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것이 맞습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맞습니까?"
우리의 신앙의 갈등은 악인이, 예수를 믿지않는 이들이, 심지어 하나님을 욕하고 비방하는 이들이 많은 형통을 누릴 때, 주님을 믿고 의인으로 사는 신앙인들은 힘든 일을 겪을때 생겨 나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 들여야 할까요. 오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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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 보실 때 그렇죠. 힘듬 도 주시고, 때로는 기쁨도 주시고. 오늘처럼 맑은 날도 있으면 흐린 날도 있는 것 처럼 어느것 하나 헛된 것이 없다, 라는 것입니다 .
지난 주간에 제주도에서 꿀벌이 삼억 삼천만 마리 정도가 없어 졌다고 합니다. 하루아침에 싹 없어져 버렸답니다. 이 벌들이 굉장히 날씨에 민감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이 기후가 이상 기후에 있습니까. 그래서 비가 와야하는 곳에 눈이 오기도 하고 항상 더 웠던 곳에도 눈이 내리는 이상기후를 피부적으로 느끼지 않습니까. 아마 그래서 그런지 그 벌꿀들이 한꺼번에 다 없어졌다 그래요. 그러니 꿀벌 농가들은 평생을 그 꿀벌을 키워서 자녀 학비도 내고 또 결혼 장가 다 시켰는데 하루아침에 삶의 희망이 없어졌던 거죠. 더 큰 문제는 꿀벌이 없어지므로 말미암아 우리나라 농가의 40%정도 피해를 당한다고 합니다. 이 벌이 없어지면 과수가 제대로 맺히지 않아서 우리나라 농산물이 폭등을 하는 겁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자 하냐면 어느것 하나라도 우리가 소홀히 여기는 것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다 중요한 것이고, 필요해서 곳곳에 다 배치를 시켜 놨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 삶을 한번 들여다 보면요, 우리 삶에서도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야 할 일이 안 일어 났을 때 우리는 답답한 심정을 갖죠. 특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신앙생활 하는 우리 아닙니까. 아무리 울면서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는, 아주 응답이 더딘 그런 경우를 얼마나 많이 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때, 시간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꼭 필요한 시간에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이죠. 우리는 열을 달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필요한 시간에 100을 주시기도 하시고, 우리는 100을 요구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를 주시기도 하신다는 겁니다.
오늘 시편 74편을 낭송하며, 눈으로 읽으며 느꼈던 것처럼, 악인들은 왜 이리 형통하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왜 의인이, 왜 예수를 잘 믿는 우리는 왜 이리 불행하냐는 겁니다.
우리 신앙의 갈등이 거기서 오는 겁니다. 왜 우리가 예수를 잘 믿는데 이런 힘든 일이 닥치나, 하는 생각에 우리에게 갈등이 옵니다. 또 영적인 침체가 오기도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한번 뒤 돌아 보면 한 주간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승리했다, 또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한주 간 마음 껏 누렸다, 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뭅니다. 목사도 그렇지 못합니다. 사모 한사람만 그런 것 같습니다. 하하
우리 주변에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죠. 왜 이렇게 힘든 일이 자꾸 생길까, 왜 이렇게 어렵지, 왜 나는 건강하지 못할까, 아 또 아프네... 일어나면 삭신이 쑤신다고 하죠.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는 겁니다. 근데 여기 지금 아삭이라는 사람이 이 시를 썼어요. 아삭은 다윗과 솔로몬 때에 한쪽에는 에단이 있었고, 한쪽에는 아삭이 있었고, 가운데는 해만이 있었습니다. 해만은 우리가 잘 알다싶이 사무엘 선지자의 손자이지 않습니까. 사무엘 선지자가 자식농사는 잘 못 지었죠. 잘 못 지었다고 하기는 그렇지만, 아버지가 워낙 위대한 선지자이다보니 막나니로 막 나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가족을 그대로 두지 않죠. 한 믿음의 가적에 한 사람만 기도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 가정은 산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찬 가리조 하나님께서는 그 손자를 귀하게 들어 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질때에 성전 속에서 평생을 거주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을 담당하는 그러한 직분을 감당을 합니다. 오늘 여기 아삭이라는 사람도, 동일한 사람입니다. 레위 지파의 사람인데 이 사람도 평생을 하나님 전에서 찬송으로 섬기는 그러한 사람입니다. 에단도 마찬가지고요.
여러가지 악기도 있을테고, 성가대가 찬양을 드린 그런 것도 있을겁니다. 이 아삭이라는 분은 성가대를 주로 리드했던, 지금 얘기하면 음악 디렉터, 성가 대장, 성가대 지위자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아삭이 지은 시편이 시편 150편 가운데 11편이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11편 가운데 첫번째 시 인데 이 정도의 신앙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은 우리가 겉에서 쳐다 볼때는 어떨 것 같습니까. 항상 은혜까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해서 하나님께 찬양 할 때도 정성껏 다하고 하나님께서 기뻐 하시는 찬양과 많은 백성들이 기뻐하는 찬양을 하며, 그 속에서 살 거다 라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73편을 읽어보면 상식 밖에 하나님을 하삭이 아주 실망하는 모습을 73편에 보이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할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축복을 내리셔야 하는 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자기는 날마다 쪼들리고, 힘든 일이 많다라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는 악인들은 옆에서 보니깐 너무 잘되는 거에요. 자녀들도 잘 되고, 평생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질병이나, 우리가 당하는 고통없이 그들은 평생을 평안함 가운데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더 기분나뿐게 뭐냐면 가만히 있어도 제산이 막 늘어 나는것, 저희가 그 것을 못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악인들은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그런 사람들의 제산들이 막 불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삭이 이 상황들을 바라보며 절망하고 낙망하는 그러한 전반부가 그러한 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꼭 이 아삭 뿐만 아니라 여러 인물들도 이러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에레미아 선지자도 그렇고요, 하박국 선지자도 그렇고, 또 우리가 잘 알고있는 욥을 보면 이유없이 당하는 고난들이 있더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 이유없이 당하는 고난,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하나님, 이런 모습을 아삭은 굉장히 절망 가운데서 바라봤다, 하나님 너무 모순적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하는 그런 겁니다. 여러분들은 안심하십시요. 여러분들의 신앙도, 우리의 신앙생활도 얼마든지 그럴때가 있다는 겁니다. 나뿐만이 아니라 성경의 대표적으로 위대한 인물들도 이러한 삶을 살았구나, 이런 모습을 보며 위로함을 얻는 것입니다.
1절과 2절 말씀을 보시죠.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렇게 지금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에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을 행하신다, 라는 그 의미는 뭐냐하면 완전하고 좋으신 분이다, 이런 의미 입니다. 그러니깐, 완젼하다, 좋다 라는 것의 의미가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얘기와 똑같은 얘기인데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했다, 좋았다, 라고 하는 그 단어와 똑같습니다. 그러니깐 예수를 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완전한 사람으로 나타나야 되는데 아삽이 볼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거의 넘어질 뻔 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했다, 휘청거렸다는 겁니다. 상식과 다른 하나님을 느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지금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좋으신 분이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에게는 선하신 분이다,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지금 아삽이 얘기를 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것이 맞는 것이냐, 정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맞느냐, 라는 갈등이 3절부터 14절까지 계속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사람들은 오만하고 교만하다는 겁니다. 어느정도냐 하면 하나님이 진짜냐, 하나님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그런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우리 생각은 하나님 그 사람에게 벼락이라도 내리셔서 대번에 죽게 하시고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알려주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정도 얘기를 하는데 전혀 그런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비방하고 욕해도 다 잘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깐 아삽의 문제는 이게 안 맞다는 것이죠. 우리가 생각할 때 도 그렇습니다.
4절과 5절 말씀을 보시면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다는 것은 살면서 고통이 한번도 없었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도 차라리 저렇게 평안하게 살다가 평생 고생 없이 살다 저렇게 죽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결론을 봐야겠죠. 지금 아삽이 하는 얘기가 그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악인들의 형통에 불만이 없을 수 가 없었죠. 그런데 자녀들도 잘 되요. 그리고 평생 먹을게 많아 살이 디룩디룩 찐다고 하죠. 여러분들 70년대, 60년대 중국집이나 큰 식당앞을 지나가다 보면 어떤 조각상이 있었습니까. 배가 불룩하게 나온 인물들이죠. 배사장이라고 이렇게 얘기도 했었죠. 그게 잘 먹고 평안하다는 상징이지 않았습니까. 지금이야 배가 흉이 되지만, 악인들이 그렇게 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 우리로써는 하나님 너무 불공평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 하는데 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의 10분의 1이라도 띄어 주면 우리가 더 잘 믿을 텐더 왜 그런 것도 없습니까, 라는 불만들이 나오기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삽이 그런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저 사람이 분명히 하나님으로 부터 벌을 받아야 하는데 벌도 받지않는 그런 모습에서 갈들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유없이 어려움을 주실 때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할때는 이유가 없는 고난 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깐 어떤 우리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질병이라든지 아니면 고난을 당한 다던지, 재앙을 당한 다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라고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게 싫죠. 우리는 그레 없었으면 좋겠죠. 저도 그런 것들이 여러분들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재난을 당하고 우리가 이 약해야만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붙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우리는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러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달라요. 재앙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을 부인하고 뒤 돌아서서 세상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고난과 제앙이 있다할지라도, 온다 할지라도, 원하지 않는데 찾아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러한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볼수 있고 강함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로 그런 것들을 사용한다는 거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런 고백을 하죠. 하나님께 그렇게 간절하게 내 몸에 있는 가시를 없애 달라고 기도를 했는 데 하나님께서는 바울아 내게 내가 족하다 라는 응답을 허락 하시죠. 사도 바울이 고백한게 뭐냐면, 자기 자신에 가시가 없었다면 자기는 교만해서 하나님 복음을 전하는데 그것이 오히려 더 방해가 됐을 것이다 라는 얘기를 합니다. 얘냐하면 사도바울이 건강함으로 전하는 복음과 육신에 가시가 있어 전하는 복음은 완전 질적으로 틀리다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전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온전했을 때는 봐라 내가 하나님을 잘 믿어 이렇다 라는 교만함 속에 있었다는 고백이 있었죠. 그리고 야곱을 보면 형 에서가 받아야 하는 장자의 축복권을 가로채고 그 길로 밧단아람에 있는 라반 외 삼촌 집으로 도망을 가죠. 금방 돌아올 줄 알았던거 같습니다. 일주일 안에 돌아 올 수 있으리라 생각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을 그 곳에 20년 동안 그곳에 머무르게 하십니다. 그 후 다시 아버지의 땅에 돌아 가게 되는데 가는 도중에 어떤 일이 일어 납니까. 뒤에서는 라반이, 외삼촌이 그 아들들과 함께 열이나서 죽이겠다고 쫓아오고 있고, 그리고 종들을 통해 앞으로 정찰을 보냈더니 형 에서가 20년동안 죽이겠다고 복수의 칼랄을 갈고서 300병이나 되는 군사를 이끌고 달려 온다는 소식이 들렸던 겁니다. 그러니 완전히 진퇴양난에 빠진거요. 그때 야곱이 한 모습을 보시죠. 그때 야곱은 기도의 자리에 나아 갑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이 기도늬 자리는 봐로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됬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가까히 할 수 있는 그 길이 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들에게 교훈을 하는 것은 우리들이 당하는 그런 고난, 그 것은 이유없이 당하는 것이 아니고 어떨 때는 우리의 교만함을 꺽는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연약했을 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더 알게 하기 위해서, 붙들게 하시는 그런 통로로 우리 고난을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아삭이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12절과 13절을 보시면,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지금 가만히 보니깐 이 악인들의 제물이 불어나는 겁니다. 나는 스톡을 집어 넣는데 꺼꾸로 가는데 저 악인들은 주식이 배로 뛰고 그런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황당하냐 그러는 것이죠. 그래서 뒷부분에 14절을 보면,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이 말은 내가 신앙생활 하는게 헛되는게 아닌가, 내가 하나님 믿는거, 봉사 하는 것, 이 모든것이 헛된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하게 사는게 무엇이지, 신앙생활을 하는게 무엇이지, 착하게 사는게, 봉사를 하는게 무엇이지 이런, 신앙의 절망 속으로 아삽이 빠져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아삽이 17절에 와서 뭐라고 합니까. 침묵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17절을 보시면 갑자기 이 모든 일들이 반전이 되기 시작하는데 어디에서 반전이 되는지 한번 보십시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쉬운 성경은 17절을 어떻게 번역을 했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으로 나아가서야 그들에게 무슨일이 일어날 지 깨닭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그런 장소이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꼐서 오시고 성령께서 오신 이후로는 하나님 그 충만 하심이 온 땅위에 다 충만해서 어디든지 우리가 눈을 들어, 우리 마음을 열어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만나 주시는 그런 성령 시대이지만 이 당시에는 하나님은 오직 어디에먼 계시냐면 성소에만 게셨던 하나님 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꼇다는 거죠. 지금 아삽이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무엇을 깨달았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 얘기를 하면 우리가 기도 도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내가 이 뜻을 깨달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지금 아삽이 성소에 들어가서 무엇을 보고, 깨달았나. 정말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임재 하시고 하나님께서 아삽에게 말씀하셔서 깨달은 건가, 라고 생각 하실수도 있지만, 성도에 들어가시면 어떤 행위가 일어 나면요, 날마다 산 번제를 드립니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재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위해 씻음의 형태로 항상 제사를 드립니다. 백성들이 죽어야 되는데 양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는 일들이 날마다 성전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니 아삽이 성가 대장이잖아요. 성서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에요. 아삽도 할일 이 있어서 들어 갔는데 거기서 무엇을 보게 되냐면 하나님께 드려지는 번제물,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번제를 보며 깜짝 놀랐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악한 줄로만 알았는데 제사를 들여지는 것을 보며 자신도 악하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위하여 지금 양이 죽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의 죄를 위해 양이 죽고 있는 겁니다. 백성들이 죽고, 자기 자신이 죽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피를 흘리고 있는 양을 보며 깨달은 겁니다. 아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구나. 아 저렇게 해서 내 죄 용서를 받았구나,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도 나에게 함께 하는구나.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말씀을 묵상하며 어떤 은혜를 깨달습니까. 공통적인 답변은 아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구나, 그런 답변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삽은 지금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넘어에 있는 무엇을 깨달았냐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구나, 악인들이 심판당할 그 날이 있지, 악인들이 이 땅에서 떵떵거리면서 평생 고통없이 누리고 살지만 저들은 반듯이 멸망의 심판이 있구나, 하는 사실을 성소에 들어가 깨달은 겁니다.
이 땅에서는 비록 험한 길을 가고 비록 고통을 누리고 어려움을 겪으며 살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바라보고 나서 갑자기 영적인 영안이 열려 버린 겁니다. 그러니 이 땅이 다가 아니구나 , 이 세상의 삶이 다가 아니구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구나 하는 것을 ㄲㅐ 달은 것이죠. 아삽이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8절과 19절을 보시면,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그러니깐 믿음의 시험에 들었늘때는 이 세상의 삶이 다 인줄 알았고, 이세상에서 누리는 복이 그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축복으로만 생각했던 아삽이 눈을 들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앞에 부끄러운 죄인임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피흘려 죽는 아무 죄도 없는 저 양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며 아 이땅에서의 삶이 다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아삭이 깨달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아삽이 주는 교훈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냐하면 악한 사람들이 이땅에서 잘 되는 것을 부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정말 우리가 부러워 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면 영적인 복을 주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부러워 해야 합니다. 저사람은 외 저런 고난 속에서도 기쁨이 있지, 저사람은 저런 어려움을 만났는데도 감사와 찬송을 하지? 우리는 이해할 수 가 없죠. 같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요. 그런데 우리들이 부러워해야 하는 것은 그 것이라는 겁니다. 세상에서 제산 많은 것들, 우리가 다 가지고 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 놓고 가야 할 것 들인데, 내가 그 것을 가지고 가야 하겠다고 그렇게 기를 쓰고 수고하고 노력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들이 준비하고 부러워 해야 할 것은 영적인 것을 사모하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아삽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저 들이 심판을 당하고, 멸망 당하는 것을 아삽이 본 것이죠.
그래서 아삽이 24절과 25절에서 이렇게 얘기 합니다. 드디어 찬송을 합니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라고 얘기 합니다.
그러니깐 영적인 침체에 빠졌을때에는 세상만 바라보던 아삽이 이제는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나 영안이 열리다 보니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됬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가진 사람들이 불쌍할 수 밖에 없다라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을 갖은 사람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진짜 복은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아삽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내리시는 물질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아삽에게는 복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물질도 같은 축복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 그러시지 않다라는 것이죠. 하나님만 원하느냐, 의지 하느냐, 이것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요구를 하십니다. 물론 우리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제물도, 건강하기도 하고, 자녀들에게 복을 주셔서 자녀들이 잘되기도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하나님만을 바라봅니다, 라느 ㄴ그 신앙과는 상관없는 겁니다. 이것은 사이드로 배푸시는 복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아삽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절망의 늪에서 나와 영안의 눈이 열리고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기 28절을 보시면 아삽의 결론이 나오는데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지금 아삽이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내가 신앙생활을 잘 하는게 지금 잘 하는건가, 갈들 하기도 하고, 악인들의 형통을 보고 그렇게 배가 아팠던 아삽이었지만 나중에는 아삽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는 것이 복이구나 라는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게 뭐가 도대체 복이 됩니까. 잠언 보면 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잠언 8잘 17절을 보면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찾을 때 만나주시는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떤 복을 누리면서 하나님 나라를 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래도 주식이 올랐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이십니까. 그래도 뭔가 있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 이십니까. 그래도 쓸 돈이 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 주신다. 정말 이게 큰 복인 겁니다.
아삽이 뭐라고 얘길 합니까.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겠다. 피난처가 무엇입니까. 내가 어려움을 당할때, 피할 장소라는 겁니다. 그게 어디냐면 바로 하나님 이시라는 것이죠. 내가 환란을 만날때 피할 장소도 있겠다, 하나님을 나를 사랑하시겠다, 내가 또 하나님을 부르짖으면 나를 만나 주시겠다, 이게 예수 안에 있는 복입니다.
여러분들 악인들의 형통을 놓고 배 아파 마시고, 여러분들이 마음껏 이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 대신 죽으셨지,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으면서 이것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라보며 아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지.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만나 주시는 것이지. 내가 힘들고 어려우면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거기로 피하면 되는 거지, 이게 예수 안에 있는 복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다른 복 구하지 마시고 예수 안에 있는 이 놀라운 축복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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