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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1편 1절에서 15절.
"내평생에 가는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은지
그 풍파로 무섭고 어렵던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여러분들 이 기가막힌, 말이 안되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 배경에 대해서는 몇번 말씀 드렸죠. 사랑하는 자녀들이 사고로 인해 다 물속에 빠져 죽은 그 가운데 아들을 위로 하기 위해서 대서양을 건너는 가운데 선장이 '여기가 당신의 자녀들이 빠져 죽은 곳이다.' 라고 할때 이 찬송이 지어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몇년 전에 젊은 학생들이 수학 여행을 가다가 졸지에 명을 다리했던 적이 있죠. 우리의 사고, 우리의 생각으로는 보통 어떤가요. 우리는 그곳을 지나며 꽃을 뿌리며 통곡을 하지 않습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를 생각지도 않는 때에 보냈으니 그 부모의 심정,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그와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 뛰놀던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 갔겠습니까. 우리가 티비를 보면서 그런 소식들을 들으며 통곡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자연스러운 마음이죠.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요, 이 모든것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통곡해야 할 그 자리에서 통곡이 나오지 않고, 눈물이 나와야 하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고, 이 마음이 편안한 것입니다. 이 찬송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죠. 그곳에 있으면 꽃을 던지고,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꽃을 던지며 자식들을 생각하는게 당연하죠. 물론 이 분도 처음에는 그랬죠. 눈물을 흘리면서 자녀들 보고싶다, 통곡하다가 있었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함과 하나님께서 하늘로 부터 내리시는 평안함을 맛 보게 되니깐 이 곡이 쓰여진 거겠죠. 71편이 꼭 그렀습니다. 우리가 24절 까지 다 읽지는 않았지만 71편이 주는 교훈이 사람이 어렵고 힘들면 눈물을 흘리면서 원망하고,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때 쓰기도 하고 그런는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또 그러다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찬송합니다 라고 얘기하다가 다시 하나님, 도대체 이럴수가 이씃ㅂ니까, 원망 하다가 또 찬송 하다가 이것이 계속적으로 반복됩니다. 일단은 여러분들에게 몇번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 시편은 우리들에게 은혜가 되는 것은 다윗이나, 이 시인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체험했던 하나님의 이야기를 시로, 글로 썼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큰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냥 없는 창작을, 없는 내용들을 만들어서 글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삶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하시고, 내가 그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것을 좀 얘기해 주고 싶은겁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래서 글로 남긴 것입니다. 그것이 시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편을 읽을때는 많은 위로를 얻게 되죠. 하지만 우리 스스로, 혼자서만 시편을 읽데 되면, 이게 무슨 말인가 잘 알지를 못할때가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쩌면 하나님께서 목사를 세우셨나 봅니다. 니가 좀 대표적으로 연구를 해서 성도들에게 원래 뜻을 전달하라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원래 이 내용 전체를 다 이렇다 하고서 100프로 이해를 하고서 전달을 하는것은 아니지만, 제가 이 안에서 은해를 받고 이 안에서 느꼈던 하나님을 같이 나누고, 미처 우리가 깨닭지 못했던 부분들을 나누면 충분히 하나님ㄲ서 우리에게 하락하신 운혜가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말씀드린데로 여기에서 살다보면 우리가 힘들일을 만나고, 깊은 수렁에 빠질때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 교회를 세우신 분들 중 이민 오신분이 많으시고, 연세가 많으시기에 기가막힌 일들을 많이 만나셨을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일어 나셨습니까. 뒷뜰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그냥 이겨 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럴때는 기도든 뭐든 나오지 않죠. 그냥 뒷뜰에 가서, 자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눈물을 흘리는게 자연스러운 것이죠. 하지만 시편을 보면 그런 상황속에서 주님이 보여야 하는데, 이 문제가 자꾸 보인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시편의 기자는 문제만 보다가, 다시 또 주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그 문제를 이겨 냅니다. 그러다 끝났거니 생각을 하는데 또 문제가 닥쳐서 그 문제로 좌절하고 절망하다가, 하나님을 붇들고 일어 서면서 또 찬양합니다. 이게 3번 정도 반복이 되는데, 결론적으로 보면 이해하기가 참 힘든겁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런 절말속에 있으면, 그 마음속에 찬송이 일어나고, 어떻게 감사가 일어나고, 또 어떻게 기쁨이 일어날까...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래야 이해 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경험 해야 하는거죠. 우리 삶 속에서 살아 계시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해야만 우리 슬픔이 살아지고, 그 속에서 감사가 나오고 기쁨과 찬송이 나오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믿음인 것 같습니다. 저자가 다윗인지 저자가 나오지 않아 누구라고 특정을 하지 못하겠지만 이 시인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이 하나님을 경험하는데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는 수렁속에 빠져 있다가도 그 속에서 만져 주시는 그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죠. 우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럴때는 우는것이 제일 낫죠. 근데 이제 그속에서 만져주는 하나님을 경험 하자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에게 위로가 있고, 그 위로 넘어서 평강이 있고, 찬송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우리의 생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하나하나 살펴 보기 원합니다.
3절과 4절을 보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원해 달라 기도를 하고 있는데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서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세이심이니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학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
3절에서 주께서 나의 반석 - 곧 바위라고 하는데 바위는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주님은 나의 반석이십니다, 라고 얘기 할때는 주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내가 변하는게 문제지, 주님께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라는 표현인입니다. '주님은 나의 요세입니다' 요세는 안전 한 곳이죠, 피난처 이지요. 그것을 주님은 변하지 않으시며 나를 안전한 곳에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이헐게 하나님을 붇들고 일어나는 장면이 여기 있씁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시인을 해치려는 사람들은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은 그를 버렸다,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지 않기로 작정 하셨다, 하나님이 외면 하셨다, 라는 얘기를 듣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우리가 그런 경우를 만나지 않습니까.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지만, 참 어렵고 힘든일을 만날때, 우리 곁에 안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친구들이 뭐라고 합니까. 너 교회 다닌데매, 하나님을 믿는데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겠지, 이렇게 조롱을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때는 더 견디기가 힘들죠. 하나님께서도 나를 버린 것 같은데 , 주변에 있는 사람들 조차도 이렇게 조롱을 하니 얼마나 상쳐도 되고 그러겠습니까. 시편을 보면 꼭 그렇다는 것이죠. 지금 어려움을 만났는데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이 저 사람을 버렸다, 이제 안 도와 주겠다, 이러니 얼마나 절망속에, 깊은 수렁에 빠지겠습니까. 그러나 이 시편의 기자는 그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반석 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요세이십니다, 하며 그 상황에서 일어나더라는 것이죠.
그러니 이런 부분은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이것이 이해가 되시나요. 내가 만약 이런 상황에 빠져 있다면, 주님은 나의 반석이십니다, 요세 이십니다 하시며 기쁨이 넘치고 찬성이 넘치는 이런 일이 일어 납니까? 여러분의 침묵으로 보니 그러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인데, 많이는 않지만 조금이라도 그런 경험이 있다, 그러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교회를 다닌다 할때, 세상사람들과 우리는 대체 뭐가 다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고 교회를 다니는데, 세상 사람들과 우리는 다를게 뭐가 있을까...
이 시편을 보며 살펴 보자면, 여러분들이 이제 가끔 감사 헌금을 내시는데 그 감사 헌금의 내용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 해 보세요. 내가 무엇때문에, 내가 기록한 감사의 내용이 무언가, 생각해 보세요. 사업이 잘 됬다던지, 자녀가 좋은 직장을 들어 갔다던지, 의사도 포기했던 질병이 나았더든지, 이런 것 때문에 여러분들 감사하십니까.
자녀가 좋은 직장을 다니고, 좋은 대학을 다닌다는 것은 교회를 안 다니고, 예수를 안 믿어도 세상 사람들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업이 번창해서 감사하다, 물론 믿음이 좋으셔서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고 사업이 번창해서 잘 될수도 있죠. 그런데 안 믿는 사람도 사업이 잘 되면 기쁘고 감사 할 일들이죠. 거기다 의사도 포기한 질병이 나았다, 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안 믿는 사람들도 동일하게 감사를 하리라 생각합니다.
교회를 다닌다, 예수를 다닌다 하면서 감사한다 하는 것은 그 모든것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자녀가 비록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해도, 좋은 직장을 가지지 못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예수님으로 인하여 나를 구원하신 내 주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는 그게 진짜 감사인 것이죠. 이게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의 감사와 다른 부분입니다.
여기 시편을 보면 꼭 그러는 거에요. 세상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없는 그 부분에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송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의 친구들이, 주변 분들이, 내가 어려움을 만나서 참 힘들어 하고 있을때 조롱을 하면 힘들지만 여러분들은 그 속에서 감사를 놓치지 않고 기쁨을 놓치지 않으면 그 사람들을 오히려 조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오히려 민망해 하게 되는 겁니다. '아 그렇구나. 역시 교회를 다니니깐, 하ㅓ나님을 믿는 자녀지만, 도저히 저 힘들고 깉은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 없지만, 저 사람은 그래도 하나님을 붙들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거구나' 이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가서 전도지 아무리 돌려 도 이거 우리 삶 속에서 한번만 보여주면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시편 71편이 참 힘들고 어려운 부분 같지만,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복된지 한번 보세요.
5절 말씀 보시면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 이시요, 내가 어릴 때 부터 신뢰한 이시라'. 내가 어릴때 부터 하나님을 신뢰 했습니다. 그러니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내가 어려서 부터 하나님을 신뢰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붙들 었다는 겁니다. 어려서 부터요.
8절을 보시면 '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 하리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이 말은 다른 성경에 어떻게 얘기를 하냐면 '주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입에는 주님을 찬송하는 찬송이 하루종일 떠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을 찬송하는 찬송이 하루 종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이것을 우리가 이해를 못하는 것이죠. 똑같이 예수를 믿어도, 똑같이 하나님을 섬겨도 어떻게 이 사람은 수렁에 빠져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조롱하고, 정말 죽을 것 같은 상황인데, 어떻게 주님을 찬양하는 찬송이, 하루종일, 일 순간도 아닌,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하나님을 찬송함이 내 입에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완전 정신 나간 사람인 것이죠. 예수를 믿더니, 힘든 일을 만나 드디어 맛이 갔그나 하겠죠. 전에도 말씀 드렸죠. 다윗이 꼭 그런 것입니다. 다윗이 힘든 일을 만나서 하루 종일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루 종일 눈물로 지셌던 그런적이 있습니다. 그 것도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300명 이상)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때 눈물을 하루 종일 흘렸던 것입니다. 그려다가 정신 차리고, 어렸을때 부터 의지했던 그 하나님을 그 상황속에 한번 대입을 해 봤던 것입니다. 이 어려움이 하나님꺼로 부터 온 것이라면 이 어려움에서 건져 주실 이도 하나님 이시다, 라는 이러한 믿음이 작품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새벽까지 하나님께 기도 드리다, 새벽녘에야 이제 찬송을 하는, 그래서 '수금아 비파야 껠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그 찬송이 나오는 거죠.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삶 에서도요, 우리가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내 믿음이 이것밖에 안되나, 내가 권사인데, 장로인데, 내가 교회 집사로 오래 섬겼는데, 힘들고 여러운 일을 만나서 내 믿음이 이것밖에 안되나, 하는 좌절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좌절의 기간이 길어지면 안된다는 것이죠. 다윗이 어렸을때 부터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었지만 다윗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71편을 기록한 시인도 역시 마찬가지 라는 겁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럴때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우리도 똑같이 동일하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래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 어려움에서 벗어하는 것을 아까 말씀드린 것 처럼, 그 어려움이 어디서 부터 왔나 이 것을 생각 해 보라는 것니다. 이게 하나님께로 부터 왔다는 확신이 있으면 그 어려움을 이겨내게 하시고 그 어려움을 가져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을 우리들이 알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럴때 우리는 이 기쁨이 다시 회복이 되는 겁니다. 이 신앙이 다시 회복이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다윗이 지금 하나님께 피했다 라는 그러 표현이 여기에서 씁니다.
14절 말씀도 한번 보십시요. 보시면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님을 더욱더 찬송 하리이다. 지금 이 예기가 뭐냐하면 지금 내 형편, 내 삶의 소망이 없는 것 같지만 나는 지금 비록 힘든 상황 속에 있는 것 같지만, 나는 소망을 품고 주를 찬송한다 라는 이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 내가 젊어서 부터 늙을 때 까지라는 표현이 등장 하는데, 어려서 부터 주께서 택하셨 사오니, 여기 부분에 나오는 백발이 되는 노인까지도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이야기는 나의 평생에, 내 평생에 하나님께서 나의 요세가 되십시요, 나의 반석이 되십시요, 나는 평생에 하나님을 의지 하겠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언젠가 한번 말씀 드린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의 문제로 인해서 특히 힘들어 하죠. 그런데 지금 힘들어 하는 그 부붖은 그 자녀의 평생 가운데 일부분입니다. 그 평생을 힘들어 하는게 아니고, 지금 혹시라도 여러분들이 예수를 잘 믿는데, 자녀들이 예수를 잘 안 믿는 가정도 있을 겁니다. 절대 여러분 걱정 마세요. 한 가정에 한 사람만 영적으로 깨어 있고, 기도하는 그러한 분이 계시면, 절대 그 가정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을 할 것은 일 순간이 아니라 평생이라는 겁니다. 그 자녀가 자라나면서 어느때,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을 만날 지 모릅니다. 숨이 넘어 가기 바로 전에 만날지도 모릅니다. 우리 생각은 지금 젊었을때, 할 일 많을 때, 하나님 빨리 만나서, 믿은 생활도 잘 하고, 교회에 열심으로 봉사하면 참 좋겠지만, 그건 우리 생각이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바라 보실 때 평생을 인도 하시는 겁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마찬가지 시각으로 바라 봐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 시인이 하는 얘기는 뭐냐면, 내가 모태에서 부터 주님을 알았습니다. 내가 늙어서 내가 힘이 없을 때에도 나와 함께 하십니다, 나를 버리지 마십시요, 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죠. 여개서 늙었다 하는 것은 '힘이 없다' 라고 표현하느는데 늙었다는 것은 왕성 했던 힘이 다 빼졌다, 젊었을때는 제물이 많았지만, 늙어서는 제물이 다 없어졌다, 그러한 자의 표현이잖아요. 그런데 이제 이 시인이 하 고자 하는 얘기는, 그렇게 약할때에라도 하나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런 얘기를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려 볼께요.
여러분이 힘들 일을 만난다고 가정할때, 하나님께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보통 어떻게 그 시간들을 응답될때 까지 지내 십니까. 기도 하고 바로 잃버 버릴까, 기도한 내용이 뭔지도 모르고, 힘들고 어려워서 그냥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 밖에 없는 기도 그 내용을 모른다. 두번째, 기도하고 감사와 기쁨과 찬송으로 응담하실 때 까지 기다린다. 아 별로 없으실 것 같습니다. 세번째는 기도는 했지만 여전히 염려와 근심 속에서 있다...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세번째 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언젠가 한번 말씀 드렸죠. 하나님의 시간이 있고, 우리 시간이 있다라고 말씀 드렸죠. 크로노스 라고 얘기를 합니다. 이게 인간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시간들입니다. 근데 카이로스라는 것은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 입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가 있는데 그 열매들 가운데 어떤 열매가 있냐면, '오랜 참음' 이라는 열매가 있습니다. 그 오랜 참음이라는 의미가 뭐냐면 그 기다리는 시간을 이야기 합니다. 내가 기도를 했으면 이건 우리의 시간에서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내가 기도를 했으면 이제 하나님게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일하시는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얼마나 성질이 급한지, 빨리 이뤄저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것을 이루시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을 '오랜 참음' 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성령의 열매 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속에 거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렇게 기도를 해 놨지만 잊어 버린다든지 여전히 근심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시편 기자가 그렀습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를 했지만 찬송하고 그 속에 감사가 우러나오고, 기쁨이 나오는 것은 기도를 해 놓고 이제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시간 인 것입니다.
초대 교회를 보면 서머나 교회가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하나님으로 부터 칭찬을 받는 것이 무엇이냐면, 서머나 교회는 하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었다는 것에대해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믿음을 가졌는데, 우리가 믿음을 가졌는지 없는지는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도 하나님은 삻아 계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이지만, 내가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하나님은 있다, 없다, 이 믿음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결정 하는 것은 아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사람들 입니다. 그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체험 할때에 이 기가막힌 상황 속에서 우리는 기쁨을 찾는 겁니다. 그계 예수님의 사람이고, 그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히브리서 11장에 그런 얘기를 하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라는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깐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러다 보니, 실상에서 그게 나타났다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서 우리는 기가막힌 수렁 속에서 살아남는 것입니다. 그러고나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나서 실상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죠.
20절 말씀을 보시면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 땅 깉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우리에게 심하신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이 심한 고난이 어디어세 온 것입니까.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심한 고난을 보여 주신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이 배후에 이 하나님께서 이 고난을 주셨다, 라는 믿음이 있으면 여기에서 얘기한 것 처럼,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끌어 올리 시리라, 라는 이 감사의 근거, 찬송의 근거, 기쁨의 근거가 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이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내 뒤에 하나님이 계신다 라고 여러분 들이 생각을 하신다면, 우리 앞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난 들, 그게 우리 믿음을 약하게 한다던지, 우리의 믿음을 앗아간 다던지, 이런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뒤에계신 하나님을 보지를 못하고, 앞에 있는 사건만 보다보니, 미처,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해서 그러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앞에 있는 사황을 바라본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의 옆에서, 뒤에서 계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함께 하시며, 혹시라도 그 성도가 넘어질까, 조바심 내시고, 안타까워 하시고, 성도가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 주시고, 그래서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은 우리 이지만, 바로 일으켜 주시지는 않으 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믿음이 연약한 분들은 하나님께서 바로 일으켜 주시겠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단련 시키고 싶은 분들은 쓰러진 상태 에서도 절대 손을 내밀 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속된 표현을 하지 않습니까. 얻어 터졌는데, 낫기는 커녕, 이쪽도 얻어 터지고, 저쪽도 얻어 터지고, 한꺼번에 몰매를 맏는 경우기 있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련 시키시는 방법이 다 다르지만, 이렇다 하는 답은 나와 있지 않지만, 다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 이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아주 깊은 수렁에서 빠져 있는데, 그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는 주님은 우리들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 즐거워 한다, 하는 것들이 우리 삶속에서 일어나는 그런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과연 세상 사람들도 함께 그 일을 기뻐할 일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셔야 합니다. 예수가 없어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게 일어나는 일이냐, 그 속에서 내가 감사를 하는 것이냐, 라는 것을 한번 따져 봐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20절, 21절을 보시면,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 시리이다.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 하소서' 근데 이전보다 더 새롭게 하소서, 하는 이야기죠. 이전보다, 내가 힘들어 쓰러지기 이전보다, 나를 여기서 끌어 올리셨다면, 믿음이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하시옵소서 라고 이야기 하고 있죠.
고난 속에서 힘들고 어려운데, 어느순간 나도 모르게 찬송이 나왔다, 그러면 상황 끝! 이가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요, 그 어려운 고통들이 더이상 여러분들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상황을 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내게 마음속에서 내 입에서 나도 모르는 찬송이 튀어 나왔다, 라면 하나님께서 이제 일하시는 시간 입니다. 그런 것을 세상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겁니다. 어떻게 그 속에서 찬송이 나오고, 어떻게 기뻐하고, 어떻게 감사하나,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죠.
여러분들 잘 아시는 이어령 교수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우리나라 초대 문화 교육부 장관을 지내셨죠. 대한민국에서 내노라 하는, 최고의 수재로 꼽히는 그런 분이지 않습니까. 3대 수제가 있다고 하듯이, 이분은 손꼽히는 그런 수재 이십니다. 그런 이분이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라는 시집을 쓰셨습니다. 예수를 믿고나서 신앙 시집을 냈는데,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입니다.
원래 무신론자는 기도를 안하죠. 신이 없기 때문에, 기도를 안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이어령씨는 이 시집을 내면서 자신이 과거 무신론 자로 살았을때에, 과거에 대한 부끄러움, 뭐 이런 것들이 있어서 이 시를 기록을 했는데 이제는 이 분이 예수를 믿고서 자기가 고백할 대상이 있고, 감사 할 대상이 있고, 자기 기도를 할때 들어 줄 대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이 시를 기록을 했는데, 이 시가 너무나도 은혜스러워서 제가 봉독을 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어렴픗이 보이고 멀리에서 들려 옵니다.
어둠의 벼랑 앞에서 내 당신을 부르면
기척도 없이 다가서시며
네가 거기 있었느냐
네가 그동안 거기 있었느냐고
물으시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달빛처럼 내민 당신의 손은
왜 그렇게도 야위셨습니까.
못 자국의 아픔이 아직도 남으셨나이까.
도마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나도
그 상처를 조금만 만저 볼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내 눈물방울이 그 위에 떨어질 지라도
용서 하소서. 아무 말씀도 하지 마옵소서.
여태까지 무었을 하다 너 혼자 거기 있느냐고
더는 걱정 하지 마옵소서
그냥 당신의 야윈 손을 잡고 내 몇 방울의
차가운 눈물을 뿌리게 하소서
이렇게 되어 있는 시가 있습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자 했던 지성인이 그 지식으로는 도저희 하나님을 이해 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힌 겁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딸, 그렇게 똑똑했던 딸이 하나님을 믿는데 그 고통 속에서 살아 가는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어디 있냐, 라고 부르짔던 이어령씨. 나중에 이미라 목사님은 목사님이 되셨고, 결국 암으로 하나님께서 불러 가셨지만 그 딸이 그렇게 고통 스러워 하고, 병 중에 고통하는 모습을 이 아비된 입장으로서는 도저희 주변에서 바라볼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견딜래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러고 나서 이 이어령 교수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 딸의 고통의 현장 속에서 축복 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다, 라는 얘기를 하십니다. 그 딸의 아픔, 암에 걸린 딸의 죽음,이런 것들을 보면서 더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는 이러한 모습을 이분이 한 적이 있으십니다. 그러니깐 교수님이 하는 얘기는 이러한 자신의 상황, 주변 이런 것들을 바라보니 한 숨만 나오는 거지, 절대 기쁨이 나오지 않다라는 겁니다. 그 어려움을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그 하나님, 과연 누구시냐, 온갖 지식을 다 동원해서 이해를 해 보려 했지만 이해 불가능 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을 만나 주십니다. 그분에게 찾아 오십니다. 물론, 딸도 병에서 낮고, 정말 좋은 것을 주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사람들의 생각으로의 좋은 결말 이지만, 하나님게서는 이 아버지, 이어령씨를 구원하시려는 일 하심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물론 그 가정에 대해서는 잔인한 말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 에게 찾아 오셨으며, 우리를 구원 하시려고 어떻게 우리 주변을 희생 시켜 나가시는가, 여러 분들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지 않나 생각 해 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에게는요, 정말 세상이 알 지 못하는 기쁜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 우리 속에서 세상이 모르는 그 감사의 샘, 또 찬송의 샘,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나 다 하실 지라도, 그 속에서 기쁨을 확인 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22절에서 24절을 보시면 이 시인이 이렇게 마무리를 하고 있는데, '나의 하나님이에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시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합니다.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여러분들, 정말 이해하기가 불가한 시인입니다. 그러나 이 시인을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는 그 속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일을 하면 나와 같은 찬송이 기쁨이 감사가, 당신들에게도 나타난다, 라는 것을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다시한번 24절까지 묵상하시면서 아 그렇구나 이 고통속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일어나시는 그런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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