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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기도의 응답이 더딜 때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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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진짜로 계신 것이 맞습니까, 왜 이렇게 급한 상황에 대답이 없으십니까"

너무 힘들고 어려울때, 당장 위급한 상황이 닥칠때 찾아갈 곳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간절한 기도에 응답이 없다면 어떨까요. 오늘의 말씀입니다.

(아래 내용은 영상에 문제가 있어 재생이 불가능하시거나 설교내용을 자세히 알고자 하시는 분들을 위해 영상내용을 문자로 저장한 것으로 웹 디자이너가 영상을 들으며 타입을 치다보니 오타가 많고 띄어쓰기에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리며 고쳐야 할 부분은 이메일로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다.)



오늘부터 섬머 타임이 시작이 됩니다. 언제 시작되나 했는데 벌써 이렇게 됐습니다. 이제 제법 벚꽃도 피었고 그렇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알러지가 있으신 분들은 3월달을 아주 힘들게 지내시는데 저는 기도하니깐 되던데요. 하나님 저 알러지 있으면 기도 못합니다, 했더니 어느순간 없어졌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 목사가 강대상에서 거짓말을 하면 하나님이 바로 징계하실 거 같아 거짓말은 안 드리고, 진짜 그렇게 해서 극복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참 특이한 케이스인데 하나님께서 특이하게 응답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특이한 것이 한가지 생깁니다. 특이한 것이라는 것은 기도한다는 것이죠. 예수를 처음 믿을때에는 기도를 잘 못해도, 유창하게 다른 사람들 처럼 하지는 못해도 기도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저에게 기도 할 수 있는 여건, 자리, 이런 것들을 참 많이 허락 하신 것 같습니다. 섬기는 교회가 그렇게 크진 않았는데 대표 기도가 있지 않습니까. 주일날 대표기도는 하시는 분이 나오시니깐 큰 문제가 아닌데 이제 주일 저녁이나, 수요일 저녁이나, 저는 빠짐없이 참석했거든요. 그런데 기도하시는 분이 안 나오시면 어떻할까. 제일 지혜로운 방법이 목사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겁니다. 목사님과 눈을 딱 마추는 순간 바로 저에게 기도를 시키시는 경험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날은 준비도 안 했는데, 학교에서 거의 삼천명 되는 사람들 앞에서 갑작스럽게 기도를 시키시는 바람에, 특히 교수님의 눈과 딱 마주쳐서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에는 기도한다 하면 참 이상한 곳에서 기도를 많이 해요. 특히 산에서글 기도를 참 많이들 하는데 애꾿은 소나무 붙들고 기도하시는 분들도 있으시고, 저도 그렇게 해서 기도하면 안 풀리던 것도 다 응답이 될줄 할고 그랬고, 눈 떠보니 공동묘지 한 가운데서 기도했던 때도 있고, 밤 12시에 또 산에 가서 기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연히 무섭죠. 당연히 떨림이 있죠. 그런데 기도의 그 내용, 뭘 기도했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어디에서 했는지는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우리가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참 한심한 그런 기도를 드리고 있지않나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나는 내용을 다 잊어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기억을 하시고 응답 하셨던 적도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성도들이 기도를 하면서 한가지 뭐가 있냐면은 하나의 기도의 장애물이 있습니다. 기도의 장애물이라는 것은 무엇이냐하면 하나님, 이것 만큼은 꼭 들어 주셔야 합니다, 하고 힘껏 기도를 했는데 기도의 응답이 없을때, 우리는 낙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게 장애물이 되면서 또 다시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하는 큰 장애물이 되어서 돌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 나중에 믿음 생활이 조금더 깊어지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더 알아가면서 내가 기도 했을때와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가 있구나, 하면서 하나님이 언제 내려주시 던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그런 적은 많이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막 믿기 시작했을때, 우리가 나아가도 기도 했을 때, 응답이 없을 때 우리가 낙심하게 되고, 그래서 기도의 능력 또 기도의 은혜, 이런것들을 체험하지 못하며 지내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기도를 가르켜서 우리는 눈물로 씨앗을 뿌린다 하는 비유를 많이 합니다. 기도는 씨앗이다, 라는 이야기를 참 많이 합니다. 여러분들 씨앗들을 한번 보십시요. 그게 5년이 되어도, 10년이 되어도, 아주 오래된 씨앗들도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뿌리면 납니다. 신비한 생명의 신비인데 기도를 씨앗에 비유를 했다는 것은 그가 눈물로 씨앗을 뿌렸을때 하나님께서 반듯이 응답하신다는 것이죠.

우리는 잊어버립니다. 어떤 기도를 했는지 기도의 내용 조차도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헛되이 듣지를 않으시고 반듯이 우리가 필요할 때에 다시 응답하시는 그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여기 시편 74편은 어떤 내용으로 되어 있냐면, 기도의 좌절에 빠져 있는 사람이 탄식하는 그러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 아삽이라고 적혀 있는데, 아삽은 다윗 다음으로 많은 시를 기록을 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삽은 어떤 별명이 있냐면, 선견자, 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선견자라는 명칭은 선진자와 비슷한 내용인데, 하나님 편에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그러한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깐 아삽이 시적인 능력이 있어서, 문학적인 능력이 띄어나 시를 잘 지었기에 시를 많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를 할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말씀 하시고자 하는 내용이 있기에 하나님이 아삽을 통해 시적으로 표현된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삽을 가르켜 선견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표절을 보면 마스길 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마스길은 제가 여러번 말씀 드렸지만 교훈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깐 74편 가운데 우리가 발견 해야 할 교훈이 있고, 아삽이 이 시를 통해 우리에게 던지고자 하는 메세지가 있다는 것이죠.

그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아무리 크나큰 고난에 직면 하더라도,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기억 하라는 겁니다. 나에게 언약하신 그 하나님의 언약을, 약속을 기억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언약의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신례할때는 환경이 변화하지 않더라도 낙심 가운데 빠지지 않는다라는게 74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 시가 언제 쓰여 졌는지 배경이 조금 궁금합니다. 아삽은 어느 시대의 사람이냐하면 다윗가 솔로몬 시절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예루살램 성전이 무너지는 그러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7절 말씀을 보시면 "7절: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지금 앗수루는 이미 북쪽 이스라엘을 멸망 시켰고 남쪽 유다만 달랑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바벨론에서 처 들어와서 이스라엘을 포위하고 또 예루살렘 성을 멸망 시키고 무너 뜨리고 그 안에 있는 성전을 무너뜨리는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이 잘 보면 예루살렘 성이 역사적으로 세번 파괴 됩니다. 그런데 아삽이 살던 시대는 아까 말씀드린데로 다윗과 솔로몬 시절이기에 이때는 성전이 파괴 되는 적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한참 지나고 나서 성전이 파괴되는데 첫번째는 바벨론 시대에 파괴되고, 두번째는 헬라 시대 때 세번째는 로마 시대 때, 그러니까 70년도에 성전이 파괴됩니다. 지금 이스라엘에 가보면 예루살렘에 통곡의 벽이라는 곳이 있죠. 성전의 서쪽 부분입니다. 그것도 서쪽 부분도 원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점령했던 그 지역입니다. 그런데 중동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에서 승리를 한 이스라엘이 제일먼저 차지한 지역이 지금 통곡의 벽이 있는 곳이 있는 그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70년도에 로마가 성전을 차지하고 무너뜨리면서 한쪽 벽만 남겨 놨습니다. 그것을 교훈으로 삼아 옛날 웅전했던 성전을 우리가 다 부서뜨렸다, 라는 것을 알게하기 위해 그 한쪽 벽만 남겨 놓은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은 모든 남자들이 그 벽에서 통곡을 하며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조그만하게 돌돌 휴지같은 것을 말아 기도제목을 벽 틈에 집어 넣습니다. 그러면 기도가 응답되어진다는 전설아닌 전설이 있어 그 통곡의 벽에서 기도를 하고 유대인들은 특히 옛날 다윗의 영광을 획복시켜 주십시요, 그런 내용들로 그 통곡의 벽에서 기도를 합니다.

이처럼 성전 파괴는 후일에 되어지는 데 위에 보면 아삽의 시라 기록을 한걸 보면 후일, 아삽의 자손들이 나중에 포로로 끌려 갔을 때 이러한 모습을 보고 시로 기록을 하고, 자신들의 조상, 가장 대표적인 이름, 아삽의 이름을 넣어 아삽의 시가 되지 않았나, 라고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간에 73편을 봤는데 73편의 내용은 개인적인 통곡, 개인적인 기도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74편의 내용은 민족적인 기도, 공동체 적인, 국가적인 기도로 조금 선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개인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또 원망의 자리에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모습과 74편은 한 국가가 외부세력으로 부터 침략을 당해서 멸망을 당할 때 그것을 어떻게 이겨내는 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죠.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 여기서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하며 기도를 하고 있는데 지금 상황이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쳐들어 와서 성전을 무너뜨릴려고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다보니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 성전이라는 계념은 그 성전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 성전에서 하나님이 임제 하시고, 만나 주시기로 약속 했기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그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역사적인 기록에 의해서 아 성전이 3번이나 무너 졌었구나, 라구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당시 백성들이 바라볼때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상상 할 수 도 없는 것이죠.

그것도 성민, 하나님이 택하신 민족들, 유대민족들에게 있어서 그 성전은 그 만큼 중요한 의미였었는데 그것이 무너졌다, 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지 않는가 라는 의문속으로 빠져 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깐, 하나님께서 만유에게 주시고, 만유를 창조하시고, 만유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계신곳이 무너진다, 이것은 신앙생활에도 큰 타격이고 상상할 수 없는 그러한 내용들로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십니까, 라고 얘기한 것을 보면 이 기간이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전혀 회복되기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성전이 파괴되었다, 라는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열왕기서에서 보면 이 기간이 어느정도였나 보면 이 기간이 3년동안 바벨론이 포유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보면 히스기야 터널이 있는데 성에서 부터 물을 구하기 위해 암반을 뚤어 터널을 만들어 물을 구하는 그 모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여러분들이 유럽 여행이나 영국을 가시게 되시면 영국에 대형 박물관이 있습니다. 입장료는 공짜입니다. 거기에서 아시리아 관을 여러분들이 들릴 기회가 있으시면 꼭 한번 들려 보십시요. 거기에 가시면 입구에 통역기도 준비되어 있는데 그림 별, 조각 별, 이런 예술품들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 해 줍니다. 저도 한번 들렀던 적이 있는데 이 당시에 예루살렘이 파괴되는 그 장면을 그대로 벽화로 세밀하게 그려나서 바벨론으로 다 가져 간 것을 영국 사람들이 도로 다 훔쳐다가 거기다가 진열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보시면 느부갓네살 왕의 모습도 보이고 이스라엘 민족들이 처참하게 무릎을 꿇는 모습도 있고, 성전이 무너질 때 눈물의 골짜기, 뒤로 도망가는 그림도 있고, 실제적인 상황이 그려진 그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3년동안 예루살렘성을 포위를 하고 있었는데, 이 기간이 길어지쟈 시편 기자가 뭐라 하면은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단기간 동안 끝난것 아니고 마치 여호와께서 우리를 영원히 버리신 것 처럼 성전이 파괴되고 있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정말 자신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던 그 하나님이 계신곳이 무너지자 완전히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죠. 이때는 식량까지도 고갈이 됐는데 하물면 이 기록을 보면 심지어 자식까지도 잡아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때 드리는 기도는 얼마나 간절 했겠습니까. 사람이 사람도 먹지 못하는데 자기 사랑하는 자식을 잡아 먹었다는 것은 얼마나 극심한 고통가운데 있다는, 완전 하나님께서 정말 버리시지 않았다면 일어날래야 일어날 수 없는 그 상황이 지금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깐 하나님께 향하여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해 잊으 셨나이까, 버리셨나이까 하고, 얼마나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 지 볼 수 있습니다.

9절을 보시면, 특히 이 시를 기록한 분을 힘들게 하는 장면이 있는데, "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더 이상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지금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표적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표적이 없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를 통해서 세상을 멸망시킬 때에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보여 주시며 표적을 삼죠. 두번다시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 라는 그러한 내용으로 말씀하시는데 그런 표적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우리가 40년동안 해맬때 구름기둥으로, 불기둥으로 우리를 지켜 주셨던 우리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도 더 이상 없으며" 이 이야기는 들려 오는 하나님의 말씀도, 들려주는 사람도 우리 가운데 없습니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2년동안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팬데믹의 터널을 지나면서 이게 언제 끝나나, 라고 이야기를 하고 그 날이 끝날때만 우리들이 기다렸는데, 사실 이 터널을 지난다, 앞이 깜깜하게 보이지 않는 곳을 지난다라는 것은 굉장한 두려움이 있다는 겁니다.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으면, 이거 돌아가야 하나, 똑바로 그래도 가야 하나, 이러한 두려움 속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시편 기자가 하는 얘기가 뭐냐면, 터널을 지나는것 같은 지금 상황에 자신이 빠져 있는데 하나님의 표적도 보이지 아니 하고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도 없고, 그러니 이걸 앞으로 가야 하는지, 뒤로 가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께 부르짓는 장면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2절과 3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결과를 여기서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옛적부터 얻으시고 속량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께서 계시던 시온 산도 생각하소서. 영구히 파멸된 곳을 향하여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지금 하나님 회복 불능한 상황안에 있습니다. 빨리 응답해 주십시요, 라는 기도의 내용이지요. 여기보면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라는 내용이 있는데, 주의 발을 옮겨 달라는 말은, 우리가 분주하게 걸아가면 신발 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유롭게 걸어가면 신발 끌리는 소리가 들리죠. 하나님, 신발 끌리며 여유롭게 지나가실 때가 아닙니다, 빨리 우리를, 이 상황을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빨리 서둘러서 우리의 위급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역사 하십시요, 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깐, 이런 내용들을 살펴 보면요, 우리가 이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이 기도 만큼은 빨리 응답해 주셔야 합니다' 라고 할때 이 기도가 얼마나 다급합니까, 그런데 그 응답이 없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74편도 이렇게 하나님 앞에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응답이 앞에 나나타지 않습니다.

지금 시인이 간절하게 기도하는 부분만 있지, 하나님이 안심 시키시고 응닫 하시는 부분이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시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를 했던 근거, 그 끈이 무엇이냐하면 하나님의 거대함을,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 기도할실 때에 정말 긴급한 기도의 내용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 조차도 하나님께서 응답 하시고 응답이 더딜 때에는 무엇을 생각 하셔야 하면,

나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기억하는 겁니다.

지금 시인이 기억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백성에게 향하신 언약이 있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언약을 하실때에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실때에 어떤 언약을 배푸시냐 하면 불 가운데로 하나님께서 지나가시는 언약을 보게 되는데 짐승을 둘로 쪼개 놓고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로 지나 가십니다. 만약에 내가 이 언약을 어긴다면 이 둘로 갈라 놓은 짐승처럼 내가 갈라 질 것이다 라는 그러한 의미이죠.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향하신 그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음을 이 시인이 기억을 하고 있더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기도의 낙망이 있을때 우리도 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구원하셨으며, 어떻게 나를 하나님 백성 삼아 주셨는가, 내가 비록 하나님의 올바른 자녀다운 행동을 하지 아니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힘든 일을 만나게 하셨다면 그 힘든 일 가운데서 어떻게 역사 하시며 어떻게 인도 하시는가, 라는 하나님의 나름 구원하심, 그 구원을 우리도 기억 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이 시편 기자가 얘기를 하는 것은, 주의 기업의 지파와 주의 회중, 이런 단어를 쓰고 옛부터 얻으시고 속량 하셨다 이러한 얘기를 쓰는데, 지금 이 이야기는 뭐냐하면, 지금 출애굽을 회상 하는 겁니다. 그러니깐 하나님께서 과거 우리가 노예를 살 때에, 핍박 가운데 살 때, 도저히 가망이 없고 소망이 없는 삶을 살때에 댓가를 지불 하시고 우리를 그 속에서 건지신 것을 이 시편 기자가 지금 기억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그렇게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를 속량하지 않으셨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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