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0:1~15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
- seattleomc
- May 15
- 12 min read
어제 밀알 선교회 봉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다녔던 교회는 매주 월요일마다 권사님들께서 순번을 짜서 옆 마을로 봉사를 갑니다. 우리는 지체 부자유자들이 있어서, 가서 목욕을 시키는 일을 합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아이들을 연세 드신 권사님들이 씻긴다는 것은 보통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주 권사님들이 순번을 정해 그곳에 사역하러 가는 모습을 보고, 저는 큰 감동과 감명을 받았습니다.
어제도 밀알 선교회 아이들이 왔습니다. 사실, 그 아이들은 지체가 불편한 아이들이지 않습니까? 외형적으로는 성인처럼 보이지만, 대부분 지능은 일곱 살 정도 수준입니다. 그런 아이들과 함께 봉사하시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며, 참으로 뿌듯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런 봉사를 하는 것이 이름을 내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여러분이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여러분에게 주어진 귀한 시간을 내어 봉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구경도 좀 하셨지요? 저희 집 차는 한 번 움직이면 어디로 가는지 제 손바닥 안에 다 있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돌아와야 할 시간이었는데, 안 돌아오더라고요. 그래서 지도를 켜보니, 벚꽃을 구경하고 계시더라고요.
벚꽃 구경만 하고 바로 돌아올 줄 알았더니,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겁니다. ‘웬일이지?’ 하고 보니, 팥빙수집으로 가고 계시더라고요. 여러분들, 봉사도 하시고 꽃도 구경하시고, 시원한 빙수까지 드시고 오셔서 정말 부러웠습니다.
저도 한 그릇 두고 먹을까 하다가, ‘이거 녹을까 봐 빨리 먹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조금 깁니다. 1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인데,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중요한 말씀들입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12제자들이 불림을 받고, 12명의 사도들의 이름이 나열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사도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떼어놓고 살펴보는 것도 우리에게 중요하지만, 주님께서 이들을 왜 부르셨는가, 왜 제자로 삼으셨는가, 왜 보내셨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중요한 구절 몇 가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1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12제자를 부르셨다는 말은,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한 ‘전도의 목적’으로 부르셨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에는 2절을 우리가 묵상하지 않았지만, 자세히 보면 ‘제자’라는 단어와 함께 ‘사도’라는 단어도 등장합니다.
‘사도’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서 이 부분에만 등장하는 특별한 단어입니다.
‘제자’라는 말은 배우는 사람,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절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자신을 절제하고 배우며 따르는 사람을 ‘제자’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배우는 사람의 특징이 뭡니까? 배운 것을 간직하는 거죠.
그래서 ‘배운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가르친 선생님의 말씀을 내가 간직하는 것, 갖는 것, 그것이 제자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는 사명자이며, ‘파송받은 자’라는 뜻을 가집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셔서 제자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그 복음을 들고 사명자로서, 전파하는 자로서 나아가는 사람이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제자’와 ‘사도’는 분명히 다른 개념입니다.
지금은 사도가 없느냐? 없습니다.
사도란 예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도들에게도 제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속사도’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직접 말씀을 가르치셨고, 그 말씀을 직접 들은 사도들에게 배운 자들—속사도들이 있었습니다.
속사도의 제자들, 그 아래 세대는 뭐라고 부를까요? 바로 ‘교부들’입니다.
교부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은 받지 못했지만, 사도와 속사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이런 명칭 하나하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점은 예수님의 말씀이 한 세대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다시 말해 그 명령은 사도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고, 그 제자들에게, 또 그 제자들에게 계속 이어져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흘러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멈추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받은 말씀, 누린 은혜, 주어진 구원의 축복을 주변 사람들에게 흘려보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천국만 약속하시고 끝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예수를 믿었으니 복을 받는 사람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복’을 물질적인 복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 속에서 주님께서 왜 우리를 부르셨는지를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내시며 권능을 주셨다고 나옵니다.
이 권능은 능력이라는 말과 바꿔 쓸 수 있습니다.
원어적으로 보면, 여기서 ‘다이나마이트(dynamite)’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다이나마이트 하면, 작은 한 조각이 엄청난 폭발력을 가집니다. 바위도 뚫을 수 있죠.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능이 단순한 ‘힘’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필요한 사명자의 능력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능력은 제자들을 통해 시작되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능력을 주신 이유는 단순히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권능, 곧 능력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잘못된 것을 되돌리는 데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되돌린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귀신이 들려 말을 못 하던 벙어리를 우리가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셨고, 그 벙어리가 입을 열어 말을 하게 된 장면을 성경에서 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벙어리 상태 자체가 잘못된 것이고, 그것을 예수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고쳐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는 의미가 더 큽니다.
우리가 권능을 받아서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죽은 자가 벌떡 일어나는 그런 기적을 행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할 때 잘못된 생각과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을 바른 길로 되돌리도록 하기 위한 권능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열차가 탈선을 하면 스스로 다시 레일로 올라올 수 없습니다. 반드시 외부적인 힘이 작용해야 레일 위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을 돌이키기 위해서 이 권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구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이 떠나가며 말을 못 하던 벙어리가 낫게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지요. 주님께서 행하신 그 권능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 자신의 의지, 자신의 노력만으로 잘못된 길에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외부적인 충격을 받아야만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이 믿든지 안 믿든지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복음을 전했을 때, 그 사람이 즉시 믿고 주님을 영접한다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쁘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경우는 참 드뭅니다. 전도받은 사람이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 꿇고 영접기도를 하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권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맨정신으로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샤이하다”, “내성적이다”라고 말하며 낯선 사람 앞에서는 말도 잘 못 꺼냅니다.
그런 성격의 사람이 전도를 하러 낯선 사람 앞에 서서 복음을 전한다는 건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부터 권능을 받는 일이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주신 힘이라면, 못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셨다는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나아가서 그들의 잘못된 길을 되돌리라는 의미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보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보내신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미 묵상했던 마태복음 9장 35절에 나옵니다.
한번 다시 볼까요?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들을 고치시니라.”
이 말씀을 다시 보면, 천국 복음을 증거하는 일, 병자를 고치고, 앉은 자를 일으키는 이 사역을 제자들과 함께하기 위해 부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그 사명을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증거하라는 말씀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신자된 자의 책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도로 불러 주셨는데, 그 성도에게 주어진 책임은 바로 세상 속으로 보냄 받은 자로서의 책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사도로 임명하시고, 세상으로 보내셨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도, 우리 또한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명을 함께 지닌 것입니다.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선교사님들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직접 선교지로 나아갈 수도 있고,
또 어떤 분은 교회에서 선교 집회에 참석했다가,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 한 분이 아프리카로 가는 선교사 파송 집회에서 자신이 선교사로 헌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란 거죠.
"제가 가서 할 일이 있습니까?" 그 할머니가 선교사를 자원하면서 선교사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교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든지 있습니다. 선교사님들 밥을 지어주는 일도 할 수 있고, 힘들고 어려운 일, 말 더듬는 아이들을 돕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분은 실제로 아프리카로 선교사로 자원하여 가셨습니다.
그 캠프의 리더는 케냐에서 사역하시는 이용남 선교사님이셨습니다.
이분도 원래는 목회하시던 분이었는데, 엘레스 사역을 하시다가 목회를 그만두고 선교사로 헌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 성도, 연세가 많으셨지만 “나는 선교사님을 뒤에서 돕는 사람으로 가겠다”라고 하시며 자신의 생을 내려놓고 선교지로 가신 겁니다.
이처럼 다양한 분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 속으로 보내셨다고 하실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 또한 선교사의 삶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세상 속에 있음으로 인해
세상의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들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알게 되는 삶,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선교사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세상 속에서 몇십 년을 살아가더라도,
나로 인해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목적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분이 계심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가정이 살아나는 것, 아시죠? 아멘.
여러분의 기도로 말미암아 교회가 살아나는 것, 아시죠? 아멘.
여러분 한 분이 계심으로 지역 사회가 살아나는 것,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생각해 봅시다.
그곳은 하나님을 아는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당했습니다.
그러나 벨뷰는 멸망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의인이신 여러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건 웃을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한 명의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심판을 유보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자들이기에,
우리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 일을 하도록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를 이야기할 때,
“믿는 자는 죽으면 천국, 믿지 않는 자는 죽으면 지옥” 이 생각에만 집중하다 보면,
믿는 자로서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자주 간과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믿었으니까, 열심히 신앙생활했으니까,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식의 신앙생활,
그건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복은 이미 받은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과 17절,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들이 받은 복이 무엇입니까?
죄와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과 영생의 자리로 옮겨졌다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채택되며, 즉각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소원과 간구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인하는 기도 생활이 이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일차적으로 우리가 받은 복은,
예수를 믿음으로 죄와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과 영생의 자리로 옮겨졌다는 것,
그 복입니다.
이 복을 나누라고, 7절과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거저 받으셨습니까?
그것을 알아야 나눌 수 있습니다.
그걸 모르면 나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것이 무엇인가?”
이걸 깨달아야,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고,
거저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권세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뭔가 대단한 일을 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완벽해서, 윤리적으로 정결해서 이 복을 받은 게 아닙니다.
아무 조건 없이, 값 없이, 은혜로,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의 은혜를 거저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값싼 은혜라 여기면 안 됩니다.
이 거저받은 구원의 은혜는 너무나 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금이나 은으로도, 어떤 부로도 살 수 없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입니다.
이걸 우리가 깨달았다면,
그 복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서 7절에서 **“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귀한 것을 들고 가라.”
가서 무엇을 전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 세례 요한이 선포했지요.
그 증거로, 눈먼 자가 눈을 뜨고, 병든 자가 나으며,
앉은 자가 일어나고, 귀신 들린 자가 자유케 되고,
문둥병자가 깨끗해졌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그 모든 일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말합니다.
"이 예수님이 바로, 구약 때부터 우리가 기다렸던 메시아다!"
그 메시아가 오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고,
그 말은 동시에 심판의 날도 가까이 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노아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심판의 날은 예고 없이 다가옵니다.
“노아야, 정말 이 땅에 죄가 가득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좋지 않기 때문에 내가 홍수로 이 땅을 다 쓸어버리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며 노아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산 꼭대기로 올라가 방주를 지어라.”
자그마치 120년 동안 노아는 방주를 짓습니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산 위에 방주를 짓겠습니까?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길게는 1~2년 정도는 참고 지을 수 있겠지만,
무려 120년 동안 노아는 뚝딱뚝딱 산에서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120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노아는 다가올 심판의 날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방주 밖에서 “우리를 들여보내 달라”며 아우성쳤지만,
그 문은 하나님께서 닫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했죠.
그렇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라고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고, 심판의 때가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권능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라. 병든 자를 고쳐라.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라.”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누리게 된 은혜와 축복,
이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셨고, 그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8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병든 자를 고쳐라. 죽은 자를 살려라.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라.
주님께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들을,
이제는 제자들이 권능을 받아서 동일하게 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권능은 거저 주어진 것입니다.
제자들이 말만 하면 눈먼 자가 눈을 뜨는 놀라운 일들,
이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것이었습니다.
거저 받았다는 의미는, 이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것을 나누는 도구, 통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라 말합니다.
아브라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알게 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죠: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네 자손이 많아질 것이다.”
그 의미는,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함께 누릴 사람들이 수없이 많아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복을
우리에게도 흘려보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시고,
세상 끝까지 이 복을 나누게 하려는 하나님의 명령이
이 말씀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왜 주님께 책망을 받았을까요?
그들도 먼저 천국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려는 자들의 길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성숙하다는 것은 단순히 하늘의 복만 받은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를 드러내는 자라는 뜻입니다.
신앙의 열매가 맺히고,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의 향기가 퍼져나가는 사람,
그들을 성숙한 성도라 부릅니다.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 머물라.”
여기서 **“합당한 자”**란, 헬라어 원어로 보면 **“헌신된 자”**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나아가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이미 헌신된 자를 준비해 두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전에 제가 청소년들을 데리고 농촌 전도 수련회에 간 적이 있습니다.
한 청년은 개를 정말 잘 다루는 친구였고,
다른 청년은 개에게 허벅지를 물린 경험이 있었어요.
이 둘이 팀을 이루어 전도를 하게 되었는데,
시골 집들은 대부분 개를 풀어 놓고 키우기 때문에 낯선 사람이 오면 짖거나 물기도 합니다.
그래서 개를 잘 다루는 친구가 개에게 온갖 아양을 떨고 주의를 끌면,
다른 친구는 그 틈을 타 재빨리 안방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시골집에는 평상이나 대청마루가 있잖아요?
그러니 집주인이 깜짝 놀라죠.
“누구세요?”
그때 그 청년이 허벅지 상처를 보여주며,
“예전에 개한테 물려서 개를 피해 들어왔습니다,” 하고 전도를 시작하는 겁니다.
정말 지혜로운 접근이었죠.
이처럼 하나님께 헌신된 자,
그리고 전도를 위해 지혜롭게 준비된 자를 하나님께서 붙여 주십니다.
성경은 전도를 혼자 가지 않고 짝을 지어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전도는 영적인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는 사명,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책임이 전도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준비된 사람들을 붙여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준비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건 정말 중요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에 믿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
그 한 사람이 가정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
너무나도 소중한 일입니다.
이제 곧 여러분의 손주, 손녀들이 자라게 될 텐데,
가능하면 믿는 여자에게, 믿는 남자에게 보내십시오.
왜냐하면, 최소한 나를 위해서 내 아내가 기도할 것 아닙니까? 아멘.
또 내가 믿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내 아내를 위해 기도할 것 아닙니까? 아멘.
그렇기 때문에 믿는 부모를 둔 자녀들은 정말 큰 축복 속에서 살아가는 자녀들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 가정에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를 귀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성도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그 성도가 밉게 보일 수도 있고, 나와 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려울 때, 좌절하고 넘어질 때,
그 성도는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완성된 공간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지어져 가는 불완전한 곳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의 영적 동역자들을 교회 안에 붙여 주셨습니다.
다니엘에게도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그 친구들과 함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자녀를 위해서, 혹은 손주, 손녀를 위해서 기도하실 때,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우리 아이에게 믿음의 친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아는 친구를 붙여 주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이 자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기도 제목입니다.
또 본문에서는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이곳저곳 옮겨 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거저받은 귀한 진리를 그곳에서 전하고,
그들과 교제하며 성도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모습 없이 자꾸만 옮겨 다니는 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사도행전 16장에도 나옵니다.
바울이 마게도냐 환상을 보고 유럽 땅으로 건너가지요.
그 첫 성이 빌립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이 있는 곳이면 거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회당이 없을 경우, 유대인들은 시내가에서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꼭 “강가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은 없지만, 오랜 전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강가에서 바울은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루디아는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 되었고,
빌립보 교회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자매로 성장했습니다.
그녀를 통해 온 가족이 세례를 받는 축복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루디아의 집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조금 더 내려가면 데살로니가의 야손이 있습니다.
야손 역시 자신의 집을 열어 바울을 머물게 하고,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또 고린도에서는 가이오의 집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엘리야에게 사르밧 과부가 있었지요.
3년 6개월 동안 가뭄이 이어지던 때,
과부는 아들과 마지막 한 끼를 먹고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뻔뻔하게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음식, 나에게 먼저 가져다오.”
믿음이 없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과부는 믿음으로 그 떡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드립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지죠.
밀가루가 끊이지 않고, 기름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비가 올 때까지 그 축복은 계속되었습니다.
또 엘리사에게도 수넴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엘리사를 위해 다락방을 내어주고, 침상과 책상까지 준비해주며,
언제든지 머물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실 때,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머무르셨습니다.
그 집에서 마지막 만찬도 열렸고,
오순절 성령 강림 때 120문도가 기도하던 장소도 그곳이었습니다.
마가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성장했고,
결국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외삼촌 바나바는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를 세우는
초대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결국 바나바도 순교했습니다.
이들은 하늘에서 복을 받아 부유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거저받은 복”을 세상에 전하며, 순교의 자리에까지 나아간 사람들입니다.
저는 미국에 와서 가장 놀랐던 것 중 하나가 집집마다 게스트룸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문화죠.
아마도 성경적인 손님맞이 문화가 미국 문화 속에도 자리 잡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느 날 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제가 가르쳤던 청년 하나가 시애틀 형제 교회에서 아버지학교 강사로 왔다는 겁니다.
그 청년은 섬기는 집사님의 가정에 머물기로 되어 있었고,
그 집에서 교제하며 말씀을 나누게 된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와서 평안을 빌어주는 사람,
그 사람이 우리 집에 온다면,
그 가정이 얼마나 복된 가정입니까!
여러분의 가정을 열어 보십시오.
기도하는 사람이 들락날락하는 집,
하나님의 사람들이 쉬어가는 집,
그 자리를 통해 자녀들은 놀라운 믿음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여기서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는 말은
“그들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의미이며,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강한 표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 땅의 흙조차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방 땅을 지나 집에 돌아올 때는
발에 묻은 먼지까지 털고 들어왔습니다.
마태는 이 말씀을 통해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들도 이방인과 동일하게 여기라는 강한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지금도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하다”는 표현을 씁니다.
이 말은 죄악과 심판의 정도가 극심하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세대는 어떻습니까?
소돔과 고모라 같은 시대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녀들도 그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의 날이 가까웠다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에서도 말합니다: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라.”
하나님의 심판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도둑처럼 오기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고, 보내셨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말을 듣든 듣지 않든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휴지가 떨어져 있으면, 그냥 주우십시오.
교회 앞에 쓰레기가 널려 있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가 먼저 주우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 대신 누군가를 준비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마지막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내가 전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복음을 들을 기회를 영원히 놓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심판주로 오시는 것처럼,
우리도 세상 앞에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할 자입니다.
그러니, 전하십시오.
말로 전하시든지, 삶으로 전하시든지,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용하시고자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책임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의무입니다.
여러분이 살아 있음으로 인해,
가정이 살아나고,
교회가 살아나고,
세상이 살아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한 주간도 이 사명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