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0:34~42 주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 seattleo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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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를 지나서 여러분들을 뵙습니다.아, 반갑습니다. 아멘, 아멘.
말씀드린 대로 알래스카를 다녀왔는데,거기는 벌써부터 해가 밤 10시 반, 10시 40분까지도 지지를 않습니다.
하지가 되면 ‘백야’라고 해서,하루 종일 해가 떠 있다가,잠깐 해가 질 듯하면 또 해가 떠오르는,정말 신기한 곳입니다.
같은 미국 땅에 살면서도,정말 희한한 세상을 보는 곳—그곳이 바로 알래스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들, 고사리 많이 꺾으셨어요?
이제 알래스카에도 봄이 찾아오니까,사람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했습니다.고사리도 다 꺾어야 하고요.
제가 알래스카 가자고는 말씀은 못 드리겠고요,아무튼 고사리 꺾느라고 목사님이 굉장히 염려하셨습니다.“우리 성도들이 고사리 시즌이 시작됐는데,말씀 사경회에 제대로 나올까…”이 염려를 많이 하셨어요.
그런데 의외로—금요일 새벽, 금요일 저녁, 토요일 새벽, 토요일 저녁, 주일예배,그리고 오후에는 임직예배까지—
모든 예배에 성도님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말씀을 받을 준비가 돼 있었는지!
오히려 말씀 전하러 간 사람이,은혜를 끼치러 갔다가 은혜를 받고 돌아오는 시간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얼마나 갈급해하시고,기도를 사모하시는지!
끝나고 나면 가는 사람 붙잡고“기도해 주세요, 기도해 주세요” 하는 분들이 많았고요,정말 기도 많이 하고 왔습니다.
어떤 분은 축복기도 하는 걸 보시고는뒤에서 입을 삐죽 내밀고,“왜 나는 기도 안 해 주시지?” 이런 표정을 지으셨대요.
제가 그건 몰랐는데, 나중에 따로 불러서 같이 기도했습니다.그랬더니 목사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그 삐죽거린 분이 바로 그분이었다!”야,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성도님들 중에 알래스카 다녀오신 분들도 계시겠고,또 아직 안 다녀오신 분들도 계시겠지만,한번쯤은 꼭 가보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면,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원수가 집안 사람이라.”이 말씀 다들 잘 아시죠?
그런데 아는 것만큼,사실은 이 본문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긴 한데,정확한 뜻은 잘 모르는—유명한 구절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예수님께서는 이제 복음 전도자들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시고,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쭉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내가 온 것은 이 땅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다.”“복을 비는 그 집이 너희의 평안을 거절하면,너희 발에 먼지를 떨어버려라.그 평안은 너희에게로 돌아갈 것이다.”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 이제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예수님께서는 지금 그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다.오히려 검을 주러 왔다.” 하셨을 때,
여기서 말씀하신 ‘평화’는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평화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졌을 때,그 평화를 입은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되는가,그리고 그 모습으로 살아갈 때,세상 사람들과 어떤 점이 부딪히는가,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설명하고 계신 겁니다.
그리고 그다음, 두 번째로 말씀하시는 것은—그 평화,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평화는 가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다시 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우리를 방해하는 것이 가정일 수 있다 할지라도,그 가정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가정 속에서도,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 사이의 충돌,즉 신앙의 충돌이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설명하고 계신 겁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원수가 집안 사람이라”는 건,가족이 적이라는 말이 아니라,신앙의 갈등이 가정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우리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나타나는 긴장과 갈등이가정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할 수 있다는 걸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럼 싸우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나는 화평을 주러 왔다”라고 하셨으면서도,동시에 세상과의 싸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싸움의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즉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와,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들,세상과의 충돌을 의미하는 겁니다.
다르게 말하면,이 싸움은 외부와의 싸움일 수도 있지만,우리 자신과의 내적 갈등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인식을 가질 때,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살지 않습니까?말과 행동, 신앙의 모범도 은혜롭고 덕스럽게 살아가죠.
그런데—가끔 하나님의 은혜를 잠깐 놓쳐버릴 때,우리의 신앙생활이 흐트러질 수 있습니다.
그때는 어때요?세상의 모습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기도 합니다.
바로 그때의 싸움—내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은혜와 세속적 성향이 충돌하는 싸움,그것을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이 싸움은,내 자신과의 싸움이 될 수도 있고,예수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 될 수도 있다.
이게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앞서 12절 말씀에서도 이런 말씀이 있었죠.“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을 빌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도,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도,평안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처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평화는,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릅니다.
이 평화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평화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4절 말씀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죠: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세상에 검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세상과 싸우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과, 악한 세력과 싸우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원래 우리는 악한 세력 안에 있었던 자들이고,하나님과 원수된 죄인이었던 우리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사,예수님께서 하신 세상의 싸움을,이제 우리를 통해 계속 이어가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고,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겁니다:“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다시 말해,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세상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계신 거예요.
이제 ‘평화’, ‘화평’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해봅니다.히브리어로는 ‘샬롬’,헬라어로는 ‘에이레네’ 또는 ‘에레네’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 이름도 ‘에레네’였던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평화란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또는 이웃과의 관계에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야만 이루어지는 것.그 문제가 해결되어야 얻을 수 있는 것.바로 그것을 샬롬, 평화라고 부릅니다.
여러분들,여러분 사이에, 또는 친구와의 관계,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다면,평화롭다고 느끼기 어렵지 않습니까?
나라와 나라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남아 있으면,그 나라는 평화롭지 못한 겁니다.
요즘 인도와 파키스탄이 서로 충돌하려는 분쟁 상황이 있다는 얘기,여러분도 들으셨을 겁니다.그게 뭘 의미하느냐—아직도 그들 사이에 남아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롭지 못한 것이죠.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뭔가가 남아 있으면 평화롭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 가운데 보내사,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남아 있던 그 모든 관계를 깨끗하게 청산하시고,우리를 하나님과의 화평의 자리, 평화의 자리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한 자,하나님과 평화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제부터 우리는,하나님으로 인해 이 땅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하느냐?
“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것이 계속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대치 상태에 놓일 수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 안에 있다 해도,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아간다면,아직도 하나님과의 대치 관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거예요:“너 죽을래, 살래?”
그냥 무서운 말이 아니라—“너 십자가에 못 박힐래, 아니면 살아날래?”이 질문인 겁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자신을 십자가에 온전히 못 박았을 때,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가 십자가에 온전히 못 박히지 않으면,내 안의 속사람—나의 죄성, 나의 자아가 막 드러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한 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우리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내가 죽을래, 내가 살래?”이 문제를 놓고,우리는 늘 갈등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내가 죽을 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흘러나오지만,내가 살아 있을 때는 예수님은 온데간데없고,내 속에 있는 모든 옛 자아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우리가 여전히 하나님과 대치 상태에 있을 수 있음을 설명하고 계신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항상 죄 가운데 살아갑니다.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부름받지 않은 사람들은죄가 무엇인지조차 모릅니다.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깨닫지도 못합니다.죄가 죄인 줄도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고,악한 것만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감각조차 없습니다.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르고,어디로 가야 할지 목적과 방향조차 모른 채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우리 성도들은, 그 죄 가운데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먼저 이것부터 짚고 넘어갑시다.
성도들의 죄는 무엇인가?
성도가 죄를 짓는 것은,죄가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 아니라,우리가 죄에 잠깐 미혹되어 실수하는 것입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신앙 고백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겠습니다:성도의 죄는, 죄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죄에 미혹되어 잠시 드러나는 연약함입니다.
이 차이를 확실히 정립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다는 말은,억압 가운데서 건져내셨다는 뜻도 있지만,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서도,가난함 가운데서도,부족함 가운데서도,
우리를 가득 채울 수 있는 평화를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 평화의 개념은 굉장히 넓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걸여러분이 기억하셔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죄에서 건짐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병든 상황 속에서도,문제가 있어도,형편이 나빠도,
그 모든 것들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기 때문에,우리는 평안하다는 겁니다.
예전에 예로 들었던 수넴 여인 기억하시죠?
아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그녀는 엘리사에게 달려가며 말합니다:“나는 평안합니다.”
엘리사가 “무슨 일로 달려오느냐” 했을 때,그 여인은 평안하다고 말했죠.
또 한나처럼,또 성경의 수많은 위대한 신앙인들처럼—
우리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하게 되는 이유는,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볼 때,그걸 고치려 하지 말고,예수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우리의 믿음은 약할 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죄 가운데 있는 자는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어둠 속에 있는 걸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양심이 마비된 상태—그걸 성경은 “양심에 화인을 맞았다”고 표현합니다.
예전 어르신들,길다란 곰방대에 담배를 넣고 불을 붙이고손으로 꾹꾹 눌러도 뜨거운 줄 몰랐던 이유,그 손끝에 화인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으면,죄를 죄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우리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영혼을 깨우쳐 주셨고,감각 없는 자를 감각 있게 하셨고,하나님과 원수 된 자를 화해시키신 십자가의 은혜가,우리에게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평안할 수 있고,하나님의 뜻을 우리 삶으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때에도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말아야 하고,침을 아무 데나 뱉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쓰레기를 줍고,질서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그게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지나가던 홈리스들이,어느 날은 정말 불쌍하게 보이기도 하고,내 주머니에 많은 돈은 없지만,그들에게 건네어 허기진 것을 달래주는 일들—
이런 것들이 예수 밖에 있었을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인데,예수 안에 들어오다 보니 이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화평하게 하신 은혜,그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지금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자, 35절 말씀을 한번 봅시다.35절, 36절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딸이 그 어머니와,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그리스도인으로서,다시 말해, 양심이 깨어 있는 사람으로서 이 땅을 살아갈 때—그 충돌이 가정 안에서도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집안에서도,식구들 간에도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예수님께서 직접 설명하고 계시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예수를 믿는다는 건,예수님을 ‘주인’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셔야 하니까,다른 어떤 것도 나의 주인이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관계가 깨질 수 있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과 충돌이 생깁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기쁨을 삼고,예수님으로 소망을 삼고,예수님으로 힘을 삼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그들은 물질로 힘을 삼고,명예로 힘을 삼고,쾌락으로 즐거움을 삼습니다.
그 차이가 결국 충돌을 일으키는 겁니다.그게 가족 안에서조차도 분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걸 지금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불화’는,기존의 삶을 따르는 사람들과,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과의 갈등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않는다면,갈등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이런 갈등이 생기고, 충돌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 누가복음을 한번 볼게요.누가복음에는 이 ‘검’에 대해 또 다른 표현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12장 49절입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마태복음에서는 “검을 주러 왔다”고 표현했고,누가는 이것을 “불을 던지러 왔다”고 기록했습니다.
즉, 세상과의 충돌은검으로도,불로도,전쟁으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검(칼)은 무엇입니까?무언가를 끊는 도구입니다.
끊는 과정은 ‘단절’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부자지간의 단절,세상과의 단절,이것이 검의 역할입니다.
다시 말해,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움을 얻기 위해서는 단절이 필요합니다.
세상과 단절해야만이,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가 태어날 때 무엇을 끊습니까?태줄을 끊습니다.
태줄을 단절하지 않으면,엄마도 아기도 함께 죽는 겁니다.
마찬가지로,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과의 단절,내 자신의 성품, 옛 습관들과의 단절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두 번째, 불에 대해 누가복음은 말합니다.
불은 태우는 겁니다.
우리가 성소에 대해 공부할 때,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번제단’을 통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번제단에서 나의 모든 것을 태우지 않으면,지성소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나의 옛 자아를 완전히 태우지 않으면,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번제단은 성소에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입니다.
그곳을 통과해야,물두멍을 지나고,떡상, 등잔대, 향단,그리고 마침내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 과거의 자아를 태우지 않고서는,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아멘.
세 번째는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세상과의 전쟁이 아니라,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건,세상과 단절하고,세상적인 습관을 태워버리는 것뿐 아니라,
내 속사람과 매일 싸워 나가는 것입니다.
그 싸움, 정말 어렵습니다.끊고 싶지만 끊기지 않는 것,버리고 싶지만 자꾸 올라오는 것—
그게 바로 내 자신과의 전쟁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싸움을 했습니다.로마서 7장 마지막을 보십시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도 절규했습니다.
이 싸움, 정말 안 되는 싸움입니다.
자신을 끊고 싶지만,끊어지지 않고,내 속에서 옛 사람이 올라오는 것—그게 우리 모두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나를 온전히 따를 수 없다.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자만이,내게 합당한 자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성령 받기 전,모든 제자들이 두려움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강하고 급한 바람처럼 임하셨을 때,그들 안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납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를 보고 소동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즉, 전쟁 같은 영적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 받은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에 죽음이 무서워 도망갔던 사람들이,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이제는 주님이 재판받으셨던 바로 그 재판장에 자신이 서고,복음을 전하는 자로 변합니다.
그 변화는,검으로 끊고,불로 태우고,전쟁으로 자신과 싸운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갇히셨던 그 감옥 속에,이제는 제자들이 자발적으로 들어갑니다.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외면하지 않고,그 길을 기꺼이 따라 걷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제자들은 순교함으로 그들의 삶을 마감했습니다.그리고 그 순교를 통해,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게 안 된다는 거예요.매일의 싸움이 영적 전쟁이고,매일의 삶이 전쟁터인데도,우리는 그 싸움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성령을 가리켜 “보혜사”,영어로는 “Counselor”—즉, 상담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내가 누구인지를 성령을 통해 알게 하신다는 겁니다.그리고 성령을 통해과거의 나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깨닫게 하신다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내적 갈등이 일어날 때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가르쳐 주신다.아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성령께서 안에 거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까요?우리가 성령께 자신을 내어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만이라도 내어드리면,성령은 역사하십니다. 아멘.
어떤 사람은 99%를 내어드려서,성령께서 기쁨으로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삶을 삽니다.
여러분, 99% 원하시면 안 됩니다.그 정도가 되면 순교의 자리도 두렵지 않습니다.사망의 골짜기조차 두렵지 않습니다.
제가 다음 주 예배를 마친 뒤,오후 늦게 터키 지역으로 들어갑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터키는 무슬림 권역이고,제가 가게 될 교회의 목사님은 출국 금지 상태입니다.
정부가 그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출국을 금지시킨 상태입니다.
그 교회는 어떤 목사님이20만 불을 도네이션하여 지어진 교회입니다.
무슬림 지역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 자체가정말 극히 예외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선교로 들어오면,종교 경찰에게 즉각 체포되는 곳입니다.
솔직히, 저도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하지만 뭐… 주님이 알아서 하시겠죠.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왜요?성령이 99% 충만하다면, 죽음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사역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부탁드립니다.기도해 주세요.
성령께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내가 누군지 알게 하시고,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그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죠:“성령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말은,우리와 함께 호흡하시고, 말하시고, 듣고, 보시는 인격체로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의미는—성령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건,성령에 의해 ‘변화되는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옛말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근묵자흑(近墨者黑).”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
즉, 누구와 가까이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거짓말 잘하는 사람과 가까이 해 보세요.처음엔 거북하고 듣기 싫고 부담스럽지만,나중에는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 됩니다.그러다가 어느새 닮아갑니다.
하지만 성령과 가까이 하면,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그분의 모습에 나도 가까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건,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들입니다.그런데 세상 속에서 성도로 살아간다는 건,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자기를 부인해야 하고,욕심을 내려놓아야 하고,원수까지 사랑해야 하고,십자가를 져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길은 결단이 필요한 길입니다.쉽지 않지만,그 길이 생명의 길이기에 우리는 걸어가는 겁니다.
왜요?우리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특징이 무엇입니까?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이 있다면,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성장이 없다면 문제가 있는 겁니다.그 안에 생명이 없거나,휴면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다면,그리스도의 모습이 반드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묻죠:“성도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그 믿음,어디서 꺼내서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여기 내 믿음이다!” 하고 꺼내 보여줄 수는 없어요.
그 믿음은 삶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죽지 않으면,새 사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옛사람이 반드시 죽어야만새 사람이 나타납니다.
억울하죠.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이셨기 때문에,우리가 죽어야만 새 사람이 살아납니다.
자, 38절과 39절 말씀을 보십시오.이 말씀이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이를 것이요,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기독교는 항상 역순의 원리입니다.
“주라, 그러면 받을 것이요.죽으라, 그러면 살 것이요.자신을 낮추라, 그러면 높아질 것이다.”
여기서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그렇다면 십자가란 무엇입니까?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그러니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아멘.
고린도후서 4장 10절~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결국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건 ‘자기 부인’입니다.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그게 바로 십자가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당신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죽음은 나를 위한 죽음이었습니다.그래서 우리는 말하죠:“주님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이다.”
예수님은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기 위해,영광의 왕으로 군림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나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기 위해그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과 함께 죽고,그분의 살과 생명을 담아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셨던 그 아름다운 말씀들,우리의 입을 통해 전하게 되고,
주님께서 하셨던 긍휼과 사랑의 손길,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여러분,이 길은 쉽지 않습니다.가장 어려운 게 ‘자기 부인’입니다.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러실 겁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십자가 없는 성도의 삶은,세상의 조롱거리일 뿐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세상은 우리를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너나 나나 똑같은 사람이잖아.”
하지만 십자가를 가지고,그 삶을 드러내는 순간,세상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너는 나와 다르구나.”
그러므로 십자가 없는 성도의 삶은,세상의 조롱거리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마태복음 10장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처럼—
우리의 이웃들, 심지어 가족이라 할지라도,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을 자랑하지 마십시오.십자가를 자랑하십시오.아멘, 아멘.
여러분이 드러나지 말고,십자가가 드러나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들이 되실 줄 믿습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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