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0: 16~23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 seattleomc
- May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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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봄이 되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봄을 기다리고 또 좋아하는 이유는,감추어져 있던 것이 드러나는 생명의 신비함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겨우내 죽은 줄만 알았던 가지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것,세상이 다시 살아나는 것,그런 생명의 신비를 보며 우리는 봄을 기다리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닐까요?
연세 드신 분들이야말로 추운 겨울을 지나 따뜻한 봄이 오기에더 기대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클 것이라 생각됩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참 신비롭습니다.딱딱한 땅속에 눌려 있고, 바위 같은 큰 덩어리에 짓눌려 있어도그 틈을 뚫고 나오는 것을 보면,그 안에 있는 생명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순 모임에서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나누고 계실 텐데,거기 보면 ‘큰 믿음’과 ‘작은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또 ‘믿음’을 여러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무엇일까 하는 고민도 함께 나누실 겁니다.
그 중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믿음의 크기를 따지기 전에, 그 믿음 안에 생명이 있는가를 먼저 보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누가 큰 믿음인가, 누가 작은 믿음인가”를 따지기보다는그 믿음 안에 진짜 생명이 있는가? 살아 있는가?그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이 살아 있다면,큰 믿음이든, 작은 믿음이든, 결국 자라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주여, 큰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기보다는**“주여, 이 믿음 안에 생명이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바른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그 안에 생명이 있으면자라서 새들이 깃들 만큼 큰 나무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지금은 나타나지 않더라도, 믿음 안에 생명이 있다면 반드시 자라나게 됩니다.그러니 믿음이 작다고 낙망하지 마십시오.좌절하지 마십시오.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몸부림치십시오.작은 믿음을 그대로 두지 마십시오.믿음이 자라도록 가꾸십시오.물을 주고, 햇볕을 쬐게 하고, 필요하면 걸음도 주십시오.그렇게 우리가 받은 믿음을 성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0장 16절~23절은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이 구절은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잘 알고 있는 말씀이죠.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보내신 것은당시 시대나 이스라엘 지역에만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오늘날에도,어느 곳이든지, 누구에게든지 이 말씀이 전파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동일한 사명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하나님의 거룩하심, 다시 말해 하나님을 닮은 삶,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향기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우리는 부름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그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감으로써,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분의 살아 계심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며,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목적입니다.
여러분,선교사로 나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그러나 나가든 안 나가든 더 중요한 것은,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삶을 살아내느냐는 것입니다.이 점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로 보내심 받은 자들이 책임 있게 살아가기 위해성경은 두 가지 원리를 말합니다.
첫째는,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받은 은혜를 나누라는 것입니다.
둘째는,오늘 본문처럼“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이 두 가지 원리가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실천,이것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야 할까요?
첫 번째는 “거저받았기 때문에 거저 주는 것”으로 나타나고,두 번째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삶”으로우리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라,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16절 말씀을 보시면, 아주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우리가 이 말씀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이 말씀은 성도들이 어떤 분별력과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여기서 "뱀같이 지혜로우라"는 말은교활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냉철한 분별력, 통찰력 있는 안목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세상 속을 살아갈 때,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보이려면우리는 냉철한 안목과 판단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 한 분은 뱀 이야기만 나오면 소름이 돋는다고 하셔서가급적 뱀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만,성경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오늘은 계속 “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뱀은 왜 지혜로움의 상징인가?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뱀은 혀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어 말을 많이 하는 동물로 여겨졌습니다.그래서 그 당시에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 여겼고,그 문화적 배경에서 "지혜롭다"는 표현을 설명할 때**“뱀같이 지혜롭다”**는 표현이 나온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뱀은 사단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됩니다.하지만 여기서는 지혜로움의 대명사로 상징적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리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이는 신앙의 정결함을 의미합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이, 너희를 세상으로 보낸다."
즉,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성도들이지혜로움과 순결함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며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너희가 세상 가운데 나아갈 때,사람들이 너희를 향해 뭐라 말하겠느냐?그 말씀이 17절부터 23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 같은 현실,그 속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함”입니다.
지혜로울 때는 지혜로워야 하고,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신앙의 정결함을 지켜야 한다고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칭찬과 그리스도인의 삶
세상은 우리가 윤리적으로 살고 도덕적으로 살면 박수를 칩니다.예수를 믿지 않아도 도덕적이고 친절한 사람은 칭찬받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고 말하는 순간,세상은 우리를 오히려 핍박하고 환난 가운데로 몰아넣습니다.
왜일까요?
많은 성도들이 착각합니다.“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 세상 사람들도 나를 칭찬하지 않을까?”그런 기대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하지만 이것은 착각입니다.
예를 들면,우리는 몰몬교인들을 보며 자주 감탄하곤 합니다.“저 사람들 정말 친절하다. 이웃에게 자신의 일처럼 잘해준다.”그 모습이 너무 좋아 보여 때론 우리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친절함 속에,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삶은 다릅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의 근거는?
우리가 세상에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사는 이유는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은혜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없이는우리가 하는 선한 행동들은 결국세상에서 칭찬과 보상을 얻기 위한 행위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는 삶은더 뛰어난 윤리와 도덕을 갖춘 삶이 되며,그 때문에 오히려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게 됩니다.
“너희들만 잘났냐?”는 말이 나옵니다.왜냐하면 그렇게 살아내지 못하는 자신들의 삶에 대한 자책이폭력적인 반응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고,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세상은 열심과 노력으로 도덕적인 삶을 살고자 하지만,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과 우리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내가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면,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겠지."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바탕으로 한 삶이라면,세상은 오히려 우리를 핍박하고, 환난의 자리로 몰아갑니다.
반대로, 십자가 없이 윤리적인 삶이나 도덕적인 삶만 있다면,세상은 얼마든지 박수를 쳐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핍박을 피하기 위해,환난을 당하지 않기 위해,선한 행위를 봉사나 사회적 사업으로만 국한시키고,병원을 세우거나 학교를 세우는 등의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자신의 행위를 드러내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은 세상의 박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세상이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세상이 알아주면 기뻐합니다.심지어 신문에, 매스컴에 소개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생깁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적인, 세상적인 생각입니다.예수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는**“뱀같은 지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한 윤리나 도덕보다 더 깊고 높은 인격의 표현입니다.그 바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고,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며,우리의 온유함 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스며나는 삶,바로 그런 삶을 우리는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보상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있다
그래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성도들의 신앙의 삶은 세상에 보상이 없습니다.그러나,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상”이라는 단어에 혹시 기분이 좋을까봐,위로가 될까봐 감히 말씀드립니다.하나님의 보상이 있습니다.그러나 세상에서의 보상은 없을 수도 있다는 것,그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17~18절: 핍박 가운데 드러나는 증거
17절과 18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억울한 신문이 있을 것입니다.억울한 재판, 억울한 손해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믿음대로 살려고 할수록 손해 보게 되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경험한 내용입니다.믿음대로 살기 위해서는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약 손해 보지 않고 신앙인으로 살아간다고 한다면,우리는 아마도 진짜 신앙인으로 살고 있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여기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그 억울한 신문과 재판, 손해 가운데 하나님은 손 놓고 계시지 않다."
오히려 그 상황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며,**“이 모든 일이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도우시는 삶
즉,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우리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우리 안에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며,우리가 살아내도록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어떨 때는 "내가 스스로 살아내야지, 내가 열심히 노력해야지" 하며결단하고 애쓰지만,그 결단조차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음입니다.그리고 성령께서 도우셔서 우리가 그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시련과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진리입니다.
“하나님, 나는 늘 손해만 보고, 참아야 하고, 져줘야 하고,진실은 외면당하고, 거짓만 인정받는 이 상황 속에 방치된 것이 아닌가요?”
그런 마음이 들 때,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그 가운데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살아내는 삶을 통해,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믿음의 눈을 떠야 할 때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믿음의 눈을 뜨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아내고 있는데, 하나님은 가만히 계신 거 아닐까?”그렇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그 상황 속에서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뜨지 않으면,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현실, 고난, 핍박뿐입니다.
마치 사울 왕이 그랬습니다.그는 골리앗을 보자마자 두려움에 무너졌습니다.믿음은 온데간데없고, 두려움만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그는 소년이었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 믿음의 눈을 가졌기에거대한 골리앗조차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정복의 대상으로 보였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성도로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손해를 보고, 져주고, 억울해도,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그걸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이로부터의 핍박
21절과 22절 말씀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음에 내어주며,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무시무시한 말씀이죠.가장 가까운 사람이 대적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기대합니다.“그래도 가장 가까운 사람만큼은 나를 이해하고 응원해 주겠지.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알 테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여기서 제 아내를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도,핍박과 환난의 자리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왜일까요?
시기심, 질투 때문입니다.“나는 그렇게 살아내지 못하는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살아내는가?”이 마음이 질투로, 시기로 바뀌어,그 사람을 칭찬하고 격려하기보다는,비난하고 핍박하는 자리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는데,너는 겉보기엔 그렇게 완벽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나보다 더 신실한 삶을 사는가?”이 부러움이 결국은 미움으로 변해,핍박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 속에서 지혜롭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의 대접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그게 바로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뱀처럼 지혜롭게 살아가라.”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우리는 사소한 문제 하나로도 핍박을 받고 박해를 받습니다.그런데 그런 핍박은 때로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고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으로 인한 고난을 자주 경험합니다.이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서 받는 징계가 아닙니다.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겪게 되는 고난입니다.
다시 말해,우리가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은하나님의 채찍이나 벌이 아니라,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아라.너희가 세상에 속하였다면 세상이 너희를 사랑하였겠지만,나는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
“종이 주인보다 더 클 수 없다.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으니, 너희도 박해할 것이다.사람들이 내 말을 지켰다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그러나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행할 것은그들이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핍박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우리에게 상처 주는 사람들,그들이 하나님을 알았다면,우리를 핍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오히려 격려하고, 위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했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너희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생명이 없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경계선이다
세상은 선행, 구제, 봉사를 좋아합니다.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봉사하면 박수칩니다.그런데 “십자가”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세상은 갑자기 선을 긋습니다.
칭찬은 멈추고, 핍박이 시작됩니다.왜냐하면 십자가는 세상을 찌르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혜롭게 살아가라”고 하십니다.지혜가 있어야, 순결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의미
그렇다면,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하나님의 사람답게, 하나님의 향기를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세상이 우리를 아무리 핍박하고 환난 가운데로 몰아넣는다 해도,우리는 하나님의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믿음의 초심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당연히 우리를 핍박합니다.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미움을 받는 자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주님은,“비둘기처럼 순결함을 지키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옛 성질을 이겨내는 싸움
그런데 현실은 쉽지 않습니다.그리스도인으로서 양보하고 또 양보했는데,세상은 계속해서 깐족거리듯 공격해 옵니다.
그럴 때 어떻습니까?“옛 성질 나올 것 같아…”“나 한 가닥 했던 사람이야...”그런 말, 생각 안 드십니까?
우리가 억눌러야 하는 그 본성,그것을 눌러 이겨내는 것이비둘기처럼 순결하게 사는 삶입니다.
로마서 12장 18절~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라.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네 원수가 줄이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그리함으로 숯불을 그의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성도는 온유함으로 싸우는 사람들입니다.성도는 이기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저 사람을 은혜의 자리로 이끌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저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내어줌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모범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스데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졌습니까?스데반이 졌습니까?
아니요.그들은 하늘의 별처럼 영원히 빛나는 신앙의 본이 되었고,우리 모두가 본받고 싶어 하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랐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참 아이러니합니다.죽으면 사는 것,저주면 이기는 것,내어주면 받는 것.주님께서 그렇게 거꾸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성도의 정체성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4장 21~2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또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옛 사람을 벗어버리고,새 사람을 입으라.이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라.”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의와 거룩과 진리의 옷을 입은 새 사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세상의 도덕이나 윤리와는 다릅니다.잘못된 것을 고쳐 바르게 돌아오는 것,즉, 하나님께로 방향을 바꾸는 변화를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난 영원한 기준입니다.
남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는 것—그건 진리가 아닙니다.그건 혼란입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진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의롭고 거룩한 존재로 새롭게 지으심을 받았습니다.이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은혜입니다.
세상과의 싸움: 내어줌으로 이기라
성도는 무엇으로 세상과 싸웁니까?내어줌으로, 짐으로, 양보함으로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 싸움에는 때로 사랑,희생,절제가 필요합니다.
오늘 집에 가셔서, 혹시 부부 싸움이 나거든져보십시오. 그게 이기는 겁니다.주변 사람들과 갈등이 있다면,져보십시오. 그게 진짜 승리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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