해 인생이 불행하지는 않습니다.아멘?
하지만 우리가 진짜 불행하게 여겨야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그게 뭘까요?
“내가 그때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내가 그때 말씀에서 벗어났다면 지금 나는 어디에 있을까?”
주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고,주님을 더 가까이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그 기회를 놓쳐버린 사람들—그들이 겪는 영적인 후회는 평생을 갑니다.
세상적인 후회는 어떻게든 되돌릴 수 있고,고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후회만큼은 되돌릴 수도 없고,고칠 수 있는 기회도 다시 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기회가 왔을 때는,그 기회를 꼭 붙잡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저번에도 여러분께 말씀드린 것처럼,베레아 지역에 있는 성도들이 성경에 이렇게 한 줄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베레아 성도들은 신사적이어서 날마다 그 말씀을 상고하였더라.”묵상하였더라.그 말씀이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를 날마다 성경을 묵상하였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언제의 말씀입니까?2천 년 전,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때의 이야기입니다.그런데 놀랍게도,2천 년 전 베레아 사람들의 말씀에 대한 자부심이지금도 그 땅 가운데 흐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자기 동네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럽겠습니까?
저는 그 땅을 방문했을 때,현지 사람들을 보며 바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아, 이분들은 나를 이국 사람, 타국 사람이라고 금방 알아보는구나.”
어떤 교회에 들어가자마자 사람들이 달려와 말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이게 우리 동네 지도입니다. 필요하시면 이걸 가지고 편안하게 둘러보세요.”
그 말투, 태도 속에서‘우리 동네는 신사적인 동네야’ 라는 자부심이 느껴졌습니다.
그 자부심은 바울 시대부터 지금까지도신앙의 유산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영적인 기회가 왔을 때는 빨리 붙잡는 것이 지혜입니다.
미적미적하다가 영적인 기회를 놓치면,세상에 둘도 없는 후회를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가르쳤던 학생들이 지금도 기억납니다.거의 40년 전 일입니다.
그런데도 지금도 제 생일이면 “목사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하고카톡을 보내오는 이들이 있어요.40년이 지난 인연인데도, 그 관계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당시 그 아이들에게“너 신학교 가라.”“너 목사 되면 좋겠다.”“너 선교사로 헌신해라.”이렇게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했든지—그중 12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지금은 목사로,그리고 사모로,또는 선교사로 헌신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은 말합니다.
“그때 내가 예수를 붙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에지금 내가 이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 영적인 기회 하나가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있어서,“내가 그때 예수를 붙잡을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기에오늘의 내가 있다.”이 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붙잡은 그 결과로,하나님께서 그들을 쓰시는 사역자로 세우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이 세상에 있는 일들은 얼마든지 후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영적인 것에 대한 후회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바로,영적으로 후회할 만한 일들을 행한 사람들에 대한 책망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고,그 이전에도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이 땅에 전파되었지만,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말씀에도 반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 16절과 17절을 보시면,예수님께서 이 세대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자기 동무를 불러 이르되,‘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아이들의 장난과 놀이를 예로 들어 이 세대의 심령 상태,영적인 반응 상태를 진단하고 계신 것입니다.
결혼식 놀이를 해도 기뻐하는 사람이 없고,장례식 놀이를 해도 슬퍼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비유가 어떤 뜻일까요?
세례 요한이 와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외쳤습니다.하지만 그 외침에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절제하며, 금식하며, 금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그러나 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도“우리도 저렇게 살아야겠구나” 하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세례 요한을 보고 말합니다:“저 사람은 귀신 들렸다.”
이제는 반대로,예수님을 한번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복됨,예수 안에 있는 평강,예수 안에 있는 즐거움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세리와 죄인들과 친구가 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말했습니다:
“저 사람은 식탐이 많다. 탐욕이 많다.”
그래서 예수님까지도 거부했습니다.
이처럼,아이들이 결혼식 놀이를 해도 기뻐하지 않고,장례식 놀이를 해도 슬퍼하지 않는 모습처럼—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초청에도 반응하지 않은 사람들이 바로 이 세대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우리들이 반응을 하지 않는다면,오늘 주님께서 시장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비유가마치 우리를 향한 비유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보면,사람들이 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않을까?성경은 그 이유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된 성품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우리의 마음은 늘 하나님을 향해야 하고,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하며,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실천되지 않는 것은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된 본성 때문에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세상을 더 많이 알기를 원하고,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우선이 되다 보니,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악된 성품의 영향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다 해도,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요한복음 5장 39절부터 44절을 보시면,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이 말씀에서 42절이 특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셨는데,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영접할 것이다."
여기서 주님은 분명히 지적하십니다.“너희가 서로 영광을 구하고,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않는다.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마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꼭 마치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영생을 얻는 줄 알고, 그래서 성경을 연구합니다.오늘도 성경을 공부할 텐데, 우리는 성경을 그렇게 열심히 공부합니다.그런데 이 성경이 누구를 증거하고 있습니까?바로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고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 내게로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냐?그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이나 우리들이나 성경을 연구합니다.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기에 두려움을 가지고 부지런히 살피며 나아가기도 합니다.그러나 그 말씀이 예수님께로 이끄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영생을 얻게 하는 길이다”라고 하셨지만,많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제사장들은예수님을 붙잡아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요한복음의 말씀 그대로입니다.“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결국은 세상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신앙적 행위,모든 종교적 방법과 수고들은이 세상에서 상급으로 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이 땅에서 보상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성경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가르치는 설교가 있다면,그건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그 가르침으로 인해 교회가 부흥할 수는 있습니다.사람들이 몰려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성경 밖에 있는 한 개인의 생각일 뿐입니다.
📖 성경 어디에도,“신앙적 행위로 인해 이 땅에서 보상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성경은 어디를 보아도, 우리의 신앙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축복의 약속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에게 재물을 맡기실 수도 있고,우리를 높은 자리로 올리실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이런 것들은 단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잠시 맡겨진 것들일 뿐,우리가 잘했기 때문에 보상으로 주어지는 상급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제사장들의 가장 큰 잘못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금식하고, 절제하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살아갔습니다.이 모든 신앙 행위를 통해,“메시아가 오시면 당연히 이에 대한 보상이 있을 것이다.”라고 착각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그러한 금식이나 율법적인 삶을 통한 신앙의 보상은 이 세상에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이 신앙 안에서 종종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의 충만함,곧 하늘의 기쁨과 하나님의 은혜를 이미 우리에게 다 주셨음에도 불구하고,우리는 그것을 이 땅에서의 보상으로 바꾸려는 마음을 갖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이 땅에서의 보상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그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과 같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을 때,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주위를 돌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금송아지가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낸 신이다!”
금송아지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바로 애굽 땅의 풍요의 신입니다.즉, 송아지 형상은“이 송아지가 우리가 이 땅에서 풍요롭게 살게 해줄 것이다”라는 욕망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송아지 형상으로 바꿔버린 것입니다.
결국, 아무것도 주지 않는 하나님 앞에는 예배하지 않고,이 땅에서 풍요를 줄 수 있을 것 같은 것 앞에 춤추며 뛰놀며 경배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고 예배한다 하더라도,그 모든 것이 이 땅에서의 풍요로움을 누리기 위한 것이라면,우리도 결국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의 신앙 행위가 그렇게 왜곡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들의 실패는 어디에서 시작되느냐 하면,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그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회개할 것이 있다면 회개해야 하고,은혜를 누릴 수 있는 말씀이면 은혜를 받아야 하고,말씀 속에 눈물이 있다면 눈물을 흘려야 하며,그 말씀이 주는 평강이 있다면 그 평강을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말씀 앞에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그것이야말로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가졌던 마음 상태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대에게 예수님이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러자 그들이 대답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이에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시죠: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이게 무슨 말씀이냐 하면, 예수님은 “내 말에 거하면 너희가 진리를 알게 되고 자유함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셨지만,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은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왜 자유롭게 하리라 하느냐?”즉, 자신들이 이미 자유롭다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죄를 범하는 자는 다 죄의 종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또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지 죄의 종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시죠:
“너희가 정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아브라함이 행한 일을 너희도 행해야 하거늘,너희가 하는 일은 온갖 죄악밖에 없다.그러므로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다.”
결국 말로 안 되니까 유대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고,하나님의 은혜를 알고,그 은혜를 삶 속에서 누리고 있다면,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맞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을 통해 열매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 삶에 그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면,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은,지금 유대인들이 하고 있는 그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종교 생활을 하고, 또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이 뭐냐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엄밀하게 따져서 생각해 본다면,내가 예수님을 고백하고 신앙 고백을 하고, 주일날 예배드리는 이 모든 행동들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해서 나오는 것인지,아니면 앞서 말한 대로, 우리가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어떤 신앙의 보상을 받으려는 마음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아보려는 것은 아닌지—그런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신앙을 고백할 때, 우리는 반드시 한 가지 분명한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그 기준은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내가 성경에서 하라고 한 것을 행하고 있는가?
성경에서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피하고 있는가?
이런 것들이 성경의 기준이 되어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인생의 중요한 선택 앞에 설 때,나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묻고 있는가?아니면 이미 결정해놓고, 그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기쁜 일인지 아닌지 묵상조차 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에 기준이 되고 있는가?
만약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우리는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지금 예수님께서 바로 그 말씀을 우리에게 하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유대인들의 가장 큰 잘못은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그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번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나의 행동,
나의 중요한 결정,
나의 인생의 목표,
이런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 이 결정에 대해 저에게 어떤 말씀을 들려주시겠습니까?”“이 목표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합니까?”“이 행위가 주님 기뻐하시는 일입니까?”
하고 물어야 하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는 이유는,우리의 삶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고, 하나님의 뜻이 역사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보상을 받기 위함이 아닙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또 삶의 목표를 세울 때,혹은 어떤 행동을 할 때,주님께 묻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럴 때 비로소,우리는 세상을 더 사랑하지 않고, 주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절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시되…"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셨던 고을들—한번 생각해 보십시오.예수님이 밤낮 없이 찾아오셨고,그들과 함께하시고,기적을 베푸시고,은혜를 주셨고,무엇보다도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권능을 보이셨는데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지금도 우리에게 주시는 깊은 도전과 경고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자신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나를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그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순종이며, 낮아짐이며,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엔 자신을 죽이는 사람도, 순종하는 사람도, 낮아짐도 없습니다.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아, 내가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있구나…”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더 많은 기적이나 말씀의 양이 아니라,우리의 변화입니다.
아무리 기적을 많이 본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말씀을 가까이 한들, 우리가 변하지 않는다면,그 모든 말씀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결론으로 맺어보겠습니다.
시편 90편에 보면, 모세가 지은 긴 기도문이 있습니다.그 일부를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편 90편 중)
이 기도문의 초점은 무엇입니까?
인생은 너무나 짧다는 겁니다.
칠십, 팔십을 산다 한들, 인생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고,그 날들은 마치 날아가는 것처럼 허무하게 지나간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의 더 깊은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 짧은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 앞에 성실하게 살아가는 자가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 인생이 짧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공감도 합니다.그런데 그렇게 짧다는 걸 알면서도,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성실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그들을 아무런 공로도 없이 이끌어 내셨고,철옹성 같던 바로를 무너뜨리셨고,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누렸습니까?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날마다 만나와 메추라기
목마를 땐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
옷이 헤지지 않고, 신발이 닳지 않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그런데도 그들은 날마다 불평이요, 원망이요, 불만이었습니다.
“하나님, 만나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이 말씀은 우리를 향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반응하는가?하나님의 은혜 앞에 감사하는가?짧은 인생 속에 주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고 있는가?
마치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장례식 놀이로 하면 슬픔이 있고, 혼례식 놀이를 하면 좀 즐겁고 기쁜 반응들이 있어야 할 텐데, 이들은 전혀 깨닫지 못하는 그런 백성들로 살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 기적들이 우리들에게 온다면 우리는 어떨 것 같습니까? “할렐루야!” 하고서, 여러분들 그 기적 가운데 “주님! 주님을 믿다 보니 이런 기적도 내가 보게 되는군요!” 하며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을까요? 아멘? 우리들도 장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죄악된 본성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솔직합니다.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세상에 대한 미련이 너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나를 따를 수 없다."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순종이요, 낮아짐이요,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죽이는 사람이 없고, 순종하는 사람도 없고, 낮아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아, 내가 주님보다도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있구나.”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건 기적을 베푸는 것보다, 우리가 변화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적을 많이 본다 한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말씀을 가까이한다 해도 우리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말씀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 이제 오늘 말씀의 결론을 시편 90편 말씀으로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 시편 90편 (모세의 기도)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이니이다.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과 같으니,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 시들어 마르나이다.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간이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 90:1–12)
그러니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얼마나 충만합니까? 얼마나 은혜롭습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날마다 불평이요, 날마다 원망이요, 날마다 불만이었다는 것이죠.
어느 누구 하나 "하나님, 만나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얘기한 인생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느 누구 하나, "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에 우리가 어떤 꿈을 가지고 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인생이 너무나도 짧다는 것은 알아요. 그러나 짧음을 알면 알수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내 인생을 살아야 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 가고 하나님께서 "멈춰라" 하실 때 멈출 수 있는 그런 믿음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고, 불평이 많고, 원망이 많은지… 아직도 불만이고 뭐 그런 투성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살았던 그 모습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더라는 것이죠.
아까 서두에 여러분들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의 즐거움은, 구약 시대 성도들이 광야에서 누렸던 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보다도 더 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 구원함은요, 아주 값싼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인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갑없이 받은 은혜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한 것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의 피값으로 사셨다고 말씀하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는데, 내가 이 짧은 인생을 하나님 앞에 설 때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까? 내가 이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내 삶 속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까?" — 이걸 좀 생각해 보셔야 된다는 겁니다.
성경을 통해서, "성경은 내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가?"를 찾아보셔야 합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실 때, 최소한 저한테라도 "목사님,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기도 좀 부탁드립니다"라고 얘기는 하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딱 한 분 계셔요, 그런 분이. 우리 교회에서. 나머지는 다… 가짜라고 하긴 좀 그렇고… 어쨌든.
그러니 여러분들, 중요한 결정을 내리실 때 저에게도 좀,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카톡으로라도 메시지 한번 던져 주세요. 그러면 제가 기도합니다. 요즘 기도할 거리가 없어 가지고 기도 시간이 굉장히 짧아졌는데, 여러분들 자꾸 기도 제목을 주시면 제가 기도 시간이 좀 더 길어질 거 아닙니까?
이렇게 우리의 인생에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 예를 들어 우리의 자녀들이 장가를 간다, 시집을 간다, 대학을 앞두고 있다, 진로를 고민한다 — 이런 중요한 결정들이 우리 삶 속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인가 같이 되묻고, 짧은 인생 가운데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야 된다는 겁니다.
참, 웃지 못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교주가 나와서 이런 변명을 하나 한 적이 있습니다. 교주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아무튼 TV에 나온 걸로 기억하는데요. 이 양반이 라스베가스 카지노에 가서 몇 만 불을 잃었어요. 그 목사님… 아, 목사님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교주라고 합시다.
그 교주가 라스베가스에서 몇 만 불을 잃었다 하니까, 신문, 방송에서 막 떠들고 그랬을 거 아닙니까. 얼마나 망신입니까? 그런데 이 교주가 교회 가서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그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아십니까? 내가 거기 왜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서 그 고생을 한 줄 아십니까? 한 푼이라도 벌어서 교회에 도움이 되려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성도들이 뭐라고 했을까요?
"아멘!" 하더라는 겁니다.
여러분들, 이게 참 얼마나 망신입니까? 정말, 끼리끼리지. 우리가 뭐라고도 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 교회에 몇만 명이 모이거든요. 그러니까는 어떤 사람들은, "야, 거기 능력이 있으니까, 뭐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몰리는 거 아니야?"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정말 어이가 없죠. 아마 그러니까 교주를 하고 있겠죠. 우리 같으면 돈 100불이라도 잃었으면 진짜 고개도 못 들고 구석에 가서 조용히 있어야 할 텐데… "그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아십니까? 여러분들 편하게 하려고 내가 그 고생했습니다." 그러면 또 "아멘!"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말 다 한 거죠.
아무튼, 예수를 믿는다는 것—여러분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이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낮아지지 않고는, 우리가 희생하지 않고는, 우리가 순종하지 않고는, 그 길을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 그 길을 걸어갈 때, "짧은 인생이다"라는 걸 항상 기억하시고, 이 짧은 인생 동안 내가 어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것인가—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하시고, 하나님 말씀하시면 반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Yoruml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