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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0:34~42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우리가 이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고 할 때,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아멘.

그것은 핍박이고,우리를 싫어하는 곳으로 끌고 가고,원치 않는 곳으로 인도하며,어쩌면 그 길이 우리의 죽음의 자리까지도 인도한다고 말씀드렸죠.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살다가,죽음의 자리까지 내어주고,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망설임 없이, 주저함 없이,히브리서의 표현대로라면, 부끄러움 없이 그 길을 걸어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치러야 할 대가는,세상과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항상 옳은 것이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결국에는 옳은 것이 승리하죠.아멘.

나쁜 것이 항상 이기는 것처럼 보이지만,마지막에는 반드시 패배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옳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으로,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으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세상 사람들은 그 모습이 불편한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하는 것이죠.왜 우리처럼 살지 않느냐,왜 너희들만 잘났냐,이런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

빛의 역할, 소금의 역할로 살아갈 것을주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내지 않으면 어떤 모습이 되는가?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없어 밖에 버려져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이니라.”

우리를 소금으로 부르셨지만,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면,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감추려 해도,여러분의 몸짓 하나, 말투 하나, 행동 하나에서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미꽃은 쓰레기통에 감춰도, 향기는 막을 수 없다.”

여러분이 아무리“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냐!”머리에 써 붙이고 다닌다 해도,여러분은 감출 수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거룩함과 인자하심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당하는 고난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희생,우리의 손해,이런 것들은 단순히 고통이 아니라—생명을 살리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소망이 없고, 희망이 없는 이들에게우리가 소망이 되고 희망이 되는 삶,그것에 쓰임받을 때,우리의 고난은 의미가 있습니다. 아멘.

여러분의 말 한마디로,전도를 통해 누군가의 인생이 변했다면—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 사람이 예수를 만나고,인격이 변화되고,삶이 변화됐다면—우리의 낮아짐, 손해, 고난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무나도 귀한 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믿는 자로서세상에 영향력을 나타내야 합니다.

만약 그 영향력을 나타내지 않는다면,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너희는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하면서,들어가려는 자도 가로막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셨음에도,그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면,우리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들어가려는 자를 막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0절 말씀입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우리를 영접하는 사람은,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동격의 사명자로 부르셨습니다.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하나님의 도구로,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신 거예요.

이 말은,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까지 도달한다는 게 아니라—하나님의 마음을 닮았다는 것,하나님의 생각을 품게 되었다는 것,하나님의 행동을 본받는 자로 부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한 영혼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그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입니다.

누가복음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의 말을 듣는 자는 나의 말을 듣는 자요,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나를 저버리는 자요,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통해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우리를 통해,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 한마디,우리의 행동 하나하나하나님의 메시지가 된다는 것—이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창세기에도 이와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창세기 12장 1~3절,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

아멘.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복의 통로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항상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 직접 축복하십시오.여러분의 가정을 위해 여러분이 기도하고 축복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목사님만 부르지 마시고,“목사님, 오셔서 축복해 주세요.”만 하지 마시고,여러분 스스로 기도하십시오.여러분에게도 동일한 축복권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정을 위해 기도하시고,자녀들을 위해 축복하시고,대부분의 성도들이 손주들, 손녀들을 데리고 계시는데—그 손주, 손녀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시고,그들을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다.”“너는 잘될 것이다.”“하나님이 너의 힘이시다.”“하나님께서 너와 함께하신다.”

이런 믿음의 고백이 담긴 기도를자녀들에게 자꾸 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축복권입니다.이 축복의 권리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우리가 그 축복을 사용하지 않는다면그 축복은 멈추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누차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처럼,한 가정에 기도하는 한 사람이 살아 있으면그 가정은 살 것입니다.

한 사람이 그 가정을 위해 깨어 기도할 때,그 가정은 살아납니다.

왜냐하면, 그 가정을 위해 축복하고,그 가정을 위해 기도하며,그 가정이 하나님을 붙들 수 있도록 중보하기 때문에,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인도하시고,축복하시는 가정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나라들 사이에도 보면,서로 외교 관계가 있으면 ‘대사’를 파견하죠.

고린도서에도 보면,우리를 ‘그리스도의 대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사란 어떤 존재입니까?자기 나라를 대신해서,타국에 나아가 공식적인 입장을 전하고,항의를 하거나 소통하는 사람입니다.

그 나라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그 나라의 대사를 불러 항의하는 것,그건 곧 그 나라 전체에 항의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지만 대사가 본국의 뜻을 마음대로 바꾸거나,왜곡해서 전달한다면그 사람은 대사의 자격을 잃게 됩니다.

마찬가지로,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대사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너희가 말하는 말이 곧 내가 하는 말이다.”

이 말씀처럼,우리가 전하는 말과 기도와 중보하나님의 뜻을 대신하여 행하는 사명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을 향해축복하고,깨어 기도하며,회복을 위해 중보하는 그 행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대행하는 대사의 역할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에게,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동격의 은혜를 주시겠다고 주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아멘.

갈라디아서 4장을 보면,사도 바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바울은 지병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어떤 사람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강한 빛 때문에 시력을 잃었다고 하기도 하고,어떤 사람은 간질과 같은 질병이 있었다고도 말합니다.

성경은 그 질환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지 않지만,그것이 바울에게 큰 약점이자 걸림돌이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사람들은 바울을 영접할 때,그의 연약함을 보고 영접한 것이 아니라—그가 전하는 복음을 보고,그가 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영접했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렇습니다.우리는 연약합니다.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의 말에서 예수가 나타나고,우리의 행동에서 예수의 행동이 나타난다면—우리는 하나님의 천사처럼,그리스도 예수처럼 귀하게 여김받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본문 4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선지자는 누구입니까?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세상에 외치는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기득권층의 눈엣가시였습니다.

왕궁에 들어가도 스스럼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죄악과 잘못을 지적하며,심판을 선포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선지자를 미워하고 죽이려 했지만,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선지자 자체가 아니라—선지자가 전하는 말씀, 그 메시지입니다.

그 말씀에 귀 기울이고,그 말씀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찾는 자는,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상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와 같이,우리의 외형이나 조건이 아니라,우리를 통해 전해지는 복음이 귀하기 때문에,우리가 귀한 자로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곧 우리 모두에게 주신 사명이자 위로입니다.


실질적으로 선지자의 그 놀라운 축복을 받은 여인이 있죠.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엘리야가 등장을 하게 되는데, 엘리야가 그릿 시내가에 시냇물을 마시면서, 또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떡을 먹으면서 지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땅에 3년 반 동안 감염이 들자, 그릿 시내가에 시냇물이 말랐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굶주리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지시를 하셔서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라, 그리고 먹을 것을 구해라 하셨죠.

그래서 사르밧 과부에게 갔더니, 사르밧 과부가 어땠습니까? 가는 가루 하나 가지고 떡을 만들어서 내가 먹고 내 자녀가 먹고, 이게 떨어지면 우리가 죽으려 한다고 생각하던 그때에 엘리야 선지자가 온 겁니다.

음, 왜 하나님께서 부유한 사람에게 보내지 않고, 가난한 여인에게 보냈을까? 라는 것은 우리의 캐션이지만, 그러나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임하였고, 그렇게 구하라고 했기 때문에 엘리야는 그렇게 여인에게 구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주저함 없이 자기가 먹고 자기 아들이 먹고 죽을 음식엘리야에게 먼저 먹게 합니다. 그러자 기적과 같은 일이, 가루통에 가루가 마르지 아니하고,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아니한 놀라운 축복을 이 여인이 받게 됩니다.

이게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대접했더니, 우리에게 이 땅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임을 우리가 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여인은 가뭄이 그치기까지, 가루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아니하였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선지자들은 기득권층을 향하여 외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기득권층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이 귀에 들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이 사르밧 여인처럼 귀한 선지자의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되죠.

그다음에 두 번째로 뭐라고 얘기했냐면, 의인의 예를 들어서 지금 이야기를 하는데,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다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의인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아십니까? 여러분들 소돔과 고모라의 성을 기억할 겁니다. 의인 열 명이 없어서 그 성이 멸망당했죠. 지금 이 세상이 잘 굴러가는 것은 여러분들 같은 의인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멸망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된 부분을 감춰주셔요. 우리는 자꾸 그 잘못된 부분을 끄집어내려 하지만, 하나님은 감춰주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너는 의인이다” 하고 감추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우리는 표현하죠.

그것처럼 의인 한 사람소돔과 고모라 성에는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였던 겁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서에서도, 의인 한 사람의 무게가 예루살렘의 모든 죄악의 무게보다 더 무겁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니까 의인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존재인가! 그렇게 우리를 하나님의 의인된 자로 부르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말이 귀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귀중한 존재라는 것이죠.

의인을 영접하는 자,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42절을 보시면,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예를 들고 있습니다.“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작은 자에게, 제자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그 사람에게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작은 자’라는 표현에 주목해 보십시오. 여기에는 ‘너희가’라는 표현을 쓰면서, 선지자의 이름으로, 의인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이 세상에 보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우리들을 성경 42절에서는 ‘작은 자’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보낼 때, 큰 자로, 당당한 자로, 부자의 모습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작은 자의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게 하신다는 겁니다.

‘작은 자’라는 의미는 부족한 자, 병든 몸 그대로, 불편한 몸 그대로, 무언가를 쌓지 못한 연약함 그대로, 그 모습 그대로 세상에 보내신다는 것이죠.

이렇게 작은 자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보내신다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 속에 감추어진 그리스도 예수를 발견하게 하려는 것이죠. 아멘.

여러분, 만약 우리가 큰 자로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면, 우리 안에 감춰진 그리스도 예수를 보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모습만 나타났을 겁니다.

그래서 작은 자, 연약한 자, 소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소자된 모습, 우리의 작은 자 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는 겁니다.“도대체 저 사람은 뭐냐? 저런 환난 가운데서도 왜 저 사람은 웃지?”“저 어려움 속에서도 왜 저 사람은 즐거워하는 거야?”“왜 저렇게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일을 만났는데 저 사람은 뭐가 그렇게 평안한 거야?”

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것이죠.이게 바로 작은 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아갔을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눈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감춰져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캐내려고 하고,세상 사람들은 우리 속에 감춰져 있는 것들을 알려고 노력한다는 것이죠.이런 모습으로 주님은 우리를 보내신 겁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그런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까?

내가 줄였을 때, 너희들은 물, 냉수를 가져오고,내가 옥에 갇혔을 때 너희들이 찾아와서 나를 영접하고 위로하였다.

그리고 나서 25장 40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죠: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이처럼 ‘소자’, ‘작은 자’의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내가 굶주렸을 때 너희는 외면하지 않았다.내가 옥에 갇혔을 때 너희는 외면하지 않았다.내가 굶주렸을 때 너희는 먹을 것을 가져왔다.내가 옥에 갇혔을 때 너희는 나를 돌보았다.”

그래서 40절의 표현이 바로 이겁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죠.

그래서 성도들은 복음을 전할 때,넉넉한 자, 풍성한 자, 부자의 모습으로 보내지 않았다는 겁니다.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들이 소중하지 않고,하나님의 것들이 귀중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귀중한 것을 아는 사람이기에,세상으로 보내시는 이유가 ‘작은 자’로 보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죠.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린도후서 4장 7절~12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아니하며,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보십시오.우리 같은 깨지기 쉬운 질그릇 안에,하나님께서 보배를 담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같이 작은 자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나타나고자그 보화가 감추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에 나아갈 때,우리는 감춰져 있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포장을 뜯어야 합니다.

즉, 질그릇에 감춰져 있는 보화,우리가 깨져야만 그리스도 예수가 드러나는 겁니다.

제가 지난주에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것처럼,알래스카에서 말씀 사경회를 하면서 참 눈에 띄었던 두 가정이 있습니다.

한 가정은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던 장로님의 아내였어요.그분은 정말 천사 같은 모습으로, 생글생글 웃으시며,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찬양하는 모습을 보였어요.여러분들, 예배하는 가운데 그런 모습들 보이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저도 처음엔 정상인 줄 알았습니다.그런데 알고 보니 이 분, 수잔 집사님처럼 어려운 과거를 지닌 분이었습니다.

수잔 집사님도 어렸을 때 약물로 인해 몸이 상하고,한쪽 눈이 보이지 않고 다른 눈도 겨우 보이는 상태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볼 때마다 기쁘고 즐거워 보입니다.우리 같으면 불편하고 답답하고 슬플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한 번은 식사 시간에 물어봤습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우십니까?

그랬더니 이제 쭉 이야기를 하시는데...

실은 제가 한쪽 눈을 실명했고,다른 눈은 20%밖에 보이지 않습니다.이게 선천적인 병이라 유전이 되고,아들과 딸도 같은 증상이 나타났습니다.세 아이 중 두 아이가 이런 증상이 있습니다.

엄마 된 입장으로서 얼마나 속이 타겠습니까?

사고로 인한 고난이라면 받아들이기 쉬웠겠지만,유전으로 인해 자녀에게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너무 마음이 아프고, 죄책감이 든다고 하셨어요.

내가 잘못한 것 같아서 아이들한테 너무 미안합니다.

그런데도 그분의 찬양은 변함이 없고, 그 얼굴은 평안합니다.찬양이 끝나면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 오시고, 가시는 모습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두 눈이 멀쩡해 보였는데, 알고 보니 그런 상황이셨던 거예요.

또 한 분은, 마지막 날 공항으로 가기 전,비행기 시간이 네 시였나, 두 시였나,굳이 가게로 와서 햄버거를 먹고 가라고 권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이미 리타이어(은퇴)하신 분들로 돈을 벌 필요도 없는데,햄버거 가게를 운영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습니다.

동네 홈리스들을 특정 요일에 가게 안으로 다 들여보내햄버거를 만들어 먹인다”는 거예요.

그게 즐거움이고, 기쁨이라고 하셨습니다.그날은 일반 손님은 받지 않고, 홈리스들만 초대하여 앉혀서 먹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음식 싸서 건네주는 게 아니라,가게 안으로 들여서 직접 대접하는 일입니다.그 자리에서 앉혀서 먹이는 것,그분에게는 너무나 귀하고 즐거운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죠:

권사님, 여기까지 오셨으니 기도 제목이 있으시면우리가 기도해드리겠습니다.

그랬더니 말씀하셨습니다:

자녀가 세 명 있는데, 큰 아이만 괜찮고 두 아이는 자폐입니다.

다 컸대요.고등학교를 졸업했대요.우리가 생각할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일이죠, 그죠?그리고 또 우리의 표정에서 어떻게 기쁜 표정이 나오겠습니까?

그런데 전혀.이 두 분은 아주 특이한 권사님들이셨습니다.가정이 편안해서도 아니고, 장사가 잘돼서도 아닌데,그런데도 기쁨과 평안을 얼굴에 가득 담고 계셨어요.

이분들은 육신의 상처도 있었고,마음의 깊은 아픔도 있었던 분들입니다.

이제 다음 주에 미랄 목사님이 오셔서미랄 사역에 대해 설명하실 텐데,그분이 섬기는 것도 바로 이런 고통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보듬는 사역입니다.

두 아이가 자폐를 가졌다고 얘기하시는 순간,우리는 오히려 질문이 생겼습니다:

이분은 뭐지? 왜 이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살지?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우리 안에 있는 깨지기 쉬운 질그릇,그 질그릇 안에 그리스도 예수라는 보배를 집어넣으셨다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우리를 건강하고 성공한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는 게 아니라,가난하고, 깨지기 쉽고, 연약하고, 병든 모습으로,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겠다는 겁니다.

왜요?우리가 세상에 보냈을 때 불평하고 원망해서 영향력을 끼치라는 게 아니라,연약하지만, 부족하지만,그 부족함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거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 이렇게 묻는 겁니다:

쟤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쟤가 믿는 종교는 뭐길래?쟤가 믿는 예수는 도대체 뭐길래?저런 불행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나?

이것을 주님께서 원하셔서,우리를 작은 자로, 세상 한복판에 보내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1절, 12절,아까 읽었던 그 말씀처럼 이렇게 되어 있죠: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내게 하려 함이라.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귀한 생명,주께서 우리 안에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이 세상 가운데 드러나야 되는 것입니다.감추는 것이 아니라, 깨뜨려야 합니다.

포장지를 뜯으면 안에 귀한 선물이 나오듯이,우리의 연약함이 뜯겨져 나가야,그 속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여러분 안에 있는 귀한 생명, 그리스도 예수를 드러내는 복된 한 주 되시기를 바랍니다.감추지 마시고, 포장 뜯으시고,질그릇이 깨어져서 보배 되신 예수님이 흘러나오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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